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현지르포 - 리비아 내전

  • 유재동│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jarrett@donga.com

    입력2011-09-21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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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보낸 4박5일. 내전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유령도시가 된 트리폴리에선 언제쯤 총성이 멎을까.
    • 카다피를 무찌르기 위해 트리폴리에 왔다는 15세 반군 병사, 가족을 죽인 카다피군을 치료해주는 여의사가 만들어갈 포스트 리비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8월28일 리비아 트리폴리의 순교자광장(옛 그린광장)에서 총을 든 반군 청년들. 이날 국가과도위원회(NTC)의 트리폴리 이전을 기념하는 차량 퍼레이드가 열려 광장에 모인 반군들은 하늘에 축포를 쏘며 자축했다.

    기자는 지난 8월 말 다녀온 리비아 출장에서 파괴와 학살의 현장 곳곳을 둘러봤고, 수많은 시민의 피끓는 증언과 절규를 들었다. 이 나라에선 지난 6개월의 내전으로 약 5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런 생생한 현장과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극이 우리 시대에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그대로 믿기엔 너무나 충격적이다.

    리비아에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원수라는 사람이 전투기까지 동원해 자기 나라 마을을 폭격하고, 건물 위에 저격수를 배치해 국민에게 총을 쏘아댔다. 또 무고한 시민 수십 명을 창고 안에 가둬놓고 무차별 총질을 한 뒤 시체들을 불태웠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눈앞에서 차례로 쓰러졌지만 국민들은 이에 겁먹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제 독재자의 축출, 시민혁명의 성공이라는 값진 과실이 눈앞에 와 있지만 이를 위해 흘린 피와 눈물이 너무나 많았다.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또 이에 대항하는 국민의 저력이 얼마나 강인할 수 있는지,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리비아 혁명, 또는 이를 아우르는 ‘아랍의 봄’은 최근 10년, 또 앞으로 10년 동안 9·11 테러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사건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리비아에서 기자는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환경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가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매순간 긴장의 연속이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계속 터져 나왔다. 물론 기자도 기자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출장 지시를 받았을 때는 덜컥 겁부터 났다. 우여곡절 끝에 리비아 국경을 처음 넘었을 때의 긴장감, 그리고 리비아 국경에서 벗어났을 때의 안도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리비아는 이런 개인적인 두려움을 넘어 이미 그 어떤 기자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됐다. ‘때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지난 8월23일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세 번, 자동차 두 번 갈아타고 리비아 진입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8월28일 리비아 트리폴리의 순교자광장(옛 그린광장)에 선 동아일보 유재동 기자.

    튀니지 남부에 있는 제르바 섬은 이름난 휴양지다. 햇살이 따사로운 지중해의 섬이라 고급 리조트가 모여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기자가 머문 호텔에도 가족 단위로 백인들이 찾아와 수영복 차림으로 바캉스를 즐기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한가로운 호텔 바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기자밖에 없는 듯했다.



    기자는 파리와 튀니스(튀니지 수도)를 경유, 30시간이 넘는 비행과 대기시간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제르바를 베이스캠프로 선택한 것은 이곳이 리비아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르바에서 리비아 국경을 넘으려면 두 가지 루트가 있는데 하나는 해안도로를 통해 국경도시 빈가르데인으로, 또 하나는 내륙도로를 통해 데히바로 가는 것이다. 리비아 상공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그 어떤 비행기로도 리비아의 도시에 직접 진입할 수 없다. 기자는 우선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은 ‘해안도로 루트’를 시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첫 국경 통과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차로 2시간을 달린 뒤 도착한 빈가르데인 쪽 국경 검문소에서 튀니지 경찰은 기자의 여권을 한 장 한 장 살피더니 “리비아 비자가 없다”며 결국 월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라. 여기는 보다시피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다. 비자가 없으면 절대 국경을 넘을 수 없다.” 과연 약 100m 앞쪽에 있는 리비아 쪽 검문소에는 카다피의 녹색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실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이 경찰관은 돌아서는 기자를 다시 불러 세우더니 매우 중요하고 실용적인 ‘팁’을 줬다. “데히바로 가라. 그곳은 이미 반군이 점령한 지 오래다. 비자도 필요 없을 것이다.”

    리비아로 가는 길이 명확해진 뒤 기자는 예상 일정에 맞춰 출장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랍어와 영어가 모두 가능한 튀니지인 가이드를 구하고, 차량도 섭외했다. 특히 리비아 국경을 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는 제르바에서 트리폴리를 3박4일 일정에 왕복하는 조건으로 튀니지의 한 렌터카 업체에 25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터인 트리폴리는 “무서워 안 가겠다”는 운전사가 대부분이어서 섭외에 마지막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트리폴리 인근에서 이탈리아인 기자 5명이 정부군에 납치되고 운전사는 현장에서 사살됐다는 보도가 막 나왔을 때였다. 출장 준비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지체되면서 마음만 초조해졌다. 하지만 치열한 내전의 현장을 혈혈단신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취재진과 가이드, 운전사 등 일행은 27일 다시 제르바를 출발해 당일 오후 튀니지의 내륙국경도시인 데히바에 도착했다. 중간에 차를 한 번 갈아타고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우리의 계획은 국경을 넘은 다음 리비아 국경 인근도시인 날루트에서 반군 병사 한 명과 접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차량 3대로 호위 행렬을 이뤄 중간에 아무런 제지 없이 트리폴리까지 직행할 수 있었다. 마치 액션 영화에 나오는 첩보 작전 같았다.

    데히바 국경에선 과연 반군의 삼색 깃발이 보란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평화로워 보였지만 마음 한쪽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국경 통과에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튀니지 검문소에서 여권에 출국도장을 받고 그대로 50m 앞의 리비아 반군 검문소로 향했다. 마치 간이 이동식 화장실을 연상시키는 낡은 리비아 검문소에서 총을 든 반군 병사가 나오더니 여권을 대충 훑어보고 그냥 취재진에게 건넸다.

    “웰컴 투 프리 리비아(Welcome to free Libya).” 그는 외신기자인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리비아 여행의 막이 올랐다. 국경을 지나 약 10분도 안 되서 기자의 휴대전화에는 문자메시지가 한 건 찍혔다. 발신인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귀하는 여행제한지역 포함국가 여행 중. 긴급용무 아닌 한 출국 요망. 무단 입국 시 1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의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우릴 보호해주기는커녕 벌을 준다고 생각하니 부모에게 버림받은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총성은 멎었지만 치열했던 교전 흔적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8월31일 리비아 순교자광장에서 트리폴리 함락 이후 첫 이슬람 기도회가 열렸다. 반군들이 테러를 막기 위해 기도회장 주변을 겹겹이 둘러쌌다. 시민들은 카다피 정권의 종말을 자축하며 기도회 중 여러 차례 환호성을 질렀다.

    리비아 국경지대엔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이 산재했다. 길가엔 정부군이 버리고 간 탱크 여러 대가 방치돼 있었고, 부서진 AK-47 소총, 전복된 차량, 고철더미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곳을 지키던 한 반군에게 물어보니 올 4월경 인근 나푸사 산 일대를 둘러싸고 정부군과 반군의 치열한 쟁탈전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일대 어딜 가도 삼색 깃발뿐이었다. 반군들은 빌딩 위에도, 차량에도,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언덕 위에도 깃발을 꽂아놨다.

    국경을 지나 약 1시간 동안 차를 내달려 도착한 한 검문소에는 반군깃발과 함께 아랍에미리트(UAE) 튀니지 카타르 유럽연합(EU)의 국기가 동시에 걸려 있었다. 모두 카다피의 축출과 반군의 승리를 위해 직간접적인 지원을 했던 나라들이다.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 날루트 마을에도 곳곳에 “사르코지(프랑스 대통령) 고맙습니다” “나토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등의 문구가 영어로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보통 서방에 대한 적대감과 독립 의지가 높은 중동 지역에선 보기 드문광경이었다. 이처럼 리비아 반군과 국민은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외세를 등에 업은 혁명’도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여기엔 카다피가 1969년 친(親)서방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것에 대한 반발심리도 투영돼 있는 것 같았다.

    인구 10만명이 채 되지 않는 소도시 날루트는 이미 일상을 되찾은 듯했다. 거리엔 이프타르(라마단 금식 후 첫 식사)를 위해 빵과 과일을 사려는 주민이 많았다. 또 리비아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교통경찰의 모습도 보였다. 공권력이 가동된다는 것은 나라가 어느 정도 정상을 찾아간다는 신호였다.

    기자는 이곳에서 주민들과 이프타르를 함께하면서 트리폴리로 가려는 각국의 외신기자도 여럿 만났다. 반군이 기존 건물을 개조해 시내에 차려놓은 간이 ‘미디어 센터’에도 미국과 일본 폴란드 등 각국의 특파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리비아 현지 취재를 위해 목적지와 루트의 안전 여부, 이동수단 등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 이곳에서 만난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는 “이 마을에서 어제 하루 묵었다. 반군의 도움을 받아 트리폴리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고 있다”며 우리 일정도 되물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면서 취재진도 날루트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밤 시간에 트리폴리로 이동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현지 리비아인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다음날인 28일 새벽 5시 반, 취재진은 트리폴리로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우리와 동행하던 튀니지인 가이드가 그동안 미니밴 위에 싣고 가던 짐짝을 모두 차 안으로 옮겼다. 그는 “짐을 차 위에 싣고 가면 약탈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어제 스나이퍼(저격수)의 공격으로 트리폴리에서 세 명이 죽었다”고도 말했다. 전날 3시간도 채 못 잤지만 잠이 확 달아났다. 트리폴리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현지 소식을 접하고 어느 정도 안심하던 차였다.

    트리폴리를 향해

    우리 앞 차에는 날루트에서 접선한 리비아 반군 무함마드 자루크(33)씨가 타고 있었다. 그는 트리폴리까지 여정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상황에 대처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직 엔지니어인 그도 1980년대 쿠데타 시도가 있었을 때 카다피군에 삼촌 두 명을 잃었다. 지금은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뒤 반군에 합류해 날루트와 트리폴리를 매일 ‘출퇴근’한다. 내전이 마무리되면 엔지니어링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받을 계획이다. 그는 “카다피 정권하에서 우리는 ‘노(No)’라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 우리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했다.

    반군들이 세워놓은 체크포인트(검문소)는 평균 10분에 한 번꼴로 만났다. 처음 몇 곳에선 반군들이 취재진을 보면 승리의 ‘V’자를 해 보이고 “어느 나라 기자냐” “코리아, 원더풀”이라며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트리폴리로 가까워질수록 검문은 검문대로 까다로워지고 이들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출발 2시간 후 도달한 한 검문소에서 우리는 반군들에게 트리폴리 사정을 물었다. 그들은 “일부 지역은 위험하고 시체도 많다. 어린아이들도 죽었다. 정부군이 가리지 않고 쏜다”고 말했다.

    다만 트리폴리까지의 도로사정은 6개월의 내전을 거친 것을 감안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가끔 부서진 도로가 나오긴 했지만 길목마다 반군이 임시로 우회도로를 만들어놨다. 또 길 저편 벌판에는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탑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뚝 솟아 있었다. 이처럼 리비아를 지탱하던 중추 기반시설은 상대적으로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카다피 이후의 새 리비아가 내전의 상처를 생각보다 빨리 털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끼게 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일부 교전이 치열했던 도시는 파괴의 흔적이 선명했다. 전쟁의 상흔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자위야였다. 트리폴리 입성을 위한 관문도시로 양측 모두에 전략 요충지였던 이곳에선 내전 초반부터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건물마다 유리창은 죄다 깨어져나갔고 총알자국도 30여 개씩 남아 있었다. 어떤 3층 건물은 폭격을 맞고 너무나 심하게 훼손돼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건물이 아니라 마치 거대 공룡의 사체를 연상케 했다. 평일 낮인데도 길거리에서 사람의 모습을 전혀 관찰할 수 없었다. 그저 건물마다 삼색 깃발들만 황량하게 나부낄 뿐이었다.

    기능 마비된 유령 도시

    트리폴리에선 4박5일을 머물렀다. 렌터카 운전사와 합의한 당초 일정은 3박4일이었지만 계약을 파기하고 이틀을 더 있기로 했다. 비록 트리폴리는 여전히 위험했지만 사흘만 머물기엔 취재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트리폴리에 도착한 첫날은 사람구경을 제대로 못 했다. 이날은 이슬람 세계에서 평일인 일요일이었는데도 상가는 모두 문을 닫았고 길거리에 쓰레기더미만 가득했다. 심지어 도심의 한 블록 전체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기자가 “시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고 묻자 우리를 안내한 리비아의 지방 공무원 아흐메드 다와씨는 “모두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이미 도시 밖으로 탈출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도시 기능도 거의 마비상태였다. 우선 머물 수 있는 호텔이 없었다. 길거리는 텅 비었는데 얼마 되지 않는 호텔에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객실 손님들은 모두 각 지방에서 올라온 반군 병사들, 또 외신기자들이었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총이나 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얼마 뒤부턴 수돗물도 끊겼다. 그 탓에 사흘 동안 씻지를 못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카다피군이 퇴각하면서 수도관을 파괴했다고 한다. 전기도 자주 중단됐고 국제전화 등 통신 서비스도 이용할 수 없었다. 문을 연 음식점이나 가게도 찾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은행 업무가 마비돼 신용카드가 무용지물이 됐고 현금 인출도 불가능했다. 상황이 이 정도일 줄 예상치 못한 취재진은 얼마 되지 않는 돈과 옷가지, 비상식량으로 그저 버틸 만큼 버틸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트리폴리 도착 3시간여 만에 겨우 찾아낸 호텔은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래 카다피의 측근이 소유했지만 트리폴리가 함락되면서 이젠 반군의 기숙사처럼 쓰이고 있었다. 호텔 종업원이라는 사람들도 알고 보니 모두 반군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실탄이 가득한 총을 들고 다녔다. 룸서비스는 애초에 기대하기 힘들었다. 기자가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채 전날 머문 반군이 켜놓고 간 듯한 아랍 TV채널이 틀어져 있었다.

    카다피 추종자는 다 어디로 갔나

    카다피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트리폴리 함락 이후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인 ‘그린광장’의 이름을 ‘순교자광장’으로 바꿔 불렀다. 이름과 함께 광장의 분위기도 180도 달라졌다. 한때 이 광장은 카다피 지지자들의 충성 집회가 매일같이 이어지던 곳이다. 카다피는 수천, 수만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높은 단상에 올라가 광기 어린 연설을 하곤 했다. 8월28일 기자가 찾은 이 광장은 이미 반군 축제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차에 걸터앉아 소총과 자동화기를 하늘에 대고 쏘면서 자신들의 트리폴리 점령을 자축했다.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귀청을 찢을 듯한 축포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저러다 오발 사고가 나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다.

    실제 리비아에서 만난 사람들의 카다피에 대한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지금 당장은 자유와 민주주의 자체보다도 카다피에 대한 복수와 단죄가 리비아 국민에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닌지 우려될 정도였다. 반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트리폴리의 주요 호텔을 비롯해, 공항 청사와 빌딩, 심지어 차가 다니는 길바닥에도 일부러 카다피의 사진을 깔아놓아 지나가는 이가 짓밟고 가도록 했다. 어쩌면 반군 지도부가 “카다피 추종세력들에 대한 무차별 보복행위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 과한 걱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는 리비아 국민의 이런 극한 정서를 보여주는 사건을 순교자광장에서 직접 경험했다. 취재진은 타던 차에서 기름이 새어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차량을 멈춘 뒤 무심코 차에 있던 녹색 천을 꺼내들어 기름통을 닦고 있었다. 순간 우리 주변이 조용해지고 지나던 사람들의 표정도 굳어지는 것을 직감했다. 리비아에서 ‘녹색’은 카다피의 통치 철학을 상징한다. 안 그래도 눈에 잘 띄는 외국인이 하필이면 카다피를 상징하는 색깔의 천을 쓰고 있는 것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자는 순간 쓰던 천을 땅에 내팽개치고 신발로 사정없이 밟아댔다. 수군거리던 주변 리비아인들이 그제야 인상을 풀고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박수를 쳤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기자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트리폴리의 그 많던 카다피 지지자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하는 궁금증도 자연스레 풀렸다. 이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미 트리폴리를 대거 탈출했다. 출국을 위해 국경 지대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리비아인의 상당수는 실제 카다피 지지자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트리폴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정말 남의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 것이다.

    악랄한 독재정권의 상징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8월29일 리비아 트리폴리 서부의 구트샤알 거리에서 어린이들이 반군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취재진은 리비아 취재 기간에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을 느낄 만한 급박한 상황은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트리폴리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건물 밖을 나서거나 차량에서 내릴 때 주변 빌딩의 옥상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정부군 잔당들이 ‘목 좋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민간인을 조준 사격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골목길을 들어오는 차의 경적, 심지어 옷깃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놀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트리폴리에선 평균 10분에 한 번꼴로 총소리를 들었다. 대부분은 반군의 축포 소리였지만 그때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총성이 울리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트리폴리에서 만난 외신기자들 가운데 어림잡아 절반 이상은 방탄복을 입거나 헬멧을 쓰고 있었다.

    트리폴리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아부슬림 지역을 찾은 것은 셋째 날인 8월30일 오전이었다. 비록 어느 정도 도시가 안정을 찾은 다음이었지만 마을의 황량한 풍경은 등골을 여전히 오싹하게 했다. 이곳은 인적도 드문 데다 낡거나 짓다 만 아파트가 어지럽게 들어서 있어 슬럼가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악랄한 카다피 정권의 상징이었던 ‘아부슬림 교도소’로 향했다.

    이 교도소는 카다피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의 집합소였다. 반정부 세력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온 것은 물론 고문과 구타 등 인권침해도 비일비재했다. 1996년에는 교도소의 열악한 복역 환경에 항의하는 죄수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카다피 군대가 중화기로 이들을 공격, 1270명의 죄수가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학살도 벌어졌다.

    이날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교도소의 모든 문은 다 열려 있었고 죄수들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트리폴리가 함락되고 간수들이 모두 도망가면서 인근 시민들이 교도소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감방 안에는 죄수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전선 및 스위치 등 전기고문의 흔적, 죄수들의 범죄일람표를 비롯한 각종 문서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트리폴리에서 만난 모하메드 엘키쉬 반군 대변인은 “트리폴리에 왔으면 꼭 아부슬림 교도소를 가보라”고 조언했다.

    과연 이곳은 카다피가 그동안 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리비아를 장기간 철권통치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장소였다.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정권의 수명을 조금씩 연장시켰고 결국 42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 그 독재에도 종말이 찾아 왔다.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

    8월28일 리비아 트리폴리의 중심가에서 만난 반군들. 저마다 총으로 무장한 채 길목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시민혁명에 동참했다가 부상당한 반군 병사, 카다피의 꼬임에 넘어가 정부군으로 활동했던 청년, 돈을 받고 리비아인을 죽인 카다피의 흑인 용병, 지난 6개월간 이들을 치료하며 내전의 참상을 가까이서 목격해온 의료진…, 31일 리비아에서 가장 큰 살라 에딘 병원에는 그야말로 리비아 내전의 주인공이 다 모여 있었다.

    용서와 후회의 참의미

    기자를 이 병원 6층으로 안내한 의사는 한 병실에 멈춰서더니 “부상당한 정부군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 병원에는 반군과 정부군, 용병 출신 환자들이 각기 격리 수용돼 있었다. 서로 간에 충돌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병실에서 만난 이브라힘 마흐무드(20)씨는 카다피군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카미스 여단(32여단)’에 자원했다가 약 일주일 전 전투에서 왼쪽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부상한 그를 이곳 병원에 데려온 건 한 반군 병사였다. 마흐무드씨는 “국영 TV에서 나토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고 했고, 모스크에서도 반군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며 정부군에 자원한 이유를 밝혔다. 독재자의 몰락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 무리의 청년은 정부군으로, 또 다른 청년들은 반군으로 활동하면서 서로에게 총질을 하는 불행한 순간이 이어졌던 것이다.

    병원 의사들은 “군인들은 총상을 치료해주면 퇴원한 다음 나가서 다시 싸우고 병원에 입원하기를 반복했다”며 씁쓸해했다. 마흐무드씨는 부상을 당한 이후 심경에 큰 변화를 겪은 듯했다. 그는 “(카다피군에 자원한 것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한 뒤 “카다피가 잡히면 고문해서 토막을 내고 싶다”고 다소 격하게 말했다.

    이 병원의 여성 의사인 모하메드 이남(35)씨도 지난 내전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총을 든 정부군 병사들이 수차 병원에 난입해 “반군 폭도들을 치료해주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며 의료진을 위협했다. 이남씨는 흑인 용병들이 부상해 실려올 때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개인적인 복수심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했다. 이남씨도 카다피 군과 용병의 무차별 사격에 친척 3명을 잃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용병 환자들에 대한 적개심에 “치료는커녕 바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적일지라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꾸란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다독였다.

    트리폴리는 독재에선 ‘해방’됐지만 여전히 서로 간의 반목과 보복 공격의 가능성에선 해방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독재권력 대 비무장 시민들’의 구도였던 이집트나 튀니지와 달리 리비아는 양측 세력 간의 내전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 리비아 국가 재건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바로 이런 갈등의 봉합과 사회통합일 것이다.

    반군 청년들의 미래는 곧 리비아의 미래

    리비아에서 수많은 반군 청년을 만났다. 이들은 저마다 환희와 성취감에 가득 차 있었다. 청년들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이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주로 외신기자인 외국인들과 눈만 마주치면 승리의 ‘V’자를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일부러 어깨를 치면서 인사를 한다. 그들은 “당신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고, 그 다음엔 “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리비아는 이제 자유다”라고 소리친다. 짧은 영어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정말 큰일을 해냈다. 우리를 주목해달라. 리비아의 미래를 기대해 달라”는 눈빛이 역력했다.

    기자는 머무는 호텔 앞에서 청년 한 무리를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트리폴리 동쪽에 있는 해안도시 미스라타에서 왔다고 했다.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청년이라 하기에도 너무 어려보이는 소년병사가 있었다. 그에게 나이를 물어봤다. 15세의 학생이라고 했다. ‘친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도 26세였다. 왜 트리폴리로 왔느냐고 했더니 “카다피를 무찌르기 위해서”라고 서슴없이 답했다. 이처럼 트리폴리에서 총을 들고 있는반군은 갓 20대를 넘기거나 성인이 채 되지 않은 청소년이 대부분이었다.이들 중엔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하거나 학업을 중도에 그만둔 학생도 많았다. 청년들에게 카다피에 대해 물으면 그에 대한 비판과 성토에 열을 올리다가도 “카다피 이후 국가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면 그다지 뾰족한 답변 없이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은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 왜? 카다피가 사라졌기 때문에”라는 말이었다. 처음 몇 번 들었을 때는 참 단순 명쾌하다 생각했는데 자꾸 듣다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미 카다피의 시대는 끝났다. 아직 리비아 일부 지역에서 친위대의 저항이 있긴 하지만 그가 잡히거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카다피의 가족과 측근들도 이미 죽임을 당하거나 알제리, 니제르 등 주변 국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리비아의 미래는 카다피의 운명보다는 이들 반군 청년들이 앞으로 리비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세계의 눈이 리비아의 미래에 쏠려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바람대로 진정 새로운 리비아로 거듭나 건실하고 희망찬 사회를 일궈나갈 수 있도록 마음 깊은 곳에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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