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한 우울증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마광수 교수.
-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구속된 이래,
- 12년을 하루같이 정체 모를 불안과 싸워왔다.
- 이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복직한 학교에서 또다시 내침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다
- 마침내 ‘표현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한 20세기 한국 예술가의 슬픈 초상.
연세대 복직 해인 1997년, 자택 서재에서 <김성남 기자>
직접적인 원인은 2000년 6월 연세대 교수 재임용 과정에서 동료 교수들로부터 ‘교수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데 있다. 마교수는 “배신감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이 무섭다”며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켜버렸다.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
부슬비가 내리는 오후, 서울 이촌동 마광수 교수 집을 찾았다. 이미 전화로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한 다음이었다. 전화통화에서 그는 그저 죽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할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거나 정당성을 주장할 뜻도 없다고 했다. 목소리 또한 땅으로 꺼질 듯 힘이 없고 발음조차 분명치 않았다. 한마디로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듯했다.
귀찮은 전화임이 분명한데도 마교수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 ‘천진성’과 섬약함이 오히려 상대편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마교수 집 벨을 눌렀다. 친척으로 보이는 여인이 문을 열었다.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뒤로 언뜻 마광수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전해드릴 물건이 있다”고 했지만 그 여인은 문을 닫아버렸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마교수였다. 저래도 살 수 있나 싶을 만큼 극단적으로 마른 모습이었다. 175㎝의 키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걸음을 옮길 때면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구부정한 어깨는 기아선상의 아프리카 소년을 연상케 했다.
준비해 간 음악CD를 내밀었다. 받아드는 손가락 또한 뼈만 앙상했다. 시간 좀 내달라는 말은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마교수가 “고맙다”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팔순 노모가 아들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됐어요, 가세요. 지금 너무 아파 안돼요.”
찰칵,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안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마교수가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왜 그러시냐”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창백한 낯, 하얗게 센 머리, 멍한 회색빛 눈동자가 절로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이어진 대화는 2분을 채 넘지 못했다. 마교수는 “물어 볼 것이 있으면 전화로 해달라”며 “어머니가 너무 걱정하셔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조리 잘 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무서워요”
이튿날 이촌동으로 전화를 했다. 마교수가 받았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친구이신 신승철 박사께 대강 말씀 들었습니다.
“신승철…? 모르는 사람인데….”
-정신과 전문의 신승철 박사님 모르세요.
“아… 신승철. 승철이 내 친구예요.”
-심정이 어떠세요.
“죽고만 싶어요. 살 수가 없어요.”
-병원에 입원을 하시지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입니다.
“작년에 한번 입원했어요. 근데 뭐 별로 좋아지는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시간이 많아서요.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제자들이라도 만나시죠.
“제자들이 와 줘야 만나지요. 학교 떠나면 다 그만이지…. 끝났어요.”
-재임용 파문 전에도 학교 생활이 많이 힘드셨나요.
“제가 잘살았는지 못살았는지 모르지만, (복직 후 학교에) 다시 나가면서부터 (주변에서) 면박 주고 따돌림당하고. 고통스러웠어요.”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시겠네요. 연세가 여든이시죠.
“그래요. 녹내장 때문에 눈도 잘 안 보이는데. 전 마누라도 없고 수입도 없어요.”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두 끼 먹어요. 점심에 빵 한 쪽, 저녁에는 시켜 먹고, 아니면 어머니가 간신히 차려주시는 거 먹고. 누님이 가끔 와서 도와줘요.”
-바깥 나들이 좀 하셔야죠.
“산보도 못하겠어요. 쇼크가 커서.”
-그러니 입원하세요.
“입원해봤자 소용없어요. 작년에 해봤는데 머릿속을 바꾸기 전에는 다 소용없어요.”
-그럼 그렇게라도 하셔야지요.
“사람이 머릿속을 어떻게 바꿔요.”
-그래도 이겨내셔야 할텐데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죽고만 싶어요. 세상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제 강의는 수강생도 많고, 가르치는 보람과 자부심이 컸어요. 6년 공백 끝에 어렵게 (복직)했는데 그렇게…. 너무 친했던, 서로 돕던 친구들이라…. 사람이 무서워요. 제가 받은 불이익이 너무 크니까.”
-전 부인 생각도 많이 하시나요.
“이혼한 것도 후회해요. 다 후회스러워요. 분노와 회한이 밀려와요. 못 이겨낼 것 같아요. 일에 대한 공포가 있고, 글 한 줄도 안 써져요.”
-경제사정은 어떻습니까.
“계속 까먹고 있죠. 걱정이에요.”
-이 모든 고통의 근원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든 것은 ‘즐거운 사라’ 사건에서 시작됐어요. 하지만 그 사건 터졌을 때만해도 젊었고, 이렇게 옆구리에서 확 찌르는 일은 없었는데…. 이제 됐죠? 힘들어서 더 못하겠어요.”
짧은 인터뷰 동안 마교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비유와 논리 전개에 능하던 달변가의 풍모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감정표현은 단선적이었으며 종합적 사고에 어려움을 겪는 듯했다.
마교수의 말 속에는 일부 동료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감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로 인한 피해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승철 박사도 “마교수에게 심한 우울증을 가져다 준 ‘외상’이란 바로 재임용 파문”이라면서 “지금 상태로는 강단 복귀가 결정된다 해도 몸이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00년 6월, 국문과 교수들로 구성된 학과 인사위원회는 ‘논문실적이 없고 학문적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마교수에 대해 재임용 부적격 대상 판정을 내렸다. 마교수는 “나는 교수이자 작가인데 왜 논문만 따지고 시와 비평을 쓴 업적은 인정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마교수가 학교에 제출한 ‘업적’은 에세이집 ‘자유에의 용기’·문화비평집 ‘인간’·장편소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전2권) 등 단행본 3종, ‘소설에 있어서의 일탈미에 대한 고찰’ 등 논문·기고문 6편, 2개의 단편소설과 일간지 연재 장편소설 1편, 시 8편 등이었다.
대학 중앙인사위원회는 마교수의 소명을 일부 받아들여 재임용 문제를 1년간 유예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학과 인사위원회 측은 ‘마교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문학비평 전공으로 임용된 만큼 시 비평이나 문학 비평 이외의 것은 업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또다시 부적격을 상신했다. 결국 마교수는 재임용된 것도 아니고 탈락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상황에 밀려 휴직원을 내고 말았다. 사유는 건강 악화였다.
이 사건은 국문과 내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일부 학부·대학원생들은 “마교수에 대한 부적격 판정에는 학문적 이유 외에 다른 배경이 있다”며 학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격렬히 항의했다. 일부 학생들은 부적격 판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교수들을 향해 원색적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홈페이지 게시판은 찬반 양측의 격렬한 논쟁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결국 학과에서는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이 사건과 기타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국문과 교수와 학생들은 장장 5시간에 걸친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간 인식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연대 대학원 국문과 학생회는 일련의 사건과 관련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제에 대한 백서’를 발간했다. 마교수 재임용 탈락 문제는 ‘백서’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은 ‘사실상 복직된 마교수를 신규 임용 형식으로 받아들여 재임용 심사를 받도록 한 점, 논문 형식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고 있는 요즘, 창작물을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점’ 등을 문제삼고 있다. 이에 대한 인사위원회 측의 입장은 단호하다. “모든 일을 적법한 절차와 원칙, 학자적 양심에 따라 처리했다”는 것이다.
소설 '즐거운 사라'의 표지에 실렸던 마광수 교수의 초상화. 코와 손은 그가 젊은 시절 가장 자신있어 한 신체부위였다.
‘시대와의 불화’가 앗아간 정기
재임용과 관련 마교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인간적 배신감’이었던 듯하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적격 판정을 내린 이들은 자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문, 동료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원칙에 입각한 냉정한 판단’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
또 하나 절망스러운 일은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1990년 이혼 후 자녀도 없이 독신으로 살아온 마교수에게 학생들은 피붙이와 다름없는 존재다. 그가 갖가지 필화(筆禍)에 휘말려 고통받을 때 변함없는 믿음으로 그의 곁을 지켜준 것도 학생들이었다. 이제 마교수는 그들과 정기적·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마교수의 한 지인은 “경제적 어려움도 클 것”이라고 말했다. “마교수는 글쓰고 가르치는 일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다. 그런 사람이 학교에서 떨려나고 글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으로 호구를 삼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마교수의 ‘감정 상태’나 주장, 일부 학생들의 비판에만 근거해 학과 인사위원회의 결정을 무조건 매도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당대의 평균적 도덕과 교수 업적 평가 시스템에 기반한’, 있을 수 있는 결정이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동료의 손으로 내려진 재임용 불가 판정이 마광수라는 한 인간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사실 마교수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그 뿌리가 깊다. 마교수의 말대로 10년 전 발생한 ‘즐거운 사라’ 사건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근본 원인이다. ‘즐거운 사라’가 외설물 판정을 받고 그로 인해 마교수가 구속되는 사태만 없었다면 해직, 복직, 재임용 탈락으로 이어지는 고통스런 과정은 밟지 않아도 됐을 것이었다.
결국 마교수가 ‘죽음에 이르는 병(우울증)’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사회적·육체적 생명을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지경까지 온 데에는, 그와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대변되는 ‘시대와의 불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마교수의 삶을 지탱하는 ‘척수’는 서서히 고갈되어 온 것이다.
사람들에게 마교수는 ‘야한 남자’로 통한다. 스스로 붙인 ‘광마(狂馬)’라는 별명이나 학생들이 존경의 의미로 헌사한 ‘마교주’라는 이명(異名) 또한 그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같은 ‘야한 남자’라도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것과 마교수식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통 사람에게 ‘야하다’는 ‘헤프다’‘색을 밝힌다’ ‘음란하다’ 등 주로 성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마교수에게 ‘야(野)한 사람’이란 ‘본능을 은폐하려 들지 않고 솔직한 사람’ ‘생각과 속이 화통하고 개방적인 사람’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하고 원시적인 정열로 가꿔갈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마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야한 정신론’을 펼친다. ‘‘야한 정신’은 정신보다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국수주의보다는 세계적 보편성에, 집단보다 개인에, 관념보다 감성에, 명분보다 실리에, 교조주의보다 다원주의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이라는 설명이다. 마교수는 아울러 ‘이런 세계관으로의 변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의식 변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내세우는 단어(야하다)가 좀 묘할 뿐, 마교수의 주장은 그리 과격하지도, 심한 거부감을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마교수는 오랜 세월, 도덕주의자,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여성주의자, 민족주의자, 인문주의자 등 각종의 복잡다기한 ‘주의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아왔다. 이는 그가 ‘실로’ 용감무쌍하게도 ‘위선적 이중성에 갇혀 금기시돼온 성담론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개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발언하려’ 한 데 기인한다. 그것도 고상한 관념어가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용어로, 더군다나 자신의 성적 취향을 솔직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마교수가 매니큐어 바른 긴 손톱과 두텁게 화장한 얼굴에 강렬한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은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렇듯 페팅(애무)을 중시하고 페티시즘(fetishism)에 경도된 그의 성적 취향, 성담론 해방에 대한 계몽주의적 사명감이 가장 강렬하게 투영된 작품이 바로 문제의 소설 ‘즐거운 사라’다.
그렇다면 마교수는 정말 ‘밝히는 남자’일까. 그렇지 않다. 그의 속(상상력)은 야할지 모르지만 생활은 지나칠 만큼 금욕적이다. 마교수를 잘 아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매우 ‘순결한’ 남자이며 여자에 대해서는 쑥맥에 가깝다고들 한다. “외도를 하느니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할 만큼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류의 본원적 도덕률에 철저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리고 심약한 개인주의자, 그래서 사상 투쟁이나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는 일에는 영 ‘젬병’인 사람.
이른바 ‘모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자연인’ 마광수는 어떤 사람인가.
마광수 교수는 1951년 1·4 후퇴 피난길에서 태어났다. 태중(胎中)에서나 출생 후에나 제대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한 탓인지 선천적으로 약골이었다. 전쟁중에 군속사진사였던 아버지를 비롯 많은 피붙이를 잃은 탓에, 그는 외할머니, 어머니, 누나 등 여자 3명의 보호 아래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서울 대광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연극반, 문학반, 미술반, 교지편집, 성가대 등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미대와 국문과를 놓고 고민하다 1969년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 4년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27세 때 시인으로 등단 후 이듬해인 1978년 홍익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됐다. 1983년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84년 모교 국문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마교수가 상아탑을 넘어 대중적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1989년 1월 출간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때문이었다. 이 책은 6개월 이상 비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마광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개부터 ‘마광수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금병매’를 읽고, 중학교 시절엔 ‘아라비안 나이트’나 그 중국판인 ‘요재지이(聊齋志異)’ 등을 탐독한 그는 이미 학창시절부터 ‘충분히 야한’ 소년이었다. 특히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요재지이’ 속 선녀들은 그에게 꿈의 연인이었다. 그가 길고 화려하게 장식된 손톱에 유난히 집착하는 페티시스트가 된 데에는 그 영향이 대단히 컸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서 마교수는 성과 성의식, 성담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펼쳤다. ‘사랑에는 불륜이 없고 성에는 변태가 없다’ ‘사랑에의 욕구는 성욕 충족에의 욕구이고 성욕의 충족만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 ‘남자에겐 사디스트, 여자에게는 마조히스트적 속성이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말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명문대 교수나 되는 사람’이 쏟아놓는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거짓 없고 적나라한 고백이었다. 성에 대한 자기고백적 글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그때 상황에서 마교수의 말과 행동은 튀어도 한참 튀는 것이었다.
책이 발간된 지 6개월쯤 지나자 각계에서 비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는 건전한 성의식을 해친다고, 진보주의자는 여성의 성상품화를 부추기며 잘못된 노동관·인생관을 주입한다고 그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마교수는 “나는 은폐되어 왔던 성문제를 ‘사상의 자유시장’에 상장하고 싶을 뿐이다.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겉 다르고 속 다르며, 쓰레기통에 근사한 뚜껑만 덮어놓은 꼴이다. 실용주의적 쾌락주의에 입각해, 관능적 상상력을 대리배설할 수 있게 하는 문학작품의 탄생이 절실하다”고 받아쳤다.
마교수의 글이 논란을 일으키자 연세대에서는 1989년도 2학기 강의에 대한 인원제한조치를 내렸다. 강좌당 수강생이 1500여 명에 이르러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교수’로 불리던 마교수에게 강의당 학생 수를 500명으로 제한한다는 학교의 조치는 큰 충격이었다. 이는 명백한 사형(私刑)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첫 장편소설 ‘권태’를 발간했다. 이어 발간한 연작소설 ‘광마일기’에 대해 간행물윤리위는 경고처분을 내렸다. 검열기관과의 첫 충돌이었다. 1991년, ‘행복한 사라’가 출간됐다. 이후 상황은 에 정리되어 있는 것과 같다.
두 달간의 수감 생활,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 문단의 외면과 마녀재판식 여론몰이는 마교수를 깊은 불안과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했다. 강단에서 쫓겨난 것은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마교수는 “상상이나 소신은 재판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일부 세력이 자기 요구(창작물에 대한 검열)를 관철하기 위해 공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 “못 썼다고 욕을 얻어먹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못 썼으니까 잡아가도 된다는 식의 발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문대 교수라 더 당했다”
1998년 마교수가 문화평론가 강영희 씨와 나눈 대담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권의 억압은 대단한 거야. 그래서 사라도 아버지를 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재판에선 음란적인 표현보다 그런 게 더 걸렸어. 그 재판은 참 이상한 재판이었어. 사라가 왜 아버질 욕하냐, 왜 교술 욕하냐, 이런 것까지 물어왔으니 말이야.”
당시 마교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다른 대학도 아닌 연세대 교수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는 거야. 전시효과가 크거든. 난 이 필화사건을 단순히 성담론의 문제로 보는 데 반대해. 기존 지식인 사회의 위선을 파헤친 데 대한 괘씸죄가 더 크게 작용한 거야.”
이렇듯 겉으로는 ‘잘못된 편견’과 맞서 싸우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실제 삶은 외롭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사실 나는 소설 쓰고 싶어 죽겠는데, 써 놓은 것도 많아요. 그런데 출판사들이 겁을 먹어서인지 청탁이 없어요. 세상 인심이란 게, 그 흔한 신문 잡지 원고 청탁도 딱 끊어졌어요. 그림을 그려볼까도 싶은데, 작년에 전시회를 열어 좀 팔기도 했거든요, 근데 문제는 이 사건으로 기가 다 빠진 거예요.”
1995년 마교수가 연극배우 정경순과의 대담에서 한 말이다. 나중에는 가벼운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시간강사로서 1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 가는데 캠퍼스에 오래 머물고 싶질 않아요. 교수식당에서 밥 먹다가 아는 사람 마주치는 것도 싫어서 아예 도시락으로 빵을 싸갈 정도예요.”(‘여성동아’ 1997년 7월호)
그러나 마교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교수의 한 제자는 “교수님으로부터, 글을 쓸 때마다 또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늘 불안하고 쫓기는 느낌이라고 했다. 내면에 보이지 않는 검열의 칼이 돋아나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1996년 마교수는 네번째 장편소설 ‘불안’을 상재했다. 또 외설시비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하여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주장은 한결같았으나 성적 표현의 정도나 발언의 강도는 한결 수그러들었다. 이에 대해 마교수는 “마녀사냥을 당한 후 처음 쓰는 소설이라 무척 힘들었다. 자기 검열에 시달린 것이 사실”이라는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러한 ‘증상’은 복직 후에도 계속됐다. 2000년 2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마교수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두렵다. 너무 감시망이 많다. 간행물윤리위, 검찰, 종교단체, 음대협 등의 시민단체…. 나는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고 정체 모를 공포를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추이를 보고 있는 중이다. 사람마다 장기가 있는데 내 경우는 탐미주의가 주특기다. 그러나 ‘사라’ 사건 이후 상상력도 고갈되고 내 40대를 그 사건으로 다 보냈다. 이 나라에서 개성적인 예술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은 혼란스럽다. 피해의식과 자기검열, 안개 속 같은 공포에 빠져 있다고 할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마교수의 불안감은 더욱 짙어진다. 급기야는 곧 출간할 새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하다 “이것 또한 문제되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 중이다. 거의 미칠 지경이다. 그 음란물 기준이란 것이 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전에 통보해주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해석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데, 그 해석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며 탄식한다.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렇듯 마음의 병이 깊어진 상태에서도 마교수는 “학생들만이 내 희망이고 든든한 지원부대”라고 뿌듯해했다. 그런 가운데 재임용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이로써 마교수는 삶의 유일한 지지대였던 학생들과도 완벽하게 단절됐다. 일상을 지탱하던 마지막 신경줄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린 것이다.
‘즐거운 사라’, 그후 10년. 대한민국도 많이 변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간 마교수가 내놓은 저작들은 외설이나 포르노는커녕 “이렇게 싱거운 소설이 있나” 싶을 만큼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TV 미니시리즈에도 수시로 키스와 침실 장면이 등장하는 요즘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사회적 합의는 이미 ‘사라’에게 무죄를 선고했음이다. 그럼에도 왜 마교수는 여전히 유죄여야 하는가. ‘틀에 꼭 맞는 실적’만을 강조하는 교수 재임용제도 역시 또 다른 검열이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획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외로움의 극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새로운 구원의 천사가 내 앞에 나타나주리라고 기대할 뿐 내가 나서서 구해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대리배설로만 사랑의 역사를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겁나는 일이다.”
마교수가 1990년 9월 ‘즐거운 사라’ 파동을 예감하며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의 말미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마교수는 외로움을 넘어 공포의 극한에 내몰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