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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부상, 미국의 견제, 한국의 딜레마

중국의 부상, 미국의 견제, 한국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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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정상회담 관련 예비 접촉 장소는 싱가포르 이외에는 모두 중국이었다. 또 지난 3월 김정일의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방문시 장쩌민의 측근이자 정치국원인 황쥐와의 비밀회담설, 남북정상회담 설명시 미국에는 외교부차관을 보낸 대신 중국에는 장관을 보낸 점,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두고 김정일이 비밀리에 방중했던 사실 등은 남북정상회담에 중국이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까지 대미 외교에 치중하던 한국정부가 미·중 양국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2000 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14일 밤늦게 두 정상이 전격적으로 합의한 남북공동선언은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켰으며 향후 남북한의 긴장완화와 관계개선, 북한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더 넓게는 동북아 국제정치구도의 획기적인 전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남북한 정상간의 합의사항 제1항의 내용이 ‘자주’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 관계정상화 그리고 더 나아가 분단해소 및 통일 성취라는 목표 뒤에는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역사성과 구조가 존재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비밀방문한 것이라든지, 남북정상회담 직후 미국의 국방장관이 한반도 통일후에도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필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긴급 방한한 것 등을 그 단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98년 말에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민화협)에서 행한 ‘국민 통일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북통일의 장애요인으로 남북간 체제 차이(34%)와 남북간 경제격차(21%) 다음으로 주변강국의 이해관계(16%)를 든 응답자가 많아 한국 국민 사이에도 이에 대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간의 긴장완화, 교류확대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위한 작업들이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주변국가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가 필요하며, 최소한 이들이 적극적인 반대세력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한국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안보를 확보하면서도 주변국에 비위협적일 수 있으며 또한 동북아에서 어떻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한국이 (가능하면 북한도) 주변국들에 설득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자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설득의 대상은 한반도 주변 4강일 것이며 그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설득의 효용은 친화적인 관계의 지속에서 극대화된다고 볼 때, 설득의 주체인 한국이 미국과 중국 양자에 대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중국의 등장’(the rise of China 또는 中國的起)이라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향후 미·중관계에 있어서 ‘중국위협론’과 등치되면서, 미국과 군사동맹 구조로 묶여 있는 한국에 매우 심각한 정책 딜레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미·중관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공통관심지역 중의 하나인 한국(다른 하나는 대만)이 미·중관계의 변화에 따라 겪게 될지도 모르는 딜레마와 한국이 채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적 대안 및 그 각각의 유용성을 따져 본다.

미·중관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아마도 향후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는가일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아시아 및 대중 정책의 기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진압 사건이 CNN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됐을 때, 그리고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의 종말이 선언됐을 때, 중국은 소위 ‘중국붕괴론’ 또는 ‘중국분열론’이라는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 또한 소위 ‘동아시아 전략 구상’(East Asia Strategy Initiative, EASI)의 기조에 따라 3만명에 이르는 미군 철수 등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대아시아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소위 ‘중국부상론’ 또는 ‘중국위협론’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기반하여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또한 변했다. ‘동아시아 전략보고서’(East Asia Strategy Report, EASR)와 ‘4년주기 국방정책 평가’(Quadrennial Defense Review, QDR)에서부터 최근에 작성 공개된 ‘조인트 비전 2020’(Joint Vision 2020)과 ‘아시아 2025’(Asia 2025)를 살펴보면 미국의 점증하는 대아시아 관심과 중국에 대한 경계 및 견제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개념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중국의 등장은 이제 명확한 사실로서 (특히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더 이상 가상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흔히 중국의 등장을 ‘중국위협론’과 등치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반드시 위협적인 세력의 형성으로 간주하는 주장들의 편향성 문제와 그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우선 ‘중국분열론’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자.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진영에서 널리 회자됐으며 지금도 그 위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향후 10~20년 안에 정권 주체로서의 공산당 소멸이 아닌 중국이라는 국가의 붕괴 또는 분열은 그리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중국분열론이 1990년대 들어 대두됐던 가장 큰 이유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에 이은 독립국가연합 출범의 충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을 구소련과 단순비교함으로써 붕괴와 분열이라는 결말을 예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잘못이라고 하겠다.

먼저 구소련이 가졌던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구소련의 경우 최대 인종집단인 러시아인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한 비중은 1989년에 81.5%에 불과했으며(이 통계 자체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는 논란도 있음), 소수민족들이 지역에 따라 최대 민족집단을 이루고 있는 곳 또한 적지 않았다. 1989년 통계에 따르면 21개 공화국, 11개 자치오크루그와 49개 오브라스트 중에 러시안의 인구비중이 50%가 채 되지 않는 곳이 무려 13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중국의 경우 전체인구에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8%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소수민족의 비중이 전체인구의 50%를 넘는 곳은 32개 성급단위 중에서 티베트와 신강 등에 불과하다.

또한 구소련에는 국가통합의 역사가 채 100년이 안되는 지역이 많았지만 중국은 극소수의 변경지역을 제외하면 그 통합의 역사가 짧게는 300여 년, 길게는 (中原의 경우) 1000년을 넘을 만큼 중국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중국분열론은 가능성 낮아

구소련과의 체제비교적 시각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분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분열과 왕조의 변혁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첫째 조건은 농민 봉기다. 이는 조정(즉 국가)의 정통성 및 통제능력 약화와 큰 상관관계가 있다.

개혁 초기 호별영농정책의 성공적인 시행으로 개혁의 최대수혜자가 되는 듯했던 농민들은 1985년 이후 정부정책의 초점이 도시개혁과 연해개방으로 옮겨가면서 지속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왔다. 1990년대 들어 농촌에서의 과도한 세금이 심각한 문제로 야기되고, 여러 지역에 걸쳐 농민들의 기층정부에 대한 산발적인 저항과 봉기가 일어났다. 널리 알려진 사천성 인수현 봉기에서 보듯이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농촌에서의 불만과 저항이 국가로서의 중국을 붕괴 또는 분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농민의 불만이 ‘필요조건’이라면 그들의 저항이 다양한 지역에 걸쳐 충분한 힘을 갖춘 무장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충분조건’일텐데, 현재 중국의 농촌 상황을 볼 때 그 정도의 움직임은 용납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19세기 중엽 청조를 뒤흔들었던 태평천국의 난처럼 여러 지역 농민을 하나의 응집된 저항세력으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의 농촌 전파에 대해 중국정부가 극히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면 대규모 농민봉기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국농민연합회 등과 같은 기능조직의 설립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중국 농민의 전국적 봉기는 단·중기적으로 그리 현실성이 없어보인다.

역사적 관점에서 연상되는 중국분열의 두 번째 조건은 지방 군벌의 대두라고 하겠다. 이 또한 현 상황에서 그리 큰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청조의 몰락이 결국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의 사병 양성을 허용한 데서 시작했다고 본다면, 개혁기 중국의 현 상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1978년 이후 획기적인 분권화 조치로 인해 중국의 각급 지방정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자율성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율성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경제영역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국가통제 밖의 무장세력의 존재를 상정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중앙의 대군부 통제라고 하겠다. 정부 및 당의 행정편제상 지방의 최상급단위는 성(4개 직할시 및 5개 소수민족자치구 포함)이지만, 인민해방군의 편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산하로 성급보다 상위조직인 일곱 개의 대군구가 있으며 그 하부에 성군구가 설치돼 있다. 지방행정 편제와 군지휘체계가 서로 맞물리지 않도록 조직돼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병력 이동과 작전에 대한 결정 권한 또한 극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개대대 규모 이상의 병력이동은 반드시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전승인이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개대대 병력이 발휘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감안하면 단·중기적으로 지방군벌의 등장이나 지방에서의 군사적 하극상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역사적으로 중국 분열을 초래했던 세 번째 조건은 외세의 침입이었다. 19세기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열강의 침탈이 없었더라면 청조의 몰락은 훨씬 더 미뤄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의 대외환경은 어떠한가?

1949년 이후 중국의 대외환경이 지금처럼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때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이후 전방위 대외개방과 선린우호정책 시행 결과로 중국은 대만과 국교를 유지하고 있는 20여개 나라들을 제외한 160여개 나라들과 수교했다. 그중 미국, 한국, 이스라엘, 싱가포르, 남아공,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포함한 56개국과는 1978년 이후에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이에 더해 1960년대부터 자력으로 다져온 국방력 (핵억제력 포함) 강화와 홍콩 및 마카오의 주권회귀를 통하여 중국은 최근 들어 대외관계에 한결 자신감 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의 분열은 단·중기적으로 현실성이 그리 높지 않은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물론 앞으로 민주화의 고통, 법륜공과 같은 신(新)전통주의적인 도전, 농민공(農民工) 실업 문제, 국유기업 개혁과 서부대개발 등 지속적 문제들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중국 분열론’에 대한 가장 큰 반증은 무엇보다도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중국위협론’ 그 자체라고 하겠다.

‘중국의 등장’과 ‘중국위협론’

중국의 등장이 가상 시나리오라기 보다는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 대륙국가의 경우, 그것도 특히 대외연계가 극히 또는 비교적 적은 사회주의 국가는 내부적인 발전 및 자체 성장의 속도와 폭을 밖에서 인위적으로 크게 변화시키거나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현재 중국의 국민총생산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34%에 달한다는 사실을 들어 중국의 대외의존도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 그 비중이 1994년의 45%와 1997년의 37%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간과한 평가다. 즉 중국 국내시장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도약기’에 두드러졌던 대외의존도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미국과 소련의 적극적인 방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1964년 핵무기 자체개발에 성공했으며 1979년 이후에도 경제개혁과 개방의 속도 및 폭의 조절을 통해 - 서방에 의한 인권이나 다른 이슈들과 연계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 지속적인 고성장을 이루어 왔다.

둘째, 1979년 이후 20년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실질 성장률이 10%에 다다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일정 부분 과다계상한 결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7∼7.5%로 하향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같은 기간 세계평균 GDP 성장률의 두 배 이상이다. 12억50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 많은 인구가 경제발전의 자산이 아닌 부담으로 작용하는 조건하에서 - 이러한 고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것은, 그동안 인도나 러시아의 경제가 처했던 상황과 비교할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것이다.

구매력환산 기준(PPP)으로 중국은 이미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총량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연구뿐 아니라 중국 국무원 산하 발전연구중심의 내부보고서에 실린 자체 예측에 따르더라도 이르면 2020년, 늦어도 2030년경이면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에 버금가거나 초월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중국은 이미 국제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와 G8+1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토의 유고 공습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는 유엔안보리의 사전 동의없는 군사행동이 결코 실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1999년 안보리 결의사항 1244호의 서문 첫단락에 넣게 된 것도 중국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특히 그 영역을 아시아로 제한할 경우 중국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핵심적이다. 홍콩 대만 동남아를 엮는 ‘죽의 연계’(bamboo networks) 뿐만 아니라 양안관계·남사군도·조어도·ARF 등에서 중국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 ‘두샨베 선언’을 통해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 3국 간에 결성된 소위 S-5 (Shanghai Five), 최근의 동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보여준 중국의 (인민폐 절하 거부와 관련한) 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4자회담 참여 결정을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상에서 볼 때 중국의 등장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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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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