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역사에서 대마도는 무엇인가.
- 일본인의 역사에서 대마도는 무엇인가.
- 일본에 속해 있으되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 일본 방송은 하나밖에 안 나오지만 한국 방송은 난무하는 섬. 양국 사이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며 화평과 폭력을 매개하던 섬. 면암 최익현부터 왜구에 납치된 김개동에 이르기까지, 대마도 곳곳에 남아 있는 조선 백성들의 흔적을 찾아봤다.

대마도 최북단에서 본 대한해협. 자위대 레이더 기지 너머로 부산과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말 풍운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친 의사(義士)의 이름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로 유배되어 거기에서 단식 끝에 숨져간 꼬장꼬장한 유학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2004년 4월부터 시로 승격했다)에 있다. 섬에서 가장 오래고 큰 항구로, 이 섬의 ‘수도’라고 할 만한 이즈하라쇼(嚴原町)항의 절 슈젠지(修善寺)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7년 그가 순국했을 때 장례를 치른 절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운 것이다. 2005년 1월21일 필자가 이 절에 들렀을 때 비 앞에는 누가 바친 것인지 모를 몇 송이 꽃이 놓여 있었다. 비문도 새겨져 있었다.
‘최익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에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 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여기에서 순국하셨다. 슈젠지 창건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관여한 것으로 전해져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遺體)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자세히 보니 비문 한 켠에 일해재단이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촛불 훔쳐 성경 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말썽 많던 5공화국의 일해재단이 한말 열사의 위령비 건립에 힘을 보탰다는 게 흥미롭다.
찾을 수 없는 죽음의 흔적
최익현이 대마도에 끌려온 것은 1906년 8월28일. 그는 이즈하라 언덕 위의 당시 대마도 수비대 영내에 갇혔다. 그리고 1907년 1월1일 숨을 거뒀다. 지금 그 자리엔 자위대 경비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이진희 와코대 명예교수와 함께 경비대를 찾아갔다. 혹시 영내 어딘가에 최익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영창이 있던 터가 남아 있거나 아니면 그의 죽음의 흔적을 기록한 비석이라도 있지 않을까….
초소의 경비병은 친절했다. 역시 준(準)전시상태인 한반도 군대와는 달랐다. 성큼 문을 열어주면서 우리가 타고간 렌터카가 진입할 수 있게 안내했다. 경비병의 명찰을 본 이 교수가 한마디를 건넨다.
“성씨가 아비루(阿比留)군요. 아비루는 대마도의 터주에 해당하는 오랜 내력의 성씨지요. 에도시대 대마도를 주름잡은 소(宗)씨 일가가 아비루씨를 제압할 때까지 이곳을 지배했지요. 소씨 일파는 원래 규슈에서 들어와 대마도를 장악했습니다.”

이즈하라쇼 슈젠지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 기념비.
“글쎄요. 수비대 시절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요, 당시 감옥 터가 어디였는지도 명확치 않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누가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 알 수 없고요. 최익현이 누구인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다만 옛 수비대의 외곽 석축을 보실 수는 있습니다.”
홍보담당 장교의 말이다. 다시 부대 밖으로 나왔다. 석축 앞에 비석이 하나 서있다.
‘1811년, 조선통신사에 대한 막부 접대의 지(地)’
17~18세기 무렵 에도(도쿄)를 다녀온 조선통신사는 300~500명에 이르는 대형 방문단이었다. 방문단을 이끄는 정사와 부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산사(西山寺·슈젠지의 맞은편)에 묵었다. 깃발을 들고 풍악을 울리는 일 등을 맡은 실무그룹은 이곳에 묵었던 것이다. 에도시대부터 관용으로 쓰이던 이 터가 개항무렵 군대주둔지가 되고, 그 군부대 영내에 최익현 일행이 투옥됐던 것이다.
‘천동설(天動說)적’ 애국애족
최익현은 1833년 12월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집안에서는 ‘기남(奇男)’으로 불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가 네 살 무렵부터 집안이 충청도 단양으로 이사하는 등 여러 군데를 전전한다.
1846년 열네 살 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호 면암은 화서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물세 살에 갑과(甲科)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지만, 꼬장꼬장한 자세로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정치 거물을 과감히 비판해 순탄치 않았다. 서른다섯과 마흔 살에 올린 시폐(時弊)상소와 5조(條)상소에서 이러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 준열한 투쟁으로 결국 대원군이 하야하기에 이르지만, 최익현 자신도 화를 면치 못해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당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시대의 요청인 개항을 반대하고, ‘조선식의 부흥과 성공’을 꿈꿨다. 그가 왜병에 잡힐 때까지 올린 서른여섯 차례의 상소에 그러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화친을 맺으려는 적(賊)의 욕심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물화는 사치 기완(器玩)하고 공업생산품이어서 양이 무궁한데 반하여 우리의 것은 백성의 목숨이 걸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제한적입니다.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정신(심성과 풍속)은 폐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양 또한 한 해 수만에 달할 것이니, 이 나라도 부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듣다 보면 꽤나 익숙한 논리다. 요즘의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구호를 연상케 한다.
그의 열렬한 애국애족은 그런 의미에서 가히 ‘천동설(天動說)적’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게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위해 ‘돌아줘야’ 한다는 식이다. 조선이 서세동점이라는 거대한 물결의 변수가 아니라 주변정세가 조선이라는 상수(常數)를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는 것. 자기 객관화의 결여가 그의 치명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세계관과 시대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익현의 명징한 선비정신만은 참으로 깊고도 투명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 선비치고는 드문 행동파 지성이었다.
1894년 대원군이 재집권했을 때 척사론의 기수인 최익현을 산업자원부 장관 격인 공조판서에 제수하려 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러나 최익현은 뿌리쳤다. 두 해 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할 때 정부는 다시금 면암을 조정에 불렀으나 그는 응하지 않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면암은 74세의 고령에도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1906년 2월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낙안군수를 지낸 태안 출신의 임병찬(林炳瓚)을 불러 전라도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거병을 꾀했다. 두어 달 만에 의병은 113명이 됐다. 병력은 점점 늘어나고 마침내 태인읍을 접수하기에 이른다. 이어 정읍을 장악하고 난 뒤 의병부대는 800여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무장을 한 이는 2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단식과 죽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칙지가 내려졌다. 한편 옥과(전남)와 금산(충북)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좁혀왔다. 면암은 그들을 치려 했으나 척후의 보고를 들어보니 상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관군이었다. 관군과의 전투에 의병들은 고민했다. 동족끼리 죽이고 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면암은 차마 결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의병진의 해산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의병이 흩어지고 22명이 남아 면암을 호위했다. 관군은 이 기회를 틈타 공세를 취했다. 면암은 경전을 외우다 임병찬과 함께 체포됐다. 다음날 일본인 고문관 쓰나지마 고지로의 심문을 받고 다시 하루가 지난 뒤 서울로 압송됐다.
6월26일 최익현에게 감금 3년형이 선고된다. 임병찬도 감금 2년. 두 사람은 7월9일 대마도로 유배됐다. 이미 대마도 수비대 병영에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온 9명이 유배 중이었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면암의 기개는 대단했다. 야만의 나라, 좁은 섬에 갇힌 신세가 기가 막혔다. 그는 탄식하며 시를 지었다.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묻어나는 그의 한시가 전해진다.
기자(箕子)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왔거늘일본도 서양도 그 범위 안에 들거늘모르겠네,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날더러 대마도를 보게 하는지
상스러운(?) 왜적의 소굴에 갇힌 조선 선비의 굴욕감이라고나 할까….
일본 수비대장에게서 모욕을 당한 면암은 단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받아쓰게 했다.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음식은 고국에서 보낸 것으로 짓고, 일본 수비대는 경비책임만 있을 뿐’이라며 단식중단을 설득했다. 함께 갇힌 의병들도 울면서 단식중단을 권했다. 단식은 중단됐으나 74세의 노령에 심신이 매우 손상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면암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를 기리는 헌창비 앞에 선 필자. 아메노모리는 조선과 성(誠) 및 신(信)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아사가 아니라 병사라 할지라도 나라의 자주권 회복과 인민구제를 위해 몸을 던진 최익현의 진정한 가치는 달라질 게 없다”고 찬사를 보낸다(2002년 6월1일자 ‘나가사키 신문’). 폄하에 대한 재반론인 셈이다.
‘쓰시마’의 어원은 ‘두 섬’?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징검다리인 쓰시마는 ‘대마도(對馬島)’라고 적는다. 옛 중국인의 기록에는 ‘일본 열도에는 말이 없다’고 돼있다. 이를테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조(條)(통칭 왜인전)에는 ‘사람들은 작달막하고 벌거벗고 사는데, 이상하게도 말과 소와 양이 없는 나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서기 230년경의 기록이니까 지금부터 1700여년 전까지는 일본 열도에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 일본인들은 중국을 싫어하지만 옛 왜인전 기록만큼은 신주단지처럼 여기고 인용한다. 당시는 일본에 한자를 포함해 문자 자체가 없던 시대이므로 왜인전이 자신들의 유일한 거울인 것이다. 옛 중국인의 기록은 놀랍도록 섬세하다.
‘왜인 남자들은 머리에 띠를 두른다(지금도 마쓰리(축제) 때는 헝겊으로 머리를 조여 감는다). 의복은 폭이 넓고 헐렁한 천을 거의 재봉 없이 둘러써서 입는다. 남자들은 문신으로 신분을 구별한다. 기후가 온난하므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생야채를 먹고 너나없이 모두 벌거벗고 생활한다. 여자는 통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쓰는데 머리와 손 부분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민다.
일부다처제. 밥은 손으로 집어 먹고(현대 일본인도 생선초밥을 손으로 집어먹는 습관이 있다), 술을 즐겨 마신다. 장수하는 편이고 죽으면 시신을 관에 담아 열흘간 뒀다가 흙에 묻는다. 동물의 뼈를 구워 길흉을 점친다. 도둑이 없고 지체 높은 귀인을 마주치면 땅바닥에 두 손을 짚고 큰절을 올린다.’
말(馬)이 없는 일본, 그런데 왜 대마도에는 말 마(馬)자를 붙였을까. 왜인전의 관찰이 사실이라면, 서기 6세기와 660년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일본에서 군원(軍援)으로 말을 보냈다는 사실(史實)과 오차가 생긴다.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어느 시점에 일본에 말이 건너갔고 이후 길러진 말이 군사용 기마로 한반도에 수출됐을 개연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의 이름은 이런 불가사의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풀리게 될 것이다.
쓰시마의 어원이 한국어로 두 개의 섬, 즉 ‘두 섬’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작고한 재일작가 김달수씨의 주장이다. 부산이나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데, 상현(上縣)과 하현(下縣) 두개의 섬으로 보이므로 고대 이래 한반도 남해안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시마’가 한국어의 ‘섬’에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에는 일본 사람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쓰시마의 어원이 ‘두 섬’이라는 설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대마도의 지방역사가로 나가토메 히사에(永留久惠)라는 이가 있다. 일본 고고학협회와 민속학회 회원으로 대마도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나가사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향리의 교장도 지냈다. 일본의 문호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책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나카토메씨는 “쓰시마가 한국어 ‘두 섬’에서 왔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했다.
“한국에서는 쓰시마가 아니라 대마도라고 부르지 않는가. ‘對馬島’라는 한자지명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그보다 앞선 ‘일본서기’에서 대마도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른바 아테지(토착어에 한자를 붙여 읽는 이두향찰식 표기) 문화를 생각하면 나가토메씨의 반론에는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울 듯하다.
대마도에서 만나는 꿩은 영락없이 한국 꿩이다. ‘고라이(高麗) 기지’라고 부르는데 일본열도의 꿩과는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