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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 열망 불태워온 생화학무기 희생자

독립국 열망 불태워온 생화학무기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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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 주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란, 이라크의 갈등관계에서 양국은 상대국 내의 쿠르드족을 지원하며 반정부운동을 격화시켰다.

쿠르드족의 저항, 독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지원하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치공화국을 건설한 후부터다. 이에 자극을 받은 쿠르드인들이 터키, 이라크, 이란에서 각각 저항운동을 계속해왔다. 저항 과정에서 쿠르드인의 정체성 역시 견고하게 형성됐다. 각국의 도시에서는 쿠르드 지식인들이 쿠르드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당활동을 하고 있다. 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행정부가 가자지구와 웨스트 뱅크에 세워지자 쿠르드족 역시 이에 자극을 받았다.

이라크전쟁 후 쿠르드족 대표 5명이 이라크 과도통치위에 참여해 앞으로 터키와 이란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터키와 이란은 터키 제일주의, 이란 제일주의를 소수민족통치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양국은 쿠르드족을 ‘산악지역 터키인’과 ‘산악지역 이란인’이라고 부를 뿐 쿠르드족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호메이니도 쿠르드족이 무슬림 형제임을 강조하여 이슬람의 정체성으로 동화시켰다. 이라크는 쿠르드족의 자치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주변 국가는 모두 쿠르드족이 국경분쟁의 완충 역할을 하는 자국내 산악인 부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는 터키, 이란, 이라크 순으로 쿠르드족 저항운동의 역사와 실태를 살펴본다.

강력한 동화정책 펼친 터키



터키 내 쿠르드인들의 봉기는 19세기 초 아랍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시작됐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반란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880년 터키 내 쿠르드 족장이었던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aidullah)가 이란 지역 내에 쿠르드 민족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당시 우베이둘라는 8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란을 침공했으나 반격이 거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쿠르드인들에게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오스만 터키를 분할하기 위해 1920년 세브르조약에서 터키 동남부지역에 쿠르드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그러나 케말 파샤의 터키독립전쟁(1919∼23년)이 진행되면서 쿠르드족 자치문제는 국제정치협상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케말 파샤는 1919년 쿠르디스탄의 에르주룸에서 국민회의를 열어 종교적 형제애를 강조하고 터키-쿠르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당시 아나톨리아를 강점하고 있던 서구 강대국들에 대항했다. 그는 이슬람을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 당시 기독교 아르메니아인과 대립하고 있던 쿠르드족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1923년 케말 파샤는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터키 제일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같은 해 로잔조약에서 강대국들은 터키의 항의로 쿠르드족 자치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후 크고 작은 쿠르드족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25년 2월 시작된 낙쉬반디(Naqshibandi) 수피 종파 셰이크 사이드의 봉기이다. 사이드의 반란은 1만5000명의 쿠르드족을 동원한 거대한 봉기였다. 하지만 쿠르드 자치보다는 터키에 이슬람 정통국가를 건설한다는 종교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이에 터키군은 5만2000명의 정규군과 12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전사자만 총 8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족봉기였다. 터키군은 52명의 쿠르드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1만5200여 명의 쿠르드인을 학살했다. 1932년 터키는 쿠르드족 이민법을 제정하여 강제이주정책으로 쿠르드족을 분산시켰다. 1937년부터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 거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쿠르드인들을 감시했다.

한편 1차 세계대전 말 영국은 쿠르드족의 반란을 이용해 모술과 키르쿠크 등 쿠르드 땅을 차지했다. 이 두 지역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이라크로 편입되면서 현재 이라크의 영토가 됐다. 하지만 터키는 지금도 이 지역들을 자국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테러조직 성향 강한 쿠르드 노동자당

현재 터키의 대표적인 쿠르드 반군지도자는 압둘라 오잘린이다. 오잘린이 이끄는 쿠르드 노동자당(PKK)은 정부군, 경찰, 학교, 휴양지 등에 무차별 테러를 저질렀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PKK는 217명의 교사를 납치했고 700개 이상의 학교가 쿠르드의 테러로 폐교했다. 터키 정부는 PKK를 범죄, 테러조직으로 보고 쿠르드족의 대표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1949년 터키에서 출생한 오잘린은 앙카라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23세에 쿠르드 민족운동을 하다가 7개월간 투옥된 경험이 있고 1974년 PKK를 조직하여 반정부운동을 계속했다. 1980년 시리아로 망명한 그는 시리아와 레바논 고원지대에 쿠르드족 반군 훈련 캠프를 만들어 운영했고, 1984년 쿠르드 무장 저항군을 조직해 터키 정부와 테러 전쟁을 벌였다. 터키군과 PKK 반군과의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끊임없는 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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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순남 한국외대 교수·중동 정치학 hongsn@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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