국가 부강해지려면 중앙은행 꼭 필요
美 최초 중앙은행, 20년 한시적 조직 운영
국민 반감 의식, ‘은행’ 대신 ‘연준’으로 표기
연준 설립으로 국제금융 세력이 정부에 승리?

미국이 독립전쟁 중 전비 마련을 위해 발행한 콘티넨털 노트. 위키피디아 커먼스
중앙은행 설립·지폐 발행 둘러싼 첨예한 갈등
미국은 독립전쟁 후 13개 주가 모여 전쟁 비용 분담에 대해 논의했으나 각 주는 이를 외면했다. 화가 난 상이군인들과 퇴역 군인들은 대륙회의가 열리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약속했던 연금과 보상금을 요구했지만, 대륙회의 의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뉴욕주를 대표하는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정부의 설립 필요성을 실감했다. 결국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주권을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나눠서 행사하는 ‘이중 주권’을 골자로 한 미국 헌법이 탄생한다.하지만 중앙은행과 지폐의 발행에 대해서는 연방주의자들과 지방분권주의자들 간의 의견 대립이 첨예했다. 재무장관이 된 해밀턴은 중앙은행인 미국은행을 설립해 지폐를 발행하려 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지폐 발행에 부정적이었다. 초대 프랑스 대사를 지낸 그는 존 로와 미시시피 버블(18세기 초 스코틀랜드 금융가 존 로가 프랑스에서 미시시피 회사 설립 후 프랑스 정부를 부추겨 지폐를 과도하게 찍어내 주식 구매를 유도한 사건)에 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지폐는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북부 자본가들이 세운 금융기관이 지폐를 발행하게 되면 신생 정부의 힘이 북부로 넘어간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이 제안한 미국은행 설립 법안은 재무부와 국무부, 북부와 남부가 서로 다투면서 건국 이후 최대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완전히 두 패로 갈렸고, 양당 체제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의회에는 해밀턴을 따르는 연방파가 다수였고, 제퍼슨을 따르는 공화파는 소수였다. 워싱턴 대통령도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제퍼슨의 말보다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중앙은행이 꼭 필요하다는 해밀턴의 말에 더 공감했다. 그렇게 해서 1791년 미국은행이 설립된다. 하지만 반대파의 영향으로 미국은행은 영업허가 기간이 20년인 한시적 조직이 됐다.
1791~1811년 최초의 미국 중앙은행
미국은행은 민간 소유였던 영란은행이나 정부 소유였던 스웨덴의 릭스뱅크와 달리, 자본금 1000만 달러 중 80%는 일반인에게 공모하고 20%는 정부가 소유하는 지분 공유 구조였다. 민간 주주 대부분은 법안에 찬성한 의원과 상공인들이었다. 미국은행의 본부는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 세워졌고, 뉴욕·보스턴·볼티모어 등에 지점이 세워졌다. 미국은행은 정부의 출납대리인으로 세금을 걷고 국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며 연방정부에 대출을 해주는 정부의 은행이면서 동시에 일반인을 상대로 예금과 대출을 취급했다.미국은행이 설립되고 1년 후인 1792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닥쳤다. 미국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이 하나의 원인으로 주가와 채권 가격이 급락하는 금융공황이 온 것이다. 해밀턴은 은행들이 채권을 담보로 자금을 공급하게 해 가까스로 금융위기를 넘긴다. 이 위기는 미국의 금융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공황을 겪은 뉴욕시는 일반인들의 증권 거래를 금지했고, 증권 거래인이 거래를 대행하도록 했다. 이것이 뉴욕증권거래소의 전신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의 금융산업은 경제발전과 함께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1808년 공화파인 제임스 매디슨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은행은 영업허가를 연장하지 못한 채 1811년에 문을 닫았다.
매디슨 대통령은 1812년에 발발한 영미전쟁을 치르면서 중앙은행의 부재를 아쉬워했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제2차 미국은행을 설립했다. 그런데 설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과거 해밀턴을 따르던 연방파가 야당이 된 후 오히려 중앙은행 복원에 반대하고 나선 것. 금융에 무지한 여당이 덩치만 큰 은행을 만들었다가 실패할 것이란 게 표면적 이유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은행 부활을 반대하는 민간은행들로부터 정치후원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야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가운데 2차 미국은행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영업허가를 20년만 내주는 쪽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20달러 지폐에 그려진 ‘은행을 죽인 대통령’
1816년 제2차 미국은행이 설립됐다. 그러나 미국은행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돼서 미국 경제는 전후 특수로 인해 과열됐다. 제2차 미국은행의 초대 은행장 윌리엄 존스는 은행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미국은행은 파산 직전까지 갔다. 의회는 미국은행의 면허 취소를 검토했지만, 미국은행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의원들의 주장에 따라 은행장이 사임하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됐다. 존스의 뒤를 이어 랭던 취비스가 은행장으로 취임했지만, 금융위기가 계속되면서 취비스도 결국 사임했다.1823년 니콜라스 비들이 미국은행의 은행장에 취임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으로 열다섯 살에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영국 베어링사(社)가 미국 정부에 지급보증을 서도록 하여 제퍼슨 대통령과 나폴레옹 간의 루이지애나 매매 계약을 성사시켰고, 귀국해서는 필라델피아주 의회 의원이 됐다. 비들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대로 정립했다.
그 당시 제퍼슨으로부터 이어온 민주공화당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으로 분리돼 있었는데, 1828년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잭슨 대통령은 영미전쟁의 영웅으로, 자신이 서민·노동자·농부 그리고 남부의 대변인임을 자처했다. 그러한 잭슨 대통령이 보기에 필라델피아의 미국은행과 비들은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그는 취임 때부터 “헌법이 의회에 화폐 발행 권한을 준 것은 의회가 직접 그 권한을 행사하라는 것이지 특정인이나 특정 기업에 권한을 위임하라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미국은행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은행을 죽인 대통령’으로 여겨지는 잭슨 미국 대통령. 아이러니하게도 2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동아DB
자유 은행 시대(1836~1913)와 남북전쟁
미국은행이 문을 닫은 후 미국은 자유 은행 시대(free banking era)에 접어든다. 법적 요건만 갖추면 은행업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국에 약 1만5000개의 민간은행이 생겨났고, 7000종류 이상의 은행권이 유통됐다. 위조나 사기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은행과 은행권에 대한 안내 책자까지 등장했다. 은행권을 금으로 바꿔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람의 발길이 안 닿는 곳에 세운 ‘들고양이 은행(wildcat bank)’도 생겨났다.각 주는 은행권의 유통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감독을 강화했지만 수많은 은행을 제대로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미국 중앙은행의 부재는 이후 잦은 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다. 1837년을 시작으로 1847년, 1854년 등 거의 10년 주기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이때마다 미국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할 즈음 미국의 재정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연방정부가 발행한 국채는 은행에 팔렸다가 다시 로스차일드와 베어링 은행이 주도하는 런던 시장에 다시 팔렸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게 상당한 이자를 지급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영국의 국제금융가들은 링컨 대통령에게 자금 융자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자율이 30%에 육박하자 링컨은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연방정부가 나서 직접 지폐를 발행한다. 그린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린백의 정식 명칭은 연방 노트(United States Note)였지만 뒷면이 녹색을 띠고 있어 이렇게 불렸다. 위조를 막기 위해 녹색을 썼다고 한다.
그린백의 발행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헌법은 주화의 주조만 규정하고 있을 뿐 지폐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지폐를 금 교환증, 예금증서, 은행권의 연장선인 민간의 영역으로 보았다. 그린백 발행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규정이 없으니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독립전쟁 때 발행된 콘티넨털 노트의 폐해를 들었다. 결국 연방정부는 1862년 2월 ‘법정통화법(Legal Tender Act)’을 제정해 그린백을 발행하게 된다. 이런 논란에도 그린백이 1990년대까지 시중에 유통됐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07년 금융위기와 서재 사건
1863년 전쟁이 중요한 분기점에 이르자 연방정부는 추가 전쟁 비용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는 전국 단위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국법은행(국립은행)을 설립했다. 국법은행은 두 가지 면에서 연방정부의 자금 수요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하나는 그린백의 추가 발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법은행이 전국 단위의 국법은행권(국립은행권)을 발행함으로써 전쟁 비용의 추가 조달이 가능하게 됐다. 이는 은행에도 엄청난 이권이었다. 두 번째는 국채 인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전쟁 중에 국채를 사겠다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국법은행에 은행권 발행의 특혜를 주는 대가로 국채를 예치하도록 했고, 덕분에 연방정부는 쉽게 전쟁 국채를 매각할 수 있었다. 국법은행권은 여러 주에서 화폐의 지위를 확보했다. 불안정한 주법은행권이 안정적인 국법은행권으로 바뀌면서 미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지탱해 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지폐가 등장한 것이다.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금융위기가 잦았지만, 1907년의 금융위기는 정말 심각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한 금융시장의 불안이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후 하인즈 형제의 구리 회사인 유나이티드 코퍼와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인 니커보커 트러스트가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금융 불안은 더욱 증폭됐다. 신탁회사의 위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신탁회사들은 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하면서 수익성 확대를 위해 위험성 높은 자산에 투자했고, 뉴욕 소재 은행 대출의 절반이 신탁회사로 흘러갔다. 하지만 당시 은행이 예금의 25%를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했던 것과 달리 신탁회사의 준비금은 5%에 불과했다. 이렇듯 신탁회사의 무리한 투자로 인해 뉴욕의 금융시장은 점차 과열되고 있었다.
금융위기설이 퍼지면서 뱅크런(bank-run)이 일어났고, 이는 다른 신탁회사로 번졌다. 부도를 막기 위해 신탁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과 채권을 한꺼번에 팔려고 하자 자금시장이 급속히 경색됐다. 대출금리는 150%까지 치솟았고, 주식거래는 중단됐다. 금융시장이 공황 상태로 치달았지만, 문제는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다는 것이었다. 뉴욕증권거래소장은 J P 모건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모건이 중앙은행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모건은 1차 긴급 지원에도 공황이 해결되지 않자 특별 조치를 단행했다. 모건은 1907년 11월 2일 밤에 금융계 인사들을 자신의 서재로 초청해 자금을 요청하면서 액수가 채워질 때까지 아무도 그의 서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결국 11월 3일 새벽 5시경 참석했던 은행가들이 모두 서명을 마치면서 뉴욕의 금융 상황이 진정됐다. 후일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서재 회동(Morgan's study meeting)’이라고 불렀다. 모건에게 의지해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을 빗대는 말이기도 했다.
1914년 미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그로부터 100년 뒤인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서재 회동과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리먼브라더스 파산 후 미 재무부 장관인 헨리 폴슨은 2008년 10월 12일 은행 CEO들을 재무부 건물로 불렀다. 그는 이들에게 공적자금으로 은행 지분을 매수하는 안에 서명하기 전에는 건물을 나갈 수 없다고 압박해 결국 모두의 서명을 받아낸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1907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1908년 의회는 올드리치를 위원장으로 통화금융위원회를 만들어 중앙은행의 설립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에 실망한 J P 모건의 파트너 헨리 데이비슨은 중앙은행 설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10년 11월 조지아주 모건 소유의 제킬섬에서 비밀 회동을 연다. 이 모임에는 데이비슨과 올드리치를 비롯해 후일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는 벤저민 스트롱, 재무부 차관보였던 피아트 앤드루 등이 참가해 이른바 ‘올드리치 플랜(Aldrich Plan)’이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전국준비금협회(National Reserve Association)를 만들어 여기에 은행과 대다수 금융회사를 회원으로 가입시킨 다음, 통화발행권과 정부 국고 업무를 담당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민간 금융기관을 회원 또는 주주로 하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윌리엄 태프트였다. 장관 시절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인물이다. 태프트 대통령과 금융가들은 올드리치 플랜을 적극 옹호했지만, 당시 민주당이 주도하던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의원들은 월가의 권력이 더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설상가상으로 1912년 의회는 푸조위원회를 만들어 J P 모건을 조사했다. 금융위기가 모건을 비롯한 금융 독점 재벌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해 J P 모건은 사망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4년 11월 공식출범했다. 동아DB
수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과정은 극적이었다. 1913년 6월 글래스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하원에 상정됐지만 12월 중순까지도 중요 쟁점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2월 22일부터 이 법안의 처리가 급물살을 탄다. 밤 11시 하원을 통과하고, 23일 상원을 통과하고, 그날 바로 윌슨 대통령이 정식으로 법안에 서명했다. 반대파 의원들이 성탄절로 고향에 간 틈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1913년 12월 23일 연방준비제도법(Federal Reserve Act)이 통과됐고, 1914년 11월 연방준비제도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연방준비제도법은 연준의 역할을 탄력적 통화 공급, 기업어음의 할인, 효과적인 은행 감독 체계 구축으로 규정했다. 이제 금융위기 시 연준이 돈을 찍어 금융기관에 긴급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더 중요한 것은 금화, 금 태환이 가능한 증서, 그리고 국법은행권으로 이루어진 이전의 통화가 연준이 발행한 독점적 지폐인 지금의 미 달러로 바뀌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미 연준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12개 연방준비은행(FRB)을 통제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연방준비은행은 민간이 100% 지분을 소유한 은행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주주는 모건과 록펠러 등 금융산업가들이었다. 연준의 본부가 있는 워싱턴DC의 에클스 빌딩 로비에는 윌슨과 글래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글래스 동상 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연방준비제도법을 통해 우리는 위대하고 활력 넘치는 은행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단지 금융위기를 바로잡고 금융산업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교역의 확장성과 안전을 담보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산업을 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연방준비제도의 창설로 금융가들이 미국의 지폐 발행권을 장악하면서 토머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등 민주당 정부와 금융가들이 벌인 100여 년에 걸친 중앙은행 설립 논쟁은 끝이 났다. 쑹홍빙은 2007년 출간한 책 ‘화폐전쟁’에서 “미국의 연준 설립으로 국제금융 세력이 민선 정부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면서 금권 정부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동조하기도 어렵다.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화폐의 발행은 국가의 것도, 시장의 것도 아닌 국가권력과 시장 간 경쟁과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前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