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인사와 예산 독립이 관건”

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

  • 글: 정호재 demian@donga.com

    입력2002-12-02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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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위 출범은 시민운동단체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
    • 독립기구였기에 검찰 직권조사 가능
    • 현재 인력으로는 제대로 일하기 어렵다
    • 인권위는 ‘명동성당’이 아니다
    • 인권위만큼 비관료화된 조직 없다
    “인사와 예산 독립이 관건”
    11월25일로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62)가 출범 1주년을 맞는다. 1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많은 일을 겪었다. 인권위가 ‘낯선’ 기구였던만큼 정부 각 부처와 마찰이 적지 않았다. 인권위는 인권위대로 미처 정돈되지 못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검찰조사 도중 숨진 피의자 조천훈씨(32)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인권위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과 만나기로 한 11월6일은 조씨 사망 사건의 주임검사 홍경령씨에 대해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번 사건으로 말문을 열었다.

    국가 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

    -최근 검찰에서 일어난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물러나는 등 검찰은 만신창이가 된 것 같습니다. 위원장께서는 한때 검찰에 몸담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검사의 묵인하에 수사관의 가혹행위로 피의자가 사망했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담당수사관의 의욕 과잉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겠지만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잠재적인 의식과 인권에 대한 무지가 불행한 사태를 초래한 것 같습니다.”



    -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권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도는 쉽게 바꿀 수 있어도 의식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제도가 있다면 개선해야 하고 예방책을 마련해야지요. 그러나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련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 이번 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직권조사를 했는데 그 파장이 제법 컸던 것 같습니다. 직권조사를 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인권위는 피해자가 진정을 해올 때 비로소 인권침해사건을 다룹니다. 그러나 진정이 없어도 그 내용이 중대하고 인권침해 혐의가 짙으면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검찰이 제 식구를 제대로 조사하기 어렵다는 국민정서를 반영해 직권조사를 결정했어요. 이번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검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은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검찰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인권위는 공권력에 의해 빚어진 인권침해를 다루는 독립기관이니까 이번 사건을 우리 시각대로 풀어내 국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나설 경우 검찰이 놓친 부분을 포착할 수도 있고, 그 결과에 대해 국민들도 신뢰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직권조사를 하게 됐습니까.

    “사망한 피의자 가족에 대해 검찰이 1억원을 주기로 합의하는 바람에 가족들이 인권위에 진정을 하지 않았어요. 대신 공범으로 지목된 사람들로부터 3건의 진정이 들어왔더군요. 맨 처음 진정한 사람은 범행을 저지른 하수인이었습니다. 진정사건을 조사하려면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조사해야 합니다. 조천훈씨 사망 사건은 당연히 조사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죠. 11월2일 곧바로 의사를 데리고 구치소에 가서 진정인들에 대해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하고 진료소견서도 받았습니다.”

    -인권위가 개입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의 진상이 투명하게 밝혀졌다고 보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섰기 때문에 검찰이 자극을 받았겠죠. 인권위가 개입했는데도 검찰이 축소 수사를 하게 되면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죠. 인권위는 강제수사권도 없고 조사기법도 뒤떨어지지만 인권 침해사건에 우리가 개입할 경우 더욱 투명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서울 시청 옆 금세기빌딩에 위치한 인권위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까.

    작년 11월26일부터 올해 9월30일까지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서는 인권침해 2252건, 소수자 차별 128건, 기타 396건 등 2786건에 이른다.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인권위는 출범하기까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부터 인권위 설립을 시도했으나 기구 성격 등을 둘러싸고 이견이 적지 않아 2001년 4월에야 설치 법안이 통과되었다. 인권위 탄생에는 시민운동단체들의 오랜 ‘투쟁’도 한몫을 했다는 평가다. 김 위원장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의 시민운동 역사는 10년 안팎이지만 그 토대는 대단히 튼튼합니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느냐고 부러워하지요. 인권위가 행정·사법·입법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기구로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운동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 덕분입니다.”

    -외국에서 인권위에 대한 평이 좋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외국 언론 등으로부터 인권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들었지만 인권위 설립 이후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각종 국제 인권관련 회의에서 저희를 초청하고 있어요. 일본에는 국가인권위와 관련해 새로운 용어가 생겨 널리 사용된다고 합니다. ‘한국형 인권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본에도 수많은 시민단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참여연대만한 단체가 없습니다. 가장 큰 NGO가 일본변호사연합회인데 그곳에서 인권법을 다루는 변호사들이 저희를 찾아와 노하우를 배워갔습니다. 일본의 검사와 중의원들도 다녀갔습니다. 한국의 인권위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뉴질랜드와 호주의 인권위가 더 유명한데 한국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통 인권위원회의 모델로 호주를 꼽지만 그들은 서구 선진국과 비슷해 소수자 차별 이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에서는 아직도 국가가 자행하는 인권침해, 즉 공권력 횡포가 남아 있어 인권위 같은 독립기구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선진국이 장애인, 노인,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차별문제에 집중하는 데 반해 우리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아시아 각국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같습니다.”

    -인권위를 만들면서 애로사항이 많았을텐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지요.

    “인권위가 독립기구라고는 하지만 일할 때 핵심적인 문제는 인사·예산권입니다. 인권위는 말이 독립기구지 한계가 명확해요. 직원을 채용하는 데 일일이 행자부와 중앙인사위의 간섭을 받아야 하고 예산 제약도 매우 심했습니다. 인권위가 명실상부한 독립기구로 활동하게 하려면 인사와 예산을 독립시켜주어야 합니다.”

    -인력이 부족한 편인가요.

    “출범 초기 행자부와 싸워 확보한 인력이 정규직 180명, 파견 20명, 전문계약직 15명 등 모두 215명입니다. 행자부에서는 인권위였기 때문에 그 정도로 양보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 일해 보니 200여 명으로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부문의 인력이 부족한지요.

    “최근 벌어진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같은 것만 인권위 소관사항은 아닙니다. 진정사건 외에 조례를 포함하는 법령 전체를 대상으로 인권침해 여부를 검토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단지 새로 개정되는 법령이 입법 예고되면 그것을 검토하는 정도예요. 조례는 들춰볼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률에는 차별 조항이 적지 않아요. 그걸 다 손대야 하는 것이죠. 이번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만 해도 형사소송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을 고쳐야 하는데 형사소송법 개정 하나만 해도 전문가 10명이 달라붙어 몇 달 고생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인권위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집회도 자주 열리다보니 ‘21세기 명동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건 좀 잘못된 표현인 것같습니다. 인권위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소수자를 위한 기구입니다만 엄연한 국가기구예요. 따라서 농성하고 시위하는 장소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정부 내 다른 부처와 조정을 하고 권익을 위해서 싸우기도 해야 하는데 여기에 모여 시위한다면 문제가 있지요.”

    위원장 접견실에는 사진이 몇 점 걸려 있다. 지난 월드컵 때의 감격스런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다. 김위원장은 액자를 가리키며 자신이 찍은 것이라고 자랑한다.

    김위원장은 15년 경력의 베테랑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메고 여행 다니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라는 그는 집에 암실까지 갖추고 있다.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어렸을 때부터 찍어놓은 사진들을 꼼꼼히 정리해 십 수권의 사진첩을 안겨주며 사랑을 표현했다 한다.

    -15년동안 검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에 그만두셨죠?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요? 좀 미묘한 시기였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변호사 개업을 잘 했다고 봐요. 법조인들은 변호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경험을 쌓은 뒤 판사도 하고, 검사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변호사 개업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검사 생활을 할 때인 1970년대의 분위기는 지금하고 달라서 요정에서 술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검사가 술 얻어먹는 게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었거든요. 사람들이 찾아와 젊은 내게 영감님, 영감님하며 떠받들곤 했지요. 물론 검사라는 게 조그만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도(正道)를 걷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능력도 인정받고 있어서 사람들이 검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요. 참으로 순진했던 것이죠. 그러나 변호사 개업해보니 세상이 제대로 보이더군요.”

    -사람들이 옷을 보고 절한 셈이군요.

    “하하… 그렇습니다, 검사에 대한 존경심은 미미했던 것이죠. 제가 법무연수원에서 특강을 하거나 개업하는 변호사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어요. 판사나 검사이던 때를 잊어버려라, 남들이 나를 존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이죠.”

    -위원장께서는 1987년에는 김근태 고문경찰관 공소유지 변호사로 일했고,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에 참여하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그후에는 민변 회장을 지냈고 1990년대에는 참여연대 활동을 했는데 인권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민변 회원이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그때 인권사건과 시국사건을 맡아 일하며 세상에는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적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인권위가 1년 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가 중에는 인권위가 좀더 혁신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채 관료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권한을 갖고 있으면서도 법적인 틀 안에 안주한다는 것. 또 인권위 출입문을 통제하고,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에는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게 하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현장 인권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인권위가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제도의 틀 속에 안주할 경우 제2의 고충처리위원회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 인권위가 오랫동안 인권현장에서 일해온 운동가들과 대화가 없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단 시절부터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꾸준히 벌여왔습니다. 기획사업도 300여 개 단체들로부터 의견을 모아 함께 시행중입니다. 지금도 수시로 인권단체, 장애인 단체, 시민연합과 간담회를 하고 있습니다.”

    - 인권위조차도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가 빈번하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출입문 통제, 게시판 실명제 등인데….

    “게시판을 실명으로 한 것은 그곳에 남을 비방하는 글이 상습적으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실명제를 실시하기까지 내부에서 많은 논의를 했어요. 현재 득실을 고려중입니다. 출입문 통제장치는 이동권연대가 농성할 때 설치해서 오해를 샀는데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영국 앰네스티 본부나 미국의 프리덤하우스 역시 3군데의 검색대를 거쳐야 합니다.”

    -인권위가 관료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비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인권위만큼 비관료적인 조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민간인 출신들을 국가기구에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권위는 민간 출신이 45%에 이릅니다. 여성 비율도 43%에 이릅니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조직입이죠. 인권위는 국가기관과 시민단체의 중간에 서있다고 봅니다.”

    -인권위는 경찰에 대해서는 강하지만, 헌법재판소 법원 검찰 등에는 약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위원 중 상당수가 법조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허허허… 법원 판결과 헌재 결정에 대해서는 인권위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간섭을 할 수 없습니다. 인권위는 인권침해, 폭행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에 대해 조사권을 발동할 수 있지만 일반 범죄의 경우 개입할 여지가 없어요. 예를 들어 ‘경찰에서 얻어맞았다’는 진정이 들어오면 우리가 나서서 조사할 수 있지만 검찰이 개입하는 순간 우리는 빠져야 합니다. 이치가 그런데도 인권위가 경찰에 강하고 검찰이나 법원에 약하다는 이야기는 현실을 잘 모르는 것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권위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 보완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인권위에 강제수사권이 없고 과거 사건에 개입할 수 없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현 체제로도 잘 해나갈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유명한 감시제도인 옴부즈만 제도는 단지 권고기능만 갖고 있지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합니다.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받을 수 있게 일을 하느냐의 문제지요. 우리 결정이 인권에 바탕을 둔 신뢰받는 판단이라면 정당성을 획득할 것입니다. 보완할 것도 물론 있지만 지금은 권한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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