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공동체를 향하여<br>한국동북아지식인연대 지음 /동아일보사 / 580쪽 / 1만5000원
전쟁의 위험을 확실히 없애며 동북아 전체의 ‘평화공동체’를 구축하는 일, 글로벌 경제가 가져오는 기회와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한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침략과 저항, 반목과 오해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인식·문화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은, 지난 100년간 근대화 과정에서 상호불신이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이 지역의 안정적인 발전과 평화유지에 불가결한 과제다.
총론 수준의 이러한 이야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보면 이 지역에서 상호 불신과 대립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된다.
중국은 중화주의와 팽창주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일본 또한 대동아공영권의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앞선다. 40년간의 사회주의 실험을 마친 중국은 일종의 강력한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이것을 추진할 국가·국민·민족의 힘을 결집시켜 새로운 중화질서의 성립에 몰두하고 있다. 평화헌법 개정논의, 국기국가법의 통과, 수상의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 참배 등과 같은 일본의 움직임도 국가·국민·민족의 힘으로 국가재건의 기반을 삼으려는 의도다.
그런 면에서 최근 숨가쁘게 벌어졌던 조어도(釣魚島)를 둘러싼 중·일 갈등은 앞으로 벌어질 양국 갈등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동북아의 기본질서는 그토록 강조해온 지역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국민적 내부역량을 극대화시켜 지역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주변 강대국의 갈등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내부역량을 강화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동북아공동체에 대한 어젠더를 개발해 실현시키는 일이다. 명민한 눈으로 주변 정세를 살펴봐야 하며, 긴 시야에서 각종 지역 협력 안건을 동북아 전체의 협력으로 연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동북아지식인연대의 중간결산
이번 한국동북아지식인연대가 발간한 ‘동북아공동체를 향하여’는 격변하는 동북아의 정세 속에서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이 담보되는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 지식인들이 벌인 노력의 중간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대의 문명사적 의미(총론 4개 논문),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경제전략(3개), 동북아 통합의 정치적 고려사항(3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시민사회와 가족사회의 역할(3개), 동북아 역사인식의 공유(2개), 과학기술분야의 협력방안 도출(2개), 그리고 결론으로 이어지는 총 58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은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담론들의 풍부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결과 뒤에는 2001년 10월 총 333명의 학자가 모여 ‘동북아지식인연대’를 창설하고 다양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전개해온 노력이 숨어 있다.
“한국은 동북아의 지역협력과 공존공영의 시대를 여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해양과 대륙의 중간에서 교류와 소통의 매개자로서, 또한 다양하고 다층적인 국제적 갈등과 경쟁의 완충지로서, 그리고 선·후진 경제의 중간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한데 모여 토론과 대화의 장을 엶으로써 동북아의 새로운 시대를 위해 참여하고 연대한 결과 나온 지적 산출물인 것이다”(이상 동북아지식인연대 창립취지문).
본서의 첫 번째 특징은 그 내용이 종합적·학제적이며, 또한 상당히 성공적이라는 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인식에 이르기까지 다면적이며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한 것은 이 책이 주제로 삼고 있는 동북아공동체 이념이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정치적 통합은 경제적 상호이해관계 속에서 조정돼야만 하며, 통합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적 연대, 가족적 가치의 상호침투, 역사인식의 공유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획 단계부터 학제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시도는 상당히 성공한 듯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학제적 연구는 개별연구의 단순한 기계적 모음집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학제적 연구가 가지는 본래의 장점이 발휘되려면 개별 전문분야의 연구가 서로의 논리적 소통과정을 통해서 화학적(化學的)으로 종합돼야만 한다. 개별논문 하나하나의 우수성은 학자들 개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나, 그 논문들이 동북아공동체라는 화두 속에서 잘 조율돼 있는 것은 집필자들의 토론과 의견수렴과정이 길었음을, 또 개개 집필자들의 성실함을 나타내는 지표다.
둘째, 동북아공동체 논의가 자칫 빠지기 쉬운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세계에서 벗어나 상당히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본서의 장점이다. 동북아공동체의 총론적 필요성에 대한 강조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필진들이 동북아 통합이라는 이념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실현을 위한 논리적 치밀성과 조심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과학기술분야에서 일급연구자들이 제시한 동북아 협력의 구체적인 정책과제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논의 또는 추진되고 있는 정책들의 조감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며, 향후 정책의 실시과정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
셋째,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각 논문이 제시하고 있는 정책의 기본시점이 상당히 균형 잡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학계 일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국민국가주의 담론, 또는 탈국민국가주의 담론,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듯이 동북아의 통합과정은 개개의 행동주체에게는 상당한 리스크를 가져온다. 경제학적 용어, 구성의 오차(fallacy of composition)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전체에게 좋은 것이 개개의 주체에게 꼭 좋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왜 통합하려 하는가. 바람직한 통합이란 무엇인가. 통합실천을 위한 전술적 고려사항은 무엇인가. 동아시아 통합논의에서 점검할 것은 추상레벨에서의 통합의 당위성이 아니라 통합과정에서의 리스크를 줄이며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7000만 민초의 생물학적 안전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인간적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쾌한 정책적 방안에 대한 모색이다.
따라서 탈국민국가주의, 국민국가주의 모두 다 필요하다. 동북아공동체라는 균세(均勢)의 완성은 탈국민국가적 경향의 강화를 요구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국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자강(自彊)의 완성은 국민국가적 결집력을 힘의 원천으로 하기 때문이다. 탈국민국가주의의 적극적 실현이 이념이라면, 국민국가의 틀을 강화시켜가며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19, 20, 21세기적 코드가 집약되어 교차되고 있는 동북아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우리의 균세(均勢)와 자강(自彊) 전략 구축을 위한 지식인들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통합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 질서에 모든 국가들을 줄서기 시키는 미국의 의도도 결국은 통합이며, 이에 대응한 유럽의 실험도 통합이다. 5족협화(5族協和)를 중시했던 쑨원(孫文)의 근대중국 창설과정도 통합이며, 그것을 국시로 하며 위구르과 티베트 독립요구를 탄압하는 현 중국의 목적도 통합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전세계를 배회하는 것도 통합이며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는 것도 통합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통합이 아니라 통합의 내용인 것이다.
동북아에서 공동체적 실험이 개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마음껏 발휘시키며, 개별국가와 집단의 자존과 협력을 증대시키며, 문물과 사람과 문화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책은 “동북아 비전은 우리나라의 생존전략이고 21세기의 어젠더이며 앞으로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는 국가적이고 시대적인 과제임을 인식하고 먼저 ‘동북아를 생각하는 것’부터,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의지를 다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566쪽)라고 결론짓는다. 실천하는 지식인 집단으로서 집필자들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