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br> 제러미 리프킨 지음/이원기 옮김/ 민음사/552쪽/2만2000원
“유럽에서 오셨다고 했는데 유럽이 살기 좋은가요, 미국이 살기 좋은가요?”
그는 필자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미국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열심히 일하면 대가가 확실한 곳’이라는 게 골자였다. 그때 필자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유럽이 우월한 점을 설명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엇갈림이었다. 미국 시민권자인 식당 주인은 미국시민으로서 유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인데, 필자는 한국인으로 미국과 유럽을 비교했던 것이다.
리프킨의 책은 ‘미래에 대한 유럽의 비전이 어떻게 아메리칸 드림을 잠식하고 있는가?’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철저히 미국인의 관점에서 ‘유러피언 드림’과 ‘아메리칸 드림’을 대비하고 있다. 리프킨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엘리트교육을 받았지만 유럽을 동경하며 수시로 유럽에 체류하는 저술가다. 실제로 유럽에는 단순히 여행이나 출장이 아니라 장기간 체류하며 활동하는 미국의 지식인이 상당수 있다. 이들에게 유러피언 드림과 아메리칸 드림의 경계와 대비는 너무나 생생하다. 한때 유럽에 체류했던 학자 로버트 케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이 파라다이스라면 미국은 파워다. 유럽이 살롱 주인이라면 미국은 보안관이다. 곰이 나타나면 유럽은 엎드리지만 미국은 곰을 사살해버린다.”
하지만 필자는 ‘유러피언 드림’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코리안 드림’이라는 개념을 끼워넣게 된다. 코리안 드림을 만들어냈고 또 전파했던 한국인에게 이러한 유러피언 드림과 아메리칸 드림의 생생한 대비가 시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코리안 드림은 ‘유길준 코스’나 ‘이승만 코스’를 통해 만들어졌고, 아메리칸 드림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선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의 찰떡궁합이 과연 좋았던 것인지 되돌아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에 서술된 ‘유럽적 대안’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드림’이란 결국 미래에 대한 ‘이념’의 문제다. 혹자는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이념’ 타령이냐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이념은 항상 중요하다. 또 결국 ‘어떤 이념을 세우는가’가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좌우하게 된다. 리프킨은 바로 그러한 쟁점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문명적 표준 경쟁
유럽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한다. 이것이 리프킨의 결론이다. 그런데 리프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을 미국에 비해 ‘조금 덜 잘살더라도 인간답게 사는 곳’이 아니라 ‘미국보다 더 잘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곳’으로 묘사한다. ‘포춘’이 선정한 140개 대기업 가운데 유럽 회사는 61개로 미국(50개)보다 많다. 또 세계 4대 은행 가운데 3개가 유럽은행이다.
문명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다. 그 배후에는 팽창, 침탈, 헤게모니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렇다 해도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코스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다. 문화와 지역에 따라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문명을 대신해 야만을 앞세울 수는 없다. 누가 더 문명적인가 하는 겨룸은 있을 수 있어도, 누가 더 야만적인가 하는 겨룸은 있을 수 없다. 누가 더 문명적인가 하는 겨룸이 있기에 과연 무엇이 문명인가라는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유럽과 미국은 분명히 다른 시각에서 문명적 표준을 바라보고 있다.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문명적 표준 경쟁에까지 이른 건 아니다. 유럽 대 미국의 문명적 표준 경쟁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대서양 관계를 형성할까, 아니면 유럽적 표준과 미국적 표준의 영원한 이별로 이어질까. 이 문제는 동아시아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그동안 리프킨이 출간한 ‘엔트로피’ ‘생명권 정치학’ ‘노동의 종말’ ‘바이오테크 시대’ ‘소유의 종말’ 등에서 제기된 화두들과 관련해 봐도 유럽과 미국의 대결양상은 확연하다. 교토협약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 노동문제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시각 차이, 소유하고자 하는 미국과 사용하고자 하는 유럽의 차이 등이 그것이다.
필자가 몇 가지를 추가한다면 지난 세기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유럽 일부 국가들의 전향적 자세(사과 및 보상. 영국과 프랑스는 제외)와 미국정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의 차이,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 등 군비증강과 관련한 유럽과 미국의 갈등, 문화다양성 기구의 설립과 관련한 유럽과 미국의 대립, 국제형사재판소 설립과 관련한 유럽과 미국의 입장 차이, 유전자변형식품과 관련한 유럽과 미국의 시각차이, 항공우주기술을 비롯한 각종 기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표준선점경쟁, 국가주권문제와 관련해 합의에 의한 ‘포스트모던’적 제국을 추구하는 유럽과 힘에 의한 ‘모더니티’의 완성으로써 제국을 추구하는 미국, 그리고 최근 중동문제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반목 등이 있다.
21세기 변화의 화두는 ‘유럽’
리프킨은 문명사적 변환기에 처해 혼돈을 느끼는 세계인에게 그런 혼돈을 해석하고 대처할 수 있는 문명비판적 혜안을 제공해왔다. 2004년 시점에서 리프킨이 잡아낸 문명사적 변화의 화두는 결국 ‘유럽’인 셈이다. 이 책에서 리프킨은 그동안 다뤄온 화두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보다 큰 정치적 표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단일헌법의 비준을 앞둔 새로운 ‘유럽합중국’의 출현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이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저서에 대한 공감의 폭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연장선에 놓여 있던 코리안 드림에 대한 반성의 여유를 제공한다.
얼마 전 미시건대에서 조사한 세계가치조사는 그동안의 끈끈했던 한미관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본적인 가치표준이 미국보다 유럽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향후 유럽과 동아시아의 교류와 협력이 증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측과 아울러 한국과 유럽의 관계를 일본과 유럽의 관계와 비교해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한국과 유럽의 관계는 비정상적 단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유럽의 관계는 달랐다. 난학(蘭學)의 예에서 보듯 유럽은 미국에 앞서 일본의 서구화(서유럽화)를 초래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회화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듯 일본 역시 서유럽의 변화를 야기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프랑스인 신부의 참형과 뒤이은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략, 독일 상인 E. J. 오페르트의 남연군(대원군의 친부) 묘 도굴사건 등으로 유럽과의 관계 모색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의 외교권 박탈 이후엔 완전히 단절됐다. 일본은 이후에도 유럽과 다양한 교류를 지속한 데 비해 한국인에게 유럽은 너무나 먼 곳이었다.
코리안 드림 위한 문명론적 묵시록
그러다가 광복과 미군정,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미국이 한국적 근대의 유일한 모델로 자리잡았다. 유럽적 대안에 대한 지적인 모색은 동베를린사건과 최종길 교수사건 등을 통해 ‘삼제(芟除)’됐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유럽은 우리에게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시각에서 유럽을 탐구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냉전시대와 같은 미국의 전략적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인식과 맞물리며 더욱 증폭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유러피언 드림이 코리안 드림이 될 수 있을까. 유러피언 드림을 꿈꿀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이 되기까지 한국적 근대를 추동해온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정녕 폐기의 대상일까. 유러피언 드림과 유사하게 포스트모던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동북아드림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은 결코 머나먼 나라의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급변하는 문명사적 전환의 현실에 비춰 한국의 생존전략을 되돌아보게 하는 문명론적 묵시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