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돈 훔친 아들, 믿음을 가르쳐준 아버지

  • 글·이정빈 전 외교통상부장관

    입력2003-01-29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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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내가 몰래 용돈을 꺼내 쓴 금고의 열쇠를 건네주시며 “이젠 너도 장성했으니 이 열쇠는 네가 관리하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후 공직자가 된 나는 당시 아버지께서 정직이 최상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우리 일곱 형제를 모두 군대에 가게 하셨다. 자식들의 졸업식이나 수료식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아버지께서 논산훈련소로 아들을 면회하러 오셨다….
    돈 훔친 아들, 믿음을 가르쳐준 아버지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의 룸비니에서 생전의 아버지(왼쪽)와 함께 한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 장관(1984년 2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나이가 들면서 참 많이 바뀌는 것 같다. 같은 아버지이건만 내가 어렸을 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리고 할아버지가 되어 자식·손자들과 지낼 때가 다르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50을 갓 넘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내가 50대 중반일 때 80을 넘어 돌아가셨다. 부모님을 여읜 자식들이 생존시에 못다한 효도를 아쉬움으로 간직하는 것처럼 나도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추억 속에서 되풀이할 뿐이다.

    유품상자에서 발견한 초등학교 성적표

    어렸을 때 갖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새로워진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이 평생 보관해왔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일제시대에 다녔던 공립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성적표를 포함해 많은 서류를 보관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성적표라면 호적등본을 제외하고는 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아닌가.

    60여 년 전의 성적표는 빛 바랜 누런 종이에 불과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소화 19년도(1944년에 해당됨)에 발급된 성적표는 ‘통신표(通信表)’라고 기재되어 있고, 성적이 과목마다 ‘갑(甲)’ ‘을(乙)’ 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공부를 잘했는지 ‘을’은 하나고 전부 ‘갑’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상자에는 성적표 이외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졸업장과 많은 상장 등 나의 학창시절에 관한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단기 4292년 12월12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 나의 고등고시 합격을 알려준 ‘전보송달지’와 고등고시 최종합격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 단기 4292년 12월13일자의 빛 바랜 ‘한국일보’도 스크랩되어 있었다(당시는 연대를 단기로 표기하였다. 단기 4292년은 서기 1959년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늘 근엄하셨다. 희로애락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분이어서 나에게 아버지는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가장으로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접근하기 어려운 분이셨다. 학교에 낼 수업료와 용돈도 아버지께는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언제나 어머니를 통하곤 하였다.

    많은 학부형이 참석하는 수료식이나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운동회에도 부모님이 참석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의 성적은 비교적 좋은 편이어서 반에서 1등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료식 때는 대개 1등을 한 학생이 대표하여 수상하는데 나는 이러한 나의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수상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너무나 외롭고 슬퍼서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왜 자식들에게 냉정하고 무관심할까 하는 의문은 어린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백화점이나 식당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러한 아버지께서 자식들의 성적표 하나까지 전부 챙기며 보관해두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직접적인 애정표현은 자제하면서 자식들의 성장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씩씩한 사회인으로 키워나가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어린 나로서는 칭찬보다는 꾸짖음과 낮춤을, 단것보다는 쓴것을,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중시한 아버지의 사려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서 자식 모르게 60여 년 동안 보관해주셨던 초등학교 때의 성적표를 그 무엇보다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정직의 중요성 일깨워준 ‘금고사건’

    아버지는 정직과 신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다. 내가 정직을 우리 집 가훈으로 정한 것도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내가 정직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초등학교 2, 3학년 때 일어났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귀중품을 보관하는 나무로 만든 금고가 있었다. 금고 열쇠는 아버지께서 보관하고 계셨다. 나는 늘 굳게 잠겨 있는 나무 금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금고의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사이 열쇠로 금고를 열어보니 한 모서리에 돈이 쌓여 있었다. 수일 후 급히 용돈이 필요했던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싫어서, 금고를 열고 돈을 꺼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눈치를 살폈다.

    다행이 아버지께서는 전혀 모르는 듯 보여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나를 찾으시더니, 금고의 열쇠를 건네주시며 “네가 큰애가 되었으니 열쇠를 책임지고 잘 관리해 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몰래 금고에서 돈을 꺼냈던 나로서는 가슴이 철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열쇠보관 책임을 맡은 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금고를 열어보고 돈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돈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 모르게 돈을 꺼내 쓴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나의 잘못을 아시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오히려 열쇠까지 맡기신 아버지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주어 스스로 깨닫게 한 아버지의 뜻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나의 성장과정에서 정직의 중요함을 크게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이후 나는 정직을 평생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정직은 가족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최근 핵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국제사회가 북한을 믿지 못할 나라로 간주하며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자식들이 성장함에 따라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변해왔다.

    내가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외무부에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자유당 시절 외무부는 서울 광화문의 조선일보 맞은편에 있었다. 내가 출근길에 나서기 전, 아버지께서 더 일찍 외출을 서두르셨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미리 외무부 정문 맞은편 길에 나가, 나의 첫 출근을 지켜보셨던 것이다.

    아들의 졸업식이나 수료식에는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아버지께서 아들의 사회 첫 걸음을 몸소 지켜보고자 하신 것은, 자식이 사회생활에 잘 적응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정하셨던 아버지께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크나큰’ 사건이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일어났다.

    나는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4·19 이후 민주당 정부 시절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8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주말이면 가족 친지들과 만나는 면회시간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이미 돌아가셨고, 나는 미혼(未婚)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들 관련 행사에는 참석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말이 되면 나는 가족과의 면회는 꿈도 꾸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주말인가 나에게도 면회를 신청한 사람이 있었다. 면회소에 나가 보니 아버지께서 와계셨다. 아버지의 방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면회소 한구석에 앉아 아버지께서 준비해오신 도시락을 들면서 정답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아버지와 나누었던 정담이 내가 아버지와 나눈 첫 번째 대화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아들에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보시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후 떠나셨다. 그때 나를 뒤로하고 떠나시며 보인 아버지의 붉은 눈시울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수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몫까지 다하러 오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물을 보이신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인자하고 감성적인 아버지셨다.

    우리 형제는 아들만 일곱인데 나는 셋째다. 큰형님은 대학생 때 6·25를 맞았으니 일곱 형제가 전부 군복무를 마쳤다. 6·25동란 중은 물론이고 그 후로도 전선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1950~60년대에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풍조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자로 태어난 이상 국민의 3대 의무인 병역을 마쳐야 한다. 군복무를 마치지 않고는 떳떳한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하시며 병역 적년(適年)에 달하면 아들을 예외 없이 군대에 가도록 하셨다. 아버지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간혹 사회 저명인사들의 자녀 군복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투철하신 국가관과 자녀교육관을 되새겨보곤 한다. 만일 아버지께서 자식들에 대한 정 때문에 부당한 방법으로 자식의 병역의무를 면제시켜주셨더라면, 우리 형제는 과연 떳떳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겠는가.

    41년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아버지로부터 팽생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다. “공금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든가 “모든 결정은 신중히 하되 지나친 신중은 오히려 누를 범할 수 있다” 등등.

    아버지께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족한 실력은 노력으로 보충할 수 있지만 공금을 잘 못 다루어 생긴 불신은 회복할 수 없는 결격사유가 되니, 공금사용에는 각별히 주의하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아버지께서는 내가 사심 없이 공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내가 1960년 초 결혼하자, 아버지께서는 서울 서교동에 신축한 조그마한 주택 한 채를 사주셨다. 박봉에 집문제로 고민하다 유혹에 걸려들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신 것이다. 국장·과장을 하던 시절 연말이 되면 아내에게 직원들 회식 준비에 보태 쓰라고 하시면서 적잖은 용돈을 주곤 하셨다. 평소 아버지는 근검절약하는 분이셨지만 아들의 떳떳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남의 빚을 지지 않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만 자유롭고 떳떳할 수 있음을 일찍이 깨우쳤다. 나는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개인이나 국가는 빚을 지면 자유롭지 못하다(Those who are in debt are not free)”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나라가 5년 전에 겪었던 IMF 사태도 외국에 진 빚을 갚지 못한 데서 발단된 것이 아니었는가.

    부모의 은덕을 손자에게 전하며…

    1970년대 두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아내에게 나 대신 꼭 아이들 학교 행사에 참석해 아이들의 기를 북돋아 주도록 했다. 그리고 요즘은 우리 부부가 손자들의 운동회나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해 손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나는 지난날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면서 시대가 변했으니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경쟁이 강조돼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최고의 미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해 배려할 수 있는 것이고 선량한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주위 사람과 함께 잘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은덕을 이제는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부모님께 보은하는 길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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