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호

“포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랍니다”

[사람 속으로] 선생 박주정과 ‘주정이의 자식들’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6-03-29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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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돼요?” 한밤중에 들이닥친 8명

    • 707명을 등하교시킨 빨간 프라이드의 기적

    • “스스로 생을 마감한 138구 시신 옆에서 울었습니다”

    • 언제든 달려간다, 위기 학생 신속대응팀 ‘부르미’

    • 중도 탈락은 없다 ‘금란교실’ ‘용연학교’ ‘돈보스코 학교’

    • 아파서 울었고 울어서 아팠던 34년이 영화로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의 저자인 박주정 전 진남중학교 교장. 전남 화순군 도곡면에 작은 집을 짓고 매주 이틀은 대학 강의, 나흘은 전국 학부모 강의, 주일은 교회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며 살고 있다. 박주정 선생님의 블로그 ‘blog.naver.com/2664029’를 보면 최근 활동 소식이 소개돼 있다. 박해윤 기자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의 저자인 박주정 전 진남중학교 교장. 전남 화순군 도곡면에 작은 집을 짓고 매주 이틀은 대학 강의, 나흘은 전국 학부모 강의, 주일은 교회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며 살고 있다. 박주정 선생님의 블로그 ‘blog.naver.com/2664029’를 보면 최근 활동 소식이 소개돼 있다. 박해윤 기자

    2024년 2월 21일 광주 남구 진남중학교에서 열린 박주정 교장 퇴임식에 7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중 정장 차림의 청장년 500여 명은 ‘주정이의 자식들’로 불리는 제자들이었다. 공중파 TV가 생중계를 하겠다고 나설(주인공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정도였으니 지역 경찰도 아연실색할 만큼 떠들썩한 행사였다. 정년 1년 남기고 명예퇴직하는 선생님의 퇴임식이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제자가 쓴 감사 편지에 그 답이 있었다. 

    “선생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저희들을 깨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일어나기는커녕 대꾸도 없는 우리를 선생님은 이불을 걷고,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수백 번 우리를 깨워서 아침을 먹여 10km 거리의 학교로 실어 나르셨죠. 그 차를 잊지 못합니다. 저희들을 10년 동안 싣고 다니느라 주행기록 54만 km. 어느 날 하교를 하는데 그 차는 수명을 다하여 패밀리랜드 고개를 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고 우리들은 그 차를 밀고 집까지 왔고 폐차장으로 보내면서 함께 울었던, 정들었던 빨간 프라이드. 지금도 그 차를 보면 저는 걸음을 멈춥니다.

    선생님! 부모조차 포기했던 707명의 아이들을 선생님은 왜 품으려 했을까.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기억납니다. 함께 살았던 ○○ 선배가 사고를 쳐서 재판장에 서게 된 날 선생님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던 그 재판장, 검사의 구형을 듣고 절규하며 쓰러진 선생님을 부축했던 그날을! 쌀이 떨어지고 부식비가 없어서 선생님 큰딸 돌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양동시장 가서 쌀과 오뎅, 팬티, 양말을 사가지고 돌아온 날을! 아이들이 경찰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니며 절도로 북부경찰서에 잡혀 있을 때 경찰관님께 애원했던 영화 같은 그 장면을! (중략) 굽이 닳고 흙이 묻은 구두, 너덜너덜한 양복, 빛바랜 넥타이 몇 개로 살아온 선생님을 위해 이제는 성공해서 잘사는 제자들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하면 ‘내가 20여 년이 지나 너희들에게 사례를 받는다면 난 하숙집 아저씨로 전락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은 진짜 고집쟁이입니다. (중략) 선생님은 우리의 아빠였고, 철없는 친구였고, 그리고 성자였습니다.”

    학교도 가정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교육

    2022년 3월 박주정은 광주 서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신분으로 CBS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실화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울다 웃다 1시간 20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고, 누적 조회수 210만을 넘겼다. 이 이야기는 2023년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김영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고 실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3월 초 박주정 선생이 아담한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으로 찾아갔다. 퇴임 후 그는 일주일에 이틀은 대학에 출강하고, 나흘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학부모·교사·학생들을 상대로 ‘콩나물 교육론’을 설파한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은 금세 다 빠져버리고 언제 싹이 트나 싶어서 조바심이 납니다. 썩은 콩은 아닐까 너무 빨리 내다버리기도 하죠.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콩나물을 키우듯 아이들도 기다려줘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제든,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1962년생 박주정은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바닷가 마을에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골 훈장댁 4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어린 주정은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무릎에 앉아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한문과 주산을 배웠고 초등학교 입학 전 네 자릿수 연산도 암산으로 척척 해내며 신동 소리를 들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600명 정도 됐는데 매달 시험을 치르면 과목별로, 학급별로 평균 내고 석차 내야 하니까 선생님들이 힘들어하셨죠. 그때마다 주판 잘 하는 주정이가 쓸모가 있었죠. 1학년 1반부터 6학년 6반까지 전교생 성적 집계를 도맡아 했으니까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아이’라는 낙인

    운명의 6월, 선생님이 내준 중간고사 성적을 집계하던 주정은 자신의 점수가 궁금했다. ‘100점이겠지’ 하며 성적표를 보니 웬걸 국어 20점, 산수 30점 전 과목이 꼴등 점수였다. 뭔가 잘못됐다 싶어 1층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제 점수가 이상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을 맞았고 귀를 잡혀 끌려갔다. 선생님은 어린 주정의 머리채를 잡고서 벽에 박더니 주먹질하고 발로 차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주판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부서진 주판알이 얼굴에 박히고 피가 줄줄 흘렀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주정은 기다시피 고개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피범벅이 된 채 돌아온 아들은 보고 화가 난 아버지는 목발 짚은 다리로 학교로 달려갔지만 정작 선생님은 만나지도 못한 채 도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그는 그때 선생님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점수를 줬는지, 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는지 알지 못한다. 

    이날 이후 어린 주정은 ‘나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괴로워했고 아버지를 잃은 8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주정은 큰누나가 사는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야간 경비와 매혈로 버틴 고등학교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다행히 전남대 공대는 등록금 전액 면제 기회가 있었다.  1981년 전남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고등학생 입주 과외 자리가 났다. 하필 그 집에서 10년 전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여전히 사과도 반성도 없는 선생님을 보고 주정의 내면은 무너져내렸다. 증오심에 휩싸여 공부고 뭐고 다 내팽개쳤다. 대학 1, 2학년 때까지 우등생이었던 그가 3, 4학년 때는 학사경고를 세 번이나 받았다. 

    인생을 포기한 듯 살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당당히 합격했다. 웬만한 직장인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분노는 그를 서서히 망가뜨렸다.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못 가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날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남의 한 사찰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3년 뒤 환속했지만 갈 데가 없었다. 대학 지도교수였던 박돈희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다.

    “방황 그만해라. 내 밑에서 공부해라.”

    은사의 한 마디가 그를 살렸다. 전남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자 이미 나이는 서른. 이제는 학위보다 가장으로서 생계가 더 급했다. 그때 박사학위 논문은 잠시 미루고 교사임용고시를 본 것이 평생 업이 될 줄은 몰랐다. 1992년 3월 광주에 있는 한 실업계 고교로 발령이 났다. 화공과 2학년 1반 담임으로 아이들과 첫 대면을 했다. 

    “오전 8시 30분 아침 조회를 하러 교실에 들어갔는데 50명인 학급에 5명밖에 없어요. 3명은 자고 있고 2명이 멀뚱히 쳐다봐요. ‘학생들이 왜 아직 등교를 안 하죠?’라고 묻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를 째려보더니 ‘안 온 걸 왜 나한테 물어보세요? 나는 왔잖아요. 안 온 놈들한테 물어보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더군요.”

    1교시가 끝나자 또 한 명, 2교시가 끝나자 또 한 명,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하루종일 등교했고, 내키는 대로 하교했다. 담임으로서 어떻게 생활지도를 해야 하는지 기가 막혔다. 노련한 선배 교사가 그에게 조언했다.

    “박 선생, 우리 학교는 인문계, 실업계 다 떨어지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오는 학교야. 전교생이 2000명이지만 그중 절반 정도만 학교에 나와. 500명은 가출했어. 그러니까 가만 내버려둬. 뭘 하려고 하지마. 그러면 아이들이 다 도망가 버려.”

    부임한 지 1년도 안 돼 아이들이 도망간 게 아니라 그가 도망갔다. 

    “할 수 없죠, 데리고 삽시다” 

    생계 때문에 시작한 교직인데 그만두고 나니 막막했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어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해 12월 다시 임용고시를 봤다. 최종 합격 후 광주 시내 358개 학교 중 제발 그 학교만 걸리지 말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무슨 조홧속이란 말인가. 또다시 그 학교로 발령이 났다. 동료 교사들 볼낯도 없고 학생들의 조롱은 또 어떻게 견딜까 심란해 하는데 아내가 말했다.

    “그냥 눈감고 다니세요.”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 뭔가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모든 게 편했다. 조회 때나 수업 때 아이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6월 초여름 밤, 그가 사는 열 평짜리 주공아파트의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전까지는 그렇제 지냈다. 

    “하필 아버지 제삿날이었어요. 문을 여니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 8명이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서 있는 거예요. ‘누구세요?’ 했더니 ‘선생님반도 몰라요?’ 하더군요. 몰랐죠. 한 학기 내내 일부러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수업을 했으니까요. 아무튼 우리 반 학생이라 해도 새벽 1시에 선생님 집에 놀러 왔다고? 일단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룻밤 재워서 돌려보냈더니 다음 날 아이들이 또 왔다. 부모님 패물 팔아서 오토바이를 산 게 탄로 나서 갈 데가 없다고 했다. 

    “여름방학까지 한 달 반밖에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있겠다는 겁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인 열 평짜리 아파트에 우리 가족 3명과 덩치 큰 남학생 8명이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매일 아침 도시락 8개를 싸야 하고, 세탁기도 없는데 그 많은 빨래를 해야 하고, 발냄새, 술 냄새, 담배 냄새를 참으며 한 달을 보냈죠. 그러다 7월 기말고사가 다가왔어요. 이 학교는 아이들이 워낙 공부를 안 하니까 미리 시험 문제를 3배수로 알려줘요. 답도 알려주니까 외우기만 하면 되는데 아이들이 그조차도 공부를 안 해요. 시험이 사흘 남았는데 갑자기 이 녀석들이 ‘선생님 우리도 공부 한번 해볼라네’ 하는 겁니다. 속으로 ‘구구단도 제대로 못 외우는 놈들이 무슨 공부?’ 했는데 아이들이 그때부터 문제와 답을 달달 외기 시작했습니다. 그 녀석들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본 것이죠. 시험 결과는 놀라웠어요. 2학년 전체 650명 중 1등부터 7등까지 전부 우리 반에서 나왔어요. 8명 중 자폐 성향이 있던 한 아이만 빼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 7명이 1등부터 7등까지 한 거죠. 아이들은 80만 원씩 장학금도 받았어요. 돈도 받았겠다 방학이 됐으니 각자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 안 간대요. 여기서 살겠대요. 어이가 없어서 아내의 얼굴만 쳐다봤죠. ‘할 수 없죠. 데리고 삽시다’ 하더군요.”

    ‘참스승’ 박주정 선생 뒤에는 통 큰 아내 이정례 씨의 헌신이 있었다. 두 손을 맞잡은 부부. 박해윤 기자

    ‘참스승’ 박주정 선생 뒤에는 통 큰 아내 이정례 씨의 헌신이 있었다. 두 손을 맞잡은 부부. 박해윤 기자

    “선생님 반 아이들 8명이 잡혀 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자 아이들이 “이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생전 처음 1등이란 것을 해본 아이들에게 자부심이 생긴 거죠. 주공아파트 7개 동 입구에 방을 붙였어요. ‘○동 ○호에 전교 1등부터 7등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괜히 방이 붙은 앞을 어슬렁거리고 담배도 몰래 피우러 가는 등 행동이 달라졌어요. 그러더니 새벽 4시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아침밥 먹고 나가고 점심 먹고 또 나가는 거예요. 이놈들이 오락실 다니며 장학금을 탕진하는구나 싶어서 야단을 쳤죠.”

    그러나 선생님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대학 진학 프로젝트였다. 아이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기능사 자격증을 딸 계획을 세웠고 부족한 학원비를 벌려고 새벽마다 주유소 아르바이를 하고 있었다. 장학금은 손도 대지 않고 모아두었다.

    “이 녀석들이 동아일보 오린 것을 보여주며 ‘○○공대 특차 모집, 실업계 고등학교 내신 7% 이내라고 돼 있잖아요. 우리는 내신 1%니까 기능사 자격증만 따면 대학에 갈 수 있잖아요’라고 하더군요.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다행이다 싶었던 아이들이 어느새 대학을 진학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죠. 저도 슬슬 2학기 중간고사가 기대되더군요. ‘2학기에도 1등부터 7등까지 하면 선생님이 한턱 낼게’라고 했죠.”

    아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이번에도 전교석차 1~7등을 휩쓸었다. 선생님과 약속한 회식을 한다고 한껏 부풀어 있던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빨리 경찰서로 오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선생님 반 아이들 8명이 잡혀 있습니다.”

    간 큰 놈들 8명이 실습 시간에 쓰는 스프링으로 순찰 오토바이 3대에 시동을 걸어 타고 시내를 질주하다 붙잡힌 것이었다. 부모들에게 연락했더니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제발 좀 잡아넣으라”고 했단다. 박 선생님은 경찰서로 가서 상황을 수습한 뒤 아이들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집으로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오락실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자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차며 ‘뻥쟁이’라고 화를 냈다.

    “회식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오토바이 8명을 사람 좀 만들어보라고 부탁했는데 ‘걱정 마, 이미 우리가 사람 만들었어’ 하더군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멤버 교체’를 한대요. 자기들 7명은 이미 사람이 됐으니까 선생님 집에서 나가고, 대신 오토바이 8명이 들어오기로 했다는 겁니다. 처음 8명 중 1명은 남고 새로 8명이 들어오니까 이제 9명이 된 거죠. 새로 들어온 아이들도 같은 방법으로 문제와 답을 달달 외며 공부를 했죠. 이후로전교 1등부터 15등까지 계속 우리 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랬더니 고액과외 한다고 신고와 투서가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경찰이 아파트로 찾아오고 매번 조사받는 게 귀찮더라고요. 어느날 선언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시 외곽으로 이사 가자.’ 은행 대출받고 전세금을 보태서 광주시와 담양군의 경계인 용전마을로 갔어요. 4000여 평의 땅과 40평 규모의 창고를 임차해 공동학습장을 만들었죠.”

    문제는 시 외곽이라 학교까지 10km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빨간 프라이드가 매일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 8명이 한꺼번에 탈 수 없으니 4명씩 등교 때 두 차례, 하교 때 두 차례 공동학습장과 학교를 오가며 폐차할 때까지 무려 54만㎞를 뛰었다.

    박주정 선생님은 2015년 광주시교육청 민주인권생활지원과장 재직 시 24시간 위기학생 신속대응팀‘부르미’를 창설했다. ‘부르면 즉시 달려간다’는 의미의 ‘부르미’는 자살 등 위기상황에 처한 학생이 전화로 요청하면 24시간 언제든지 30분 안에 긴급 출동하는 조직이다. ‘언제든 달려간다’ ‘끝까지 책임진다’ ‘모두가 함께한다’는 3대 핵심과제를 만들고 교육청, 지자체, 경찰, 소방서 등 관련기관과 전문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박해윤 기자 

    박주정 선생님은 2015년 광주시교육청 민주인권생활지원과장 재직 시 24시간 위기학생 신속대응팀‘부르미’를 창설했다. ‘부르면 즉시 달려간다’는 의미의 ‘부르미’는 자살 등 위기상황에 처한 학생이 전화로 요청하면 24시간 언제든지 30분 안에 긴급 출동하는 조직이다. ‘언제든 달려간다’ ‘끝까지 책임진다’ ‘모두가 함께한다’는 3대 핵심과제를 만들고 교육청, 지자체, 경찰, 소방서 등 관련기관과 전문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박해윤 기자 

    참혹한 자살 현장,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나

    “저는 10년 동안 선생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너무나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707명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707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것만으로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3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가 됐습니다. 장학사들이 제일 하기 싫어하는 부서가 학교폭력·성폭력 생활지도 업무입니다. 대개 1~2년 하면 다른 데로 가는데 저는 18년 동안 학생 생활지도를 담당했습니다.”

    매년 광주시교육청 산하 학교에서 중도 탈락자가 2000명이 넘었고, 전국적으로 연 5만여 명이 학교를 떠났다. 그는 멀리서 답을 찾지 않았다. 공동학습장을 거쳐 간 707명의 아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해보기로 했다.

    2004년 4월 국내 최초로 학교 부적응 중학생들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 시설인 ‘금란교실’을 시작했고, 2008년에는 장기 위탁 대안학교인 ‘용연학교’를 설립했다. 용연학교의 성공은 학교 부적응 고등학생을 위한 ‘돈보스코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가 장학사가 된 지 얼마 안 돼 새벽 2시 무렵,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18층에서 뛰어내린 사고 현장은 비참했다. 얼마 뒤 한 고등학생이 나무에 목을 맸다. 2년 넘게 아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치우고 ‘뒤처리’를 하다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고, 교육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교사들이 조기에 징후를 발견하고 학생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예방 교육’이 필요했다. 이 교육이 실효를 거두려면 자녀들이 심리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학부모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했다. 그는 광주 지역 전문가 100여 명을 모아 ‘생명존중강사단’을 만들어 각 학교에 파견해 자살예방교육을 진행하는 한편, 24시간 위기학생 신속대응팀 ‘부르미(부르면 즉시 달려간다는 뜻)’를 창설했다(2015). 학생들이 우울함으로 힘들 때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전문 의료진이 있는 ‘마음보듬센터’(2016)를 만들기 위해 밤마다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예산 확보를 위해 설득했다. 

    사람들은 박주정을 ‘참스승’이라 칭송한다. 그러나 참스승 뒤에는 아내 이정례 씨의 헌신이 있었다. 제자의 감사 편지에도 등장한다. 

    “철없는 선생님은 뻔한 월급을 우리들에게 다 써버리고 ‘뭔 통장이 항상 마이너스’냐고 싸우시던 그날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소풍 간 날 선생님 몰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몇 장 나눠주며 미안해하시던 사모님, 쌀값이 없어서 외상으로 쌀을 사시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딸 ○○는 잘 있나요. ○○에게 부탁 많이 했네요. 담배 피는 것 아빠에게 이르지 말라고, 사모님 지갑에서 돈 훔친 것이 아니라 빌린 거라고. 보고 싶습니다.” 

    박주정 선생님 곁에는 마이너스인 월급통장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지언정 아이들에겐 슬쩍 용돈을 찔러주던 넉넉한 마음의 아내가 있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8명의 학생들과 함께 살며 “저 오빠들 왜 저래?” 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던 어린 딸은 이제 학교 전담 경찰관이 돼 “아빠, 오늘 한 남학생을 상담했는데 사연이 너무 복잡해서 어디서부터 도와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수시로 의논하는 사이가 됐다. 부부 일심동체, 부전여전이다.

    박주정의 ‘콩나물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라 동행이요 섬김다. 

    “저는 교육청에서 장학사, 장학관, 과장, 국장, 교육장까지 마치고 2024년 2월 28일 1년 앞당겨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32년 동안 비탈에 선 아이들을 데리고 죽고 살고 해봤지만 왜 아이들은 변하지 않고, 선생님들은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고 할까. 생각해 봤더니 교육청과 학교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가정이 무너져 있으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가자. 전국을 다니며 강연과 공연을 하면서 학부모들에게 당신은 과연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 함께 반성하고 깨우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박주정 선생님은 현재 한국교육문화재단 부르미 학교안전대응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광주 ‘부르미’의 서울형 모델인 ‘학생 자살 응급구조단’ 도입을 추진 중이다. 그는 2년 전 퇴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에 손을 내밀 수 있어서 선생 박주정은 너무도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이제 누군가의 인생에 등불을 들고 꿈을 지키는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합니다. 교사의 길을 마무리하고, 선생의 길을 걷습니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선생 박주정’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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