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 자리는 긴 이름만큼이나 무겁고 중요한 지위다.
- 노무현 대통령은 정동영 장관에게 그만큼의 힘과 무게를 실어줬다. 하지만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 북핵문제는 갈수록 꼬이고,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장관 취임 8개월째.
- 북한의 폭탄선언으로 한반도에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는데….
2004년 12월15일 북한 개성공단 입주업체 리빙아트의 첫 시제품 생산 기념식장에 들어서는 정동영 장관과 열린우리당 의원들.
또한 김대중 정권 창출 이후에는 권노갑 고문으로 대표되는 동교동계와의 ‘투쟁’을 통해 열린우리당 창당의 산파를 자임했고, 이후 선거대책본부장 당의장 등을 역임하며 노무현 정권 재창출을 일궈냄으로써 여권의 당당한 실세로 자리잡았다.
정 장관의 욱일상승(旭日上昇)하는 기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해 7월1일에는 외교안보부처의 팀장으로 승격된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성가를 한껏 높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옛말이 틀리지 않았던지, 정 장관의 통일부 장관 재임기간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취임 8일 만인 7월8일 김일성 주석사망 10주기를 맞아 정부가 조문단의 방북을 불허하면서 남북관계에 이상조짐이 나타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7월27일에는 468명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탈북자가 동남아시아 지역의 한 국가로부터 한국에 입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공화국(북한)의 체제를 허물어보려는 최대의 적대행위로 규정한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내놓았다.
“두 달만 빨리 장관 됐더라면…”
이 같은 기류는 결국 북한의 4차 6자회담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말에는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발효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악재들은 지난 2월10일 북한 외무성이 발표한 핵무기 보유 및 6자회담 참가 무기중단 선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는 1994년 1차 북핵위기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결과적으로 정 장관은 취임 이후 단 한 차례도 남북당국간 대화를 하지 못한 상태로 취임 8개월째를 맞았다. 이쯤 되면 ‘행운아’ 정 장관이 통일부 장관으로서 겪었을 마음고생을 짐작할 만하다.
통일부의 한 간부는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통일부 장관으로서 정동영 장관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당시 박재규 장권(현 경남대 총장)의 경우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시기여서 업적도 많이 낼 수 있었지만 정 장관은 시기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요즈음도 사석에서 “내가 몇 달만이라도 빨리 통일부 장관으로 취임했으면 남북관계가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운 심정을 토로하곤 한다.
실제로 정 장관은 공식석상에서 조문파동이나 탈북자 대거입국문제를 염두에 두고 “북측에서 지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좀더 슬기롭게 처리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며 여러 차례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정 장관의 표현대로 남북관계 경색의 결정적 원인이 된 조문파동과 탈북자 대거 입국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사항이라고 한다면, 정 장관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지난해 9월 발생한 한국의 핵물질실험문제였다.
당시 외신은 한국 정부가 핵을 보유하려 했다는 문제제기를 집중적으로 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지난해 9월13일 IAEA 이사회 보고에서 한국의 핵실험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serious concern)’를 표명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정 장관의 NSC 상임위원장으로서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장관은 IAEA 이사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12일 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한국의 핵 투명성을 거듭 강조했다. 또한 9월18일에는 ▲핵무기 개발 보유의지 없음을 재확인 ▲핵 투명성 유지 및 국제협력 강화 ▲핵 비확산 국제규범 준수 ▲핵의 평화적 이용범위 확대 등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IAEA는 한국의 핵물질실험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지 않은 채 가장 강도가 낮은 의장 요약보고(summary) 수준에서 마무리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핵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4년 기자로서 통일부(당시 통일원)를 출입했던 정 장관은 10년 후 장관이 되어 화려하게 통일부에 돌아왔다. 당시 통일정책관실 이봉조 과장이 현재 차관이다. 각 실·국장을 포함한 간부들에게서 업무보고를 받는 정 장관은 자주 “그래서 ‘야마’가 뭡니까?”라고 질문한다고 한다. ‘야마’는 어떤 사물이나 사안의 핵심을 지칭하는 말로 기자들 사이에 사용되는 은어. ‘야마를 잘 잡는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감각이나 직관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통일부 간부들이 현안에 대해 보고를 할 때 보고 내용이 한 페이지를 넘어갈라치면 정 장관에게선 어김없이 ‘야마’를 먼저 보고하라는 말이 떨어진다. 현안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일일이 설명하지 말고 핵심만을 알기 쉽게 보고하라는 주문인 것이다.
지난해 9월18일 IAEA가 제기한 한국 핵물질 실험의혹에 대해 NSC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발표한 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4원칙 중 ‘야마’는 네 번째 항목인 핵의 평화적 이용범위 확대”라며 싱긋 웃었다.
4원칙 수립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정 장관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수첩은 기자들이 애용하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취재수첩’. 그는 NSC 상임위원회 주요 논의사항이 메모된 취재수첩을 보며 ‘야마’만 간추려 설명했다.
기자들이 생명처럼 중시하는 ‘현장성’도 정 장관이 통일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전화에 의존하거나 책상에만 앉아서 일하는 ‘탁상행정’을 배격하고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가 일을 처리하라는 지적이다.
보고받는 도중 보고서에 ‘키워드’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보이면 동그라미를 치고, 중요한 문장이나 기억할 만한 문장이라고 여기면 밑줄을 ‘쫘악’ 긋는 것도 정 장관의 독특한 습관. 펜은 주로 연녹색 형광펜을 이용한다.
통일부 당국자는 “장관실에 보고하러 들어갈 때 내용을 일별하고 ‘야마’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며 “사안의 핵심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취임 초반 정 장관은 매우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스스로 표현한 ‘공부와 숙제’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정치인들과의 공개적인 만남이나 언론사 간부들과의 상견례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외교, 안보 및 국방을 총괄하는 NSC 상임위원장으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업무를 추진하기 위한 ‘선행학습’에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고, 섣불리 발언하기 곤란한 민감한 사안이나 발언에 따른 책임이 주는 중압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라는 것이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와 관련 정 장관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솔직히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업무를 파악하고 내 목소리로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북한의 ‘정동영 길들이기’
정동영 장관은 2004년 7월1일 통일부 장관에 취임한 이래 230일이 지난 2월15일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통일부 정례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방송국 앵커 출신에다 대변인으로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던 정 장관의 ‘과거’를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취임 이후 정 장관은 줄곧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파월 미국 국무부장관, 파고 미 태평양사령관,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힐 주한미국대사, 리빈 주한중국대사 등을 비롯, 수많은 국내외 인사와 매주 두세 차례 이상 면담하고 국내외 현안을 논의했다. 이 같은 정례적인 ‘인풋’에 비해 한국 외교안보정책의 현안과 정부의 대응방안 등에 대한 NSC 상임위원장으로서 ‘아웃풋’에는 인색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 장관은 통일부 기자단과의 비공식적인 간담회나 오찬은 자주 했지만,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공개석상에서 브리핑한 것은 딱 세 차례다. 지난해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 중 남북관계 부분 배경설명, 지난해 9월12일과 18일의 한국 핵물질실험 문제에 대한 NSC 상임위 결과 브리핑이 그것. 세 차례 모두 큰 현안에 대한 비정기적인 브리핑에 NSC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나선 것이고, 그나마 통일부 장관 자격으로 나선 것은 8·15 경축사 배경설명 한 번뿐이다.
흡사 묵언수행하듯 언론과의 만남을 자제하던 정 장관의 말문이 트인 것은 지난해 12월15일 개성공단 시제품 생산 기념식에 다녀온 뒤였다. 이전까지 언론과의 만남을 극구 자제하던 정 장관은 이후 한 인터넷 매체를 필두로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응했다.
12월의 개성공단행은 정 장관으로서는 첫 방북이었지만 북한의 ‘계산된 홀대’로 썩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듯하다. 정 장관의 첫 북한행은 노심초사 끝에 성사됐다. 정부는 진작부터 북측이 알아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정 장관의 개성방문을 선언했지만 정작 방북승인을 해줘야 할 북한은 행사 전날 오후에야 방북을 승인해 정 장관의 애를 태웠다.
지난해 10월31일부터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회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단이 “정 장관은 북한 땅을 한 번도 못 밟는 통일부 장관이 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부는 혹시나 북측이 ‘몽니’를 부리지 않을까 내심 조바심을 냈다. 어쨌든 북측으로서는 ‘정 장관 길들이기’에 성공한 셈이다.
행사 당일에도 정 장관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소홀했다. 정 장관이 방북했는데도 북측은 대남경협 책임자인 이종혁(李種革)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보내지 않고 실무책임자격인 주동찬 중앙개발특구 지도총국장만 보냈다.
그나마 주 총국장은 정 장관이 축사를 하는 도중 자리를 뜨는 결례를 저질렀다. 북측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홀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 장관도 주 총국장과의 환담 자리에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등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후에 보도된 것이지만, 북한은 남측이 개성공단과 관련한 행사를 지나치게 이벤트성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돌파력’과 ‘지나친 신중함’의 두 얼굴
정 장관이 통일부 장관을 맡은 데는 정치인으로서 순탄한 길을 걸어왔지만 실제로 행정 경험이나 국가경영 비전을 갖추지 못했다는 세간의 지적도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왔지만, 궁극적 목적인 대권에 도전하기에는 ‘3%쯤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한 응전(應戰)이라는 것.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노인폄하’ 발언으로 당의장직은 물론 국회의원직도 버린 정 장관은 통일부 장관직을 강력하게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장관의 정계 입문 이래 10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장관을 보좌하고 있는 A씨는 “정 장관의 통일부 장관 취임은 ‘본인 의지 반, 대통령 의지 반’이 결합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당시 정 장관은 국가지도자의 식견이나 안목을 기르는 데 가장 적합한 자리로 통일부 장관을 생각했고, 북핵문제와 통일문제 해결이라는 21세기 최고의 이슈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통일부 장관 자리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동안 ‘리스크’가 높지만 현상을 타파하고 그에 부딪히는 일을 많이 해온 것이 정 장관의 스타일이다.”
뜻밖에도 정 장관의 지인들은 MBC 기자를 그만두고 정계에 뛰어든 것 역시 현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평가한다.
정 장관과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경희대 국제관계학부 권만학 교수는 “정 장관이 방송기자직을 그만두고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방송직을 정치의 교두보로 삼은 것이 아니다”며 “당시 권력의 핵심에서 호남 출신이 메인앵커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말했다. 즉 정 장관 본인도 지역감정의 희생양이라는 것. 정 장관은 MBC에서 메인앵커가 된 뒤 오직 언론인의 길을 꿈꿨지만, 주변의 상황 때문에 새로운 길을 모색해 떠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 장관이 정치에 대한 동경과 함께 남다른 현실 참여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증언한다. MBC의 한 동료기자는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1992년 대선 직후 실의에 빠져 2, 3일간 식음을 전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또한 정 장관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인 1971년 전북에 유세차 온 김대중 후보의 연설을 듣고 대중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여튼 기성질서에 대한 도전과 성공에 대해 정 장관은 “국민의 뜻이 어디 있는지 판단하고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할 때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섰고 그것이 여러 번 맞아 떨어진 것 같다”며 “난 항상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임한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앞길을 예측하고 이기는 선택을 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며 “지금까지의 길도 미리 계산하고 행동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덧붙였다.
정 장관은 이 같은 돌파력의 이면에 지나친 신중함도 갖고 있다. 정 장관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http://www. cdy21.net/)에 자신의 단점으로 ‘너무 신중하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정 장관의 다른 참모 B씨는 “정 장관은 주위 사람들에게 득점하려 하지 말고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강조한다고 말했다. 방송 앵커로서 생방송을 자주 하면서 생긴 노하우인 것으로 보이며 신중함이 몸에 밴 것 같다는 평가.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킨 노인폄하 발언은 ‘신중한’ 정 장관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로 꼽힌다.
2월1일 이라크 아르빌의 자이툰 사단을 전격 방문한 정동영 장관이 부대원과 악수하고 있다.
정 장관은 재임기간 동안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틀을 잡는 등의 업적을 세우고 정치권으로 개선장군처럼 복귀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커녕 오히려 남북관계가 후퇴할 조짐마저 보이는 상황이다 보니 초조할 수도 있다.
보좌관 출신 A씨는 “초기에는 좀 조급해하고 성과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2004년 말을 지나면서부터 상당부분 정리된 느낌을 받았다. 남북관계라는 것이 장관 한 명이 조바심낸다고 잘 풀리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인으로 복귀하는 시기는?
정치 입문 10년 동안 큰 곡절 없이 대권이라는 고지를 향해 차근차근 전진해온 정 장관이지만 본격적인 검증의 단계에 들어가면 한계가 드러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1997년부터 정 장관을 줄곧 취재해 온 C기자는 “단련-검증-시련이라는 과정을 겪지 않은 것이 정 장관의 한계”라며 “아직까지 구호가 아닌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놓은 적이 없다는 것도 정 장관의 불안 요소일 것이며 통일부 장관 재임이 주목받는 것도 그 이유”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자신의 통일부 장관 취임 100일째 되던 날인 지난해 10월8일 출입기자와의 간담회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통일부에 있는 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버리고 이 자리가 마지막 공직이라는 자세로 헌신하겠다”는 것.
물론 이 발언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도 “통일부 장관 재임기간에는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자제하겠다는 뜻 정도로만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 장관은 공식일정에 정치인 면담을 넣고 있지 않지만 늘 여의도 정치권이나 당내 인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 창당의 핵심인 ‘바른정치모임’ 사람들과는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비공식 모임을 가지며 당내 문제를 듣고 의견을 교환한다.
최근 정 장관은 사석에서 “통일부 장관으로서의 임기는 언제까지로 생각하고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원한다고 통일부 장관을 계속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통일부 장관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재임기간 중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북핵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