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도 구동독의 많은 사람은 통일로 인해 직업을 잃었고 그 결과 물질적인 궁핍을 감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전까지 자신들이 살면서 달성했던 모든 것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나아가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가 독일의 내적 민족적 통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서독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적 통합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실제 현재 독일의 체제는 구동독 지역의 모든 영역에 서독 체제가 급하게 전이된 결과, 통일 이전의 서독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전이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형평성과 심리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관철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통일된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아직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분단이란, 독일이든 아니면 한국, 사이프러스 또는 어느 다른 나라에서든, 종속을 의미하며 언제든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은 한 국가에 제한된 국지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다.
先 관계정상화 後 통일
한국이 왜 통일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많은 한국인이 한민족은 오랫동안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았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답이 기성세대에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여겨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언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충분한 토론이 진행되지 않았다. 정치 경제 그리고 통일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도 통일과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질적인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볼 때 독일이 평화적 통일의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독일 통일이 한국을 위한 완벽한 모델은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 시사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북한 두 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그리고 협약을 통해 평화공존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평화적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에 통일은 언젠가 달성해야 할 필연적인 과제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인 관계 정상화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협상의 경험 또한 일천해 국제 사회에서 협력하는 것 자체를 종속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 모두 분단이 외국의 간섭으로 인해 지속되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마치 한국인들만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면 아주 이른 시일 안에 손쉽게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현재까지 분단이 지속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서로 적대적인 두 체제가 반목하고 있다는 점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두 체제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는 중요한 원인이 양측의 불신이 너무 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돈독한 공생관계를 유지해본 경험이 없다는 데 있음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