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역사에서 대마도는 무엇인가.
- 일본인의 역사에서 대마도는 무엇인가.
- 일본에 속해 있으되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 일본 방송은 하나밖에 안 나오지만 한국 방송은 난무하는 섬. 양국 사이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며 화평과 폭력을 매개하던 섬. 면암 최익현부터 왜구에 납치된 김개동에 이르기까지, 대마도 곳곳에 남아 있는 조선 백성들의 흔적을 찾아봤다.
대마도 최북단에서 본 대한해협. 자위대 레이더 기지 너머로 부산과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말 풍운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친 의사(義士)의 이름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로 유배되어 거기에서 단식 끝에 숨져간 꼬장꼬장한 유학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2004년 4월부터 시로 승격했다)에 있다. 섬에서 가장 오래고 큰 항구로, 이 섬의 ‘수도’라고 할 만한 이즈하라쇼(嚴原町)항의 절 슈젠지(修善寺)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7년 그가 순국했을 때 장례를 치른 절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운 것이다. 2005년 1월21일 필자가 이 절에 들렀을 때 비 앞에는 누가 바친 것인지 모를 몇 송이 꽃이 놓여 있었다. 비문도 새겨져 있었다.
‘최익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에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 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여기에서 순국하셨다. 슈젠지 창건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관여한 것으로 전해져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遺體)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자세히 보니 비문 한 켠에 일해재단이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촛불 훔쳐 성경 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말썽 많던 5공화국의 일해재단이 한말 열사의 위령비 건립에 힘을 보탰다는 게 흥미롭다.
찾을 수 없는 죽음의 흔적
최익현이 대마도에 끌려온 것은 1906년 8월28일. 그는 이즈하라 언덕 위의 당시 대마도 수비대 영내에 갇혔다. 그리고 1907년 1월1일 숨을 거뒀다. 지금 그 자리엔 자위대 경비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이진희 와코대 명예교수와 함께 경비대를 찾아갔다. 혹시 영내 어딘가에 최익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영창이 있던 터가 남아 있거나 아니면 그의 죽음의 흔적을 기록한 비석이라도 있지 않을까….
초소의 경비병은 친절했다. 역시 준(準)전시상태인 한반도 군대와는 달랐다. 성큼 문을 열어주면서 우리가 타고간 렌터카가 진입할 수 있게 안내했다. 경비병의 명찰을 본 이 교수가 한마디를 건넨다.
“성씨가 아비루(阿比留)군요. 아비루는 대마도의 터주에 해당하는 오랜 내력의 성씨지요. 에도시대 대마도를 주름잡은 소(宗)씨 일가가 아비루씨를 제압할 때까지 이곳을 지배했지요. 소씨 일파는 원래 규슈에서 들어와 대마도를 장악했습니다.”
이즈하라쇼 슈젠지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 기념비.
“글쎄요. 수비대 시절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요, 당시 감옥 터가 어디였는지도 명확치 않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누가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 알 수 없고요. 최익현이 누구인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다만 옛 수비대의 외곽 석축을 보실 수는 있습니다.”
홍보담당 장교의 말이다. 다시 부대 밖으로 나왔다. 석축 앞에 비석이 하나 서있다.
‘1811년, 조선통신사에 대한 막부 접대의 지(地)’
17~18세기 무렵 에도(도쿄)를 다녀온 조선통신사는 300~500명에 이르는 대형 방문단이었다. 방문단을 이끄는 정사와 부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산사(西山寺·슈젠지의 맞은편)에 묵었다. 깃발을 들고 풍악을 울리는 일 등을 맡은 실무그룹은 이곳에 묵었던 것이다. 에도시대부터 관용으로 쓰이던 이 터가 개항무렵 군대주둔지가 되고, 그 군부대 영내에 최익현 일행이 투옥됐던 것이다.
‘천동설(天動說)적’ 애국애족
최익현은 1833년 12월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집안에서는 ‘기남(奇男)’으로 불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가 네 살 무렵부터 집안이 충청도 단양으로 이사하는 등 여러 군데를 전전한다.
1846년 열네 살 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호 면암은 화서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물세 살에 갑과(甲科)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지만, 꼬장꼬장한 자세로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정치 거물을 과감히 비판해 순탄치 않았다. 서른다섯과 마흔 살에 올린 시폐(時弊)상소와 5조(條)상소에서 이러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 준열한 투쟁으로 결국 대원군이 하야하기에 이르지만, 최익현 자신도 화를 면치 못해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당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시대의 요청인 개항을 반대하고, ‘조선식의 부흥과 성공’을 꿈꿨다. 그가 왜병에 잡힐 때까지 올린 서른여섯 차례의 상소에 그러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화친을 맺으려는 적(賊)의 욕심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물화는 사치 기완(器玩)하고 공업생산품이어서 양이 무궁한데 반하여 우리의 것은 백성의 목숨이 걸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제한적입니다.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정신(심성과 풍속)은 폐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양 또한 한 해 수만에 달할 것이니, 이 나라도 부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듣다 보면 꽤나 익숙한 논리다. 요즘의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구호를 연상케 한다.
그의 열렬한 애국애족은 그런 의미에서 가히 ‘천동설(天動說)적’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게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위해 ‘돌아줘야’ 한다는 식이다. 조선이 서세동점이라는 거대한 물결의 변수가 아니라 주변정세가 조선이라는 상수(常數)를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는 것. 자기 객관화의 결여가 그의 치명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세계관과 시대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익현의 명징한 선비정신만은 참으로 깊고도 투명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 선비치고는 드문 행동파 지성이었다.
1894년 대원군이 재집권했을 때 척사론의 기수인 최익현을 산업자원부 장관 격인 공조판서에 제수하려 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러나 최익현은 뿌리쳤다. 두 해 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할 때 정부는 다시금 면암을 조정에 불렀으나 그는 응하지 않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면암은 74세의 고령에도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1906년 2월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낙안군수를 지낸 태안 출신의 임병찬(林炳瓚)을 불러 전라도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거병을 꾀했다. 두어 달 만에 의병은 113명이 됐다. 병력은 점점 늘어나고 마침내 태인읍을 접수하기에 이른다. 이어 정읍을 장악하고 난 뒤 의병부대는 800여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무장을 한 이는 2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단식과 죽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칙지가 내려졌다. 한편 옥과(전남)와 금산(충북)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좁혀왔다. 면암은 그들을 치려 했으나 척후의 보고를 들어보니 상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관군이었다. 관군과의 전투에 의병들은 고민했다. 동족끼리 죽이고 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면암은 차마 결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의병진의 해산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의병이 흩어지고 22명이 남아 면암을 호위했다. 관군은 이 기회를 틈타 공세를 취했다. 면암은 경전을 외우다 임병찬과 함께 체포됐다. 다음날 일본인 고문관 쓰나지마 고지로의 심문을 받고 다시 하루가 지난 뒤 서울로 압송됐다.
6월26일 최익현에게 감금 3년형이 선고된다. 임병찬도 감금 2년. 두 사람은 7월9일 대마도로 유배됐다. 이미 대마도 수비대 병영에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온 9명이 유배 중이었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면암의 기개는 대단했다. 야만의 나라, 좁은 섬에 갇힌 신세가 기가 막혔다. 그는 탄식하며 시를 지었다.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묻어나는 그의 한시가 전해진다.
기자(箕子)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왔거늘일본도 서양도 그 범위 안에 들거늘모르겠네,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날더러 대마도를 보게 하는지
상스러운(?) 왜적의 소굴에 갇힌 조선 선비의 굴욕감이라고나 할까….
일본 수비대장에게서 모욕을 당한 면암은 단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받아쓰게 했다. 당황한 일본 군인들이 ‘음식은 고국에서 보낸 것으로 짓고, 일본 수비대는 경비책임만 있을 뿐’이라며 단식중단을 설득했다. 함께 갇힌 의병들도 울면서 단식중단을 권했다. 단식은 중단됐으나 74세의 노령에 심신이 매우 손상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면암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를 기리는 헌창비 앞에 선 필자. 아메노모리는 조선과 성(誠) 및 신(信)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아사가 아니라 병사라 할지라도 나라의 자주권 회복과 인민구제를 위해 몸을 던진 최익현의 진정한 가치는 달라질 게 없다”고 찬사를 보낸다(2002년 6월1일자 ‘나가사키 신문’). 폄하에 대한 재반론인 셈이다.
‘쓰시마’의 어원은 ‘두 섬’?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징검다리인 쓰시마는 ‘대마도(對馬島)’라고 적는다. 옛 중국인의 기록에는 ‘일본 열도에는 말이 없다’고 돼있다. 이를테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조(條)(통칭 왜인전)에는 ‘사람들은 작달막하고 벌거벗고 사는데, 이상하게도 말과 소와 양이 없는 나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서기 230년경의 기록이니까 지금부터 1700여년 전까지는 일본 열도에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 일본인들은 중국을 싫어하지만 옛 왜인전 기록만큼은 신주단지처럼 여기고 인용한다. 당시는 일본에 한자를 포함해 문자 자체가 없던 시대이므로 왜인전이 자신들의 유일한 거울인 것이다. 옛 중국인의 기록은 놀랍도록 섬세하다.
‘왜인 남자들은 머리에 띠를 두른다(지금도 마쓰리(축제) 때는 헝겊으로 머리를 조여 감는다). 의복은 폭이 넓고 헐렁한 천을 거의 재봉 없이 둘러써서 입는다. 남자들은 문신으로 신분을 구별한다. 기후가 온난하므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생야채를 먹고 너나없이 모두 벌거벗고 생활한다. 여자는 통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쓰는데 머리와 손 부분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민다.
일부다처제. 밥은 손으로 집어 먹고(현대 일본인도 생선초밥을 손으로 집어먹는 습관이 있다), 술을 즐겨 마신다. 장수하는 편이고 죽으면 시신을 관에 담아 열흘간 뒀다가 흙에 묻는다. 동물의 뼈를 구워 길흉을 점친다. 도둑이 없고 지체 높은 귀인을 마주치면 땅바닥에 두 손을 짚고 큰절을 올린다.’
말(馬)이 없는 일본, 그런데 왜 대마도에는 말 마(馬)자를 붙였을까. 왜인전의 관찰이 사실이라면, 서기 6세기와 660년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일본에서 군원(軍援)으로 말을 보냈다는 사실(史實)과 오차가 생긴다.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어느 시점에 일본에 말이 건너갔고 이후 길러진 말이 군사용 기마로 한반도에 수출됐을 개연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의 이름은 이런 불가사의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풀리게 될 것이다.
쓰시마의 어원이 한국어로 두 개의 섬, 즉 ‘두 섬’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작고한 재일작가 김달수씨의 주장이다. 부산이나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데, 상현(上縣)과 하현(下縣) 두개의 섬으로 보이므로 고대 이래 한반도 남해안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시마’가 한국어의 ‘섬’에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에는 일본 사람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쓰시마의 어원이 ‘두 섬’이라는 설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대마도의 지방역사가로 나가토메 히사에(永留久惠)라는 이가 있다. 일본 고고학협회와 민속학회 회원으로 대마도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나가사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향리의 교장도 지냈다. 일본의 문호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책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나카토메씨는 “쓰시마가 한국어 ‘두 섬’에서 왔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했다.
“한국에서는 쓰시마가 아니라 대마도라고 부르지 않는가. ‘對馬島’라는 한자지명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그보다 앞선 ‘일본서기’에서 대마도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른바 아테지(토착어에 한자를 붙여 읽는 이두향찰식 표기) 문화를 생각하면 나가토메씨의 반론에는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울 듯하다.
대마도에서 만나는 꿩은 영락없이 한국 꿩이다. ‘고라이(高麗) 기지’라고 부르는데 일본열도의 꿩과는 종류가 다르다. 대마도의 관광안내 책자엔 1700년경 한국에서 전래한 것이라고 쓰여 있다.
대마도에는 천연기념물인 쓰시마 산고양이와 쓰시마 사슴이 있다. 관광책자의 설명이 눈길을 끈다.
‘산고양이는 일본 본토에는 없고 대마도 야산에만 산다. 그 옛날 대마도가 아시아 대륙에 이어져 있을 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중국에 분포하고 197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사슴은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예로부터 일본 본토의 사슴과 동일종으로 여겨져왔으나 1970년 국립과학박물관의 비교조사 결과 다른 독립종으로 뿔이 50cm가 넘는 것도 있다.’
흰구름(白雲) 원추리라는 야생식물도 대마도의 자랑거리다. 관광안내 책자는 이 또한 ‘대마도와 한반도에만 분포하는 백합과의 식물이다. 여름에 꽃이 피는 이 식물은 일본 본토에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천연기념물만 살펴봐도 대마도는 지질학적으로 한반도에 가깝다는 것이 증명된다.
대마도 서부지역에는 전통적으로 바닷가의 바위를 뜯어내 지붕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건축방식이 있다. 비바람에는 강하지만 빗물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로 창고를 짓는데 쓴다.
물론 일본 우익이 알면 ‘국적(國賊)’이라고 테러를 가할 만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전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천손강림 자체가 외지에서 온 천황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음은 필자가 참석한 한 간담회에서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연설한 내용이다.
“과학에 반하는 천손강림이라는 신화는, 천황계가 열도의 원주민 가운데서 나온 게 아니라 도래인 가운데서 나온 것임을 증명한다.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동남아 섬나라에도 천손강림 신화가 있다, 일본의 신화가 이상한 게 아니다’라고 반론하지만 그 나라들 역시 ‘밖에서 건너온 자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품고 있는 위화감을 해소하고 통치상의 난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강림신화를 창조한 것에 불과하다.”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가토메씨가 규슈대학의 오카지마(岡島敬) 교수와 대담한 대목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치를 비웃으며 나눈 얘기였다. 원래 대마도는 부산을 향하고 있는 쪽이 상현(가미아가타)이고 일본열도를 향하고 있는 쪽이 하현(시모아가타)이었다. 일본에 천황중심의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메이지 무렵 지명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를 빗댄 것이었다.
“일본의 수도에 가까운 쪽이 상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메이지 이후 만들어진 지도에는 하현이 상도(上島)라고 적혀 있지요. 옛날부터 상현·하현이 있을지언정 상도·하도라는 말은 쓰시마에 없는 말인데요.”
“명백히 틀린 거지요.”
“일전에 도요(대마도 북쪽의 한 지명)에 갔는데 별칭으로 시마가시라(島頭·섬의 머리)라고 적고 있어요. 요코하마에 사는 친척이 하는 말이, 구야(狗邪·가야), 즉 한국 어디쯤에 (일본의) 중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더군요.”
대마도의 중심인 이즈하라항에는 쇼주인(長壽院)이라는 절이 있다. 경내에는 대마도가 자랑하는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가 묻혀 있다. 17세기 일본의 한반도담당 외교관이자 교육자로 부산사투리까지 구사할 정도로 한국어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교본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어도 원어민 수준을 자랑할 정도로 능통했던 보기 드문 국제파 지성이었다.
호슈는 성의(誠)와 믿음(信), 즉 성신을 지키는 외교를 주창했다. 이름하여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쇼주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앞에는 그를 기리는 비가 서있다.
성과 신은 아메노모리의 신념이요 캐치프레이즈였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1607~1811년) 12회에 걸쳐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다녀왔다. 그 길목에 자리한 대마도는 성과 신으로 두 나라의 가교역할을 자임한 곳이다.
통신사는 조선 조정의 고관에서부터 통역관, 악대, 소동(小童), 무인(武人) 및 인부에 이르기까지 300~500명에 이르는 대행렬이었다. 일행은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배를 갈아타고, 말을 갈아타고, 더러는 걷는 식으로 거의 반년이나 걸리는 길을 왕래한 것이다.
통신사 일행이 묵는 숙소에는 일본의 숱한 유학도, 문인, 묵객들이 몰려 학문과 예술의 교류가 이뤄졌다. 이들에게는 조선 선비들의 한시(漢詩) 한 수가 귀중한 보물 이상이었다. 통신사 일행이 방일을 위해 준비한 선물도 산삼을 비롯해 귀중한 것이 많았고, 정부재정에 부담을 안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이 문화사절을 맞이하는 데 조선 조정 재정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재물을 투입하는 등 거국적인 행사로 만들었다.
통신사가 열도에 닿는 첫 기항지이자 순방을 마치고 부산으로 떠나는 마지막 기항지가 바로 대마도였다. 이를 기념해 매년 8월에는 이즈하라쇼에서 아리랑 마쓰리(축제)가 열려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되고 있다.
통신사보다 한 단계 낮은 외교사절로 역관사(譯官使)가 있었다. 통신사가 국빈방문이라면 역관사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실무자 방문단에 해당한다. 요즘 외교용어로는 ‘Working Visit’이라고 할까. 도쿠가와 가문과 한성 왕실의 경조사 때에 주로 교환되곤 했다.
한반도 남단이 빤히 보이는 대마도 북단의 와니우라 항구에서 부산까지의 직선거리는 49.5km다. 항구 맞은편에 있는 우니지마(海栗島)에는 자위대의 레이더 기지가 서 있다. 맑은 날 레이더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남해안 농가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닭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와니우라의 산 언덕 위에는 한국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설화도 많다. 임진왜란 이후 우니지마에는 조선 혼령이 나타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든 조선인 남자와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조선인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면 안개가 짙게 끼고 비가 내리곤 했다는 것이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은 이즈하라의 신사(神社)에 모여 진무제를 올렸다.
혼령을 내쫓는 행사도 열었다. 우니지마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배에는 돌과 모래를 싣는다. 그리고 배에서 바다로 돌과 모래를 던지고 뿌린다. 섬쪽의 무사들은 부산을 향해 수천 발의 대포를 쏘아댄다. 주문도 외운다. “앗키 데테이케!(악귀야 물러가라!)” 그렇게 하면 혼령의 출현이 덜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 조선 양민을 살육하고 코와 귀를 베가던 그 악행을 스스로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왜병들도 요즘 이라크전에서 미국 병사들이 겪는 심리적 증후군 같은 것에 시달린 모양이다.
그 치유방식도 일본적이다. 신사에 매달리는 샤머니즘적 처방, 대포를 쏘아 귀신을 놀라게 해 쫓는다는 발상이 칼잡이들의 나라답다.
대마도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인 히타가쓰(比田勝)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맛있는 어류가 많이 잡히는 곳이다. 규슈 지방이나 대마도에서는 식당주인들이 생선회를 내놓을 때 흔히 “히타카쓰모노 데스요(히타카쓰에서 온 생선입니다)”라고 말한다. 한국 횟집에서 듣는 “자연산입니다”쯤 될까.
히타카쓰의 식당 ‘모모타로’에 들렀다. 주인인 쓰지 아키라씨는 대마도 시의회 의원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는 ‘거제도 로타리클럽’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국 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내미는 명함도 멀리 부산항 불빛이 아른거리는, 한국전망대에서 찍은 부산야경 사진을 넣고 이름을 써 넣었다. 쓰지라는 이름 위에 적힌 ‘대마도에서 본 부산야경’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라디오를 켜면 한국 주파수가 너무 많이 잡혀서 곤란해요. 일본 거라곤 하나밖에 안 들리거든요. 한국말을 알면 좋겠지만 하나도 모르는데 차를 타고 가다 라디오를 틀면 온통 한국 방송뿐이에요.”
그의 가게 마당에는 소달구지 바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이건 일본 열도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물건 아니냐”고 물었다.
“예, 물론 한국에서 건너온 거지요. 대마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썼던 것 같아요. 물론 열도에는 드물지요. 여긴 한국이 더 가까우니까…. 용사마 붐이 일기 훨씬 전부터 이곳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 친근감을 갖고 있었지요.”
약탈과 무역의 줄타기
사실 한국의 관점에서 대마도는 왜구와 밀수의 본거지였다. 왜인전의 한 구절에서 대마도의 원초적인 지정학(地政學)을 읽을 수 있다.
‘대마도는 산이 험하고 숲이 우거진 곳. 도로라곤 짐승이 다니는 길뿐이다. 1000가구 정도가 살고 좋은 전답(良田)은 없다. 그래서 해산물을 먹고 산다. 배를 이용해서 남북간에 교역을 한다.’
역사 소설을 많이 쓴 시바 료타로는 이 마지막 구절, ‘남북 교역’에 주목한다. 대마도는 태고 이래 한반도(북)와 일본 규슈(남)를 잇는 무역의 거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관점에서 왜구란 남해안 일대를 약탈하고 쌀과 사람을 실어다 팔아먹는 해적의 무리였다. 한국에서는 왜구가 일본인들로만 이뤄져 있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왜구 중 ‘일본인은 3할 정도였을 뿐, 중국인과 싱가포르인이 섞인 다국적 해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인들은 유명한 왜구 두목 왕직(王直·?~1559)만 해도 수백척 선단을 거느린 중국인 해적이 아니었냐고 반문한다. 다행히 일본인들은 대체로 조선인이 왜구에 가담했다고는 기록하지 않는다(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투지만).
정리해보면 왜구는 무역과 약탈을 겸업했다고 해야 옳다. 무역을 요구하다가 불응하면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마도가 그 활동의 중심무대였다. 대마도와 열도를 잇는 이키(壹岐)섬도 대마도에 버금가는 근거지였다.
고려의 멸망에는 왜구의 발호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이성계는 왜구 제압에 공을 세워 국민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조선을 일으키는 힘을 얻는다. 조선 초기에도 왜구의 행패는 극심했다. 심지어 사람을 잡아다 동남아에 팔아먹는 노예상인 역할도 했다. 잠시 ‘조선왕조실록’의 한 토막을 들여다보자.
대마도 다카하마 지역에 있는 별장분양 광고판.
김개동의 기막힌 사연은 탈북자들이 동남아까지 흘러다니다 서울에 들어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국력이 부실한 나라 백성이 겪는 딱하고 불쌍한 여정이다. 한 일본 학자가 이 내용을 인용하면서 ‘왜구의 조선인 노예거래(이른바 披虜문제)’를 다룬 논문을 쓴 바 있다.
‘이승만 라인’이 몰고 온 횡재
기해동정(己亥東征).
1419년 조선 정부는 200척의 병선에 무려 1만7000명의 병사를 일으켜 대마도를 쳤다. 이종무가 선봉에 섰다. 왜구의 근거지를 뿌리째 짓밟고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당시 대마도에 머물고 있던 왜구의 가족들은 조선 병선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아비들이 한탕을 해서 만선으로 돌아오는 줄로 착각해 죄다 해변가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다 일망타진됐다고 전해진다. 이진희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선 정부는 왜구 유인책으로 쌀과 포를 주고 대마도주에게 벼슬도 내렸습니다. 이 벼슬은 형식적인 것이지만 일종의 무역업 면허로 통했습니다. 노략질을 막는 동시에 무역으로 먹고 살게 하려는 이 윈윈 전략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뒀습니다. 부산, 울산, 제포 등 삼포를 일본인에게 열어준 것도 이 시기 후의 일이고요.”
대마도가 1950년대와 60년대 ‘횡재’를 한 것 역시 한반도 덕분이었다. 이른바 ‘이승만 라인’ 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해 일본 어선의 대마도 북방 조업을 막아버리고 이 라인을 넘은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자 대마도의 북단 자위대기지에는 부산일대 해양경찰대 순시선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초대형 망원경이 설치되었다. 다시 이진희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 해경정에는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는 숫자가 적혀 있지요. 번호에 따라 해경정 고유의 관할해역이 있는 겁니다. 일본 자위대가 그걸 보면서 몇 번 함정은 관할구역이 어디다, 그 지역 일본 어선에 경고를 발령해야 한다, 그런 징후를 파악했어요.
그런데 한국 해경정은 일본의 대형 어선만 잡았어요. 주로 대자본을 뿌리로 하고 있는 일본 본토 선주의 배들이었지요. 그 바람에 영세한 대마도 배들이 살판나게 됩니다. 큰 배가 안 잡아가니 고기는 많지, 작은 대마도 배들은 단속에도 안 걸리지…. 이승만 라인이 일본열도에선 대소동이었지만 대마도에서는 내심 이승만 찬가가 나올 정도였지요.”
한국이 공업화하기 이전, 공산품 밀수가 성행할 때도 대마도는 흥청댔다. 밀수꾼의 거점인 대마도에 돈이 넘쳐 흘렀다. 부산에서 거제에 이르는 남해안 벨트에 밤이면 숱한 밀수선이 온갖 통신수단을 동원해 밀무역을 해댔다. 산업대국 일본의 싸디싼 공산품이 돈과 생선 등으로 맞교환됐다. 한국에서 나지 않는 라이터돌 같은 것도 당시로선 소중한 생필품이었다. 이런 물건을 해상에서 한국 어부들에게 건네주고, 현장에서 바로 돈이나 생선을 받았다. 이 시절이 대마도의 황금기였다고 섬사람들은 회상한다.
대마도의 한글 광고판
이즈하라에서 멀지 않은 다카하마(高瀕) 지역을 지나가는데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커다란 한글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대마도에 한글로 된 선전 간판이라!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대마도에서 낚시를 즐겨보세요. 토지와 건물 판매가격은 2000만원짜리부터. 0925-4-5001.’
한국인 관광객을 유혹하는 별장 분양광고였다. 여전히 대마도는 한국에 생명줄을 걸고 있는 것일까. 문득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대마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벼와 철기를 들고 열도로 열도로, 동양의 개척지, 기회의 땅을 찾아 떠나는 행렬. 그리고 히데요시 군대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던 조선 백성들의 눈물, 왜구들의 웃음소리, 최익현과 의병 지도자들의 탄식. 옛일은 다 잊혀지고 어느새 대마도 별장지를 한국인에게 팔려는 상혼만 남았는가.
대마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