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주사 한 방에 우유가 콸콸…‘부스틴’프로젝트 특공대장

LG생명과학 정봉열 동물의약연구소장

  • 장인석 CEO전문 리포터 jis1029@hanmail.net

    입력2002-10-04 1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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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생명과학이 개발한 ‘부스틴’은 주사 한 대로 젖소의 우유
    • 생산량을 20%나 늘릴 수 있는 산유력 증강제. 전세계에서 LG와
    • 미국의 몬산토 단 두 회사만이 상품화에 성공한 고부가가치 약품이다.
    • 현재 중·남미와 아프리카 시장에서 점유율 1위에 올라 있는 부스틴은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을 경우 단번에 세계시장을 거머쥘 전망이다.
    주사 한 방에 우유가 콸콸…‘부스틴’프로젝트 특공대장

    사진·정경택 기자

    구치, 롤렉스, 벤츠, 몽블랑…. 이름만 들어도 가치를 짐작할 만한 세계 톱 브랜드들이다. 여기에 ‘부스틴’이라는 브랜드를 끼워넣는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지만 부스틴은 분명 세계적인 초일류 브랜드 가운데 하나다. 동물의약품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속해 전문가가 아니면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에 떨쳐보일 ‘황금알 낳는 거위’라는 데는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부스틴은 젖소 산유력 증강제인 BST(Bovine Somatotropin)를 상품화한 것이다. LG생명과학(대표 양흥준)이 10년간 300여 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한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 부스틴은 쉽게 말해 젖소에서 짜내는 우유의 양을 증가시키는 단백질인데, 주사기를 이용해 1회 투여하면 약 2주간 효과가 지속된다. 주사 한 방이면 평소보다 20% 정도 많은 양의 우유를 짜낼 수 있어 젖소 1두당 한 해 약 60만원의 수익증가 효과가 있다. 젖소를 키우는 축산농민들에겐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BST를 상품화한 회사는 전세계에서 LG생명공학과 미국의 몬산토 두 곳밖에 없습니다. 최첨단 기술을 응용해야 하는 데다 개발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기 때문이죠. 북미시장을 제외한 제3시장, 즉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저희 제품이 몬산토를 누르고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술력 수준이나 젖소 산유량이 몬산토 제품보다 15% 정도 앞서는데, 이건 대단한 차이죠. 젖소 한 마리가 매일 3∼4kg의 우유를 더 생산한다는 얘기니까요. 부스틴이 세계 최일류 제품이라고 자신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부스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격인 LG생명과학 정봉열(鄭鳳烈·48) 동물의약연구소장은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국내 최초로 상품화한 이 제품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주사 한 방에 우유가 콸콸…‘부스틴’프로젝트 특공대장

    부스틴은 임상개발팀, 생물공정팀, 제형개발팀 등 7개 팀의 협업을 통해 생산된다.

    그러나 부스틴은 아직 북미시장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와 미국이 세계시장의 85%를 차지하는 거대 시장임을 감안하면 부스틴이 몬산토 제품에 비해 뭔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정소장은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해명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북미시장에 진출하려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절차가 까다롭고 요구조건도 많다보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몬산토도 LG와 마찬가지로 1994년에 제품을 시판했는데, 개발단계에서부터 FDA 심사에 대비한 덕분에 그해에 바로 승인을 얻었죠. 하지만 저희는 불과 2년 전부터 FDA 승인을 얻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몬산토 제품은 북미시장에서 판매되는 유일한 제품이라 전체 매출액 규모에선 저희를 앞서지만, 제품의 질이 부스틴보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정소장은 LG와 몬산토가 정면승부를 펼친 제3시장에서 부스틴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실을 예로 든다. 똑같은 제품이라도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생산과정에서 ‘포뮬레이션’ 구성요소들이 몬산토 제품에서보다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부스틴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설명이다. 가령 몬산토 제품은 아연이나 오일을 원료로 사용하지만, 부스틴은 유기 부형제를 사용하여 원제의 특징적인 장점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정소장의 목표대로라면 부스틴은 2006년 말경에 FDA 심사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스틴이 북미시장에 진출하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본다. 일단 북미시장에서 40%의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어 매출액이 현재의 200억원에서 1200억원 정도로 늘어나리라는 것이다.

    북미시장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LG는 왜 몬산토처럼 처음 개발할 때부터 FDA 심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았을까.

    “당시 우리 능력으로는 개발에 착수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FDA 심사를 통과하려면 그들이 정한 규격에 맞는 개발과정과 임상실험을 거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 FDA의 허용오차 범위는 남미시장의 수십분의 1 수준이고, 생산공정이나 공장에 적용하는 규정도 매우 까다롭습니다. 어떤 물을 사용하는지도 규제할 정도죠. 인체에 해가 없다는 사실도 까다로운 임상실험을 통해 증명해야 해요. 제출하는 자료만 해도 수십만 페이지에 달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처음 개발에 들어갈 때는 요건이 좀 덜 까다로운 남미시장을 목표로 했고, 개발과정에서 닦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년 전부터 FDA 승인을 얻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FDA 규격을 충족하려면 이처럼 R&D에서부터 개발 및 생산단계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관련 스태프들과 함께 원료와 실험방법을 규격화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시간과 경비가 투입돼야 하므로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신약품으로 자체 개발해 FDA 통과를 눈앞에 둔 제품은 LG생명과학이 만든 퀴놀론계 항생제 ‘펙티브’ 단 하나뿐이다.

    그러나 펙티브는 합성의약품이기 때문에 부스틴 같은 단백질 의약품보다는 심사를 통과하기가 덜 까다로울 수도 있다. 단백질 의약품은 성질이 민감해 변형이 심하고 안정성이 떨어져 합성의약품처럼 캡슐로 만들기 곤란하다. 따라서 원형 그대로 투여하기 위해 주사제로 만드는데, 혈관주사는 쇼크 같은 부작용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주사기에 대한 규제도 까다롭고, 약품을 투여한 이후 혈액 내 잔류물질이 없는지도 조사해야 하는 등 부수적인 일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우리는 진도가 빠른 편입니다. FDA 승인을 준비한 지 2년 만인 올해 말 FDA 사무국과 프리 IND(Pre Investigational New Drug) 미팅 스케줄이 잡혔어요. 동물의약품을 허가하는 부서 사람들과 만나 ‘우리가 미국시장에 들어갈 계획인데, 어떤 스케줄에 따라 허가를 내줄 것인지를 정해주고, 우리 자료를 검토해서 지적할 점을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이 약속을 잡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엔 유럽에 낙농국가가 많아 이쪽 시장을 노려봄직도 한데, 왜 유럽시장은 제쳐놓고 그토록 까다로운 북미시장 진출에 매달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유럽에도 미국 FDA에 해당하는 기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고 합니다. 단백질 의약품의 경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절차가 워낙 복잡해 아직 미국 제품도 유럽에 승인을 요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저희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시장은 지금도 규모가 대단하지만 잠재력 또한 크기 때문에 그런 까다로운 규제가 풀릴 때를 대비해 준비는 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부스틴은 수백명의 LG 연구인력이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인내와 끈기를 갖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전문기술이 투입돼야 하므로 누구 한 사람의 공에 힘입어 개발됐다기보다는 전체 연구원들의 공동작품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

    부스틴은 4단계의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첫번째는 발효단계. 실험실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대장균을 1만5000ℓ짜리 반응기에 집어넣어 발효시킨 후 여기에서 불필요한 단백질을 제거하는 회수 공정이 두번째 단계다. 이것의 순도를 높이는 과정(Purification)이 세번째 단계며, 마지막으로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단순한 듯하지만 각각의 공정이 정해진 규격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아야 하고, 그 과정 하나하나를 자료로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하고 방대하다. 7개팀 35명의 석·박사 연구원들이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려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7개 팀 모두가 각각의 전문성을 치밀하게 요구합니다. 따라서 각 분야의 디테일한 부분은 저나 다른 팀원들이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7개 팀의 연구와 업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뤄야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LG생명과학이 부스틴 프로젝트팀을 ‘JDT(Joint Development Team)’라 명명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저희들은 ‘특공대’라고 부릅니다.”

    젖소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임상개발팀, 발효와 정제기술을 연구하는 생물공정팀, 약품을 주사기에 집어넣어 완제품을 개발하는 제형개발팀, 공장에서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생산팀, 품질을 관리하는 QC팀, 마케팅을 책임지는 비즈니스팀, 각 팀의 활동을 문서화해 관리하고 문서 출납에 대한 승인과 책임을 지는 QA팀이 ‘특공대’의 면면이다.

    이들 가운데 임상개발팀 생물공정팀 제형개발팀은 대전 대덕의 LG기술연구원에, 생산팀과 QA·QC팀은 전북 익산공장에, 비즈니스팀은 서울 LG 본사에 있다. JDT의 특공대장격인 정봉열 소장은 “부스틴 프로젝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과 흡사하다”고 설명한다.

    “한 그룹에 모여든 여러 전문가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그 각각의 팀이 매끄럽게 어우러져 최상의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부스틴을 만드는 데는 ‘주역’이 없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부스틴 프로젝트팀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면 정소장은 지휘자다. 일곱 팀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하고 조정하는 일이 그것이다.

    지휘자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같은 악기에 모두 정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휘자는 각각의 악기 연주자들로부터 최선의 연주를 이끌어내 거대한 교향곡의 구성요소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강약과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정소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유기화학을 전공한 정소장은 1982년 LGCI(LG생명과학의 모기업)에 입사한 이후 농약 및 합성의약 분야에서 일해오다 2년 전 초대 동물의약연구소장을 맡았다. 그래서 그는 “단백질 의약품 분야에는 문외한”이라며 인터뷰 내내 “무식해서 잘 모른다”고 엄살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1000억원 이상이 투입된, 또한 앞으로 FDA 승인을 통과하려면 그 못지않은 액수의 돈이 더 들어가야 할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문외한’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정소장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은 한 달에 두 번 팀장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다. 정기 회의는 교통편의 때문에 정소장이 근무하는 대덕에서 열린다. 그는 이 회의에서 각 팀의 연구결과를 체계적으로 조화시켜 한 목소리로 집약, 창출하는 일에 전념한다. 팀별로 진행해온 프로세스를 조정·조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울러 공장의 진행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수시로 익산에 가야 하고, 서울도 한 달에 한두 번씩 오르내려야 한다.

    부스틴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파트너 기업인 쉐링 플라우(She ring Plough Animal Health)와 업무 조율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창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쉐링 플라우는 LG생명과학이 부스틴의 FDA 심사 통과를 위해 손잡은 미국 굴지의 동물의약품 전문 회사. 이 회사는 LG측에 기술적인 자문을 해주고 향후 부스틴의 북미시장 마케팅에 대비해 미국 젖소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고 있다. 쉐링 플라우는 부스틴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3500만달러를 투자했다고 한다.

    정소장은 부스틴 외에도 동물의약연구소에서 진행중인 몇 개의 다른 프로젝트도 책임지고 있다. 부스틴에 이어 FDA에 도전할 합성의약품과 비타민 제품 등이 그것이다.

    업무 자체가 치밀함을 요구하는 데다 절차나 과정이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다보니 연구원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정소장은 ‘자유스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주사 한 방에 우유가 콸콸…‘부스틴’프로젝트 특공대장

    정봉열 소장은 연구원들과 격의 없이 머리를 맞대며 의견교환을 거듭한 끝에 '지름길'을 찾아간다.

    “연구소라고 하면 틀에 박힌 업무와 딱딱한 분위기를 연상하기 쉬운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장도 자유롭고 출퇴근 시간도 ‘알아서’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벽 2시에도 연구소에 나와 일합니다. 일하다 밤을 새기도 하고, 컨디션이 나쁘면 일하다 말고 퇴근하기도 합니다. 연구단지 안에 숙소가 있기 때문에 늦은 밤에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서 일하는 연구원도 많아요.”

    연구원들끼리 형, 동생처럼 호칭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기업인데 그래가지고야 기강이 서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 벽을 없애 의사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한다. 연구를 거듭하면서 허물없는 의견교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지름길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소장은 “부스틴처럼 오랜 기간이 걸리는 방대한 프로젝트는 연구를 ‘엔조이’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는다.

    LG생명과학이 부스틴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84년. 이때는 유전공학 기술이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 시점이어서 LG도 이 기술을 이용해 뭔가 제품을 만들어내야 관련기술의 발전추세에서 뒤처지지 않으리라고 봤다. 세계 유수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딴 연구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BST로 의견이 모아졌다.

    “BST는 1974년에야 그 구조가 밝혀진 단백질입니다. 소의 뇌하수체에서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것인데, 젖소 산유에 특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하지만 소의 뇌하수체에서 직접 성분을 추출, 정제하는 방법 외에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실질적으로 활용되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유전공학 기술이 탄생하면서 BST 생성 유전자를 대장균 등의 미생물에 삽입, 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1984년에 몬산토가 BST를 상품화하기 위해 막 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희도 이것을 상업화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FDA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은 못됐지만, 국내시장과 남미시장 정도는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은 갖췄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스틴팀은 기술적으로 타 회사 제품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가, 특허를 얻는 데 장애가 될 문제는 없는가, 산유량을 더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가장 이상적인 아이템’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300억원의 개발비와 수십명의 연구인력을 동원해 1994년 시판에 들어갔을 때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첫번째 시련은 1999년, FDA 심사를 염두에 두고 쉐링 플라우를 파트너로 선정하고 한국에서 첫 만남을 가졌을 때 찾아왔다. LG생명과학기술원을 찾은 쉐링 플라우의 전문가들은 실망을 금치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LG의 기술력은 인정했으나 공장의 시설이나 공정이 FDA가 요구하는 규격에 한참이나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때껏 땀과 눈물을 쏟아부으며 연구에 매달린 연구원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시장에 진출, 부스틴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만들려던 그들의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FDA 심사를 거치려면 얼마나 많은 투자가 필요한 것인지는 경영진들도 미처 몰랐다.

    “10년의 개발과정에서 300억원을 썼지만, 최근 2년간 쓴 돈이 그 두 배를 넘습니다. 인원도 세 배 이상 늘려야 했지요. 규격에 맞는 공장도 새로 지어야 했고…. 한마디로 FDA 심사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를 다친 셈이죠.”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기엔 그때까지 투입한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LG의 그룹 이미지도 문제였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유전공학 관련 상품화에 관심을 갖고 뚝심과 끈기로 오랜 시간 투자를 아끼지 않은 회사가 LG였기 때문이다.

    우왕좌왕하던 무렵 동물의약연구팀이 연구소로 격상됐다. 초대 연구소장이 된 정봉열 소장은 “다시 한번 도전하자”며 연구원들을 독려했다. 그의 장점은 원만한 성격과 강한 리더십이다. 서울 용산고 재학시절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JDT 특공대’에서 그 꿈을 다시 이루고자 마음먹었다.

    “300억원을 들여 익산에 공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대전에 남미시장으로 나갈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지만, FDA 심사 통과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규격 미달이었으니까요. 익산공장을 FDA 규격에 맞도록 지을 수 있는가에 우리 연구소의 사활이 걸려 있었습니다.”

    착공 10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완공된 익산공장은 LG생명과학의 노하우와 기술력이 응집된 성과였다.

    하지만 관문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설계할 때 의도한 것처럼 완벽한 제품이 공장에서 생산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개 공장을 가동한 지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지나야 애초 디자인한 의도대로 제품이 나오는데, 부스틴팀은 이를 3개월로 단축했다. 정소장은 그때서야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부턴 무조건 ‘고(Go)!’”라고 외쳤다.

    ‘상품을 남기는 사이언티스트’

    정소장은 쉐링 플라우사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우리의 능력을 다시 한번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부스틴팀과 3박4일간 전문가별로 대면 회의를 거듭한 쉐링 플라우 연구진들은 익산공장의 완벽한 시설과 프로세스에 감탄했고, 불과 2년 만에 엄청난 수준으로 향상된 여건에 혀를 내둘렀다. 2년 전만 해도 다시는 LG를 상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쉐링은 “앞으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스틴은 초기 개발단계부터 국내시장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제품이다. 내수시장 규모가 작아 개발비용을 고려한다면 해외시장을 겨냥하지 않고서는 시작할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초기 연구단계에 참여한 연구원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장기 프로젝트인 부스틴 연구는 현재로선 연 매출액이 200억원이 채 안돼 수출 통로를 뚫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실정이다.

    그러나 수익성이 뛰어나고 남미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의미있는 성과로 인정된다. 또한 거의 20년 동안 이 연구를 통해 축적한 기술력이 오늘날 또 다른 연구 프로젝트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정봉열 소장은 “대학의 사이언티스트는 페이퍼를 남기지만, 기업의 사이언티스트는 상품을 남겨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부스틴의 성공에 인생을 걸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동료 연구원들도 갖고 있는 지론이다. 또한 그것은 늦은 나이에 4년 간의 미국 유학을 배려해준 회사측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제가 과학자 치고는 잡기에 좀 능합니다. 고스톱과 바둑은 물론, 여러가지 운동에도 관심이 많고 좀 잘한다는 얘기까지 듣지요. 우리 연구소에 동호회들이 많은데 저는 축구, 농구, 탁구 등 거의 모든 동호회에 들어 있어 집사람한테 눈총을 받지요. 그래서 박사학위가 좀 늦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정소장은 LG생명과학이 매년 서너 명씩 선발하는 유학파견요원에 선정돼 1991년 37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택한 대학은 보스턴에서 4시간 동안 북쪽으로 차를 몰아야 닿는 메인주립대. 10개 대학에 지원했는데, 메인주립대가 가장 먼저 합격통지서를 보내온데다, ‘쌩시골’이라 조용하고 한국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아 지원했다. 늙어서 유학가니까 회사에서도 지켜보는 사람이 많을 거란 부담 때문에 그는 4년간 단 한번도 휴가를 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로 먹고 사는 직업이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한시도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지요. 이곳 기술원에 박사학위 소지자가 300명이에요. 생명과학 분야에만 100명을 헤아리는 박사들이 있으니까 그들로부터 꾸준히 뭔가를 배울 수 있어서도 좋아요.”

    과학자라면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믿기에 그는 늘 마음을 열어놓고 후배들과의 토론에 열을 올린다고 한다.

    “부스틴의 주요 수출시장인 남미지역의 경제악화로 근심이 크겠다”고 하자 정소장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사실입니다. 브라질도 경제가 안좋고, 아르헨티나는 최악의 상황이죠. 부스틴이 남미시장을 석권한 것은 초기에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선풍을 일으킨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 아무래도 제품을 구입하기가 어려워지죠.”

    합성의약품과 달리 단백질 의약품은 값이 매우 비싸다. 개발기간이 길고 생산공정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원료에서 추출되는 완제품의 양도 극히 적다. 부스틴의 경우 첫 공정에서 1만5000천ℓ짜리 반응기를 가득 채운 원료는 마지막 공정에서 겨우 45ℓ의 완제품으로 태어난다.

    그래도 미래는 밝다. 개발에 착수한 1984년부터 FDA 승인여부가 결정되는 2006년까지 22년 동안 계속되는 ‘마라톤’도 이제 목표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D-4년.

    지금껏 18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LG생명과학의 체력은 아직도 끄떡없어 보인다. 오히려 결승점을 눈앞에 둔 1등주자처럼 힘이 펄펄 솟는 분위기다. 정소장이 자신도 모르게 내비치는 자신감과 여유로움은 결승점의 승자가 부스틴일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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