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9월 촬영된 북한 영변의 핵 시설 위성사진.
6자회담이나 북-미 간의 회담은 영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각국 말로 통역된다. 그러나 합의문 채택과정에서는 일차적으로 차석대표 회의에서 각자 또는 한 나라가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영어로 토론과 협상을 시작한다. 일단 합의문 초안이 결정되면 이에 대해 각국 수석대표들 간에 ‘잠정적인 합의’(본국 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한다는 뜻에서 ‘ad ref’ 또는 ‘ad referendum’이라고 한다)를 하고, 각자 본국의 승인을 받아 공식발표를 하는 것이다.
6자회담에서 영어는 공식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영어로 문건이 발표되고 협상 중에 영어와 북한어 통역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이유는 미국과 북한이 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라는 점이다. 물론 다른 참가국들도 핵 문제에 일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그중에서도 한국은 자국의 직접적인 안보이익이 걸려 있는 나라다. 그럼에도 이러한 중요한 사실은 북-미 양측의 이익 때문에 6자구도 안에서 뒤로 밀리곤 한다. 둘째 이유는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과 관련이 있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외교관들의 영어실력이 미국 사람들의 외국어(특히 동양어) 실력보다 낫기 때문이다.
2005년 9·19공동성명이나 이번 2·13성명은 초안부터 모두 영어로 작성되고 영어로 협상해 영어로 발표됐다. 본국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참가국들은 영문 원본과 함께 자국 대표단의 번역문을 본국에 보고한다. 물론 미국의 경우 영어 원본만 보내면 된다. 북한 대표단의 경우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도 영어를 상당히 읽고 들을 수 있지만(이근 차석대표는 영어 이해력이 날카롭도록 정확하다), 반드시 북한 말 번역문을 갖고 내용을 검토해서 평양에 보고, 협의한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북한 말 번역문을 전문으로 인민에게 발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2·13합의문에서 사용된 어휘와 용어들을 검토할 때 글의 맨 끝에 첨부한 것처럼 영문 원본과 한국 외교통상부의 번역문을 사용키로 한다. (외교부는 2·13합의문을 한글로 웹사이트에 실으면서 ‘비공식 번역문’이라는 딱지를 달았다.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인데, 필자는 이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우선 번역을 정확하게 했다면 문제가 생길 리 없고, 6자회담 합의문은 일반적인 쌍무 외교협정이나 조약과는 달라서 외국어와 한글본으로 작성, 서명되어 두 언어의 문서가 똑같이 효력을 갖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기’와 ‘평화적으로’의 뿌리
2·13합의문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I조의 ‘참가국들은 한반도 비핵화를 조기에 평화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와 의지를 재확인하였으며…’에서 사용된 ‘한반도의 비핵화’(북한말로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란 표현부터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1992년 남북공동선언 때부터 북한이 선호해온 용어다. 9·19공동성명에서 미국과 한국은 각기 한국영토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북한말로는 확언)했지만, 북핵 폐기의 검증단계가 되면 북한측에서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검증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미 간 협상 역사를 보면 협상 당시에는 사용된 어휘에 대해 양자 간에 공통된 인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북한이 그 어휘들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경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