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길 교수 사건 29년 만에 최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최초로 입을 열었다. 차철권씨는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누가 진짜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는지 내가 진상규명을 요구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증거를 수집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부 지시로 최교수를 심사했다”
● “최교수를 中情으로 데려온 이는 中情 감찰실에 있던 최교수의 동생”
● “영장 없이 최교수를 연행하고 가택을 수색했다.”
● “최교수는 두 번 평양에 다녀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채 사고가 일어났다”
● “천지신명에 맹세코 재우지 않은 것 외에는 최교수를 고문한 적이 없다”
● “최교수는 ‘야식 먹은 것이 좋지 않다. 토하고 싶다’며 화장실에 갔다. 그가 구토하는 사이 비위가 상한 김○○ 직원은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 “최교수가 투신한 현장에는 中情 수사관 외에도 경비원이 있었다”
● “최교수 시신은 계단을 둘러싼 철책에 부딪쳐 왼쪽으로 4∼5m 튕겨 나갔다”
● “최교수를 고문치사했다고 믿는다면 나와 김○○ 직원을 대질시켜 달라”
● “김대통령도 군사정권 때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지 않았소.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요”
● “국민 혈세로 움직이는 진상규명위는 선입관으로 나를 모함하고 있다” 》
지난 2월호 ‘신동아’에는 김형태(金炯泰)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이 쓴 최종길(崔鍾吉) 서울법대 교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중간보고서가 게재되었다. 신동아 2월호가 발매된 직후, 1973년 10월 중앙정보부(중정)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 수사공작과 직원으로 최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차철권(車鐵權·75)씨가 격렬하게 항의해왔다. 차씨는 “진상규명위는 최교수가 타살됐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살인자로 모는 것이다. 최교수는 타살된 것이 아니라 투신 자살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7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차씨는 “사람을 모함해도 이렇게 모함할 수는 없다. 최교수와 유가족에게만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인권이 있다”며 상당히 분개했다. 신동아는 차씨의 항의에 대한 대처 방안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러다 차씨가 단 한번도 언론과 인터뷰한 사실이 없다는 데 주목해, “그렇다면 차선생이 아는 최교수 의문사 부분을 공개해달라. 정식으로 인터뷰하자”고 제의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신건(辛建)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할말을 해야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차씨는, 이 제의를 수용했다. 진상규명위에 닷새간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는 차씨는 인터뷰에 앞서 “기자 양반. 인터뷰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교수 사건 주무 심문관으로서 신변관리 소홀로 귀중한 생명을 잃게 한 데 대해 인간으로서,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리고 부(중앙정보부)의 명예를 실추시킨 데 대해서도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라고 밝혔다. 편의상 차씨가 최교수를 남산분청사 지하조사실에서 조사한 것을 1부, 7층 VIP 조사실에서 조사한 것을 2부로 나눠 정리한다.
당시 중정 청사는 이문동과 남산에 나눠져 있었다. 대부분의 중정 사무실은 이문동에 있었으므로 이문동 청사는 본청사, 남산 청사는 분청사로 불렀다. 분청사에는 대공수사국 등이 있었고 부장 사무실은 본청사와 분청사 양쪽에 있었다. 최교수의 프라이버시를 직접적으로 해칠 수 있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표현을 완화했음을 밝혀둔다.
-최종길 교수 건을 인지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1971년 1월인가 2월쯤 서독으로 유학 가 경제학을 공부한 A씨가 귀국 직전, 서독 주재 우리 대사관에 찾아와 자기는 북괴에 포섭됐다며 자수해왔는데, A씨에 대한 심사(審査, 차씨는 수사공작과에서는 수사나 조사라는 용어 대신 심사라는 용어를 썼다고 강조했다)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자수한 간첩은, 관련법에 따라 면책 처분을 받게 돼 있으므로 혐의점이 있어도 기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혐의점을 밝히기보다는 그가 진짜로 자수한 것이냐 위장 자수한 것이냐를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가 진짜로 자수했다면 우리에게 협조할 것이므로, 그의 협조 정도를 검증하는 데 노력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심사하며 저는 그에게 ‘서독 유학기간 당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북한에 갔다왔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스무 명 정도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최종길 교수였습니다. A씨와 최교수는 ㅇ시의 ㅈ고 동창이었습니다. A씨는 ‘최교수는 나보다 먼저 서독으로 유학 가 법학을 공부했다. 최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소리로 “곧 귀국하게 되는데 나는 서독으로 유학 온 것을 후회한다. 너도 조심하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A씨는 여기서 ‘최교수도 십중팔구 나와 같은 처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A씨로 하여금 자필로 진술서를 작성케 한 후 이를 존안(存案) 파일로 보관했습니다.”
-왜 바로 심사에 착수하지 않고 존안처리 했습니까.
“당시 진행하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닥친 일이 많아, 상부에는 이런 첩보가 있다는 보고만 하고 존안처리해버렸습니다.”
-그런데 2년6개월이 지난 1973년 가을, 그 존안자료를 다시 꺼내셨군요.
“존안자료를 다시 꺼낸 것은 제가 아닙니다. 1973년 4월쯤 서울 시내의 대학가에서 산발적인 데모가 있었는데, 특히 서울대의 데모가 심했습니다. 그때 수사1과에서 구라파 간첩단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었는데, 위에서 최교수에 관한 존안자료를 수사1과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저는 ‘잘됐다’는 심정으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10월초쯤 상부에서 최교수 건은 우리 과에서 심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냄과 동시에 존안자료가 되돌아 왔습니다.”
-과장은 퇴근하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퇴근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과장이 9시쯤에 조사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녹지 작업을 하던 심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과장은 최교수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이러저러한 주제로 약 2시간 동안 회유하면서 최교수와 잡담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상급자는 심문관이 심사를 빨리 진행하도록 피조사자와 짧게 대화하고 나가줘야 하는데, 너무 오래 이야기한 것입니다. 과장과 최교수의 이야기가 길어져 야식 시간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통상 저녁 10시가 되면 보조심문관이 청사 밖으로 나가서 사온 족발이나 빵·과일·소주 등으로 야식을 먹는데, 그날은 과장과 최교수 간의 이야기가 길어져, 밤 11시쯤 김직원이 야식을 사오게 되었습니다. 저와 과장·김직원·최교수는 책상 위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야식을 같이 먹었습니다. 야식을 먹는 동안에도 과장은 계속 최교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다가 19일 새벽 1시10분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려 4시간이 넘게 심사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주제로 최교수와 대화한 것이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과장은 ‘몸이 좀 피곤하니 조사실 건너편 방에서 쉬고 있겠다. 그러니 최교수한테는 북에 갔다온 사실에 대해 요점만 간단하게 자술서를 쓰게 하고, 최교수도 피곤할 테니 잠을 재우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최교수에게는 ‘잘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 VIP 조사실을 나갔습니다(그림 1 참조).
여기서 제가 진상규명위에 출두해 조사받을 때 착각을 일으켜 잘못 진술한 부분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진상규명위에서 최교수가 18일 밤 12시쯤에 투신자살한 것 같다고 진술했는데, 진상규명위가 확보한 자료에는 19일 새벽 1시40분쯤으로 돼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위 측은 ‘왜 사망시간이 1시간 40분이나 차이가 나는가’ ‘1시간 40분 사이에 최교수를 고문치사해 건물 밖으로 떨어뜨린 것은 아닌가’ 하고 집중 추궁했습니다.
이러한 추궁을 받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장이 조사실에 들어와 대화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장이 최교수와 이야기하는 바람에 야식을 사오는 시간이 1시간 늦어졌고, 두 사람의 대화 때문에 야식 먹는 시간도 평소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장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잡아먹은 것은 생각지 않고 평소 야식 먹던 대로 생각해 시간을 역산해 보고, 최교수는 밤 12시쯤 투신했다고 진술했던 것입니다.”
-과장이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조사실에 머물다 나갔다는 이야기인가요. 상당히 긴 시간인데…. 과장이 나간 후에는 심사의 고삐를 조였겠네요.
“그렇지요. 과장이 나간 후 저는 김직원에게 책상 위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치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최교수와 마주앉아 ‘북한에 갔다온 것이 과연 한 번뿐이냐’고 캐물었습니다. 최교수는 체념한 표정으로 ‘두 번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녹지해두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최교수는 ‘속이 좋지 않다.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했습니다. 야식을 먹기 전, 그러니까 밤 11시쯤 최교수는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가겠다고 하니 저는, ‘최교수님 아까 화장실 갔다오지 않았어요. 빨리 자술서 쓰고 잡시다’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최교수는 거듭 ‘야식 먹은 것 때문에 속이 좋지 않다. 토할 것 같으니 화장실에 갔다와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보냈는데,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 참,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먹은 야식 중에는 홍시(감)가 있었어요. 김직원이 사온 것인데, 우리 네 사람은 신문지를 깔아놓은 책상 위에서 껍질을 벗겨가며 먹었습니다. 이것이 얼마 후 큰 소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홍시가 어떤 소동을 일으킵니까.
“지금 설명하면 금방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최교수 투신 이후를 밝힐 때 설명하지요.”
-야식을 먹은 다음부터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30여 분간 최교수는 생존해 계셨다는 이야기인데, 이때부터가 사건의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VIP 조사실에는 CCTV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중앙정보부니까 CCTV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녹음시설 같은 것은 해놓았을 것 같은데요.
“CCTV는 물론이고 녹음시설도 없었어요. 지하 조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제가 이렇게 오해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CCTV와 녹음시설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최교수를 7층으로 올린 것입니다. 지하 조사실에서 계속 조사했으면 최교수는 투신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저는 최교수로부터 많은 진술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교수가 투신자살한 것이 맞다면, 최교수가 북한에 두 번 갔다왔다고 한 것은 차선생을 방심케 하기 위한 위장 진술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미 동베를린에 두 번이나 갔다왔다고 자백했으니 위장 진술이라고만 볼 수 없지요.”
-과장이 1시10분쯤에 나갔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사고가 나기까지는 30분의 여유가 있습니다. 음식 부스러기를 치우는 데 5분을 소비했다고 해도 25분이 남습니다. 25분이면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차선생께서는 세번째로 날밤을 새게 됐는데 과장의 예기치 않은 방문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겼으니, 짜증이 많이 나셨겠네요. 짜증이 났으면 최교수를 심하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교수는 두 번이나 북괴에 갔다왔다고 했으니 그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최교수가 진술한 후 펜을 주고 자술서를 쓰라고 요구하자, 최교수는 야식 먹은 것을 토할 것 같으니 화장실에 갔다와서 쓰겠다고 해, 서로 입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천지신명에 맹세코 저는 그 시간에 최교수를 때리거나 고문한 적이 없어요.”
“화장실 창이 열려 있었다”
-최교수를 화장실로 보낼 때 김직원을 따라 보내셨지요.
“최교수의 고집 때문에 할 수 없이 김직원에게 ‘최교수를 모시고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최교수가 먼저 복도로 나가고 이어 김직원이 따라 나갈 때 이상한 예감이 들어 김직원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교수는 심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신변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라’고 당부했습니다(이때부터 차씨는 화장실과 VIP 조사실이 있는 7층 평면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차씨의 그림을 옮긴 것이 그림1이다). 7층 화장실은 복도를 꺾어 들어갑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창이 있는 벽에 몇 개의 소변기가 있고 반대쪽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 일을 보는 좌변기가 있었습니다.”
-1973년인데 좌변기가 있었다고요.
“있었습니다. 7층에는 VIP 조사실뿐만 아니라 부속실도 있어 화장실에는 좌변기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최교수를 따라갔던 김직원에 따르면 최교수는, 먼저 대변을 보는 좌변기 쪽으로 들어가 ‘우웩- 우웩-’하고 구토를 했답니다. 이를 본 김직원은 자기도 따라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비위가 상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만약 저였다면, 대변실로 들어가 최교수의 등을 두드려주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최교수의 마음을 빨리 돌리게 하는 방법인데, 경험이 적은 김직원은 제 비위가 상해 화장실 밖으로 나와버렸다는 것입니다. 김직원이 밖에 나와 있는 사이에 최교수는 투신하기 위해 소변기를 밟고 화장실 창틀 위로 올라가 몸을 우뚝 세운 것입니다.”
-화장실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고요? 10월이면 밤바람이 쌀쌀할 텐데, 더구나 대공 용의자를 조사하는 중앙정보부 건물인데 창문이 열려 있고, 창에는 쇠창살도 없었다고요.
“그렇습니다. 7층의 상당부분은 부속실이라 냄새를 뺀다고 당시에는 항상 화장실 창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 저도 그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그때도 창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최교수도 야식을 먹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으니 창문이 열린 것을 보았겠지요. 7층 화장실에 쇠창살이 설치된 것은 최교수 사건이 있은 다음입니다.”
-두 사람이 화장실에 간 동안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최교수가 돌아오면 자술서를 쓰게 할 요량으로 백지에다 최교수가 써야할 자술서의 제목을 적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화장실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7층의 구조는 이러한데(그림1 참조), 화장실 쪽으로 꺾어지기 직전의 복도에 있는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습니다. 누가 일하고 있나 살펴보니 ‘형님’으로 부르던 수사1과 2계의 김○○ 계장(1978년 작고)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반갑고 또 최교수에 대한 심사 결과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형님, 일이 많나보지요’ 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를 본 김계장은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최교수가 동베를린과 북한에 갔다왔다고 했으니 틀림없는 간첩 아닙니까. 이제 서울대에 침투한 간첩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김계장은 ‘빨리 자술서를 쓰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화장실 쪽에서 ‘아-, 앗!’하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당황해서 지르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그런 고함이 두 번 연이어 들렸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방을 나와 화장실로 가는 복도로 꺾어드니 화장실 문에서 4m쯤 떨어진 복도에서 김직원이 겁먹은 표정으로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복도에는 경비원 한 명이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김직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냐’ 하니, 김직원은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출입문으로 가보니, 최교수가 상체는 이미 창 밖으로 내놓은 채로 화장실 창틀을 우뚝 밟고 서 있는 것 아닙니까. 최교수는 양손을 뒤로 돌려 창틀 기둥과 창을 잡고 있었습니다.
여차 하면 손 쓸 사이도 없이 투신해 버릴 수 있는 상태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화장실 출입문에서 ‘최교수님, 이게 무슨 경솔한 행동이요. 가족을 생각하시오.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하는데, 최교수는 ‘아…아-’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어뜨렸습니다.
에이-!(차씨는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다 틀려버린 것이지 뭐. 최교수가 북한에 갔다왔다고 했을 때는 ‘야! 이제 최교수는 보물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조심조심 다룬 것인데 김직원이 방심해, 사고가 일어났으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사람이 죽었으니, 심사는 사라지고,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일 아니오.”
-최교수가 투신하는 것을 본 사람은 차선생뿐인가요.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김직원도 내 뒤를 따라 화장실 출입문으로 왔으니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직원의 고함으로 각자의 사무실에서 야근하던 직원 3∼4명이 경비원이 있던 복도까지 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교수가 투신하는 것까지는 목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감이 교차하겠군요. 하지만 계속 묻겠습니다. 차선생께서는 최교수가 투신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씀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중정의 심문관들이 최교수를 고문하다 죽이고 당황해서 최교수의 시신을 건물 밖으로 던졌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차선생 말씀과 결합시키면 차선생께서는 과장이 나간 후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하고 최교수는 거부해 물리적인 힘을 가하게 됐고, 그것이 잘못돼 최교수가 사망했다는 의심이지요.
“그러한 의심은 하지 안아도 좋습니다. 저는 자술서 쓰기를 몇번 강조했을 뿐이니까요. 7층 VIP 조사실은 사람을 때리거나 고문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고문은 지하에서, 조사실이 아닌 다른 방에서 합니다. 7층 VIP 조사실은 우리에게 협조한다고 판단된 사람만 올려보내는 특별한 곳이라 고문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질문은 고문치사한 최교수를 끌고 가 화장실 창으로 내던졌다는 것인데, 그게 혼자나 두 사람 힘으로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시신을 끌고 갈 수는 있어도, 1m 높이쯤에 있는 화장실 창문까지 끌어올려 밖으로 던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자 화장실 바로 옆에 있는 비상계단에서 떨어뜨렸다는 주장이 나오더군요.
진상규명위는 사고 현장에 저와 김직원만 있었다고 했으나, 현장에는 김쭛쭛계장과 경비원 그리고 김직원의 고함을 듣고 나온 중정의 수사관들이 있었습니다. 1988년 조사 때 서울지검은 이 경비원을 찾아냈습니다. 당시 경비원은 수원 어디에선가 과일행상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와 중정 직원들의 진술이 의심스러우면 진상규명위는 이 경비원을 찾아내 진술을 들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김직원을 대질시켜 과연 두 사람이 최교수의 시신을 끌고 가 던졌는지 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김직원이 들어오지 않겠다면 저를 미국에 데려가 대질시켜 주십시오. 진상규명위는 직원을 미국에 보냈으나 김직원으로부터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돌아왔답니다. 국민 혈세를 그렇게 써도 되는 것입니까. 차라리 저를 미국에 데려가 김직원과 대질시키세요.”
-두번째 의심은 중정 직원들이 살아 있는 최교수를 비상계단으로 유인해 밖으로 떠밀어 죽였다는 것입니다.
“최교수의 시신은 비상계단 밑에 떨어져 있지도 않았어요. 그것도 저와 김직원을 대질시키고, 경비원을 찾아내 진술을 들어보면 알 것 아니에요.”
-셋째 의심은 중정 직원이 최교수에게 너무 심한 모욕감을 줘, 최교수가 울분을 못이겨 자살했으리라는 것입니다.
“7층 VIP 조사실에는 고문하는 장소가 아니라니까요. 이미 북한과 동베를린에 갔다왔다고 자백한 사람을 왜 심하게 다룹니까. 만약 진실로 우리가 고문하고 심하게 다뤘다면 최교수는 검찰과 법정에서 얼마든지 우리에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최교수는 법 전문가입니다. 판·검사 제자가 즐비한 분이므로, 검찰과 법정에서 중정 직원들에게 고문당했다고 진술해, 얼마든지 저희를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가 고문 당한 모욕감 때문에 자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형태 위원은 신동아 2월호에 ‘중정은 고문으로 간첩 만들고 타살 후 증거를 조작했다’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저는 김위원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확실한 증거가 있어 그러한 내용을 사실인 양 기고했는가. 나는 허무맹랑한 사실을 조작 유포한 것으로 확신한다. 그렇게 하는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본인은 결단코 생명과 명예를 걸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 투쟁까지도 불사할 것임을 첨언하는 바입니다.”
-그럼 뭡니까. 무엇 때문에 최교수가 자살했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써 감춰야 할 뭔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사건 후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최교수가 투신한 직후 김직원에게 ‘비상계단을 통해 빨리 내려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현장을 보존하라. 나는 과장에게 보고하고 뒤따라가겠다’고 하고 과장이 쉬고 있는 방으로 가 사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따라 정신 없이 내려가 그곳에 있던 김직원에게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김직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저는 최교수의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가 있는지 들어보았지만, 이미 호흡은 멎어 있었습니다. 최교수는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바닥에 부딪칠 때 그랬는지 뒷머리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최교수가 떨어진 곳에서 올려다보니 7층 화장실 창 밑이 아니에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최교수가 뛰어내린 방향을 정면으로 하면, 왼쪽으로 4∼5m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시체가 이동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7층 화장실 아래를 살펴보았지요(그림1 참조).
7층 화장실 바로 밑의 지상에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이 계단은 비상계단처럼 밖으로 노출돼 있는데, 밤중에 직원이나 순찰자가 잘못하면 헛디뎌서 빠질 수 있는 모양으로 돼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막기 위해 계단 주변에 철책을 설치해 놓았는데, 7층 화장실 바로 밑에 있는 철책의 한 부분이 뭔가에 강하게 부딪힌 듯 아래쪽으로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화장실에서 투신한 최교수가 철책에 부딪쳐 4∼5m쯤 튕겨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과장이 내려왔기에 저는 최교수가 투신 자살해 절명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과장은 저에게 2층 당직실로 올라가 당직관(성명이 기억나지 않음)에게 최교수가 투신 자살했다고 보고하라고 하여, 그렇게 하고 당직실에서 대기했습니다.”
-당직실에 보고한 것이 몇 시쯤이었습니까.
“새벽 2시쯤으로 기억합니다.”
-당직관은 비상을 걸었겠네요.
“비상을 걸었지요. 수사단장과 수사국장은 물론이고 수사공작과 직원들도 전부 비상소집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찰실의 당직관에게도 통보가 돼, 감찰실 직원들도 일부비상 소집되었습니다. 감찰실 직원들은 제가 최교수를 고문하다 죽였을 것으로 보고 7층 VIP 조사실부터 조사했답니다. 그들이 VIP 조사실 문을 열어보자 최교수를 조사하던 책상 밑에 뻘건 것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고문치사했구나’라고 판단하고 VIP 조사실 문을 봉인했답니다. 그리고 19일 오전에 봉인을 풀고 들어가보니 뻘건 것은 핏자국이 아니고 홍시의 살과 껍데기였다는 것입니다. 야식을 먹다 홍시 껍데기 몇 개를 흘린 모양인데 김직원이 바닥에 떨어진 것까지는 치우지 않은 것입니다.
새벽 3시30분쯤 단장이 도착했습니다. 단장이 당직실로 들어와 ‘어떻게 사고가 났느냐’고 묻기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처음에는 야단을 치고 질책을 하다 나중에는 위로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단장실로 데려가 사고발생경위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오전 6시쯤 사고발생경위서를 작성해 제출하니, 단장은 ‘어찌되었든 최교수 수사건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야 한다. 그러니 수사1과의 정○○ 계장한테 가 조사받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정계장한테서는 오전 7시부터 조사 받았는데 이때 최교수를 조사하며 작성한 녹지와 최교수 집에서 압수한 수첩 등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녹지와 수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방송 사진, 최교수 아니다”
-녹지는 증거능력도 없는 것인데, 있든 없든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최교수를 심사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물증인데, 그것이 없어졌다니까 답답해서 그래요. 그것이라도 있어야 제가 최교수를 심사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습니까. 법적인 증거 능력은 없지만 최교수가 어떻게 진술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진상규명위는 최교수가 죽고 난 후 제가 녹지를 작성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왜 없는 사실을 지어서 말합니까. 제가 거짓말을 했다면 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진상규명위는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면 안됩니다.”
-감찰실 조사는 언제부터 받았습니까.
“정계장의 조사를 받는 중에 감찰실에서는 저를 빨리 데려오라고 성화였습니다. 아까 최교수를 데려올 때 최교수의 동생이 남산 분청사 위병소까지만 최교수를 안내했다고 했는데, 감찰실은 분청사 밖에 있었어요. 감찰실은 제가 최교수를 고문치사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감찰실의 이○○ 과장은 큰 소리로 ‘최교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은 없었는가’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다뤘기에 자살까지 하느냐’며 잡아먹을 듯이 다그쳤습니다. 저를 고문치사자로 모는 그의 추궁에 하도 억울해, 눈물까지 흘리며 ‘가족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안보역군으로 국가에 충성해왔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냐’라고 항변했습니다.
제가 고문했을 것이라는 감찰실의 오해는 그날 오전 감찰실 직원들이 VIP 조사실의 봉인을 풀어본 후에 풀렸습니다. 그들이 본 벌건 핏자국은 야식 때 먹다 흘린 홍시 살과 껍질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찰 조사는 오후 5시에 끝났습니다.”
-지난 1월25일 SBS의 ‘뉴스추적’ 프로그램은 최교수의 뒷 나신(裸身)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엉덩이와 넓적다리 등에 피멍이 있던데요. 그 피멍은 최교수를 때린 흔적은 아닌가요. 외국의 법의학자들은 전기고문의 흔적이 있다는 소견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 사진은 저도 봤어요. 하지만 제가 진상규명위에서 본 최교수 사진과는 달라요. 진상규명위에서 보여준 사진은 최교수의 엉덩이쯤에 굵은 피멍이 일자로 그어진 것이었습니다. 진상규명위는 일자(一字) 피멍을 가리키며 최교수를 때린 것이 아니냐고 캐물었습니다. 저는 ‘이 피멍은 7층에서 투신한 최교수가 지하 계단 주변 철책에 부딪쳐 튕겨나갈 때 생긴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철책에 부딪칠 때의 충격이 아니면 그렇게 굵은 피멍이 일자로 생길 수 없습니다. 전기고문은 물론이고 고문을 한 적도 없어요.”
-SBS가 방영한 사진 중에는 최교수의 발바닥이 예리한 것에 찔려 살 속에 있는 조직이 밖으로 나온 것도 있던데.
“최교수의 발은 어디에 찔린 적이 없어요. SBS가 보여준 사진은 최교수의 시신을 찍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진상규명위에 찾아가 “그 사진이 최교수의 시신을 찍은 것이 맞느냐”고 물어 보았는데, 그들은 “분명히 최교수의 시신을 찍은 사진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했습니다.
“기록이 어찌 돼 있건 최교수의 발바닥은 찔린 적이 없어요. 사진을 잘못 분류했을 것입니다”
-최교수가 떨어진 현장은 충분히 보존돼 조사가 이뤄졌습니까.
“저는 단장실에서 사고 경위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사1과와 감찰실의 조사를 받느라, 최교수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정확히 몰라요. 제가 듣기로는 19일 새벽 현장으로 달려온 안○○ 대공수사국장(당시 현직 검사)이 새벽 4시40분쯤 서울지검 공안부의 당직 검사를 불러내 검시를 하게 하고, 최교수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간 것으로 압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 현장은 가족들이 와서 의문이 풀릴 때까지 살펴볼 수 있게 보존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치워버렸습니다. 유족들이 보았으면 지금 같은 의혹은 크게 줄어들었을 겁니다.”
-서독 유학중일 때 최교수를 만났다는 노봉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프랑스에 머물며 구라파 공작망을 구축했던 노봉유는 주로 ㅈ고와 ㅇ고 출신 유학생들을 포섭해 북한으로 보낸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북괴로부터 적잖은 공작비를 받아썼겠지요. 동베를린간첩단사건과 구라파간첩단사건이 있은 후 그는 북한으로부터 소환받은 것으로 압니다. 공작금을 많이 갖다 썼는데도 조직은 노출되고 실적이 없자 책임 추궁을 하려고 불렀겠지요. 그러자 아프리카의 한 중립국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태국인가 월남 여자를 데리고 살다 몇 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그 여자에게 ‘나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고 북조선 사람도 아니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징계위원회에서 징계를 받으셨겠지요.
“그 이야기를 합시다. 징계위가 열리면 틀림없이 ‘김직원이 최교수를 데리고 화장실에 갈 때 제대로 주의를 주었느냐’고 물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특채된 사람으로 나이가 있지만, 김직원은 정규과정 출신이고 전도가 양양한 사람 아닙니까. 군대로 치면 육사 출신이니 앞길을 막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 친구에게 해가 가지 않게끔 제가 책임을 지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징계위의 위원장은 김치열(金致烈) 차장이었는데, 김차장은 ‘김직원에게 주의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는 사흘째 밤을 새며 최교수를 조사할 때라 정신이 없었다. 또 김직원은 정규과정 출신이라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것이라고 믿고 주의를 주지 않았다. 최교수 사건은 주 심문관인 저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니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결과 저에게는 견책처분이, 김직원에게는 1개월 감봉 처분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같으면 여론 때문에라도 그렇게 가벼운 징계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영장도 없이 연행과 가택수색을 했고, 48시간 이상 피조사자를 데리고 있다가 사건이 일어났으니 지금 같으면 더 큰 책임 추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책임은 상급자들도 함께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지시로 이뤄진 것인데 실무자들만 징계하면 불공정합니다. 또 그때는 시대가 그러했고…. 물론 지금 같으면 훨씬 더 큰 징계가 내려졌겠지요. 구속 수감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 문제 때문에 제가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찌되었건 최교수가 유명을 달리했으니 유가족에게는 미안하시겠군요.
“미안하지요. 우리의 부주의로 생때 같은 사람이 투신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미안하고 말고요.”
-최교수의 동생 최○○씨는 계속 중정에 근무했나요.
“1980년까지 근무하다 퇴직해 미국으로 이민간 것으로 압니다. 중정에 있을 때는 최교수 사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미국에 간 후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정말로 형이 타살됐다고 믿었다면 형이 사망한 직후 바로 중정을 떠나 중정과 싸웠어야지….”
-최교수 사망사건은 당시에 정치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됐습니다. 야당이 서민호(徐珉濠) 의원을 중심으로 한 진상조사반을 만들어 조사에 착수했습니다만 최교수가 타살됐다는 것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지검의 조사와 지금의 진상규명위 조사까지 모두 세 번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최교수가 타살됐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수사 및 조사기관이 최교수가 타살됐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면, 반대로 차선생께서는 최교수가 간첩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 것 아닌가요. 증거 능력이 없는 녹지와 최교수 집에서 압수해왔다는 수첩마저 사라졌으니….
“하지만 최교수는 심문 과정에서 북한에 갔다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지금은 다 부질없는 것이 되었지만….”
-징계 이후에도 대공수사관을 하셨나요.
“예. 계속해서 수사공작과에서 근무한 저는 최교수 사건의 불명예 회복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최교수 사건 4개월 후인 1974년 2월부터 4월 사이 울릉도와 서울·대구를 무대로 암약하는 간첩 10여 명을 일망타진하는 주무공작관 직을 수행하였습니다(울릉도 간첩단 사건).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특진하며, 어느 정도 불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12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대전지부 대공수사과장으로 재직하다 퇴직하였습니다.”
-최교수 사건은 29년 전 일인데 무척 소상하게 기억하시는군요. 저는 제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들도 한 달만 지나면 선후가 헷갈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기부를 퇴직한 후 최교수 사건에 대해서는 잊고 지냈는데, 1988년 서울지검에 고발돼 조사를 받을 때 최교수 사건을 약간 기억해 내게 되었습니다. 10년 후인 1998년 SBS 취재진과 최교수의 아들이 우리집을 찾아오고, SBS는 그들이 취재한 최교수 사건을 대대적으로 방영했습니다. 그 프로를 보고 울분이 터져, 최교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나름대로 기술해 놓았습니다. 기자회견을 열 생각으로 발표문을 준비했고 최교수를 심사하게 된 경위와 최교수의 자백 내용 등을 문답 형식으로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지만 그때의 자료가 있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정 재직기간 중에 많은 간첩 사건을 다뤘기 때문에, 최교수가 북에서 교양을 받은 장소와 교양 받은 내용, 지령 받은 내용 등은 다른 간첩의 것과 뒤섞여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언제까지 근무하셨습니까.
“1979년 10·26사건 후 중정은 안기부로 바뀌는 등 창설 이후 최대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대규모로 직원들을 해고했는데 그때 저도 나왔습니다. 1980년 7월 우리 나이로 54세 때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재미있어요.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더니 1980년에 우리가 강제해직된 것을 인정해 보상금을 주더라고요.
이봐요 기자선생, 세상사는 새옹지마입니다. 전화위복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의문사 진상규명위에서 살인자란 누명을 쓰고 조사받고 있지만, 뒤집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최교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교수를 구타하거나 고문하지 않았다는 것까지는 정말 믿기 어렵군요.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했을 텐데요. 10·26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정승화 대장도 12·12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갔을 때 대장 계급장을 떼이고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저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정말로 최교수를 고문하지 않았습니까.
“잠 재우지 않은 것을 빼고는, 제 생명을 걸고, 천지신명에게 맹세코, 최교수를 고문하지도 또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유당 시절 제가 육군 특무부대 장교로 복무할 때 어머니는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면 설사 너에게는 해가 오지 않더라도, 자손 중에는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남에게 절대로 악행을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어머니 말씀 때문이라도 저는 부정하지 않았고,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제일 중요한데, 저는 양심껏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살 만큼 살아서 머지않아 저승에서 최교수를 만나게 될 터인데, 더구나 모든 것의 시효가 끝난 지금 뭐가 두려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늘에 맹세코 저는 최교수의 뺨을 한 차례도 때린 사실조차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일을 하다 이런 꼴을 당한 게 아닙니다.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과 신건 국정원장한테도 할말을 할 것입니다.”
-두분께 무슨 말을 하실 겁니까.
“내가 대통령께 호소문을 써보냈습니다. 내용이 뭔지 압니까. ‘김대통령께서도 군사정권 때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선 적이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다. 그러니 나의 누명을 벗겨주시오. 성역 없이 철저한 조사로 사실을 규명해 주시오’ 이렇게 써보냈습니다. 국정원장한테는 좀더 많은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국정원 직원이 조직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인데 국정원이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조직을 위해 일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있는데 보호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국정원을 위해 일할 것인가’ 이렇게 탄원했습니다.
진상규명위에도 할말이 많습니다. 그 기구는 대통령 직속으로 국민 혈세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공산당과 싸워온 나를, 선입관만 갖고 허무맹랑하게 모함하고 있어요. 세상이 바뀌면 내가 진짜로 진상규명을 요구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누가 국민 혈세를 낭비했는지 따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두고보세요.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교수를 잃은 유가족들에게 삼가 부처님의 가호를 비는 바입니다.”
차씨와는 최교수 사건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는 최교수가 북한 공작조직에 포섭된 사람으로 확신한다고 했으나, 이를 증명할 물증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최교수가 북한 공작원이 되려면, 그와 중정은 최교수나 최교수 집에서 난수표나 권총·무전기 등의 물증을 찾아냈어야 한다. 최교수로부터도 자술서를 받아 6하 원칙대로 최교수가 북한에 포섭된 경위를 ‘특정(特定)’했어야 한다. 물증과 자술서가 없는데도 중정은 1973년 10월25일 구라파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며 최교수를 북한 공작조직에 포섭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은 최교수에 대해서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이 고(故) 최종길 교수에게 내린 무혐의 결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중정의 발표만 먼저 언론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최교수는 그동안 북한 공작조직에 포섭된 서울대 교수라는 불명예를 떠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정이 영장 없이 최교수를 연행해 48시간 이상 붙잡아 두고, 최교수의 집까지 수색한 것은 분명 불법 행위다. 차씨는 이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차씨는 당시로서 일반적인 행위였다고도 주장했다. 중정을 비롯한 당시의 수사 및 정보기관은 이러한 불법을 당연하다는 듯이 행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기관은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최교수가 간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것과 중정이 불법 행위를 했다는 것은 차씨와 중정의 주장을 100% 믿을 수 없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최교수가 자살했느냐 타살됐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최교수가 타살됐을 것으로 의심하는데, 최교수 의문사 사건은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난해 진상규명위는 전직 중정 간부가 ‘부하로부터 중정 수사관들이 최교수를 밀어서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직접 목격담이 아니다. 제3자(전직 중정 간부)가 다른 제3자(부하)에게 들은 것을 전달한 것이라 100% 믿기에는 한계가 있다. 최교수가 타살되었느냐는 문제는 최교수가 북한에 포섭됐느냐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증과 관련자의 자백을 통해 특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다. 주어진 책임이 막중한 만큼 진상규명위는 하루빨리 조직을 정비해, 보다 정교한 조사 작업을 벌여 최교수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최교수 사건 조사 만료일인 3월9일이 오기 전에 조사 결과를 국민 앞에 명쾌히 밝혀야 할 것이다.
-최교수를 간첩혐의로 검거한다면 서울대학교의 학생데모를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겠네요.
“얻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상급자들이 기대할 일이고, 우리 같은 실무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최교수와 같은 법학계의 저명인사를 다룬다는 것이 눈앞에 닥친 부담이었습니다. A씨의 진술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다른 대학도 아닌 서울법대의 교수를, 그것도 학생처장까지 맡고 있는 사람을 조사하라니,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에게 배운 제자 중에는 판·검사가 즐비할 텐데, 잘못 조사하면 담당 심사관만 당하지 않겠습니까. 실무자로서는 이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최교수의 친동생인 최○○(현재는 미국 거주)씨가 공채 9기로 중앙정보부에 입부(入部)해,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감찰실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직원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우리 같은 일반 직원들은 의식적으로 감찰실과의 마찰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중앙정보부(안기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좌파 활동으로 보고 대공(對共) 파트에서 담당케 하지 않았습니까. 차선생께서 근무하셨던 5국(대공수사국)은 당연히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운동 세력을 잡으러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최교수를 조사한 것이겠군요.
“아니에요.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에는 학생운동은 6국에서 다루고, 5국은 순수 대공사건과 특명사건만 다뤘습니다.”
“최교수 연행 위해 구수회의 열어”
-그렇다면 최교수에 대한 조사는 순수 대공 용의점 때문에 시작됐다는 이야기인가요.
“그것 역시 업무를 지시하는 상급자들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최교수 건이 우리에게 지시된 것으로 봐서는 그렇다고 해석해야겠지요.”
-최교수 건이 수사공작과로 되돌아온 것이 부담스러웠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교수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폭언이나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가했다가 그 사실이 최교수의 동생이 근무하는 감찰실에 알려지면 그 날로 징계위에 회부돼 처벌받게 됩니다. 설사 구타나 폭언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최교수에게서 아무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방면한다면, 그 역시 감찰실의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교수가 숱한 판·검사 제자를 거느린 서울법대 교수라는 것도 버거웠고요.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 최교수 건은 피하고 싶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A씨로부터 최교수의 혐의점에 관한 진술을 확보했을 때는 한 건 건졌다고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존안한 것이고….
“존안철은요, 이러이러한 첩보가 있다고 보고한 후 심문관 개인이 보관하는 것입니다. 심사는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수사공작과는 공작을 하면서 심사하는 곳인데, 존안철에 남겨놓은 첩보 중에서 증거를 수집한 후 심사해 봐야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심사계획서’를 만들어 상급자에게 올립니다. 심사계획서에는 ‘이러한 사건을 공작·수사하려고 하는데 인원은 몇 명 필요하고 예산은 얼마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적습니다. 이 심사계획서를 국장이 결재해줘야 비로소 심사팀이 구성되고 필요한 예산이 나와야 심사를 하게 됩니다.
A씨로부터 최교수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저는 할일이 너무 많아, 존안만 하고 증거수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구라파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수사1과로 최교수 존안자료를 넘기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잘 됐구나’ 하는 심정으로 넘겨준 것입니다. 확실한 정보라면 다른 과에 넘겨주는 것이 아깝지만 불확실한 첩보라면 넘겨주는 것이 뱃속 편하지요.
아마 수사1과의 조사 과정에서 최교수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지시가 내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중정 같은 정보기관에는 ‘보안(차단)의 원칙’이라는 게 있어서 타부서에서 하는 일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교수 자료를 넘긴 후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10월초 존안철이 다시 우리 과로 넘어왔습니다. 추측입니다만, 수사1과에서도 최교수가 부담스러워 조사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다시 우리 과로 넘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 심사에 착수하셨나요.
“현직 서울법대 교수고 동생이 감찰실에 있는 사람을 심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우리 계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위에서 내려보낸 사건은 대충 심사계획서를 작성해 바로 심사에 착수하는데, 심사할 자료는 없고 상대는 버거우니 모두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때문에 우리 계는 구수회의를 열고 최교수의 연행절차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잠깐 최교수의 연행절차를 논의했다고 하셨는데, 영장을 갖고 연행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존안철에 있는 첩보뿐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니 영장이 있을 수 없지요. 영장도 없이 법 전문가를 중정으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구수회의를 한 것인데 결론은 최교수의 동생인 최○○씨의 도움을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수사공작과에는 공채 7기생이 세 명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채 9기인 최○○씨에게 ‘형님을 자진출두 형식으로 중정으로 나오게 해달라’고 협조를 구하자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 과의 공채 7기들은 최씨에게 이러한 부탁을 했고, 최씨는 형님을 찾아가 말을 전했습니다. 최교수는 서울 성북구 미아리에 살고 있었는데, 형을 만나고 돌아온 최씨는 ‘형님이 학생처장직을 맡고 있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이 많다. 그것을 정리해놓고 닷새나 1주일 후에 나오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일이 힘들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생 최씨가 가면 바로 다음날 최교수를 데려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닷새 후에나 온다니…, 최교수는 법에 정통한 사람이니 얼마든지 증거를 인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윗분들에게 이러한 불만을 내놓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상부의 지시를 따르면서 영장 없이 최교수를 데려오는 것은 최씨가 최교수를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최교수는 얼마 만에 오셨습니까.
“닷새인지 1주일 만인지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아요. 아무튼 1973년 10월16일 최교수는 충무로에 있는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에서 동생과 우리 과의 변○○ 직원을 만나 중정으로 들어오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교수는 약속시간보다 2시간이 늦은 오후 4시쯤에야 호텔 커피숍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남산 분청사 정문까지 와, 동생과 헤어지고 변직원과 함께 분청사 지하조사실로 안내되었습니다. 자료를 보면 이때의 시간이 10월16일 오후 4시40분쯤이었습니다. 최교수가 남산 분청사로 나온 것은 자진출두입니다.”
-최교수에 대한 심문은 혼자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제가 최교수 조사를 담당하는 주심문관이 되고, 변○○씨가 보조심문관을 맡았습니다. 보조심문관은 심문에는 관여하지 않고 말 그대로 주심문관을 보좌합니다.”
-상부에서는 최교수가 출두하면 어떻게 다루라는 지시를 내렸겠지요.
“있었습니다. 장○○ 수사단장이 저에게, ‘상대는 서울법대 교수고 동생이 감찰실에 있다. 따라서 절대로 폭언을 쓰지 말고 신사적으로 대하면서 회유해,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하라. 혐의 내용을 빠른 시일 내에 밝혀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지시를 들을 때 제 가슴속에서 울컥 불만이 치솟았습니다.
우선 수사1과에 넘겼던 사건을 몇 개월 뒤 수사공작과로 되돌려보내 증거 수집도 못한 상태에서 심사하라고 한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사전에 ‘우리 회사로 나와달라’고 연락해놓고 증거 인멸이 가능하도록 닷새인지 1주일인지 지난 후에야 최교수를 자진출두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최교수에 대한 심사는 힘든 과제였습니다.”
-증거도 없이 사람을 불렀으니, 증거부터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겠군요. 그래서 무리한 수를 쓰게 된 것일 테고요.
“무리한 수를 쓰다니…, 절대 아닙니다. 상대는 서울법대 교수입니다. 증거 없이 불러들인 사람을 조사할 때 저는 이런 방식을 씁니다. 먼저 백지를 앞에 내놓고 ‘진술서’라고 쓴 후 원적·본적·주소·직업·성명·생년월일 등의 인적사항과 전과 관계, 재산 관계, 학력과 경력, 가족 관계 등을 쓰게 합니다. 그리고 서독 유학 동기, 유학 기간 중에 접촉한 사람과 동독을 여행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하나하나 제목을 줘가며 쓰게 합니다. 이렇게 같은 진술서를 밤새워 반복해서 쓰게 하면,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는 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달라진 부분을 별도로 기록해 두었다가 한 시점을 택해, ‘왜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은 이렇게 달라지는가. 이 차이가 무엇이냐’고 파고드는 것입니다.”
-최교수가 작성한 진술서의 내용 중에서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있던가요.
“있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최교수의 서독 체류기간 중에 어떤 혐의점이 있는지를 찾는 데 주력했습니다. 최교수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생활비는 필요한 것 아닙니까. 최교수는 생활비는 ㅇ시에 거주하는 형님이 매달 송금해 주었다고 썼습니다. 다음날(17일) 아침 저는 최교수의 진술 내용을 확인해보기 위해 ㅇ시로 직원을 보냈습니다. 동시에 다른 혐의 사실은 없는가 최교수를 추궁하고 회유했으나 17일 오후까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ㅇ시에 갔다온 직원이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최교수의 형을 만나 확인해 보았다. 형은 박봉을 받는 월급쟁이이고 딸린 식구가 많아 동생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고 했다. 처음 두 번인가 우체국을 통해 동생에게 돈을 부쳐주었다고 해, 우체국에 가서 송금확인서를 떼어왔다.’
이때쯤 최교수 건을 먼저 내사했던 수사1과의 동료가 ‘우리도 그 부분을 알아봤는데 최교수의 형은 두 번밖에 돈을 부쳐주지 않았다고 했다. 딸린 식구가 있어 형은 동생의 생활비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고 귀띔해 줬습니다. 이때부터 최교수에 대해 좀더 세밀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최교수의 가택을 수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최교수를 영장 없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왔으니, 최교수의 집도 영장 없이 수색하려고 한 것이겠네요.
“예, 전부 영장 없이 했습니다. 법 전문가인 최교수의 가택마저도 영장 없이 수색하려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중에 영장 없이 최교수 집을 수색한 것이 문제가 되면 큰일이 날 수밖에 없기에 최교수에게, ‘집에 누가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최교수는 ‘부인은 소아과 의사인데 현재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 있어, 식모만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식모에게 중정 직원들이 찾아가면 집을 살펴볼 수 있도록 협조해주라’는 쪽지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최교수는 순순히 써주었습니다.
그날(10월17일) 밤 우리 직원들은 쪽지를 갖고 최교수 집에 가 식모에게 보여주고, 식모의 협조를 얻어 가택수색을 했습니다. 저는 가택수색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가택수색을 하고 온 직원들에 따르면 이미 집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교수 집 다락 한 구석에서 오래된 수첩을 하나 찾아냈다며 건네주었습니다. 그 수첩을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 주소가 기재돼 있었고, 최교수의 ㅈ고 선배이자 북괴(차씨는 북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공작조직의 구라파 거점책인 노봉유(盧鳳裕·당시 프랑스 거주)와 동베를린사건 때 한국에서 독일로 도주한 재독(在獨)간첩 이재원(李在元)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일본 주소는 노봉유와 연락하는 중간 연락처의 주소일 것으로 추정하고, ‘이 주소는 무슨 주소인가’ 하고 캐물었습니다. 최교수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습니다. 이런 것 등을 추궁하며 그날도 철야 심문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18일) 새벽 4시쯤 송금확인서를 보여주며 ‘서독 유학중에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했느냐’고 따지자, 최교수는 한풀 풀죽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최교수는 이재원에게서 800마르크를 빌린 적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후 저는 ‘최교수의 인격을 존중한다. 신사적으로 믿음을 갖고 이야기하자’고 회유했습니다. 그날 오후 4시30분쯤 최교수는 한숨을 푹 쉬더니 ‘서독 유학중인 어느 봄날 한 친구가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하기에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 밤중에 어느 역에서 내렸다. 역 광장으로 나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군인이 있어, “어-” 하고 쳐다보니 동독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동베를린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교수가 지하철을 타고 동베를린으로 갔다고요.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는 이야기입니까?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자료를 살펴보면 동독 정부는 1961년부터 베를린에 장벽을 쌓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베를린장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저는 몰라요. 그러나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고 할 때는 지하철을 타고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을 때입니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은 여행자들이 양쪽으로 오고가는 것을 단속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최교수와 같이 동베를린으로 바람 쐬러 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고가 일어나기 전인 18일 밤 야식을 먹고 난 후, 최교수는 노봉유라고 밝혔습니다.”
-최교수의 혐의점을 최초로 밝히며 자수한 A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수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이 한국 생활을 했습니다. 상세한 것은 그분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습니다.”
-10월18일 ‘오후 4시30분쯤에’ 최교수로부터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자백을 받았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퇴근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최교수를 48시간 동안 잡아놓은 것이 되네요. 임의동행을 했다면 그렇게 오래 잡아놓을 수 없을 텐데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영장 없이 임의동행했다가 만 48시간이 넘도록 혐의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면 데려온 사람을 귀가 조치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이 무시되던 시절이고, 또 사건이 사건인 만큼 임의동행시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들이 동·서베를린을 자유롭게 오갈 때라고 하셨는데,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대공 용의점이 됩니까.
“지금의 관점에서만 보지 말아 주십시오. 당시 한국에서는 동베를린 간첩사건이 있은 다음이라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자백만 받아도 바로 간첩으로 볼 때입니다. 정상적인 한국인이라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베를린에 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입니다. 저도 시대 속의 인물이라 그 시대의 통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18일에야 최교수로부터 이재원에게 800 마르크를 빌렸다는 것과 노봉유와 함께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진술을 받았다는 얘기군요. 수십 초면 다 말할 수 있는 것을 2박3일을 꼬박 새운 후 겨우 받아?것이군요. 이 시간은 매우 긴 것이고,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것은 최교수에게는 매우 불리한 진술입니다. 이렇게 불리한 진술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받아냈으니, 구타나 폭언 같은 고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최교수가 타살됐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지났고, 최교수를 고문했다고 해도 역시 시효가 지났습니다. 최교수를 고문한 적은 없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요.
“천지신명에 맹세코 저는 최교수를 고문한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가 일흔 여섯이요(한국 나이로). 세상을 살 만큼 산 내가 뭐가 무서워 거짓말을 하겠소. 나도 저승에 가면 최교수를 만날 텐데, 왜 거짓말을 하겠소. 서울대 교수다, 동생이 감찰실에 있다, 윗분들이 크게 관심을 가진 사안이라는 중압감에 눌려서 최교수를 때리거나 폭언을 퍼부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최교수를 재우지 않은 것을 고문이라고 한다면 고문이겠지. 그러나 당시 그것은 일반적인 심사 방법이었소. 최교수를 재우지 않은 것 외에는 때리거나 폭언한 적이 없어요.”
-다른 대공사건을 심사하며 피조사자를 고문하거나 때린 적은 없습니까.
“저도 사람이라 사람에 따라 그렇게 한 적은 있습니다. 1978년 5월 원산을 출항한 북괴 공작선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공해로 내려와 일본 어부들이 쳐놓은 대게잡이 그물을 걷어올려, 대게를 훔쳐 원산으로 돌아가다가 잘못해서 속초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공작선은 잘못 들어온 것을 알고 황급히 북쪽으로 도주하다 우리 해군 함정에게 발각돼 제지당했습니다. 그러자 공작선이 선제 기관포 사격을 하고, 우리 함정도 대응 사격을 해 이를 격침시켰습니다(5월19일).
공작선이 가라앉기 전에 타고 있던 공작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중 8명이 아군 함정에 구조돼 생포되었습니다. 합심조가 구성돼 이들을 신문(訊問)했으나 성과가 없어, 상부 지시로 수사공작과가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잡힌 만큼 그들은 지독히 항거하더군요. 빨갱이도 그런 빨갱이는 없을 것 같아 새벽에 직원을 시켜 손 좀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 시내 관광을 시켜주며 회유하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의 풍부한 물자와 자유를 보고 뻣뻣이 버티던 이념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해 4월20일, 대한항공 707편이 항로를 잘못 잡아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가 소련 전투기의 사격을 받고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케이시오 호수에 동체착륙하는 사고가 일어났어요. 냉전이 첨예할 때인데 대한항공기가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으니 국제적으로 큰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그런데 예상을 깨고 소련이 대한항공의 승객을 순순히 돌려보내줬어요.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도 똑같이 하자는 논의가 있어, 우리가 회유시켜 놓은 북한 공작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전부 돌아가게 됐으니, 그들은 무척 곤란해졌습니다. 북괴에 돌아가 어느 누구 하나가 잘못 벙긋하면 전부 다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은 6월7일 판문점을 통해 북괴로 넘어갔는데, 판문점에서 우리가 준 선물은 물론이고 옷까지 벗어던지는 등 한바탕 쇼를 한 후 팬티바람으로 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특수한 경우 말고 일반적인 조사를 하는 경우에도 고문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거의 폭력을 쓰지 않아요. 피조사자가 고집을 부리면 야전침대 봉(棒)을 뒷무릎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아 있으라고 시키는 정도지요. 아무튼 천지신명에 맹세코 나는 최교수를 재우지 않은 것 외에는 단 한 차례도 때리거나 폭언을 퍼부은 적이 없어요.” -최교수가 혐의점을 털어놓았다는 18일부터는 상급자들이 큰 관심을 기울였겠네요. “그게 일을 망친 출발점입니다. 상급자들이 지대한 관심만 기울이지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최교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윗분들의 관심이 많으면 심문관은 보고할 내용과 보고대상자가 많아져 심사하는 데 아주 애를 먹게 됩니다.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고 진술하고, 제가 재차 캐묻고 있을 때인 18일 오후 4시30분쯤 우리 과의 안○○ 과장이 심사 상황이 궁금해 지하 조사실로 내려왔습니다. 안과장은 조사실 문 밖에서 저와 최교수가 동베를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바로 들어오지 않고 문을 두드렸답니다. 보조심문관 변직원이 문을 열고 나가자 과장이 ‘동베를린 운운하는데 무슨 얘기인가’ 물었고, 변직원은 ‘저는 뒷전에만 앉아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과장이 저를 조사실 밖으로 불러내 거듭 물었습니다. 저는 ‘과장님 지금부터 풀리기 시작합니다.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고 실토했으니 최교수는 간첩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서울대학교 내에서 활동하던 간첩을 검거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퇴근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단장께 보고하지 마시고 그냥 퇴근하십시오. 내일(19일) 출근하시면 단장께 보고할 자료를 작성해 놓겠으니 그때 보고하십시오’라고 신신당부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고하라’며 2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대공수사단장은 장○○씨였지요. 왜 장단장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단장한테 보고하면 단장의 성격으로 봐서는, 당장 지하실로 내려와 과연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고 자백했는지 확인하고 이것 저것 물으며 직접 회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고 심문관은 보고할 것이 많아져 심문 속도가 늦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저 같은 실무자들은 완벽한 진술을 받아낼 때까지는 가급적 상급자에게 보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안과장이 올라가고 최교수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면 조사를 서둘렀겠네요. “아닙니다. 서둘면 안됩니다. 입을 열기 시작한 피조사자는 심경 변화가 극심해지기 때문에 정말로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보물 다루듯이 신중히 다뤄야 합니다. 과장이 올라간 후 다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최교수와 마주 앉았습니다. 최교수는 제가 책상에 내려놓은 담배를 보더니 한 개비 달라고 했습니다. 최교수는 담배를 끊은 지 10여 년이 됐다고 했는데, 속이 타는지 담배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담뱃불을 붙인 그는 한 모금 깊이 빨더니, 뭔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동베를린 여행 이후의 최교수 활동을 추궁하려던 저는 방향을 바꿔, 천천히 회유·위로하면서 최교수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최교수로부터 어릴 적 가정환경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여 분 지났을까…, 갑자기 조사실 문이 열리며 단장과 과장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과장은 그냥 퇴근하지 않고 단장에게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자백을 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크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단장은 대뜸 최교수에게 ‘고생이 많습니다. 조사받는 동안 수사관이 폭언이나 구타·고문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최교수는 ‘그런 것은 없었는데 잠을 못 자서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단장은 제게 ‘왜 최교수님을 재우지 않았는가’라고 힐책했습니다. 저는 ‘단장님, 이 바쁜 시간에 밤에 재우고 하다가는 언제 조사합니까? 최교수님만 못 잔 게 아니고, 저희도 똑같이 자지 못했습니다’라고 대꾸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단장이 심문관 사정을 몰라서 질책했겠습니까. 다 알면서 한 것이지. 그렇게 해놓고 단장이 ‘동베를린에 갔다왔습니까?’하고 묻자, 최교수는 ‘그래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귀로 최교수의 자백을 확인한 단장은 제게, ‘최교수님은 서울법대의 교수님 아닌가. 이런 분을 어떻게 지하실에서 조사하느냐? 당장 7층으로 모셔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 때문에 최교수는 오후 7시쯤 7층 VIP 조사실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왜 바로 올라가지 않고 2시간 후에 올라갔습니까. 그리고 7층 VIP 조사실은 어떤 곳입니까.
“대공처 합심계에서 관리하는 곳입니다. 수사단에서 그곳을 사용하려면 대공처에 사용협조를 의뢰하고, 그곳에서 승인해줘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7층 VIP 조사실에서는 제3국이나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자수한 거물 간첩이나, 역용(역공작) 가치가 있는 간첩, 합심(합동 심문)이 필요한 인물을 심사하는 곳입니다. 7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공처 합심계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협조전을 만들어 보내야 합니다. 2층의 과 사무실로 올라간 저는 과원들 들으라고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언제 협조전을 만들어 협조를 구하는가. 지하실에 그냥 두면 오늘 밤중으로 결정이 날 텐데, 시간만 뺏기는구나’ 하고 투덜대며 협조전을 만들었습니다. 협조전을 만들어 합심계의 승인을 받고, 지하 조사실에서 최교수에게 저녁 식사를 들게 한 후 저녁 7시쯤 VIP 조사실로 올라갔습니다.”
-간부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니 VIP 조사실에서는 심사 속도를 높였겠네요.
“그 전에 얄궂은 제 운명부터 이야기 좀 합시다. 애초의 심사계획서에는 저와 변직원이 18일 퇴근 때까지 최교수를 심사하고, 이후에는 다른 팀이 심사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윗분들은 ‘최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왔다는 것을 진술하기 시작했으니 밤새워 조사해 북한에 갔다왔다는 것까지도 자백을 받고 내일(19일) 아침에 다른 주심문관과 교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보조심문관은 심사계획서대로 교체해, 변○○ 직원에서 김○○ 직원으로 바뀌었습니다. 18일 저녁 7시부터 저는 김직원을 데리고 다시 밤새워 최교수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생전의 최교수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김○○ 직원은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되는군요. 김직원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고 후 김직원과 변직원은 어떤 인생 행로를 걸었습니까.
“김직원은 정규과정 7기생입니다. 7기생들은 1970년 12월에 수사공작과에 배치되었으니, 실무 경력은 3년이 안되었습니다. 최교수 사건을 겪은 후 김직원은 통신국으로 옮겨가 근무하다 1988년 서울지검 조사를 받은 후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정이 떨어졌겠지요. 변직원은 저처럼 특채된 사람으로 대공수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최교수 사건이 있은 후 한참 더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브라질로 이민갔습니다.”
인터뷰 도중 차씨는 자신의 인생 역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혔다. 차씨의 인생유전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짐작케 하는 요소이므로 간략히 소개한다. 1927년 경남 함안군 칠서면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차씨는 네 살 때인 1931년 가족들을 따라 일본의 교토로 이주했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그는 1945년 광복 후 가족을 따라 경남 함안군 대산면으로 돌아왔다. 일본 생활에 익숙했던 차씨는 한국 생활을 매우 답답해했는데 답답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무 살이던 1947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제15연대(마산 주둔)에 자원 입대했다.
이듬해 15연대는 여순반란사건 토벌 작전에 투입됐는데, 여기서 그는 공을 세워 일계급 특진하고, 1950년 2월에는 육군 정보국 순천지구 CIC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CIC는 그후 특무대-방첩대-보안대로 이름을 바꾸다가 지금은 국군 기무사령부가 되었다. 6·25전쟁 때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주로 포로 신문에 참여하며 대공 수사 경험을 쌓은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준위까지 진급했다. 그리고 만 29세이던 1956년 갑종 118기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장교가 된 그는 육군 특무부대에 근무하다 1966년 1월말 계급정년(연령 초과)에 걸려 중위로 예편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3급을 군속으로 발령받아 육군방첩부대 대공분야에 근무하게 되었다. 특무대 시절 그는 간첩 검거 등의 공로로 화랑무공훈장 및 대통령 개인표창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속이 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 1970년까지 약 4년간 미국계 빈넬회사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1970년 베트남에서 돌아온 그는 촉탁 생활을 거쳐 그해 12월 중앙정보부 수사공작과의 4급갑(주사) 직원으로 특채되었다. 그로부터 만 2년 10개월 후, 46세가 된 차씨는 만 42세이던 최교수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다시 차씨에 대한 인터뷰로 돌아간다.
증거 능력 없는 녹지
-VIP 조사실에서는 최교수를 어떻게 조사했습니까.
“저녁 7시쯤 김직원의 연락을 받고 VIP 조사실로 올라간 저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최교수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셨느냐’고 묻고, ‘이제 조사실도 바뀌었으니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기탄 없이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묻고 최교수께서 대답한 내용을 제가 받아쓸 터이니 양심껏 답변해 주십시오’라고 한 후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최교수는 동베를린에 두 번 갔다왔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약 2시간 동안 주로 노봉유에게 포섭된 동기와 동베를린을 여행하게 된 경위 등을 묻고, 최교수의 답변을 녹지(錄紙)해 나갔습니다.”
-‘녹지(錄紙)’가 뭡니까. 자술서면 자술서고 조서면 조서지. 녹지는 법적인 증거능력이 있습니까(注; 자술서는 피조사자가 사건 경위를 자필로 작성하는 것이고, 조서는 조사자는 묻고 피조사자는 답변하는 형식으로 사건 경위를 적은 것이다).
“피조사자가 하는 말을 심문관이 죽 받아 적은 것이 녹지입니다. 심문관은 피조사자가 자술서를 쓸 때 녹지한 것을 줘 참고하게 하고, 피조사자가 자술서를 쓰고 난 다음에는 파기합니다. 따라서 녹지는 심문관이 피조사자의 말을 듣고 쓰는 것이라 법적인 증거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최교수가 북한에 갔다왔다는 것까지 밝혀내라고 했으니, 그 부분을 집중 추궁하셨겠네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최교수는 시종일관 담배를 피우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면서 계속해서 ‘북괴에 몇 번 다녀왔는가’ 캐묻자, 그는 ‘모스크바를 경유해 한 번 갔다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기대한 것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평양비행장에 도착했을 때는 누가 마중 나왔고, 밀봉 교육은 어디서 며칠간 받았느냐. 당신을 담당한 지도원은 누구고, 교양 내용은 무엇이냐. 서독으로 돌아올 때 받은 지령은 무엇이고, 공작금은 얼마였느냐. 서독에 돌아온 후로는 어떤 활동을 했고, 한국에 귀국한 후로는 어떤 활동을 했느냐’ 등을 집중 추궁했습니다. 그런 추궁을 하느라고 2시간이 흘러갔는데 저녁 9시쯤 과장이 조사실로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