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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6자회담 합의문의 ‘언어학적 해부’

곳곳에 이견과 해석차의 ‘함정’… 북-미 피말리는 手싸움의 결정체

2·13 6자회담 합의문의 ‘언어학적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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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13합의문이 1994년 제네바 핵 협정과 다른 점은 ‘비핵화를 조기에 평화적으로 달성’한다는 데 있다. 제네바 협정은 ‘핵 시설 동결’을 하고 이후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경수로 건설이 완공되면 ‘시설 해체’를 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핵화의 조기 달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조기’는 미국측이 요구했을 것이고, ‘평화적으로 달성’은 북한의 주장이 관철된 것으로 봐야 한다. 즉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언급해왔고 이를 9·19공동성명에서도 밝혔지만, 부시 대통령이 종종 “모든 대안은 살아있다”고 말함으로써 북한의 처지에서는 미국의 평화적 해결의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온 그간의 사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9·19성명과 마찬가지로 2·13합의문의 I조에서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다. 이 용어는 물론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이고, 2004년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측이 이를 수용했다. 제네바 협정 때는 ‘동시행동의 원칙’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이는 북-미 간에 불신이 존재하는 한 북한의 선(先) 핵폐기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협상장에서 북한측 대표는 이와 관련해 “지금 우리는 기술적으로 미국과 전쟁상태에 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데 우리더러 먼저 총을 내리라고 하면 말이 되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북한은 미국이나 6자가 아무리 약속이나 문서로 보장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북미수교나 평화협정의 서명을 통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敵對) 정책’을 종식하지 않는 한 미국을 믿고 핵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만큼 결국 북한은 이미 개발한 핵무기들의 폐기를 6자회담의 마지막 단계에서 북-미 수교와 맞바꿀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2·13 합의문의 VI에는 참가국들의 ‘상호신뢰(북한말로는 호상신뢰)를 증진하기 위한 긍정적인 조치’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회담 당사국인 6개국 사이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북-미 간의 신뢰를 중요시하는 북한의 시각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shut down’과 ‘freeze’는 다르지 않아



합의문 II의 1항은 북한은 ‘궁극적인 포기를 목적으로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을 폐쇄·봉인(shut down and seal)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IAEA 요원을 ‘invite back’한다(다시 초청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궁극적’이란 어휘는 구체적인 시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기’에 현실화할 때만, 즉 북한의 ‘조기 핵 포기’가 실현될 때만 제네바 협정과 내용상 차별화할 수 있다. 여기서 ‘포기’는 단순한 방치상태(state of abandoning)나 폐쇄상태(state of shutdown)가 아니라 완전한 물리적 해체 또는 철폐를 가리킨다.

이 문장에 사용된 ‘shut down’이라는 용어는 미국측이 꺼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단어를 한국 언론과 외교통상부는 ‘폐쇄’라고 번역하고, 북한측은 ‘일시적인 가동 중단’이라고 해석했다. ‘shut down’이라는 어휘만 놓고 보면, 사전적인 의미로 ‘문을 닫는 것’이나 ‘일시적인 가동 중단’이나 ‘(공장의) 폐쇄’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일시적인 가동 중단’이라는 해석은 비록 북한의 대내용으로 나온 것이지만, 용어의 의미론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결국 ‘shut down’은 ‘동결(freeze)’과 다른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2·13합의문이 베이징에서 발표된 후 평양방송은 그 상세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임시 가동 중단’의 대가로 100만t의 연료를 지원받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 말을 들은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아마도 언론매체 요원들은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북한 매체들은 북한 외무성에서 써주는 대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의 협상가들은 그들의 상부와 대내용 선전보도에 사용될 용어들까지 합의 이전에 꼼꼼히 따진다.

‘shut down’이 ‘freeze’와 다르지 않음에도 미국이 굳이 이 용어를 쓰자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199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을 거부한 부시 행정부의 전력이 깔려 있다. 6년 전 동결됐던 영변 핵 시설이 제네바 협정의 파기로 부활되어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가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은 핵실험에까지 이르렀는데, 이제 와서 다시 ‘동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습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이 6자회담에서 처음 동결을 제안했을 때 미국측은 다시 동결한다고 해서 보상을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동결이 아니라 철폐를 바라고 있으며, 동결을 해제하는 ‘나쁜 행동’을 한 것은 북한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서 미국은 사실상 ‘동결’을 의미하는 ‘shut down’을 채택했으므로 앞으로 이 문제가 협상 진행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은 없다.

같은 문장에서 ‘IAEA와의 합의에 따라…’도 정확한 정의가 없는 모호한 대목이다. 북한은 현재 핵확산금지협약(NPT)에서 탈퇴한 상태이므로 IAEA 안전협정(Safeguards Agreement)에 따른 검증을 받을 의무가 없다. 2·13합의에 따라 먼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이 평양을 방문해 사찰이 아닌 ‘감시와 검증(monitoring and verification)’을 위한 합의를 해야 하는 구조다. 예상컨대 장차 제네바 협정 당시 이행됐던 수준의 감시와 검증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 다음 사용된 ‘봉인(seal)’은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그거나 시설의 주요 작동장치를 잠그고 난 후 다시 열지 못하게 한다는 뜻에 불과하다. IAEA의 봉인조치는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지난번 IAEA 요원들을 추방했을 때처럼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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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전 미국 국무부 한국어 수석통역, 고려대 연구교수 tong.kim@prodig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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