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니 부통령, CIA 찾아가 알 카에다보다 이라크에 관심 보여
- 월포위츠 부국방, “빈 라덴 능력을 과대평가 말라”
- 라이스 보좌관, 알 카에다 잘 몰라
- 부시, “국제법학자가 뭐라든 상관없어. 그자들 엉덩이를 차야 해”
- 럼스펠드 국방, “아프간은 폭격할 게 없으니 이라크 치자”
- 부시, “이라크에 미사일만 쏘지 말고 후세인 전복 검토해야”
- “9·11 후 이라크 침공은 진주만 공습 후 멕시코 치는 꼴”
부시 행정부 핵심실세들에 밀려 2003년 3월 백악관을 떠났던 클라크는 최근 ‘모든 적에 맞서서(Against all Enemies)’란 책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책은 클라크의 직속상관이었던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비롯해 체니 부통령, 펜타곤의 양두마차인 럼스펠드와 월포위츠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폭발성을 지녔다. 서점에서 책이 동나는 바람에 독자들이 헛걸음을 할 정도로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클라크는 이 책에서 “부시 행정부의 테러대책이 미온적이어서 9·11을 당했다”며 그와 관련된 비화들을 털어놓았다.
클라크 폭로의 요지는 ▲자신이 거듭 알 카에다 테러위험을 경고했지만 부시 행정부 실세들이 무시했고 ▲오사마 빈 라덴보다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더 큰 관심을 보였으며 ▲9·11 테러가 터진 다음에도 빈 라덴을 비호하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격보다는 후세인 정권 전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클라크는 “부시의 핵심측근들이 9·11 전 빈 라덴과 알 카에다 문제를 다루자는 자신의 건의를 별것 아닌 양 깔아뭉개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폭로는 ‘전시 대통령(war time president)’임을 자처하며 전쟁내각을 꾸려가면서 재선고지를 노리는 부시에게 큰 타격이 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뒤 럼스펠드 국방, 파월 국무,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이 잇달아 미 언론매체에 등장해 클라크를 매도하고 부시를 옹호하고 나선 것도 그런 까닭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9·11 관련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클라크의 폭로가 편파적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간 전례가 없다”며 버티던 라이스가 지난 4월8일 증언대에 서서 3시간 동안 주고받은 문답도 사실상 클라크의 폭로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라이스는 정보기관들 사이에 정보교환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이 있었음을 핑계삼아, “9·11을 막을 은빛 탄환(silver bullet)은 없었다”는 주장을 펴며 9·11을 막지 못한 책임이 주군(主君)인 부시에게 쏟아지는 것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9·11에 책임을 져야 할 부시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테러전쟁의 초점을 흐렸다. 그런 부시가 재선에 나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부시를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다. 책의 주요내용을 살펴본다.-역자》
2001년 1월20일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나는 백악관 테러담당(counterterrorism) 조정관 자격으로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에게 브리핑을 했다. 나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알 카에다는 우리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는 매우 능력이 뛰어난 자로, 미국 안에 세포조직을 두고 미 본토를 겨냥한 큰 테러 사건을 계획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경고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체니는 언제나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 뒤로는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체니는 “내가 직접 CIA로 가서 알 카에다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일이었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알 카에다 위협을 심각하게 여기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빈 라덴에 대해 토론하는지 모르겠어”
체니 부통령은 그 뒤 CIA 본부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방문 초점은 대개 알 카에다가 아니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체제였다. CIA의 중간 간부들과 분석가들은 “체니 부통령이 제기하는 이라크 위협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분석 방향이 알 카에다가 아니라 이라크 쪽으로 조정돼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였다.
분명한 사실은 부시의 공화당 인맥이 백악관을 접수했을 무렵, 체니가 알 카에다 위협을 둘러싼 나의 경고를 똑똑히 들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라이스 안보보좌관이 주재하는 국가안보위(NSC) 회의에서 알 카에다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비책을 세우도록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매번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가 9·11 전 알 카에다 문제를 다루자는 자신의 건의를 무시해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하는 리처드 클라크 전 백악관 테러담당조정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카에다가 오사마 빈 라덴의 개인조직인 것으로 여기지만, 알 카에다는 그 이상의 조직입니다. 전세계 50개국에 세포조직을 거느리고 있고, 미국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이스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백악관 테러담당조정관인 내 직급을 한 단계 낮춰 장관급 회의(Principals Committee)에 참석할 수 없도록 했다. 부(副)장관과 차관급 회의(Deputies Committee)에만 참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게 “현재의 백악관 테러담당 직원들과 함께 계속 일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지 1주일도 안 돼 나는 라이스 보좌관에게 알 카에다 위협이 임박했다며 장관급 회의에서 이를 검토해줄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라이스는 내게 “부장관-차관급 회의에서 알 카에다 문제를 먼저 다루세요. 거기서 구체적인 윤곽이 잡히기 전까지는 장관급 회의에서 논의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는 곧 부시 행정부 고위선에서 알 카에다 위협을 제대로 논의하기까지는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2001년 2~3월에는 부장관-차관급회의에서 알 카에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일정을 잡지 못했다. 4월 들어 백악관 상황실에서 겨우 논의 모임을 열었지만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백악관 안보부(副)보좌관인 스티브 헤이들리가 내게 브리핑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곧바로 요점부터 말했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을 압박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프간 북부에서 그들과 맞서고 있는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의 무장을 강화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아울러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알 카에다 지도부를 겨냥, 무인항공기 프리데이터(Predator)를 띄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월포위츠 국방부(副)장관은 안절부절못하며 조바심을 내더니 급기야 얼굴을 찌푸렸다. 월포위츠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헤이들리 부보좌관이 그에게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도대체 왜 우리가 여기서 오사마 빈 라덴이란 인간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힘을 주듯 또박또박 월포위츠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끌고 있는 알 카에다란 전세계적인 테러 조직망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알 카에다는 머지않아 미국에서 심각한 테러를 벌일 것으로 보이기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요.”
그러자 월포위츠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헤이들리에게 말했다. “글쎄, 미국을 위협하는 다른 세력들도 있지요. 이를테면 이라크 테러라든가.” 그래서 나는 월포위츠에게 반론을 폈다. “폴, 그렇지 않아요. (제1차 걸프전쟁이 마무리된 뒤인) 1993년 이래로 나는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를 이라크가 배후 지원했다는 정보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CIA나 FBI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내 말이 맞지요, 존?”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존 맥래플린 CIA 부국장은 나와 펜타곤의 2인자(월포위츠 부장관) 사이에 벌어지는 입씨름에 끼여들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짧게 대꾸했다. “맞아요. 우리는 이라크가 미국을 겨냥한 테러 위협을 적극적으로 뒤에서 부추긴다는 어떤 증거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월포위츠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다음과 같이 고집을 부렸다.
“리처드, 당신은 오사마 빈 라덴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요. 배후에 테러지원국이 없다면 그는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 CIA나 FBI가 테러 지원 관련여부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해선 안 되지요. 알 카에다는 혼자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으며 이라크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게 틀림없어요. 우린 사담 후세인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테러를 잡아내야 해요.”
월포위츠의 억지와 아집
월포위츠는 1993년 이후 이라크를 배후에 둔 어떠한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나와 CIA의 분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11 테러 후에도 월포위츠는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런 억지주장을 들으면서 나는 그가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의 배후는 이라크”라는 로리 마일로이의 엉터리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미 신보수주의 네오콘 집단인 미국기업협회 회원이자 그녀 자신이 네오콘 이론가인 마일로이는 지난 2000년 펴낸 ‘사담 후세인의 끝나지 않은 대미전쟁’이란 책에서, 1993년 사건의 배후에 사담 후세인이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미 정보기관의 오랜 조사 결과, 이라크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역자).
회의장 분위기가 너무 뜨거워진다고 느꼈지만, 나는 내친김에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알 카에다는 미국을 강타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또한 알 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정권을 무너뜨리고 급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신성국가를 세운 다음 이교도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어요. 알 카에다는 그런 계획들을 이미 문서로 발표했어요. 마치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훨씬 전에 쓴 ‘나의 투쟁’에서 장래의 계획을 밝힌 것처럼 말입니다(오사마 빈 라덴이 발표한 문건들 가운데 ‘빈 라덴 서한: 전쟁 선언’(1996년)과 ‘유대인과 십자군에 저항하는 세계이슬람전선의 성전’(1998년)이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문건에 따르면 시오니즘(이스라엘)과 십자군(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국가)의 연합세력이 회교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다면서 이들 이교도들에 맞서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역자).”
그러자 유대인인 월포위츠가 발끈했다.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히틀러와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테러리스트(오사마 빈 라덴)를 견주지 말아요!” 이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견주자는 게 아닙니다. 히틀러처럼 빈 라덴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미리 말했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그걸 무시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 리처드 아미티지 부국무가 나를 지원사격하는 발언을 하며 끼여들었다. “리처드 말이 옳아요. 우린 알 카에다가 중대한 위협이고, 따라서 우선적으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예전에 내가 콜린 파월 국무에게 브리핑했던 효과가 나타난 셈이었다.
수차례 테러 경고 외면
여러 해 동안 조지 테닛 CIA 국장은 테러위협에 관한 믿을 만한 첩보나 정보가 들어오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알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CIA 전문가들과 함께 그런 보고서들을 검토했다. 가끔씩 그들은 “그 정보보고는 잘못됐어요. 확인해보니 사실이 아니더군요”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2001년 들어 테닛 국장은 내게 더 자주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입수하는 테러관련 정보도 전보다 더 정확해졌다. 알 카에다가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는 더욱 많이 들어왔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정보기관의 활동으로 알 카에다 세포조직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중동 바레인에 있는 미 해군기지를 공격해올 것이란 정보를 듣고, 내가 직접 지중해에 떠 있는 한 요트로 전화를 걸어 바레인 왕세자에게 협조를 요청한 적도 있다.
2001년 6월말 테닛 국장과 나는 “뭔가 심각한 테러사건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테닛 국장은 “순전히 내 육감이지만, 알 카에다 그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이번엔 아주 큰일이 터질 것 같은데”라고 걱정했다. 그 누구도 테닛 국장만큼 알 카에다 문제로 속을 끓인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런 테닛조차도 CIA 요원들로 하여금 아프간의 알 카에다 심장부를 파고들도록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CIA의 한 정보분석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알 카에다 테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알 카에다는 미국의 심장부를 노리고 있었다.
앞서 월포위츠 부국방과의 입씨름이 상징하듯, 테러대책을 논의하는 부장관-차관급 연석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보다 결정권이 강한 관련 장관급회의가 열린 것은 9·11 테러 딱 1주일 전인 2001년 9월4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테닛 CIA 국장과 나는 “알 카에다 위협이 매우 심각하고 머지않아 수백 명의 미국인들이 테러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그런 판단이 잘못됐다고 토를 달지 않았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파키스탄 무샤라프 정권에 압력을 넣어 아프간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에 관한 한 파키스탄이 우리 편에 서도록 만들겠다”는 공격적인 전략을 밝힌 후 “그러려면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텐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재정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회의 내내 딴전을 피우는 모습이었다. 그는 부하인 월포위츠 부국방과 마찬가지로 “테러대책에 관한 한 미국은 알 카에다보다는 이라크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9·11의 비극은 한 걸음씩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 동원할 것”
2001년 9월11일 아침 나는 백악관에서 세 블록 떨어진 로널드 레이건 빌딩에서 열린 한 회의에 참석중이었다. 나와 함께 백악관 대(對)테러 팀에서 일하는 여직원 리사 고든해저티가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부딪혔어요. 지금껏 아는 소식은 그것뿐이고, 더 나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나는 그 놀라운 뉴스를 듣는 즉시 “CSG 비상을 걸어! 5분 안에 백악관으로 들어갈게”라고 말했다(CSG란 Counter-terrorism Security Group의 줄임말로, 미 연방정부의 대테러 관련 기관장들이 비디오 화상(畵像)으로 현안을 조율하는 협의기구를 가리킨다-역자). 지난 1992년부터 나는 이 CSG 모임을 주관해왔었다. 차를 몰고 백악관 첫 번째 문에 들어섰을 때 리사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방금 전에 (세계무역센터) 두 번째 빌딩에도 비행기가 부딪혔어요.”
“9·11 테러의 배후는 이라크이며 미국은 알 카에다뿐 아니라 이라크에 대해서도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럼스펠드 국방(왼쪽)과 월포위츠 부국방.
라이스가 내게 말했다. “당신은 위기 관리인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봐요.” 9·11 테러 석 달 전 이미 나는 그녀에게 테러공격이 일어났을 경우 점검해야 할 사항들이 적힌 목록을 건네준 바 있다. 그러면서 “큰 테러사건이 터질 조짐이 보이며, 그럴 경우에 대비해 우리가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우리는 위기관리를 위해 먼저 각 부처의 고위관리들을 연결하는 보안 전화망을 짜야 합니다.” 체니 부통령이 “그렇게 하시오”라고 짧게 말했다. 라이스 보좌관이 “경호팀에선 우리더러 지하 대피소로 내려가라고 말합디다”라고 덧붙였다. 평상시 부통령에겐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는데, 방을 나오면서 보니 그새 8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긴급작전본부(Presidential Emergency Operations Center, 약칭 PEOC)를 백악관 동관 지하벙커로 옮길 채비를 하고 있었다. 9·11 당일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주에 있었다.
백악관 서관 지하층에 상황실이 있고, 그 맞은편에 보안 비디오 화상(畵像) 회의실이 있다. 회의실에 들어설 무렵, 부시 행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과 조지 테닛 CIA 국장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여러 명의 각료급 인사들이 출장중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페루에 출장중인 콜린 파월 국무를 대신해 리처드 아미티지 부국무가 백악관으로 들어왔고, 9·11 사건 당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던 휴 셀튼 합참의장을 대신해 리처드 마이어스 공군대장이 참석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날 오후 7시 대통령전용기(Air Force One)를 타고 워싱턴 부근 앤드류공군기지에 내렸다. 그리고 전용 헬기로 갈아타고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워싱턴 상공에는 F-15기와 F-16기들이 날며 대통령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 8시30분 부시는 대통령집무실에서 “우리는 테러분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을 한패로 보겠다”는 내용의 대국민연설을 했다. 그 뒤 곧 백악관 지하 벙커로 내려가 국가안보회의(NSC) 전체회의를 열었다. 그는 결의에 찬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린 지금 전쟁중이란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길 바랍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떤 수단이라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장애물은 다 치워버리고.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가 들어도 괜찮아요.”
부시는 내게 “다음으로 테러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큰 목표물들을 확인하고, 방비책을 세우시오”라고 지시했다. 회의 뒷부분에 럼스펠드 국방이 “일반적으로 한 국가가 무력을 사용할 경우, 예상되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보복 차원의 공격은 국제법에서 금지하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시는 아주 흥분한 말투로 “아니야(No!)”라고 고함을 쳤다. 가뜩이나 좁은 회의실이 울릴 정도였다. “나는 국제법학자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 않겠어. 우리는 그 녀석들(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엉덩이를 차줘야 해!”
백악관에서 잇달아 열리는 회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안들이 검토될 것으로 내다봤다. 테러공격이 또 일어난다면 어떤 형태의 테러가 될지, 미국이 취약한 부분은 어떤 것들인지, 짧은 시일 안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은 무엇인지….
그렇지만 막상 회의 주제는 이라크였다. 알 카에다를 처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주제를 논의한다는 게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럼스펠드 국방과 월포위츠 부국방은 자신들의 관심사인 이라크 침공에 9·11이란 국가적 비극을 이용하려 들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아,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부시 행정부 출범 때부터, 아니 훨씬 전부터 그들은 이라크 침공을 밀어붙여왔었다(월포위츠는 1991년 제1차 걸프전쟁 당시 시니어 부시 행정부의 국방부 서열 3위인 정책담당차관으로서 “이번 전쟁의 목표에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 것뿐 아니라 사담 후세인 체제를 전복하는 게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역자).
펜타곤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은 “럼스펠드와 월포위츠가 하는 말에는 2002년 들어 어느 적당한 시점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풀이했다. 12번째 아침회의에서 펜타곤이 내건 주제는 이미 알 카에다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CIA는 알 카에다가 9·11 테러공격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밝혔지만, 럼스펠드의 부관인 월포위츠를 설득하진 못했다. 월포위츠 부국방은 “9·11 테러공격은 한 테러집단이 벌이기엔 너무나 정교하게 이뤄진 만큼 이라크가 국가 차원에서 테러분자들을 뒤에서 지원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월포위츠, “후세인이 9·11 테러 배후”
9·11 테러 다음날 회의에서 럼스펠드 국방은 “미국의 대응을 알 카에다뿐 아니라 이라크로 확대하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파월 국무는 럼스펠드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지금 우린 알 카에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원군(援軍)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놓이면서, 파월 국무와 아미티지 부국무가 고맙게 느껴졌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파월 국무에게 그 동안 불편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럼스펠드 국방과 월포위츠 부국방이 이라크 배후 얘길 자꾸 꺼내고 있지만, 알 카에다로부터 테러공격을 받고 나서 이라크를 공격한다는 것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는데 멕시코를 침공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파월 국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닙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날 오후 럼스펠드 국방은 이렇게 불평을 터뜨렸다. “아프간에는 딱히 폭격을 할 데가 마땅치 않아요. 보다 뚜렷한 목표물들이 있는 이라크 공습을 고려해야 합니다.” 처음에 나는 럼스펠드가 농담을 하고 있거니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진지했다.
부시 대통령도 럼스펠드가 이라크 공습에 대해 말할 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는 “이라크에 크루즈 미사일을 쏘는 데 그치지 말고 후세인 정권 전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나섰다. 그 같은 발언은 럼스펠드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다는 것을 뜻했다. 후세인 정권 전복 이야기가 자꾸 나오자, 합참의장 휴 셀튼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려면 대규모 병력이 투입돼야 하는데, 병력 준비에만 여러 달이 걸립니다.”
결국 13번째 열린 대책회의도 오락가락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가 우리의 적인가. 지구상의 모든 테러조직을 겨냥할 것인가, 아니면 알 카에다에 과녁을 맞출 것인가. 모든 테러조직에 맞서 싸운다면, 남미 콜롬비아의 밀림 속에 근거지를 둔 반정부 게릴라 병력들도 공격 대상에 드는 것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초점이 분명해졌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알 카에다와 탈레반을 공격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첫 단계라는 일종의 타협적인 공감대가 이뤄졌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각료들도 알 카에다 잘 몰랐다”
많은 미국인들은 9·11 테러가 일어날 무렵까지 알 카에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2001년 1월 내가 알 카에다에 대해 브리핑을 했을 때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도 대부분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회의가 열리지 않는 틈을 이용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과 같이 메모를 했다. “누가 9·11 테러공격을 했나? 왜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는가? 우리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미국 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나는 ‘알 카에다가 우리 미국인들이 즐기는 자유를 증오하고 있고 이슬람 종교를 왜곡하고 있다’는 내용과 ‘그렇다 해도 우리 미국은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내용의 메모를 했다. 그런 뒤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책임자인 존 깁슨에게 그 메모를 보냈다.
한편 나는 부관인 테러담당부조정관 로저 크레시와 함께 알 카에다 문제에 대한 ‘국가안보에 관한 대통령령(National Security Presidential Directive, 약칭 NSPD)’ 초안을 다듬었다. 그 초안은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에게 근거지를 제공해왔던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맞서 오랫동안 싸워오던 북부동맹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공식화하는 내용이었다(9·11 뒤 아프간전쟁에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CIA가 아프간 공작에 들인 돈은 7000만달러에 이른다. 야전병원을 짓는 데도 들어갔겠지만, 대부분은 아프간 군벌들과 탈레반 회유공작에 쓰여졌다-역자).
리사 고든해저티와 함께 우리는 앞으로 있을 테러공격에 취약함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주요 시설물들에 대한 목록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관련 행정부서들에게 방어대책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폭발성이 강한 위험물질을 실은 철도차량들은 주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다니도록 조치했다. 살충제를 뿌리는 경비행기도 철저히 감독하도록 조치해 이상 유무를 조사관으로부터 확인받은 다음에야 공중비행을 하도록 했다. 혹시라도 테러분자들이 탈취해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특수보안요원들이 통신요충지, 화학제재공장,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등에 파견됐다.
조지 테닛 CIA 국장과 코퍼 블랙 CIA 대(對)테러팀장은 우방국 정보기관들로부터 업무상 협조를 구하랴, 아프가니스탄에 CIA 요원들을 보내랴 바삐 움직였다. 콜린 파월 국무와 리처드 아미티지 부국무는 파키스탄 실력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을 설득, 알 카에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미국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9·11 전까지만 해도 무샤라프 장군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왔었다(9·11 이틀 후 파월 국무는 무샤라프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장군으로서 파키스탄 장군에게 부탁합니다. 우리는 함께 싸울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요청했다. 협조 대가로 무샤라프는 미국의 경제지원을 요구했다-역자).
9월12일 저녁 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화상 회의장을 나와 상황실로 갔다. 부시 대통령이 혼자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미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부시는 우리들을 보고는 손을 잡더니 회의실 문을 닫아걸며 이렇게 말했다.
“자, 다들 나 좀 봅시다. 처리할 일들이 많은 줄은 알고 있지만,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걸 빨리 좀 알아내주었으면 해요. 뭐냐 하면 사담 후세인이 그 짓(9·11 테러 공격)을 했는지, 그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지 조사해보자는 얘기지요.”
럼스펠드 국방이 이라크 공격 얘기를 했을 때 믿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부시 대통령이 바로 내 눈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9·11은 알 카에다가 저지른 짓입니다.” “알아요. 나도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사담 후세인이 연루됐는지 알아봐달라는 거예요. 어떤 작은 단서라도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지.” 그 같은 부시의 말에 나는 되도록 공손하게 대꾸하려고 노력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시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그렇지만 곧 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대통령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알 카에다가 어떤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는가를 조사했지만 이라크와는 아무 관련성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알 카에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국가는 이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등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이라크를 조사해보라고 말했잖아. 사담 후세인 말이야”라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지고는 자리를 떴다. 리사 고든해저티가 깜짝 놀란 얼굴로 멀어져가는 부시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 직속부하 폴 쿠르츠가 상황실 쪽으로 오다가 부시와 마주친 뒤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표정이 심상찮은 것을 눈치챈 그가 말했다. “어이구,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리사는 조금 전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월포위츠 부국방이 대통령을 그런 쪽으로 몰아간 게 틀림없어요.”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는 대통령이지 테러전문가가 아냐. 또 대통령으로서 우리에게 다시 조사해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폴, 우리 다시 한번 조사해보자고.”
폴은 내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이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특별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는 바로 다음날 이라크와 알 카에다와의 관련을 조사하는 팀을 짜고, 첫모임을 이끌었다. 그 뒤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올렸지만, 부시가 그것을 읽어보았으리라고 여겨지는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는가
그 다음주 부시 대통령은 상하원 의원 모두가 참석한 의회에서 아주 멋진 연설을 했다. 망설이거나 어색한 부분이라곤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9·11 테러가 일어난 당일 부시는 긴급 대국민연설에서 단어를 틀리게 말하는 등 매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역자). 그 연설 초안은 부시의 오랜 측근인 카렌 휴가 그녀의 낡은 타이프라이터로 작성한 것이다. 그 연설에는 내가 작성해 넘겨주었던 메모 내용인 ‘누가 우리의 적이고, 왜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는가’ 등이 들어있었다.
그 뒤 3주 동안 날마다 회의가 이어졌다. 백악관 국방정책특보인 프랭클린 밀러와 나는 작전조정위원회를 공동으로 주재하면서, 알 카에다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짜나갔다. 래리 톰슨 장군(검찰부총장)이 이끄는 국내전략배치위원회는 또다시 미 본토를 겨냥해 테러가 일어날 경우 취약한 곳을 찾아내 대책을 세우는 작업에 매달렸다. 부시 행정부의 각료들과 관리들은 비상 경계근무 태세였다. 그러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지냈다. 테러 특공대가 백악관과 뉴욕 증권거래소가 있는 월가(街)를 폭탄 테러할지도 모른다는 보고서들이 나돌았지만, 엉터리로 드러났다. 워싱턴의 레이건 공항은 여전히 폐쇄된 상태였다. 비행기가 납치돼 백악관으로 향할지도 몰라 주의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우리는 9·11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과 비극에 대해 생각했다. 9·11 당일 백악관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은 유나이티드 항공사 소속 납치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 교외에 추락한 까닭을 알고 있다. 승객들이 영웅적으로 테러범들과 맞섰다 죽었기에 백악관이 공격을 당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하게 일에만 매달렸다. 9·11 후 우리는 백악관에서 하루 18시간 이상 일했다.
나의 친구인 존 오닐(FBI 간부 출신으로 뉴욕 세계무역센터 보안책임자)의 시신이 현장에서 발견돼 고향인 애틀랜틱 시티에서 장례식을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말해 반나절 동안 일손을 놓고 그곳을 다녀왔다. 장례가 끝나고 존의 관이 땅에 묻히자, 나는 감정이 북받쳐올라 엉엉 울었다. 너무나 슬펐다. 왜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는가? 왜 우리는 9·11 테러를 막지 못했나? 앞으로 그런 소름끼치는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시 나는 언젠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