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포도줏빛 고전주의 빚어낸 괴테 문학의 산실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4-04-30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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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이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특히 괴테가 청년기 이후 58년을 살았던 바이마르 곳곳엔 고뇌하는 파우스트의 자취가 서려 있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프라우엔플란 거리에 있는 ‘괴테의 집’. 건축 당시의 바로크 양식 그대로다.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유럽의 자연과 문화는 상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 남쪽의 자연은 밝고 경쾌하면서 바다와도 친하나, 산맥을 넘는 순간부터 그만 칙칙한 색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표정은 ‘쌀쌀맞다’고 할 만큼 굳어진다. 말수도 적어 쉽게 말을 걸기 어렵다. 알프스의 고산준봉이 따뜻한 남풍의 북상을 막으면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삭풍을 잠재우기에 그 같은 자연과 문화가 생겨난 듯하다.

    하지만 그런 알프스 이북 땅에서도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문화, 다시 말해 남방의 고전문화를 되살리려는 운동이 18세기 한때 크게 일어났다. 그 현장은 튀링겐 주(州)의 바이마르.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발트부르크가 있는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로부터 260년 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바이마르에서 독일어로 ‘파우스트’를 펴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웠다는 사실이다.

    유네스코는 세계 최초의 민주헌법이라 일컫는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공표(1919)된 이 도시를 1998년 ‘고전도시 바이마르(Classical Weimar)’란 이름으로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다. EU(유럽연합)는 괴테와 실러, 니체, 헤르더 등 출중한 인물들이 활동한 독일 문화의 중심지이자 고전문학의 메카라는 이유로 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1999년 바이마르를 ‘유럽문화도시’로 선정했다(2004년엔 프랑스의 릴르와 이탈리아의 제노바가 선정됐다).

    바이마르는 독일 학생들이 수학여행지로 제일 많이 찾는 도시기도 하다. 한국 학생들이 천년 고도 경주를, 일본 학생들이 신궁(神宮) 도시 이세(伊熱)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필자 또한 이런 연유로 옛 동독지역에 위치한 인구 6만의 이 도시를 찾았다.

    온 도시 가득한 고전의 물결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곧장 북상해 스위스 취리히에 잠시 머물다 보덴 호수변의 아름다운 국경도시 콘스탄츠를 거쳐 바이마르로 향했다. 거리가 꽤 멀었고 슈투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 거쳐가는 도시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쾌적한 고속열차(ICE)와 완벽하고 정확한 연결 시스템을 갖춘 독일철도(DB)는 8시간 만에 바이마르에 내려주었다. 각 역에선 목적지만 알려주면 경유하는 역과 그 도착·출발 시각은 물론 도착 플랫폼과 출발 플랫폼 등 필요한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 ‘고객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래서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경우는 적었다.

    밤 10시가 지나 도착한 바이마르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역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인터시티 호텔이 ‘오, 자네 왔는가’ 하며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건물에 별 세 개가 그려져 있어 ‘미안하네. 난 아직 그대를 품에 안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라는 말만 건네고 지나쳤다. 지리도 모르고 행인도 드문 그 늦은 시간에 싼 숙소를 찾아 이곳저곳 헤맸지만 주머니 사정에 맞는 곳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종일 열차 여행에 지친 터라 하는 수 없이 ‘오늘만 호사를 누려보자’는 심사로 인터시티 호텔로 되돌아가 짐을 풀었다. 58유로나 되는 하루 방값이 부담이긴 했으나 대신 아침식사와 교통카드가 제공돼 조금은 위로가 됐다. 독일에만 있는 인터시티 체인호텔은 시내를 다니는 모든 대중교통수단, 즉 시내버스와 지하철(U-Bahn과 S-Bahn), 지역철(Regional Train) 등을 하루 내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를 제공하는데, 이런 서비스는 특히 광역도시 베를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게 나그네 신세라 아침을 먹자마자 시내버스에 실려 프라우엔플란으로 향했다. 그곳 광장 한쪽에 ‘괴테의 집’이 있다고 해서였다. 생전에 괴테가 살았던 집을 후일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호텔에서 1km 남짓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사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넓지 않은 길, 그 길 좌우로 들어선 고전 양식의 건물들, 녹색을 잔뜩 뽐내는 공원, 그리고 한가하게 오가는 행인들이었다. 현대식 건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도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고전주의가 독특한 분위기로 바뀌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18∼19세기의 정경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우엔플란 앞 광장 거리.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괴테의 집’에는 노란 벽에 굵은 테를 한 창이 열지어 나 있고 문은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하나는 방문자용, 다른 하나는 마차용이었으나 지금은 마차가 드나들지 않아 큰 문은 닫혀 있다. 작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념품 가게가 나왔다. 이미 방문객들이 들어차 어수선한 그곳에는 괴테와 바이마르에 관한 책자를 비롯해 엽서, 마스코트, 컵, 티셔츠 등이 내걸려 있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괴테와 바이마르와의 인연에 관한 20분짜리 영화를 틀어주는 영사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룸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28일 라인강변의 상업·금융·교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생이 뭔지 모르고 자랐다. 라이프치히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사무실까지 냈지만, 본업인 법률보다 취미인 문학에 더 심취, 25살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을 써 유럽 지식인들로부터 ‘세계적인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775년 11월3일 새벽, 그는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그게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때의 광경이 어땠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는 후일 그가 쓴 ‘이탈리아 기행’의 첫머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새벽 3시 칼스바트(그의 여름 휴양지)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넓혀보려고 바이마르 행을 결심한 터였다. 그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우편마차에 실려 푼다, 아이제나하, 에르푸르트 등을 거쳐 11월7일 드디어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지금은 고속열차가 4시간 만에 데려다주지만 온통 진흙길이던 당시에는 걸핏하면 바퀴가 진흙 속으로 빠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괴테는 진흙에 빠진 마차를 끌어내는 일을 돕다 갈비뼈를 다치기도 했다.

    괴테 안내 영화는 낙엽이 흩날리는 광경을 배경 화면으로 처리해 괴테가 바이마르를 찾은 때가 스산한 시기였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 도시에 화사한 봄을 안겨다줬다. 그가 밑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게 했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영화는 이어 바이마르에서의 괴테 행적을 보여줬으나 초점은 어디까지나 문학가로서의 그의 면모에 맞춰졌다.

    두 ‘애송이’의 위대한 만남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국가이던 프랑스와는 달리 수십 개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진 상태였고, 바이마르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이 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였던 것. 그런데 누구보다도 포부가 컸던 26살의 청년 괴테가 이런 바이마르를 찾았다.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지도자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1757∼1828) 공(公)의 초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가 처한 상황이나 그곳으로 가는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트는 명색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실은 18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가 이미 1년 전부터 괴테를 만나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와 그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안다면 그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대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마따나 아우구스트는 제대로 된 인재 한 사람만 있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예상대로 괴테와의 만남은 바이마르를 유럽 문화 중심축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됐다. 10대와 20대 두 애송이의 신선한 만남이 세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괴테 개인에게도 일생 일대의 전기가 됐다.

    괴테도 처음엔 바이마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얼마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와 죽이 아주 잘 맞은 데다, 계속해서 은(銀)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궁정극장 책임자라는 요직을 두루 맡게 되자 도저히 그의 청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게 됐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기간을 제외하고는 8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58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바이마르를 처음 찾았을 때의 사정을 그의 조수이자 절친한 동료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들려준 바 있는데, 에커만이 정리한 ‘괴테와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일름 공원 입구에 세워진 아우구스트 공의 늠름한 청동마상.

    “내가 바이마르에 왔을 때 그(아우구스트)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큰 나무가 될 눈과 싹이 보였다. 그는 이내 나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됐으며 내가 하려는 일이면 무조건, 그리고 철저히 참여했다. 내가 그보다 여덟 살 위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됐다. 그는 저녁 내내 내 옆에 앉아서 예술과 자연,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좋은 것들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자주 밤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내 소파에서 둘이 나란히 잠든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고급 포도주와 같았다. 아직도 강력하게 발효하고 있는.”

    괴테는 당시 두서너 편의 문학작품을 써 유명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설펐고, 무엇보다도 궁정 예법에 서툴렀다. 바이마르 상류계층 인사들은 그런 괴테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와 가까이 하기도 꺼려했다. 그런데 최고지도자인 아우구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젊은이를 그처럼 끼고 돌았으니 더욱 미운 오리새끼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의 귀에도 비난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헤쳐나갔다.

    “나는,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 위해서 일한다.”

    아우구스트가 이렇듯 커다란 비전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어머니 안나 아말리아(Anna Amalia·1739~1807) 대공비(大公妃)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극한 정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녀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일찍 여의고 어린 큰아들 대신 섭정할 때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독일어로 번역한 소설가 빌란트를 가정교사로 초빙하는 등 갖은 뒷바라지를 다했다. 또한 바이마르를 당대의 문화도시인 파리나 런던과 같은 도시로 만들고자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을 불러들였다.

    덕분에 아우구스트는 어머니보다 예술에 더 심취했다. 그 결과 전도양양한 젊은 괴테를 바이마르로 모셔왔고, 독일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세워지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연주 활동을 하는 등 문화 인프라를 지닌 바이마르를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독일 지성의 허브(hub)를 구축한 것이다.

    “더 많은 빛을!”

    괴테가 프라우엔플란에 있는 집으로 이사한 것은 바이마르에 머문 지 8년째(34세) 되던 1782년이다. 아우구스트 공이 광석과 서책, 미술품 등을 모아두던 바로크 양식의 3층집을 선사하자 괴테는 이를 자신의 거소로 삼았는데, 지금의 인테리어는 1786년부터 1년 9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르네상스 스타일로 개조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1층 정면 현관에서 3층까지 꾸불꾸불 이어지는 아름다운 나선형 계단으로, 그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보여준다.

    경사가 완만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자 나무판자인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났다. 2층 입구 바닥에는 ‘SALVE’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라틴어로 ‘환영’을 뜻한다. 계단에서 연결되는 방에는 도자기와 그림들이, ‘흉상(胸像)의 방’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석고 인물상이, 응접실 겸 음악감상실인 ‘유노의 방’에는 괴테가 최고로 모셨던 음악의 여신 유노의 흉상이, ‘우르비노의 방’에는 우르비노의 초상화 등이 가득해 정말 박물관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그의 집은 크고 복잡했다. 여기에다 부인 크리스티아네가 사용하던 안방과 식당, 마요르카 도자기를 모아둔 ‘마요르카의 방’, 아우구스트의 65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 등이 걸려 있는 대전시실, 만찬장으로 쓰이던 ‘황색의 방’ 등도 덧붙어 있다. 미술품은 많은 편이었으나 가구는 실용적인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단출했다. 바닥에는 판자가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집에서 50년 넘게 살았다면 그의 체취는 물론 생각까지 배여 있을 터, 그렇다면 그 분위기에서 그의 인품을 유추해봐도 좋으리라.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괴테를 내세워 자기네 가게로 손님을 이끄는 레스토랑 간판.

    방마다 뚫린 창문으로는 꽃들이 만발한 뒤뜰이 내려다 보였다. 그곳엔 “동양에서 건너온 은행나무가 나의 뜰에 자리잡으니/ 비밀스런 뜻 담겨 있는 잎새가/ 지혜로운 사람을 기쁘게 하누나”라고 읊었던 은행나무와 장미 등이 자라고 있다.

    괴테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재 겸 침실은 작지만 녹색으로 꾸며져 무척 아름다웠다. 그가 60년을 끌어오던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한 곳이자 폐렴으로 고생하다 “더 많은 빛을!”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곳이다. 어둠 속에서 구원의 밝은 빛을 갈구한 괴테를 떠올리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깃털 달린 펜과 약장처럼 생긴 메모함, 그리고 찻잔과 시계, 지구의 등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책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괴테는 6000권의 책이 보관된 서고를 옆방에 따로 가졌던 데다 필요할 때는 1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서관장도 겸하고 있었다.

    책상 뒤로 그가 단신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작고 초라한 침대가 보였다. 거기에선 장관의 지위에 오른 자의 위엄이나 문학적 성공을 거둔 자의 흔적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정신을 다듬는 문인으로 일생을 산 사람임을 보여줄 뿐이었다.

    괴테의 여인들

    괴테의 곁에는 늘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파트너가 바뀌긴 했지만. 물론 그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괴테의 몫이었다. 그를 서정시인으로 만든 슈트라스부르크의 프리데리케로부터 계산하면 모두 9명에 이른다.

    약혼까지 했으나 결혼에는 성공하지 못한 16살의 아름다운 처녀 릴르, 릴르와 헤어진 다음 바이마르를 찾았다가 만난 슈타인 부인, 그녀와 10년을 사귀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만나 결혼에 이른 크리스티아네, 예나라는 곳에 들렸다 알게 돼 불 같은 사랑을 나눈 민나, 프랑크푸르트의 마리안네, 70대의 노년에 만나 마지막 불꽃을 태운 19세 소녀 올리나에 등이 그들이다.

    괴테는 사랑을 나눈 여인들로부터 느낀 감정을 그때마다 각기 다른 분위기와 형식의 작품들로 내놓았다. 20세기 천재화가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괴테는 이처럼 여인들을 사랑했고, 자연에 심취했으며, 인생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생의 탐구자였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맑은 강과 파란 잔디, 키 큰 수목들로 이루어진 일름 공원은 바이마르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다.

    그가 오랜 세월을 보낸 바이마르에 직접 와서 보니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일름(Ilm) 공원(일명 괴테 공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 동쪽으로 흐르는 일름 강(강이라기보다는 개울에 가깝다)을 끼고 잔디와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키 큰 수목들이 모든 것을 파랗게 물들이는 그곳을 거닐며 그는 자연의 의미를 깨달았고, 여인들과 사랑을 속삭였으며,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을 것 같아서다.

    독일은 숲(Wald)의 나라다. 곧게 자란 수목들, 산은 그들 덕분에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그 속을 거닐다 보면 미국 가수 존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란 곡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숲속을 흐르는 개울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 인공이 가해진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오염을 낳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상쾌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일름 공원을 한바퀴 걸었다. 생전의 괴테를 떠올리면서. 그러자 그가 자연을 예찬한 시가 생각났다. “자연은 어쩌면 저렇게도 화려하고 나를 향하여 빛나는 것일까! 태양은 저렇게 번쩍이고 풀밭은 저렇게 다정한 것일까!”

    그곳에 머문 2시간 동안 안내인에 이끌린 독일 단체관광객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공원 역시 관광코스의 하나인 것 같았다. 그 한쪽에는 괴테가 사색을 즐겼다는 2층 구조의 작은 산장도 있었다. 괴테는 그곳에서 그의 유일한 법적 부인인 크리스티아네와 1년 동안 동거하며 자연을 노래한 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모르긴 해도 그는 진정 뜨겁게 사랑했던 7살 연상의 샤롯테 폰 슈타인(1742∼1827) 부인과도 이 공원을 자주 거닐었을 것이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일름 공원에 있는 ‘괴테 산장’. 괴테는 이곳에 머물면서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아말리아 대공비의 비서이던 슈타인 부인의 집은 ‘괴테의 집’과 일름 공원 사이에 있다. 괴테는 언제나 슈타인 부인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그녀를 만나곤 했다. 괴테를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걷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지간히도 애를 태우던 여학생을 차마 불러내진 못하고, 그녀가 지나갈 만한 곳에 죽치고 서 있다가 다행히 그녀가 나타나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해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려 했던.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그리고 젊음이 소중한 것은 그런 사랑의 감각이 살아 있어서가 아니던가.

    괴테가 떠난 지 200년이 지난 지금, 슈타인 부인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살던 집은 남아 있다. 바로 공원 앞에 기념품 가게로 변한 채로. 그래서 아직도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괴테의 조수이자 동료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의 집이 그 이웃에 거의 폐허에 가까운 채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은 사람을 앗아가는 줄만 알았는데 추억마저도 앗아가려고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듯이.

    괴테는 자신이 “얼굴 표정에는 온유함과 진지함, 그리고 정말로 독특한 솔직함이 함께 있다. 건전한 지성과 감정의 진실성이 그녀의 독특함을 만들어준다”고 한 슈타인 부인으로부터 스스로에게 결여된 바이마르 귀족사회의 자제력과 내적인 절도 등을 익혔을 것이고, 그리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보여준 격정적인 질풍노도의 문학 경향에서 벗어나 고전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그렇듯 갑작스런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슈타인 부인과 10년을 같이 하는 사이에 고전주의의 길로 서서히 나아갔던 괴테가 어느 정도 완숙의 경지에 이르자 고전주의의 요람인 로마를 향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됐고, 그것이 그녀와의 영원한 결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로 돌아가자!”

    이성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 그것도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지던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아테네다. 독일은 그리스와는 지리적 정치적으로 상이한 환경에 놓여 있었으나, 근원·궁극·본질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졌다. 독일 지성이 유럽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그리스적인 것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계기는 폼페이 유적을 직접 찾은 고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빙켈만에 의해 이뤄졌다. 그 뒤로 괴테, 고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규명한 ‘비극의 탄생’의 저자 니체, 그리스를 무대로 한 서간체 소설인 ‘히페리온’를 쓴 횔덜린 등으로 이어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을 낳기에 이른다. 그러다 1820년대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던 시절에는 독일 출신의 왕자가 그리스 왕국의 왕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와 독일은 참으로 질긴 인연을 가진 것이다.

    질풍노도를 겪고 난 괴테는 “만일 우리가 정말 모범적인 모델을 원한다면 언제나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의 작품 속에 인류의 아름다움이 변함없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스 예찬론자가 됐다. 그리스 미학에 일가견을 가진 빙켈만을 ‘진짜 그리스인’이라 칭송했던 그인지라 그리스 미학의 본질을 그로부터 직접 듣고 싶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빙켈만을 마중하러 갔지만, 빙켈만이 귀국하는 길에 트리에스테라는 곳에서 자객의 손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 못지않게 여행을 좋아했던 괴테는 결국 직접 이탈리아로 달려갈 결심을 하고 몰래 길을 떠났다. 그때의 기록이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인데, 거기서 그는 “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만큼 애를 태웠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알프스 남쪽 밝은 햇살의 땅 이탈리아는 그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선사했다. 그래서 바이마르에서 겪은 불안과 초조감을 말끔히 씻어냈고, 정신적 안정과 심리적 균형을 되찾았다. 또한 미술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사실은 내겐 문학이 제격이라는 것”이라며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바이마르에 온 이래로 정치가, 행정가, 교육자, 자연과학자로서의 면모를 더했으니 그 이상은 무리였던 듯하다.

    1년 9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바이마르로 다시 돌아온 그는 독일 고전주의의 완성을 위해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1759∼1805)와 손을 잡았고, 그리스 신화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오랫동안 구상한 ‘파우스트’ 집필도 서둘렀다. 이러니 괴테의 80 평생에서 바이마르 생활을 빼버린다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바이마르는 괴테 문학의 산실이자 독일 정신문화의 중심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괴테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실러의 집’과 안뜰.

    개울과 산장을 거쳐 일름 공원을 빠져나오다 커다란 청동마상과 마주쳤다. 아우구스트였다. 그는 늠름한 자세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큰 꿈을 가진 자처럼. 개울 위에 놓인 다리 건너편에는 성(城)들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고, 프라우엔플란에서 멀지 않은 마르크트(시장) 광장에는 루터의 초상화를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의 집(박물관)과 시청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괴테의 집 주변 기념품 가게들을 다시 어슬렁거리다 실러 거리에 있는 ‘실러의 집’으로 향했다. 괴테의 집에서 가까웠지만 화려한 쇼윈도가 눈길을 끄는 등 주변 분위기는 아주 딴판이었다.

    ‘군도(群盜)’를 발표하여 제법 이름을 날린 실러가 세 명의 바이마르 거장을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를 찾은 것은 1787년이다. 그가 말한 세 명의 거장은 빌란트와 헤르더, 그리고 괴테였는데, 10살 연상의 괴테는 마침 이탈리아 여행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둘이 만난 것은 그 이듬해였지만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 가까워지는 데는 실패했다. 괴테는 기존 질서와 권위, 인습과 같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겠다는 질풍노도를 청산했으나 실러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던 탓이다.

    이런 그들이 서로 의기투합해 우정 어린 교제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94년부터다. 실러는 그후 바이마르의 이 집에서 ‘윌리엄 텔’을 완성했고 괴테는 실러의 격려에 힘입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르만과 도로테아’ 등을 집필하는 등 고전주의 운동에 진력했다.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 광장에 세워진 괴테와 실러의 동상. 독일 고전주의를 이룩한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10여년간 공동작업을 벌이던 실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나자 괴테는 잠시 실의에 빠지는 듯했으나 1808년에 들어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 제1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1825년엔 시청에서 바이마르 거주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고, 그 3년 뒤에는 평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카를 아우구스트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1831년엔 드디어 ‘파우스트’ 제2부를 마무리해 대작을 완성했으나 이듬해 봄, 그 자신도 영원히 눈을 감았다.

    바이마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괴테와 실러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곤 했던 궁정극장(지금의 국립극장) 앞 광장에 두 사람의 동상을 세웠다. 서로 손을 잡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상이 시내 한가운데 있어 방문객은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동상 맞은편에는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의 거소인 비툼 궁(宮)과 바우하우스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산업과 예술의 결합을 목표로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에 설립한 종합조형학교이자 연구소이고, 아울러 그들이 추구한 조형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 크지 않은 미술관에는 의자와 의자 스케치, 책상, 탁자, 수납장, 주방기구, 전등 등 기능과 디자인을 중시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이들 작품은, 독일인은 1+1=2라는 수학 공식에 충실한 민족이라며 전혀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성을 중시한 고전주의가 독일 땅에서 꽃을 피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40년 가까이 지속된 독일 고전주의를 키워낸 괴테와 실러는 일름 공원 근처의 ‘바이마르 역사묘지’에 잠들어 있다. 태어난 고향 땅이 아니라 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그곳에 묻힌 것이다. 우리가 선호하는 ‘고향 회귀’는 그들에겐 낯선 문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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