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 총선을 통해 17대 국회에 진입하게 된 당선자는 모두 나름대로 어려운 관문을 뚫었다.
- 이 가운데 특히 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사람들의 감회는 남다르다. 하마터면 후보등록도 못한 채 금배지의 꿈을 접어야 할 뻔했던 이들에게 3월31일부터 4월1일까지 48시간은 생(生)과 사(死)가 엇갈리는 운명의 교차로였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선대위측의 호남 물갈이 공천에 반발해 3월31일 오전 중앙선관위에서 중앙당 당인 및 대표자 직인 변경등록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있다.
조 대표는 이어 지난해 11월28일 전당대회 직전까지 당 사무총장을 지내 당무에 밝은 장재식(張在植) 의원을 급히 불렀다. 후보등록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의원회관에서 달려온 장 의원은 시계를 보더니 얼굴이 노래졌다.
오후 5시가 후보등록 마감시간인데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가기엔 빠듯한 1시간20분밖에 남지 않았던 것. 더욱이 뒤늦게 후보자가 확정되는 바람에 후보 등록에 필요한 관련 서류는 물론 ‘등록금’(후보 등록시 선관위에 제출해야 하는 기탁금)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장 의원의 난감한 표정에 최명헌(崔明憲) 사무총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 총장은 즉시 조직국에 연락해 “44명의 비례대표 후보에게 후보선정 사실을 통보하고 서류접수를 시작하라”고 지시한 뒤 국회 앞에 위치한 당사로 달려갔다.
당 조직국은 비례대표 명단이 늦게 결정된 데다 순번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비례대표 신청자들의 문의와 항의가 잇따르는 등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후보 기탁금 납부여부를 확인한 결과, 정해진 액수(1500만원)를 제대로 납부한 이는 5명에 불과했다.
이에 최 총장은 “당에서 서류를 접수한 사람은 당이 후보등록을 대행하고, 나머지 후보들은 각자 중앙선관위에 직접 가서 관련 서류를 제출토록 하라”고 지시한 뒤 장재식 김경천(金敬天) 의원과 함께 선관위로 직행했다. 이때가 4시5분.
장 의원은 사이렌이 부착된 자신의 승용차를 앞세워 선도차 역할을 하게 했다. 10여년 전에 달아놓은 사이렌이 이토록 요긴하게 쓰일 줄은 장 의원 자신도 몰랐다. 다행히 교통은 막히지 않았다.
장 의원이 숨쉴 틈도 없이 달려 선관위에 도착한 시각은 4시30분. 그러나 당 대표 직인과 명단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후 당 사무처 Y국장이 도장을 갖고 도착했다. 이번에는 비례대표 순번표가 문제였다. 수차례 휴대전화를 한 끝에 뒤따라온 당직자가 명부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선관위에 들어섰다.
장 의원은 이들과 함께 허겁지겁 후보접수 창구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탁금을 같이 내셔야 합니다’란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44명분의 기탁금 6억6000만원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장 의원은 즉시 당사에 있는 최명헌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의원 : “등록금을 빨리 보내줘야 등록을 할 것 아니냐.”-최 총장 : “최대한 서둘러 보내주겠다. 그곳(선관위)에는 어떤 은행이 있느냐.”-장 의원 : “농협이다.”-최 총장 : “그거 잘됐다. 마침 국회 구내에도 농협이 입주해 있으니까. 선관위 계좌번호를 빨리 불러달라.”
최 총장은 즉시 당 경리국장을 호출했다. 국회 본청에서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C경리국장은 최 총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을 선관위 계좌로 송금하기 위해 곧바로 농협으로 달려갔다. 이 3억원은 장 의원이 이날 선관위로 출발하기 직전 당에 빌려준 4억5000만원 중 일부였다.
민주당의 구세주 김방림
장 의원은 이날 낮 12시 무렵 최 총장으로부터 “지금 당에 돈이 1원 한 장 없으니 당장 후보등록에 필요한 기탁금이 걱정이다”는 하소연을 듣고는 친지들로부터 긴급히 도움을 받아 돈을 마련했다. 이 가운데는 조카며느리가 정기예금까지 급히 헐어 보탠 돈도 들어 있었다.
최 총장은 장 의원이 이처럼 어렵사리 구해 빌려준 4억5000만원 가운데 당장 급한 경북 7개, 대구 3개 지역구 후보들의 기탁금 2억5000만원을 지역 선관위에 대납했다. 최 총장이 경리국장에게 시켜 송금토록 한 3억원은 바로 여기서 남은 2억원과 당직자들의 수중에 있던 1억원을 합친 것이었다.
마감시간이 10분 앞으로 다가온 4시50분. 선관위 창구 앞에 선 장 의원과 당직자들은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동행했던 김방림(金芳林) 의원이 갑자기 “우선 이걸로 등록부터 하라”며 4억2000만원을 내밀었다. 3억6000만원짜리와 6000만원짜리 수표 각 1장이었다.
이 돈과 당에 납부돼 있던 5명분의 기탁금을 합쳐 4억9500만원으로 33명분의 등록이 가능했다. 당에서 마련한 3억원이 선관위 계좌로 송금된 시간은 후보등록 마감시간을 3분 넘긴 5시3분. 김 의원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민주당은 후보등록조차 못한 채 벼랑 끝으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민주당 비대위에게 김 의원은 일종의 구세주였던 셈이다.
김 의원이 선관위에 동행하게 된 과정도 아슬아슬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야당 시절부터 수십 년간 당료로 잔뼈가 굵은 김 의원은 선대위가 감행한 공천파동의 와중에서 자칫 야당 시절부터 고생을 함께해온 고참급 당료 후배들이 제대로 안배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비대위 회의장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대위에서 비례대표 14번에 배정받은 차태석(車泰錫) 당 종합민원실장은 미처 후보기탁금을 마련치 못한 상태에서 ‘기탁금 미납자 개별납부’ 방침이 내려지자 급한 김에 ‘누님, 좀 같이 갑시다’며 김 의원과 함께 선관위에 왔던 것.
장재식 의원은 나중에 “하늘이 노란데 ‘의원님, 제가 빌려드릴까요’라고 나서는 김 의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자리에 김 의원이 있었던 것은 하늘의 계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의원이 기탁금 납부와 함께 후보명부를 등록시킨 것은 정확히 마감시간 5초 전인 오후 4시59분 55초. 기적적으로 후보등록을 마친 장 의원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하지만 김 의원의 ‘구원’에도 실제 비례대표로 등록된 후보는 대상자 44명 중 26명에 불과했다. 17명이 서류미비로 접수가 거부된 데다 정오규(鄭吾奎) 부산시지부장이 지역구 출마를 위해 비례대표 후보에서 자신을 제외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비례대표 명단에 불만을 품은 일부 인사들은 선관위까지 쫓아와 당직자들에게 항의를 하는 등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에 대해 장 의원은 “전체적으로 약 20개의 고비가 있었다. 그 중 한 개만 어긋났어도 후보등록을 못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 사무총장은 이날의 소동을 계시받기라도 한 듯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내가 평소에 별로 꿈을 안 꾸는데 1일 새벽 2시쯤 집에 도착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어요. 선거 때라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한 임산부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잔디 위에 주저앉아 분만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애가 까만 흙탕물 같은 것을 뒤집어쓴 거예요. 내가 꿈에서도 ‘산모가 진통을 하다 낳아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물을 뿌리니까 얼굴이 깨끗한 사내 옥동자가 나오는 겁니다.”
예고된 사고
이날 ‘등록금 납부소동’은 근본적으로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秋美愛) 선거대책위원장간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예고된 사고’였다.
양측간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3월30일 오후 3시부터다. 임진각에서 열린 선대위 출범식 행사장 주변은 추 위원장이 박상천(朴相千) 유용태(劉容泰) 김옥두(金玉斗) 최재승(崔在昇) 의원 등 호남 중진 4명에 대해 공천을 취소키로 결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혁공천’ 파동의 막이 올랐던 것.
이에 행사장에 참석했던 유용태 의원의 서울 동작을 지구당원들은 공천취소에 불만을 품고 선대위 당직자가 갖고 있던 서울시지부 공천장을 현장에서 탈취, 들고 튀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추 위원장은 최인호(崔仁虎) 대변인을 통해 4명의 공천취소 명단과 후임자 명단을 공식 발표하고 박상천 유용태 의원의 지역구에는 공천을 않는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를 보고받은 조 대표는 “공천취소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발끈했다. 조 대표는 특히 추 위원장이 상의도 없이 독자적으로 비례대표 선정작업에 착수할 방침을 발표하자 이날 저녁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즉각 반격에 나섰다.
국회 대표실에서 열린 비대위 첫 회의엔 최명헌 김경재(金景梓) 장재식 이윤수(李允洙) 의원과 공천취소 당사자인 김옥두 최재승 박상천 의원이 참석했다. 비대위는 최명헌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회의에서는 제일 먼저 도난당한 당 직인과 당대표 직인에 대한 대책문제가 논의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낮 독자적으로 공천취소 및 신임 공천후보 발표 등을 감행한 선대위측이 비례대표 공천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당 사무처의 S국장을 통해 비례대표 공천장에 찍을 당 직인, 대표 직인, 당회계책임자의 도장까지 ‘싹쓸이’해 잠적했기 때문이다.
난감해진 조 대표와 비대위측은 대책을 논의한 끝에 모 당직자의 친형이 인장업을 한다는 점에 착안, 부랴부랴 새로 직인을 만들기로 하고 제작을 의뢰했다. 새 직인이 완성된 것은 3월31일 새벽 2시45분쯤.
이에 앞서 조 대표는 비대위원들과 협의 끝에 이튿날인 31일 선관위에 직접 가기로 했다. 대표가 직접 가서 직인 변경신고를 해야 다른 시비가 없을 것이라는 비대위원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31일 오전 선관위에 나타난 조 대표는 “이전의 인장으로 발급된 (지역구) 공천장은 인정하되 비례대표는 변경된 인장으로 공천하겠다”며 비례대표 공천권의 독자적 행사 방침을 분명히 했다.
선대위는 이날 오전 10시40분쯤 손봉숙(孫鳳淑)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을 1번, 김종인(金鍾仁)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2번으로 하는 비례대표후보 40명의 리스트를 발표했다. 그러자 비대위는 이승희(李承姬) 대변인을 통해 선대위측 비례대표 명단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오후 6시20분쯤 선관위는 공천권에 관한 양측의 엇갈리는 주장과 관련, “조 대표의 직인변경은 효력이 있다”며 조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시각 조 대표는 추 위원장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한 당에서 두 개의 비례대표 명부를 선관위에 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단일명부 작성을 설득키 위한 것이었다. 김경재 의원이 밀사로 나섰다.
그러나 추 위원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작심하고 감행한 ‘공천개혁’이 좌절돼 추 위원장의 상심이 컸던 것이다.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됐다. 다음날인 4월1일 오전까지도 추 위원장은 연락이 없었다.
조 대표는 오후 2시쯤 독자적으로 비례대표후보 명부 작성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등록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공개리에 진행된 회의에서 조 대표는 상위 순번은 되도록 추 위원장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 한다. 일부 비대위원들은 당초 서울 성북을 출마를 자원했던 1번 손봉숙 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에 대해 ‘지역구 공천자의 비례대표 배제’ 원칙을 내세우며 배제하자는 의견도 제시했으나 조 대표가 설득, 원안 고수로 정리됐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2번 김종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4번 김홍일 의원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3번이던 김강자(金康子) 전 종암경찰서장은 ‘출신별 위계를 감안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대두돼 7번으로 밀리고 차관급인 청소년보호위원장 출신의 이승희 대변인이 전격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조 대표와 추 위원장의 공천갈등 파동에서 철저히 조 대표 쪽에 섰던 이 대변인은 추 위원장측 선대위의 비례대표 명단에서는 아예 빠져 있었으나 조 대표가 주도하는 비대위에서는 ‘일등공신’ 예우를 받은 셈이다.
반면 경기 안산상록을 지역구에 공천됐다가 선대위 대변인에 전격 발탁돼 ‘개혁공천’ 사실을 발표하고 자신도 비례대표 8번을 배정받으며 급부상했던 최인호 변호사는 ‘괘씸죄’가 적용돼 비대위의 비례대표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또 박준영 전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선대위가 김옥두 의원의 공천을 전격취소하고 그 지역구인 장흥-영암의 새 후보로 공천하면서 선거대책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도록 했으나 비대위가 공천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지역구 공천도 인정받지 못하고 비례대표 후보도 받지 못하는 ‘오리알’ 신세가 됐다.
명패 깨지고, 바지 찢기고
비대위의 한 핵심관계자는 “재정적 어려움을 고려해 기업인들을 넣자는 의견도 제시됐으나 조 대표는 ‘우리가 깨끗한 정당을 지향하면서 돈을 보고 공천한다면 ‘클린정당’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겠느냐. 어렵더라도 그대로 가자’며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일부 인사들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비공개회의가 열리고 있던 국회 대표실로 찾아와 소동을 피우며 공천에 대한 불만을 거칠게 표현했다고 비대위의 한 참석자는 증언했다.
“모 전직의원과 당의 한 부위원장은 회의장에 나타나 욕설을 퍼부으며 ‘서류를 불태워 후보신청을 못하게 만들어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조 대표의 명패가 깨지고, 최명헌 사무총장은 양복바지가 찢기고 의자와 탁자의 다리가 부러졌다.”
최명헌 사무총장이 ‘나도 그만둔 사람이지만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해 겨우 상황을 수습했다. 최 총장은 이에 대해 “마침 기자들이 낮 12시쯤 식사를 하러 가서 다행이었지, 만일 지켜보는 기자가 있었다면 난동의 현장은 쉽게 진정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