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이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심으로 한 제1세대 지도자들의 혁명의 시대,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하는 제2세대 지도자들의 개혁 개방의 시대, 장쩌민(江澤民)을 중심으로 하는 제3세대 지도자들의 도약의 시대를 넘어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자들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번 제4세대 지도자들은 그 전 세대가 심각한 상처를 보듬으며 출발했던 것과 달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구가하는 종합국력 7위”라는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중국을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낙관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목표가 쉽게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4세대는 미래의 중국을 어떻게 설계해나갈 것인가.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국이 처한 종합적인 상황, 특히 제4세대 지도자들의 대표인 후진타오의 정치 역정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그의 정치 역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의 중국 지도부를 설계한 덩샤오핑의 후계구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후진타오
한때 덩샤오핑은 영원한 2인자라 불렸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호칭은 ‘실권자’라는 표현일 것이다. 덩샤오핑은 단 한번도 공식적인 국가원수 자리에 올라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복권 이후에는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는 생존해 있을 때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중국의 지도부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장쩌민 이후까지도 직접 챙김으로써 중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인물이다.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장쩌민을 발탁하면서 그 체제가 본질적으로 오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완 장치로 내세운 것이 장쩌민 이후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덩의 결론은 ‘당(黨)에는 후진타오, 정(政)에는 주룽지(朱鎔基)’였고 이들의 안정적인 권력 계승을 위한 장기적인 안배를 시작했다.
후진타오를 중국 공산당의 핵심요직인 중앙판사처 주임으로 앉힌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장쩌민이 권력투쟁이라는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고 있을 때, 후진타오는 당의 핵심요직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의 교장으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거센 파도를 한 발짝 피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덩샤오핑의 설계였다.
하지만 치밀했던 덩샤오핑마저 예측 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장쩌민이라는 인물이 예상 밖으로 강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장쩌민의 권력장악 과정에 잘 나타난다. 권력 초기 그는 중국 역사상 최약체 최고지도자였다. 장쩌민의 등장 자체가 덩샤오핑의 낙점에 의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과도기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한 불안정한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집권 초기 위상은 덩샤오핑의 강력한 후원이 있음에도 불안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석인 장쩌민과 당시 부총리에 불과했던 주룽지를 라이벌 관계로 인식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외부에 비치는 장쩌민은 리펑(李鵬), 차오스(喬石) 등 보수파와 주룽지 등 개혁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곡예사였다. 장쩌민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쩌민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현명하게도 당내 영향력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무리 약체라도 중국의 주석은 곧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다. 당내 영향력 강화는 그대로 국가 전체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중국의 현실. 그가 선택한 주요 방책은 먼길을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사상공작강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