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교수는 기혼자라서 이대 총장공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 남편인 박준서 교수의 서재는 있어도, 장교수의 서재는 없었다.
- 이대 총장이 된 후 친모와 시모, 두 아이, 그리고 부부 교수가 각자의 서재를 갖고 살기 위해 주상복합 아파트 두 채를 산 것이 호화 아파트가 되었다.
- 국회 인사청문회는 그를 피의자 다루 듯 공격했고, 언론은 오보를 양산했다.
장 전 총리서리는 언론 검증과 국회 청문회를 통해 부동산 구입, 장남의 국적, 위장 전입, 아파트 벽 개조, 학력 기재 등에 관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추궁을 당했다.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첫 인사청문회는 그녀가 살아온 일생을 온 국민이 지켜보는 심판대에 올려놓고 일순간에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장대환 총리서리의 잘못이 ‘기업형’이라면 장상 총리서리를 둘러싼 논란은 ‘가계형’이다. 장대환 총리서리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더라면 여성들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장대환씨와 장상씨의 순서를 바꾸어 국회 인준 청문회로 보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과연 장상 총리 후보자의 해명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처음 실시된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장상씨의 국정운영 능력과 도덕성을 바로 평가한 것일까.
장상씨(이하 교수로 호칭 통일)는 한 동안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장대환 총리서리 인준동의안이 부결된 직후 장교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장교수는 부재중이었고 남편인 박준서(朴俊緖·62) 연세대 교수가 받았다. 박교수는 장교수가 집에 들어오면 상의해 인터뷰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전화 응대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인터뷰는 장교수가 총리실을 떠난 후 언론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다. 장교수 부부는 여러가지 논란에 대한 해명이 사회적 신뢰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도덕성의 문제로까지 연결된 데 대해 무척 가슴 아파했다. 장교수는 “높은 곳에서 바로 떨어졌을 때는 충격을 느끼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통증이 몰려오듯이, 임명동의안 부결 직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1년 같았던 한 달
장교수 부부가 사는 창덕에버빌 아파트는 이화여대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인 모래내시장 입구에 있다. 장교수네 집은 꼭대기인 19층이어서 성산대교를 향해 뻗어나간 도시내부 순환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장교수는 미리 보낸 질문 요지에 맞추어 작성해놓은 메모를 보며 답변했다. 장교수가 인터뷰하는 세 시간 동안박교수는 자리를 뜨지 않고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다. 박교수는 가끔 장교수의 답변을 바로잡아주다가 “제 인터뷰이니까 너무 자주 끼어들지 말아요”라는 핀잔을 들었다.
―총리서리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고나서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한 달이 1년 같았어요. 자기 성찰을 많이 했어요. 제가 왜 여기 서있는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인이니까 기도를 많이 했죠.”
―검증 과정에서 사생활이 미주알고주알 노출돼 본인과 가족의 고통이 컸겠군요.
“공직에 나가려고 한 마당이라 사생활 노출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소중하게 살아온 전생애가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당할 때는 매우 가슴이 아팠습니다. 검증의 초점이 장상 한 사람에게 맞춰졌다고 하지만 제가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것은 아니잖아오. 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심려를 끼쳤어요. 그분들에게 정말 죄송하고 송구해요. 남편을 비롯해 우리 아이들, 시모님,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나와 가까이 있던 분들, 특히 이화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재단이사장과 이사님들, 교수님과 직원·학생들, 동창들, 이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분들이 ‘장상 총장 괜찮은 줄 알았더니 참…’이라고 혀를 차는 것 같았어요. 그분들이 실망하고 배신당한 느낌을 가졌을 게 분명하거든요. 죄송한 마음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총장을 할 때 이화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이화의 꿈에 관한 얘기를 드려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이번에 ‘장상이 저런 사람이었어’라고 말했을 것 아니에요. 그걸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참신한 총리를 원하던 국민을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여성계에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했는데 거꾸로 좌절과 실망을 드렸어요.
실존적으로 얘기하자면 나 스스로에게도 미안합니다. ‘어떻게 너 이 꼴이 됐느냐’고 자탄합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낄 거예요. 그러나 ‘너 다시 살면 어떻게 살래’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크게 달리 살 것 같지도 않거든요. 기본적으로 내 삶의 원칙과 자세는 한결같습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일생의 명예가 며칠 사이에 곤두박질치면서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기준 없는 인사청문회
서울에서 아파트 평수를 넓힌 중산층은, 크건 작건 주택공급 관련 법규를 위반했을 가능성이 높다. 15평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자녀가 자라 30평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면 주민등록을 전세 사는 것처럼 옮겨 무주택자로 위장해야 했다. 까다로운 주택관련 법규가 위장전입자를 양산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이 지키기 어려운 도덕군자의 윤리 기준을 고위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영양결핍증에 걸리면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거든요. 우리 사회가 도덕성 결핍증에 걸려 있기 때문에 고위 공직자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공직자들의 도덕성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어떻게 검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사청문회의 전통이 일천하다보니 피의자 청문회와 공직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구별하지 못해요. 준법정신이 투철한가, 공사 구별이 확실한가 하는 것들을 따져봐야 하는데 저에게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쪽으로 몰고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기준이 마련돼야 합니다. 청문회는 인재를 찾아내 살리는 청문회가 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재를 죽이는 인민재판이 되기 쉽습니다.”
―김활란씨의 공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분의 친일 행적이 다른 걸로 상쇄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친일은 그냥 친일이에요. 그러나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돼요. 그분은 이 나라 여성교육에 크나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해방되자마자 이화대학이 대한민국 종합대학교 제1호가 됐습니다. 그때 종합대학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화대학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포괄적인 종합대학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분을 1년 반 모시면서 나라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하는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통장이 여러 개가 있었어요. 미국에서 돈이 오면 ‘이건 YWCA 통장에 넣어라’ ‘이건 다락방전도협회 통장에 넣어라’ ‘이건 여학사회 통장에 넣어라’고 일일이 나누어주셨죠. 그분 돌아가신 다음에 개인 재산은 10만원도 안 남았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이고, 근세사에서 그만한 여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친일은 친일대로 따지면서 다른 업적은 평가하자고 이야기했지만 친일을 청산하자는 시대 분위기가 훨씬 강했습니다.”
이화여대 대강당에서의 명연설
세종대·상명대 등 여자대학들이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여자대학은 이화여대·숙명여대·서울여대 등 여섯 학교가 남아 있다.
―학교 발전을 위해 이화의 문을 남성에게도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이화의 교육이념은 여성교육이에요. 남녀평등이 많이 이뤄졌다고 해도 아직도 한국사회는 남성위주의 사회죠. 이화대학은 여성을 최우선적으로 대우하는 교육기관으로 여성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계발해주려고 노력해요. 여성의 세기에 이화가 제2기 도전의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이화를 잘 키우면 세계 무대에서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기관이 돼요. 이것이 이화의 꿈입니다.
김활란 총장님이 1950년대 말에 남녀공학으로 만들라는 질문을 받고 ‘국회의석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게 될 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여성의원이 전체 국회의원의 5.9%입니다. 갈 길이 아직 멉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해 예순이 넘도록 이화여대에서 가르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만 이야기해보세요.
“대학 2학년 때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59년이었을 거예요. 해마다 봄이 오면 보릿고개에 식량이 모자라 굶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보릿고개가 되면 이화대학 학생회가 쌀을 걷어 식량난을 겪는 지역에 보냅니다.
대강당에서 4000명 학생을 모아놓고 쌀을 모아오자고 독려하는 연설을 제가 맡았습니다. 군중을 감동시키려면 현장을 알아야 된다는 생각에, 보릿고개에 관한 동아일보 사설을 읽고 현장에 가봤어요. 끼니를 굶어 퉁퉁 부은 사람들을 보고 왔지요. 내가 연설을 하니까 대강당이 울음바다가 됐어요. 그래서 쌀이 많이 걷혔습니다. 그때 졸업한 사람들 중에 대강당 보릿고개 연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요. ‘너 때문에 울고 집에서 쌀 가져왔다’고. 그 경험이 저로 하여금 청중 앞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줬던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 임기가 몇 달 안 남았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민심을 잃어 선거 치를 때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물론 세월이 흐른 뒤에는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합니까.
“잘한 점은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구조개혁으로 경제 체질을 강화한 것입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도 조성했습니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와 노벨상 수상 등을 통해 국가 위상을 높였습니다. 잘못한 점은 개혁 추진과정에서 준비 소홀로 혼란과 국민 불편을 초래한 것입니다. 대북 정책 등 여러 분야에서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이 부족해 국민 통합에 실패했습니다. 임기 말에 측근과 아들들 비리로 도덕성 면에서 신뢰를 잃었지요.”
총리서리로 일하는 동안 공부해놓은 답변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실향민들의 지지도가 낮은 편이지요.
“저같이 월남해서 내려온 사람에겐 북한에 대한 경계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피해자이니까요. 오죽하면 피난을 나왔겠어요. 실향민들이 아마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불안감을 갖고 있을 겁니다. 저는 총리서리로 있을 적에 햇볕정책이 성공하려면 확실한 안보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쌀이 남아돌아 올 가을에는 쌀값 폭락이 우려됩니다. 쌀을 보관할 시설이 모자라 보관 비용이 엄청나게 들지요. 이번에 경의선 공사 재개 등 부대 조건을 달아서 북한에 쌀 40만t을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남남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퍼주기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남갈등의 정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남북관계는 멀리 크게 바라봐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북한에 쌀을 지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혹시 차기 정부에서 다시 입각 제의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가정법 질문에는 대답 안합니다(웃음). 지난번에 ‘총리가 되면’이라고 시작하는 가정법 질문에 아주 데었습니다.”
―청문회에서 저축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의원들이 ‘재산을 어떻게 모았느냐’고 따지니까 시어머니로부터 1만원을 타면 3000원짜리 점심을 사먹고 7000원은 저금하며 알뜰살뜰하게 살았다고 답변하더군요.
“우리 집에서 저축 정신 1등이 친정 어머니이고 그 다음이 시어머니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3등쯤 되고…. 시어머니는 비누 밑에 언제나 은박지를 붙여 쓰셨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월남해 돈이 없어 너무도 고생을 해서 돈을 쓸 줄 모르세요. 저는 시어머니에게 월급을 모두 갖다드리고 용돈을 타 썼습니다. 어른이 돼서 용돈을 받자니까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었죠. 하여튼 제가 1만원짜리 먹을 거면 3000원짜리 먹고 나머지 7000원은 봉투에 담아놓았어요. 유학시절부터 박교수 이발을 내가 해줬습니다. 그만큼 안 쓰고 저축을 했지요.”
박교수는 “아내가 총장이 된 후에도 얼마 동안 이발을 해주었지만 최근 몇 년은 연세대 구내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아내가 30년 동안 제 머리를 직접 깎아줬어요. 장교수가 이북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내려와 고생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교훈이 될 만한 고생담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낭비를 하지 못하고 근검 절약하는 정신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에요.”
―홀어머니가 딸 둘 데리고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갔습니까.
“친정어머님은 무학이었지만 매우 총명한 분이셨어요. 한글과 천자문 정도는 읽으셨어요. 공부를 했으면 박사 학위를 두 개 정도 취득했을 분이지요. 어머니는 삯바느질도 하고 길거리에서 땅콩 볶은 것을 팔기도 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 따라서 포도장사도 해보았습니다.
공책을 살 돈이 없어 인쇄소에서 파지를 모아 노트를 만들어 공부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다섯 번 전학 다녔습니다. 다행히 제가 공부하는 소질을 조금 타고나서 중학교 때부터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뼈저린 체험을 해봤습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습니까.
“이화대학 수학과를 나와 신학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김옥길 총장이 기숙사 사감을 시켜서 한동안 하다가 연세대 신학대학 3학년에 학사 편입을 했어요. 박교수는 서울대 법대 졸업하고 군대 마치고 연대 신학대학에 학사편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학사편입 동기생이죠. 2년 동안 같이 공부하고 박교수가 먼저 예일대학으로 갔어요. 나도 나중에 예일대학으로 가서 박교수를 만났지요.”
“별 뜻 없이 예일대를 선택한 겁니까”라는 질문에 박교수가 “나를 만나러 의도적으로 왔겠죠 뭐”라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의도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좋은 친구였습니다. 예일에 가서 3년 석사 마치고 결혼했죠.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함께 가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한 클래스 메이트죠. 평생 친구이고….”
전후 관계로 미루어 장교수가 박교수를 만나기 위해 예일대를 선택한 것은 사실 같다. 지금은 아내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지지만 박교수는 성지순례에 관한 글을 오랫동안 일간신문에 연재해, 기독교인 가운데는 박교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박교수님의 고통도 컸을 텐데요, 마지막으로 한마디해 보시죠.
“아내는 육십 평생 성실하게 신앙과 양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원칙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덕성에 흠이 있는 걸로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우선 제가 용납을 할 수가 없어요. 나는 32년을 함께 살았기 때문에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다 알아요.
제가 검증 기간에 목이 아프도록 언론에 설명했지만 잘 써주지 않았어요. 다 끝난 상황에서 우리를 두둔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만은 알려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장교수는 “나를 기본적으로 부도덕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참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하면 나는 신앙인으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제 존재가 허물어지는 거예요. 제 강연의 주제가 주로 도덕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이승만 대통령 때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박정희 대통령 때는 경제가 일어났다.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민주화를 달성했다. 21세기에 선진국가가 되려면 이제는 도덕성을 회복해야 된다. 정도로 가고 원칙을 지키는 사회가 돼야 된다.’ 이게 제 강연의 주요 메시지입니다.
제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절 보고 뭐라고 할까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한바탕 바람에 의해서 자기 존재의 기본이 흔들리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어떤 신문에서 아들 국적은 법무부에 전가하고, 학력 오기는 비서에게 떠넘기고, 위장 전입은 시모에게 미룬다고 썼더군요. 그러니까 모든 잘못을 남에게 미루는 얄밉고 파렴치한 여자가 된 것이지요.”
신앙이 힘과 용기의 원천
―혹시 여성이라서 더 심하게 당했다는 생각은 안합니까.
“청문회 끝나고 팩스와 이메일 편지가 많이 와요. 그분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거니까 힘내라고 위로합니다. 제가 집 주소 옮긴 것에 대해 시어머니가 해서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남성들은 ‘거짓말’이라고 하고 시어머니들은 ‘저런 배은망덕한 며느리가 있나’고 욕했다는데…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좀더 혹독한 것이겠죠. 누가 우리 집에 와서 ‘바깥주인 계십니까’하고 인사를 하면 가사에 매달리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내가 바깥주인인데요’라고 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은 여성이 가정 바깥에서 사회활동을 하기가 아직도 힘겨운 사회입니다.”
―어떤 성경구절을 가장 좋아하는가요.
“저는 낙천적인 사람입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아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을 좋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신앙생활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까. 너무 포괄적인 질문입니다만….
“신앙생활은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저는 제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부모에게 받은 선물도 소중히 여기는데 하나님의 선물이니 함부로 살 수 없지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어쩌다 지금처럼 좌절하더라도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善)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시련을 주신다고 생각하지요. 신앙은 상당한 힘과 용기를 줘요. 저에게 신앙은 삶의 근원이고 목적이며 힘입니다.”
장상 총장 이전의 이화여대 총장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이었다. 시모를 모시고 3대가 함께 사는 장상 총장으로서는 독신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지어진 공관에 들어가 살 수가 없었다. 이화여대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동네에서 아파트를 찾다가 창덕에버빌 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장교수는 창덕에버빌 아파트 19층 48평과 47평의 벽에 문을 내 두 아파트를 함께 쓰고 있다. 이것 때문에 귀족생활을 한다는 인상을 주어 손해를 보았다.
“이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는 제 방이 없었습니다. 똑같은 교수인데 남편은 서재가 있고 나는 없었어요. 남편은 저한테 매우 잘해주기 때문에 여한이 없지만 남편만 서재가 있고 아내의 서재가 없는 것도 남성 우월 사회의 특징이에요. 총장이 되니 때로는 손님을 맞고 결재 서류를 읽을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92세로 3년째 거동이 힘드신 시모님에게도 방을 드려야 하고 시모님을 돌보는 가정부의 방도 필요했습니다. 박교수도 서재가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아이들 방도 필요했고….”
친정어머니 수발해준 시모
장교수는 1980년대 말까지 시모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았다. 장교수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딸이 둘인 집안인데 언니는 오래전에 이민을 갔다. 친정어머니를 모실 사람은 장교수밖에 없었다. 박교수도 6녀 1남 집안의 외아들이다. 장교수의 어머니가 1989년 별세하기 전에 3년 가량 병석에 누워 있었다. 며느리가 대학에 나가다보니 시모가 친정어머니의 머리를 잘라주고 목욕시켜주는 등 수발을 했다.
“제가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라고 하면 시어머니는 ‘뭘 그러냐. 내가 인생 늙어가는 법을 사돈한테서 배우고 있다’고 대답하셨어요. 친정어머니가 일곱 살 위셨죠. 친정어머니는 몸이 약했어요. 시어머니는 저보다 더 건강하셨고요. 시장을 함께 다녀오면 나는 고꾸라지는데 시어머님은 끄떡없으세요. 건강하고 정 많고 유능하고 헌신적인 분이죠.
두 분이 12년 동안 함께 살면서 친구처럼 지내셨어요. 언젠가 학교 갔다오니까 방에 냄새가 진동해요. 친정어머니가 설사를 하는 바람에 화장실 기어가느라 온 방에….”
―어머니 두 분을 모신 이야기를 청문회에서 왜 하지 않았습니까. 40평대 아파트 두 채를 붙여 사는 귀족 이미지가 어느 정도 불식됐을 것 같은데요.
“이름 그대로 청문회(聽聞會)니까 국회의원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들을 생각은 별로 안하더라고요. 질문을 던져놓고 단답형 답안을 요구해요. 제가 여성이 아니라면 박박 우겨서라도 길게 설명을 했을 텐데….”
박교수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미진함을 느꼈는지 보충 설명을 하고 나섰다.
“이화대학 정문 앞 무궁화 아파트 37평짜리에서 살 때부터 장모님하고 어머님 두 분을 모셨어요. 어른이 둘이고 내외가 학교에 나가니까 가정부가 필요했지요. 또 두 사람이 대학교수이니까 공부방이 필요하지요. 아이도 둘입니다. 37평짜리로는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목동의 55평 아파트로 이사가게 됐습니다. 장모님이 편찮으시니 어머님과 한 방에 모실 수 없었어요. 무궁화 아파트에 살 때는 같은 방에 모시고 커튼을 해드렸는데 목동으로 간 뒤에는 방을 각각 드렸어요.
55평이 좁다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맞아죽겠지만 두 어머니에게 각각 방 드리고 아들 둘한테 공부방 하나 주면 몇 개 남습니까. 가정부가 방이 없어 자꾸 나가려고 해요. 목동에서 이화여대까지 거리는 멀지 않지만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양화대교가 막히면 50분이 걸립니다. 그래서 아내가 총장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옆으로 이사온 것입니다. 이 아파트가 1998년 경제위기를 맞아 분양률이 60%에 못 미칠 때였습니다.”
장교수네는 목동 아파트를 4억3000만원에 팔아 창덕에버빌 아파트 두 채를 4억8000만원에 샀다고 한다. 지금 사는 아파트의 가격은 산 값 그대로다. 반면 목동 아파트는 7억원이 넘는다고 하니, 투자로만 본다면 실패한 투자다. 장교수네 아파트 두 채는 팔아봐야 강남에서 30평 아파트를 겨우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창덕에버빌 아파트는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을 끼고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고급 아파트라고 하기는 어렵다. 지하층부터 3층까지는 목욕탕 농협 헬스클럽 등이 들어있는 상가고, 4층부터 19층까지는 아파트다.
기혼자이기 때문에 장교수는 이화여대 총장 공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모와 친정어머니, 두 아이에게 방 하나씩 주고 부부가 서재를 갖기 우해 주상복합아파트 두 채를 구입했는데, 그것이 호화 아파트가 됐다. 왼쪽은 황호택 논설위원
“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으레 불법개조를 한다는 불신 때문에 그렇게 몰아붙인 것 같지만, 우리 아파트는 철골조 주상복합이기 때문에 중간에 쪽문을 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청문회에서 서대문구청 건설과장이 나와서 합법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14년 전 양주군 땅을 여섯 명의 교수가 3000만원씩 내서 1억8000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친한 교수들끼리 노후에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 함께 일을 하며 모여 살자는 목적으로 구입했지요. 그 땅이 14년 만에 2∼3배 올랐습니다. 그런데 M일보에서 동그라미를 하나 더 쳐서 50억원을 호가하는 땅이라고 1면 톱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정정보도도 안했어요.”
장교수는 여섯 명이 땅을 사회복지법인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부동산 기부승낙서를 보여주었다. 박교수는 “한국사회는 꿈을 죽이는 사회입니다. 평소 품고 있던 이상을 실천하려는 사업을 어떻게 투기로 몰아버릴 수가 있어요”라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파트 문제가 나오자 장교수와 박교수가 번갈아 억울함을 토로하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자는 주인 부부를 따라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안방에서 휠체어에 탄 장교수의 시어머니가 일행을 맞았다. 복도에까지 책꽂이가 늘어서 있었고 박교수의 서재는 책으로 뒤덮혀 동굴 같아 보였다.
―한국은 여성의 공직 진출에서 선진국에 비해 현격하게 뒤떨어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첫 여성 총리가 나오기를 기대한 사람이 많았지요. 여성계에서도 지원을 했지만 좌절돼 아쉬움을 느끼겠어요.
“한국 여성의 정치 참여 수준은 세계 최하위로 분류됩니다. 16대 국회 여성의원의 비율이 5.9%로 세계 97위입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여성권한척도는 64개국 가운데 61위입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여성의원 비율은 2.3%입니다. 여성의 역량을 국가발전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해야 합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합니다. 정보화시대는 남성의 근력보다 감성·지적 능력이 중심이 되어 여성의 약점이 극복되는 세기입니다. 여성들도 사회 진출을 열망하니까 소위 삼박자가 맞아떨어집니다. 내가 대학에 있다가 공직사회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가 7개월 가량 남은 상황에서 국무총리 서리 지명을 수락한 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 지혜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라는 대의명분과 책임의식에서 수락했는데 그만 꺾이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기회가 여성들에게 주어지겠죠. 한국사회를 위해 좋은 기회였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인준동의안이 부결되고 나서 한국이 남녀평등 사회로 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쓴 외국 신문들이 많습니다. 직접 투표하신 국회의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런 측면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장교수는 국회의원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질문을 하면 ‘나는 피의자가 아니다’ ‘당신 소설 쓰지 마라’ ‘여기서 선거운동 하지 마라’며 맞섰다. 청문회가 끝난 후 그는 남편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좀더 겸손하지 않았느냐. 자세를 낮추었더라면 가결될 수 있었을 텐데…’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여자치고는 자세가 너무 당당해서 손해를 보았다는 이야기지요. 내 키가 우리 또래의 여자로서는 조금 큰 164㎝이고 덩치도 작은 편이 아닙니다. 늘 반듯하게 앉는 편이어서 좌고(坐高)도 큽니다.
국회의원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총리가 돼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청문회 둘쨋날 더 강하게 나간 이유는, 사실이 아닌 것을 자꾸 시인하라고 자백을 강요해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문회를 피의자 심문같이 하지 말라고 했죠.”
―시중에서는 국회의원을 청문회에 세우면 한 사람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선거를 통해 검증받았다지만 연고주의 투표성향 때문에 뇌물 받아먹은 전과자도 사면복권되면 선거에 나가 당당하게 금배지를 다는 게 현실입니다.
“국회의원들이 저보다 도덕적으로 더 온전하냐 아니냐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그들이 진실 규명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선서를 한 증인들이 제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이야기를 하면 탁탁 잘랐어요.”
―여담 삼아 여쭙겠습니다만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위장전입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살지 않은 곳으로 두 차례 주소가 이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대 앞 무궁화 아파트를 살 때까지는 집 없이 전세로 살았습니다. 무궁화 아파트의 소유주가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잠적했어요. 은행이 아파트를 경매에 부치겠다고 해서 전세 입주자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됐어요. 1980년만 해도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없던 시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어머니께서 살집을 장만하려고 잠원동 아파트를 분양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궁화 아파트 주민들이 뭉쳐서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 은행 빚을 안고 아파트를 인수했지요. 그러니까 이사갈 필요가 없게 돼 결국 잠원동 아파트를 파셨죠. 부동산 중개인들이 한 100만원 남겼을 거라고 증언했습니다. 그것은 무주택 상태에서 살집을 마련하려다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두 달 동안 우리 가족의 주민등록이 반포 둘째 시누댁에 올라 있었어요. 총리 인준 청문회를 앞두고 가족회의를 열어봤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시모님이 뭔가를 하시고 싶었는데 못하시고 그냥 두 달 만에 다시 가져오신 거예요.”
장 전 총장의 시어머니는 92세로 휠체어에 의존해 거동한다. 노인성 치매 말기에 접어들어 며느리를 보면 ‘아줌마’라고 부른다. 시어머니의 정신이 맑았더라면 반포로 주민등록을 옮긴 이유를 물어보고 대처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한 건데도 왜 시모에게 미루냐는 비난이 나오더군요.”
이 집안에서는 부부가 모두 학교에 나가기 때문에 살림을 시어머니가 도맡았다.
“제가 살림을 못 배운 것도 시모님이 건강하시고 주도적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안 살림에 어설프거든요. 어머니에게 월급 봉투를 그대로 드렸어요. 시모님이 늘 ‘내가 놀러 다니지는 못해도 내 나이에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 하며 좋아하셨어요(웃음). 가정 살림을 주도적으로 꾸리는 걸 너무 기뻐하시는 거예요. 또 어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고 싶어도 제가 집안에 안 붙어 있었어요. 서재가 없어서 더 그랬지요.”
장교수가 가정 살림에서 완전히 손뗀 건 민주당 정대철 의원의 어머니인 고 이태영 여사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70년대 말 무궁화 아파트에서 살 때 시모님께서 가정법률상담소에서 이태영 여사를 만나고 오시더니 ‘어멈아! 너는 살림에 일절 관여 말아라’고 해요. 이여사가 오죽 말씀을 잘 하십니까. ‘장상이 앞으로 크게 될 테니까 잘 도와 주라. 그게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거다’라고 어머니를 감복시킨 거예요. 그 뒤로 부엌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모든 가사를 전담하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릴 뿐이지요.”
―총리서리 사임 후 청와대에서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했지요. 김대통령 부부가 뭐라고 위로하던가요.
“총리 지낸 사람들이 퇴임하면 관례적으로 식사 대접을 한대요. 그날 김대통령께서는 미안하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김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를 만들어 한국 여성의 사회 진출을 확대하려고 했는데 그걸 이해 못해준다며 무척 애석해했어요. 여성들이 좀더 단합해 노력했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좀 약했다고 하시더군요. 총리 부재로 인한 국정 공백을 걱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듣기만 했는데 국정 전반에 대한 얘기를 쫙 하시는 거예요. 대통령이 말씀을 참 잘 하시더라고요.”
―요즘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는 걸 보면 김대통령의 기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요.
“우리도 그날 염려하면서 갔는데 장장 두 시간 동안 거의 혼자 말씀했어요.”
부부이자 평생 학문과 신앙의 동반자인 장상 박준서 교수. 과거에는 박교수가 유명했으나 총리 인준이 부결된 후에는 장교수가 더 유명해졌다.
일제는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練成所) 지도자 양성과로 통폐합하고 다음해 이화여전을 폐교하면서, 1학년생까지 모두 졸업생으로 처리해주었다. 일제하에서 치러진 이화여전의 마지막 졸업식은 온통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가 이화여전 2학년 때 학교가 폐교됐다. 이여사는 해방 후 서울대 사대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했다.
―청문회에서는 이희호 여사를 잘 모른다고 잡아떼던데 인터뷰는 청문회와 다르니까 좀더 솔직히 말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안 건 오래돼요. 저는 1958년 이화여대 수학과에 입학해 1학년 때부터 YWCA 활동을 했습니다. 수학과 교수님들이 ‘야 너 수학과 왔니, YWCA과 왔니’하고 놀릴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이화대학 YWCA 회장도 맡았습니다. 그때 회원이 800명 가량으로 이화 YWCA의 전성기였어요. 이희호 여사는 그때 YWCA 연합회의 총무였어요. 연합회 총무가 YWCA에서는 실무적으로 최고 높은 자리죠. 저는 이화여대 YWCA 회장이니 당연히 이희호 총무를 알았지만 그분이 저를 알았는지는 모르죠.”
이희호 총무가 김대중씨와 결혼하자 YWCA 간부들이 조금 실망하는 기색이었다고 한다. 이총무처럼 똑똑한 여성이 전실 자식이 둘이나 딸린 무직 정치인의 재취로 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이희호 여사는 원래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되시면서 공식 석상에서 만나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악수하듯이 저도 악수하는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으론 모교 총장이라고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느낌을 가졌어도 그분하고 독대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람 죽이는 언론 권력”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김대중 대통령·이희호 여사 그리고 장교수가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해 설명해주겠습니까. 이희호 여사와 특별히 가까운 것 같은 인상을 주더군요.
“김정일 위원장이 한국측 대표들과 돌아가며 건배하면서, 그날 만찬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옆에 앉아 있던 북한 대표가 저에게 김정일 위원장과 건배를 하래요. 기독교인인 여성 총장이 김위원장과 건배를 하면 사진 기사거리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끝까지 버티고 안 나갔어요.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이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자고 제의했어요. 나는 뒤편에 서있었는데 제가 좀 크게 불렀던 모양이에요. 소프라노 소리가 나니까 임동원 특보가 이희호 여사 옆에 있다가 휙 돌아보더니 저를 끌어냈어요. 느닷없이 이희호 여사 옆자리에 서게 된 거예요.”
언론기관에 보낸 이력서에 기재된 학력도 청문회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장교수가 졸업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미국에서는 알아주는 명문. 한국에서도 쟁쟁한 목사들이 이 신학대학원을 나왔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김재준 한태동 곽선희 전경연 목사, 문익환 문동환 형제 목사가 여기 출신이다. 박준서 장상씨 부부는 예일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마치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를 했다. 차남 찬석(24)군도 이번에 예일과 프린스턴 신학 두 군데에 합격했으나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신학으로서는 워낙 명문이기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나오고 학벌 콤플렉스 느끼는 사람은 없어요. 프린스턴이라는 조그만 동네에 프린스턴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길 하나 두고 붙어 있습니다. 두 교육기관은 하나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크면서 갈라져 나왔죠. 프린스턴 대학에는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이 없어요. 그러니까 프린스턴에서 신학공부 했다고 하면 아는 사람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으로 압니다. 프린스턴에서 물리학 영문학 했다고 하면 그건 프린스턴 대학이고요.
나는 시시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6년 동안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면서 학벌을 속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외부 기관에서 이력서 달라고 할 때 스스로 작성해서 보내는 총장은 거의 없어요. 저를 도와주던 비서 네 명을 불러다놓고 프린스턴대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차이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두 명이 구별을 못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제 도덕성을 문제 삼는데 정말 불신의 사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김무성 의원이 국방을 모르는 여성이 대통령 유고시 직무를 대행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가 여성계로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국방을 모르는 여성 총리 불가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총리는 군대 복무 경험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국방에 대한 넓고 깊은 총체적인 전망을 갖고 있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자냐 남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국방에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하고 있느냐를 검증해야 하는 거죠.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여성이었습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10여 명 있는데 그 나라들은 국방을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시시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언론 보도에 오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언론은 사인(私人)에 관해서는 신중하게 보도하지만, 공인에 대해서는 의문 제기 차원의 보도를 곧잘 해요.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이 던지는 질문은 철저한 확인을 거쳐 보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속기사 수준으로 보도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검증 과정에서 언론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불만이 없었다고 하면 정직하지 않은 거죠. 사실확인에 소홀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언론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많이 느꼈어요. 언론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박교수가 94년형 쏘나타를 타고 다녀요. 우리 집에는 차가 한 대뿐이에요. 그런데 어느 신문은 자동차를 두 대 갖고 있는 것으로 보도했어요. 아주 가까운 친척이 전화를 걸어서 ‘언제 나 모르게 차 하나 또 샀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람들이 신문에 나면 그대로 믿어요.”
박준서 교수가 첨언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지만 조금 더 책임 있는 언론이 돼줬으면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언론재판에 의해 죄인으로 취급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장교수는 “황위원님, 우리를 언론하고 원수 되게 만드는 방향으로 글을 써서는 안됩니다. 나는 언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집중적으로 매스컴을 타는 바람에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지 않습니까.
“유명해져서 불편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청문회 끝나고 설악산에 갔더니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알아봐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꼬마가 엄마를 끌어당기며 ‘엄마 엄마, TV에 나온 사람이야’ 하더군요.
아들이 미국에 갈 때 공항에 배웅 나갔더니 내가 스타더라고요. 어떤 분이 지나가면서 ‘여자라서 그렇게 된 거니까 조금 참고 기다리세요’라고 했습니다. 사인해 달라는 사람도 있고 함께 사진 찍자고 청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집에만 있다가 답답해 모래내시장에 장보러 가면 시장 사람들이 쳐다보고 인사하고 악수 청합니다. 저 듣기 좋으라고 그러는지 청문회에 나온 국회의원들 욕 많이 하더라고요(웃음).”
―국회의원들에게 뭐라고 욕을 하던가요.
“못된 ×들이라고…(웃음). 창덕에버빌 아파트를 놓고 ‘호화 빌라’라고 한 것은 말이 안된다는 거지요.”
―장래 계획에 대해서 말해주시죠.
“이화여대 교수의 임기가 2년 반 남았어요. 행정하느라고 전공 서적 읽기를 소홀히했어요. 재충전을 해야죠. 새롭게 시작하는 심정으로 살려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뭘 해보라고 하지만 교수가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들 이중국적 문제의 진실
이대 부속병원에서 턱수술을 받다 사진기자들에게 시달린 장남(29)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어려서 척추가 S자처럼 휘는 척추 만곡증에 걸렸다. 수술을 해서 척추 양옆에 쇠막대를 박았고, 이번에는 위아래가 맞지 않는 턱을 수술하다가 국적 시비에 휘말려 고통을 겪었다.
“큰아들이 오랜만에 월드컵을 즐기면서 잠재된 애국심이 터져나와 국적을 회복하겠다고 말했지요. 인준안이 부결되고 나서는 너무 섭섭해서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큰아들 문제가 나오자 다시 박교수가 거들었다. “큰아들은 턱이 삐죽 나와 위아래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1.5㎝ 가량 비틀어졌어요. 아래턱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열흘 병원에 있는 동안 기자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몰려왔습니다.”
장 전 총장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큰아이 얘기는 그만하자”고 대화를 잘랐다. 박교수는 장남이 국적 시비에 휘말린 단초가 된 법무부 문서를 보여주었다. 부부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77년 2월27일. 두 달 뒤인 4월 말 법무부에서 아들의 이중국적을 정리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법무부에서 장교수 부부에게 보낸 공문서에는 분명히 ‘2개월 안에 아들의 국적정리를 하지 않으면 어떠한 조치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서가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국민 총화를 명분으로 이중 국적자에게 국적 선택을 강요하는 제도를 1년 동안 시행한 일이 있다. 총리 검증과정에서 법무부는 당초 그런 문서가 없다고 했다가 장교수가 계속 분명히 있었다고 하자 어렵게 문서를 찾아냈다. 법무부 국적과에 25년 전에 근무한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서류를 찾아낸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박교수는 “살벌한 유신 통치 아래서 2개월 내로 국적을 정리하라는 법무부 공문을 받고 심리적인 압박감을 적잖게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속지(屬地)주의라서 출생과 함께 취득한 미국 국적은 18세가 될 때까지는 본인도 포기할 수 없어요. 그때 큰아이가 네 살이었습니다. 부모가 대신 미국시민권을 포기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한국국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법무부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던지 1년도 안돼 국적정리 서약서 제도를 없앴습니다.”
그는 여기서 H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기사를 보여주었다. ‘장 총리서리 장남, 출생 10일 후에 한국 국적 포기’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원본 확인 결과 호적등본 전산화 과정에서 미합중국 ‘국적 취득’을 ‘국적 상실’로 오타해 생긴 잘못이었다. H일보는 1면 톱기사로 오보를 내놓고 해명기사는 한 줄도 써주지 않았다. 박교수는 “언론이 비난한 것처럼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병역기피나 국가관의 문제와 관련짓는 것도 지나쳤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로 北에서 박해받아
장교수는 1947년 여덟 살 때 평안북도 용암포(龍巖浦)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남행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이미 별세했고 언니는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었다. 용암포는 신의주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하항(河港)으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병영과 창고를 세우고 침략 거점으로 삼으며 급속히 발전했다.
장교수는 3대째 크리스천이다. 장교수의 할머니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평북 선천(宣川)에서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뿌리가 약한 서북지방에서는 양반 상놈 차별이 없고 남존여비식으로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기독교 사상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장교수의 할머니는 기독교에 심취해 귀천 없이 살아야 한다며 둥근 식탁을 만들고 사당도 불태웠다고 한다.
소련 군대가 진주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하고 나서 지주·기독교인·친일파 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숙청은 인민재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작인들이 지주의 집을 둘러싸고 두 시간 안에 200리 밖으로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 이때 평소 소작인들의 미움을 산 사람은 곡괭이에 맞아 죽었다.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장교수 모녀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장교수는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뒤인 지난 8월14일, 이화여대 총장 자리를 12대 신인령 총장에게 물려주었다.
장교수는 총장 시절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씨를 기념하는 상을 제정하려다 좌절된 적이 있다. 김활란씨는 YWCA 여성단체연합회 여학사협회 등을 만든 한국 여성계의 큰 인물이다.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고, ‘코리아타임스’라는 영자신문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말 친일 행적은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김활란 총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저는 김활란 총장 때 입학했습니다. 그분이 총장을 그만둘 무렵인 1960년 다락방전도협회를 만들었어요. 자기 돈을 들여서 전도하는 평신도 단체입니다. 주로 겨울방학 여름방학을 이용해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나는 다락방전도협회 창설 멤버인 수학과 교수를 따라 함께 전도를 나갔죠. 연세대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할 때 저를 불러 1년 반 동안 다락방전도협회 총무를 시켰습니다. 다락방전도협회는 농촌전도, 청소년전도를 주로 했고, 넝마주이·양공주 등 밑바닥에서 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업도 했어요.
학생 시절에 그분이 친일을 했다고 수군수군했어요. 그분 자서전을 보면 친일행위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러나 저는 그분의 헌신적인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총장이 됐을 때 김활란 총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학교재단을 중심으로 김활란 기념사업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친일 논란이 불거져 김활란상 제정 시도는 좌절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