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종 때의 충신 권벌은 사화(士禍)에 얽혀 두 번이나 억울하게 파직된 선비다. 그러나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도 학문 정진에 게으르지 않았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는 그의 선비정신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권벌이 자신의 호를 그대로 따 건립한 ‘충재’. 후손들은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토론을 즐겼다.
동북쪽으로는 문수산 자락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의 백설령이 뻗어 있다. 동남쪽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정봉이 마치 활개치는 수탉의 형상으로 서 있다.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마을을 조선의 8대 명당으로 지적했다. 서쪽 산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금계포란의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 닭실마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일군의 정통 한옥이 바로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文臣) 충재(?齋) 권벌(權?·1478~1548) 선생의 종택이다. 조정에서 바른말 잘하기로 이름났던 권벌 선생은 안동 출신으로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했으나 중종 15년(1520)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된다. 그후 이 마을에 내려와 14년 동안 농토를 개간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경학에 몰두했다.
중종 28년(1533) 복직된 권벌은 1545년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으나 그해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다시 파직되고 그후 전라도 구례와 평안도 삭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명종 3년(1548) 71세로 서거(逝去)했다. 나중에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공이란 시호를 하사받았다.
어둠이 내리는 초저녁 선조들이 늘 그래왔듯이 사랑채엔 불이 켜지고 종손이 책을 읽는다. 희미한 등잔만이 형광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구자형 구조의 정침(正寢).
종택의 본채는 입구(口)자 형태로 안채와 사랑채 등 방 6개, 제사를 지내는 사당, 그리고 넓은 정원 등을 갖췄다. 사당 옆 연못에는 거북모양의 큰 바위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래서 청암정(菁巖亭)이라 이름지었다. 권벌이 도학 연구에 몰두하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지은 휴식공간이다.
거북은 물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다는데, 논에는 물이 말라도 이 못에 물이 마른 적은 없다 한다. 65세 때 이곳에 온 적 있는 퇴계 이황은 “내가 알기로는 공이 깊은 뜻을 품었는데/ 좋고 나쁜 운수가 번개처럼 지나가버렸네/ 지금 정자가 기이한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 모습일세/ 가득하게 보이는 연하는 본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가 남긴 바람이 향기로워/ 나같이 못난 사람으로 공의 거둬줌을 힘입어서/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읽으니 그 회포 한이 없어라”고 읊었다.
20대째 집안을 지켜 나가는 종손은 “고향을 지키고 집을 지켜야 선대에서 이룬 것을 지킬 수 있지요”라며, 충효세가의 자손답게 겸손히 답했다. 권벌의 숨결은 금계포란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 숨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