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 안에 있다 해서 모두 죄인이 아니요, 감옥 밖에 있다 해서 모두 깨끗한 사람이 아니던 시절. 갇힌 사람도, 가두는 사람도 겸연쩍을 수밖에 없었던 교도소를 30여 년 간 지켜온 사람은, 세상과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은퇴한 교도관이자 수필가가 들려주는 ‘내가 만난 재소자들의 이야기’.
물론 수필집 한 권 냈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형서점에 가면 쌓여 있는 책이 몇 권인지 알 수 없고, 인터넷에는 갖가지 이야기를 갖가지 방식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책 한 권이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그보다는 저자인 윤덕근씨의 삶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평생 재소자들의 사연을 테마로 글을 써왔다는 이력, 8년 전 청주여자교도소 소장을 끝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재소자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교도관 하면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악덕 간수’만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바람이 차가운 어느 날, 그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윤씨의 자택을 찾기로 했다.
윤씨의 집이 있는 서울 공덕동의 언덕배기 교차로는 출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들로 뒤범벅이 돼 있었다. 약속시간을 넘겨 도착한 옹색한 교차로 한켠에 낡은 외투를 걸친 작달막한 노인이 가로수 밑을 서성거린다. 묻지 않아도 윤덕근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안내를 받아 아파트에 들어서자, 거실에 놓인 낡은 테이블 위 컴퓨터와 바닥에 놓여 있는 교자상에 올려져 있는 두툼한 원고뭉치가 눈에 들어온다. 30년은 족히 넘었을 낡은 가구들이 서 있는 살림살이는 더없이 단출하다. 거실 창에 붙어 있는 구구단이 적힌 대형 색종이,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그림책을 보니 아이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늙은 부부 둘이 살았는데, 얼마 전부터 손주 녀석을 기르고 있습니다. 우리 때는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서야 구구단을 외우고, 졸업할 무렵에야 한글을 뗐잖아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구구단을 떼더라고요. 대견하지요?”
청년 실업자의 마지막 벼락치기
윤씨의 얼굴에 어리는 흐뭇한 표정을 보니 머리 속에 들어 있던 딱딱하고 엄한 교도관의 이미지는 단숨에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혹시 또 모를 일, 집안에서 따뜻한 사람일수록 밖에서는 가혹하다고도 하지 않는가. 차근차근 그가 밟아온 교도관 생활을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으며 첫 질문을 꺼냈다.
-책 제목 ‘이름은 왜 불러’가 무슨 뜻입니까.
“교도관이 재소자를 부를 때는 대부분 이름이 아니라 수인번호로 부릅니다. 간혹 인간적으로 다가가고 싶어 이름을 부르면 적지않은 재소자들이 ‘이름은 왜 불러, 번호나 불러라’ 하고 냉소적으로 말하곤 합니다. 오래 전부터 그런 ‘익명화’가 과연 좋은 것인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지나온 교도관 생활을 정리하다 보니 그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아 제목으로 삼게 되었지요.
책을 쓰게 된 것은 갈수록 범죄가 늘고 있는 현실, 위험 수위에 다다른 인명 경시 풍조가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재소자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교도관 출신으로서 침묵을 지키기에는 속이 터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들의 일화를 모아 교훈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왜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 교도관으로 평생을 사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먹고 살 방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군대를 자원 입대했을 정도니까요. 제대한 뒤에도 다시 군에 들어가려고 애쓰다 실패했어요. 제발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하자는 마음으로 공무원 시험을 친 것이 교도관에 입문하게 된 계기입니다.”
주민등록에는 1934년 4월로 되어 있지만 윤씨가 실제 태어난 해는 1933년이었다. 그의 고향 충북 청원은 번화한 고장이 아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려 사는 인생’을 살다 간 아버지 때문에 그는 사실상 편모 슬하에서 자라났다. 일제 시대 서울로 이주해와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역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운영하는 신탄진으로 내려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외로움이고 바람이었다.
198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수필집 출판기념회 때 아내 한점자씨(62), 장남 성렬씨(39)와 찍은 기념 사진
“저는 지금도 대방동 공군본부 자리에 가면 가슴이 뭉클함해져요. 전역한 후에도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정문 앞에서 서성거렸지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그때였다고 말하면 군대 안 가려고 갖은 꾀를 다 쓴다는 요즘 젊은이들은 영 이해가 안 갈 겁니다.”
군대시절 상관의 도움으로 대학 야간부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댈 수 없어 곧 중단하고 말았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셈이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었던 자유당 말기와 4·19 무렵, 전국은 실업자 천국이었다. 윤씨 역시 막연한 절망감으로 서울을 배회하는 청년 실업자 생활을 했다. 어느새 나이가 스물여덟이 되었다.
“‘빽’이란 말이 그때 처음 나왔습니다. ‘빽’ 없이는 취업도 승진도 안 된다는 은어가 보통명사가 돼버린 거죠. 더 이상 갈 곳이 없더군요. 나이를 더 먹으면 평생 떠돌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겠더라고요. 그때 우연히 신문 쪼가리를 화장실에서 주워 읽게 됐어요. 거기서 교도관 모집 광고를 본 거죠.”
그날부터 방석이 삭을 정도로 자리에 붙어 앉아 50여 일 동안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경쟁률 36대1을 뚫고 운 좋게 합격. 이렇게 해서 드디어 1962년 1월, 33년에 가까운 그의 교도관 인생이 시작됐다.
교도관의 길, 수필가의 길
말단 5급(현 9급) 교도관 발령을 받아 맨 처음 근무를 나간 곳이 서울구치소였다. 가장 먼저 접한 재소자는 동아방송의 ‘앵무새 사건’에 연루돼 구치소에 들어온 최창봉 당시 동아방송 부장과 이종구 기자였다. 5·16 정권의 부당성을 ‘앵무새’라는 사회풍자 프로그램을 통해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인사들이었다.
“이른바 필화사건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잘 가두는 일’에만 몰두하던 제가 어느 날 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대화 내용이 아주 수준이 높더란 말입니다. 인격도 좋은 분들인 것 같고. ‘아하, 범죄자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온 이들도 그럴 수 있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으니 저도 참 순진했지요. 그 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처음 글이란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찌어찌 만든 습작을 이종구 기자에게 보여주었더니 자질이 보인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라고 권하더군요. 어찌나 뿌듯하던지.”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첫아이를 낳으면서 ‘이제야 철이 드는가’라는 제목의 원고를 ‘동아일보’ 생활면 ‘남성 코너’에 투고해 난생 처음 ‘활자 맛’을 보기도 했다. 이 때 받은 원고료로 수험서를 사 공부한 덕택에 승진시험에도 합격했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신동아’에 투고한 수필이 채택되어 게재된 일도 있었다.
“당시 교도관들 가운데서 글을 쓰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변호사도 아닌 젊은 친구가 기고를 하니 법무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더군요. 신동아에 수필을 쓴 것을 등단으로 인정받아 문인협회에 나가기도 했죠.”
이후 윤씨는 수필가와 교도관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직함을 갖고 살아왔다. 영등포구치소 서무과장, 청주감호소와 성동구치소 부소장, 강릉교도소와 청주여자교도소 소장, 서울지방교정청 관리국장 등을 지낸 윤씨는 1994년 정년 퇴임했다. 한편으로는 법과 규율에 복종해야 하는 교정공무원으로서의 신분,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수필가의 시선으로 지내오면서 남다른 생각이 없을 리 없다.
-군사독재 시절 학생이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것을 볼 때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그런 이들은 수감생활도 다른 재소자와 달랐을 텐데요.
“교도관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양심범’이 많이 들어와 있을 때는 애로가 많지요. 기강이 잡히지를 않으니 수용 관리가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미결수인 경우에는 덜하지만 기결수인 경우에는 접견문제로 입씨름을 많이 합니다. 이를테면 월 1회, 혹은 2회로 횟수가 정해져 있는 접견을 초과해서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그게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항의나 투쟁의 방법인 셈이거든요. 그러니 그들은 당당한데 오히려 교도소장인 제가 쩔쩔매곤 했지요. 그럴 때는 누가 소장이고 누가 재소자인지 모를 지경이었어요. 모두가 시절이 수상하던 때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차입을 금지하는 도서 목록도 많이 완화되었지만, 예전에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러이러한 책을 볼 수 있도록 허가하라’는 항의도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야 되도록 많은 책, 넓은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책을 허용하고 싶지만 시퍼렇게 규정이 살아 있는데 어쩔 도리가 없지요. 제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아는 재소자들이 ‘문인이라면서 어떻게 독서의 자유를 침해하느냐’고 따져 물을 때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냥 설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요. 설득이 잘 안 되면 다음날 만나자고 헤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어제 다 이야기 됐는데 왜 이제 와서 뒤집느냐’며 대들곤 하지요. 그럴 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상부에 개선방침을 건의했다가 호되게 질책을 받고 다시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요. 그럴 때는 그야말로 거짓말을 한 셈이 되는 거예요. 못할 짓이었지요.”
-시국 사범들과 논쟁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까.
“일부러 피했습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답답해서지요. 누군들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재소자는 누구입니까.
“김상현 의원과 임수경씨가 생각나는군요. 김상현 의원은 저더러 부처님이라고 해요. 참 화통한 분이어서 정치적으로 크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임수경씨도 딸처럼 예뻤어요. 대신 제 비위를 자주 긁는 편이었지요.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죄를 지어 형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는 당당한 태도였거든요. 그러니 나는 그 앞에서 뭐가 되겠습니까. ‘이 아저씨가, 이 아저씨가’ 하고 따지고 들 때는 군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가씨였습니다. 감방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어요.
노동 운동하는 여성 재소자들도 대가 셌지요. 행형법 한 구절, 부식메뉴 하나하나를 따져 묻곤 했습니다. 혹여 내가 ‘왜 그렇게 건방지게 나오느냐’고 나무라기라도 하면 ‘아저씨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고 대드는 겁니다. 교정 일선에서 일하는 우리가 고스란히 그 항의를 뒤집어쓰는 셈이었죠.”
그러면서 그는 “교도관들의 애로를 조금은 헤아려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정통성 없는 정부 아래서는 누구나 죄인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갇혀있는 사람은 형식상 죄인이요, 가두는 사람은 기분상 죄인이나 다름없었다는 토로다.
“그래도 갈등이 생길 때는 되받아 치면 안 됩니다. 탁구공과 똑같은 겁니다. 저쪽에서 세게 친다고 이쪽도 세게 맞받으면 결국 똑같이 다치게 되지요. 저쪽은 징벌을 받게 되지만 이쪽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으니까요.”
파렴치범일수록 목소리는 높아
-이제껏 만난 재소자 중 가장 많은 전과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전과 23범인 할아버지가 한 명 있었습니다. 나와 만났을 때가 예순여섯 살이었는데, 일평생 쥐 드나들 듯 감옥을 들락날락한 거죠. 어느날 꾸벅 인사를 하면 출소구나 했다가 또 좀 있으면 다시 들어와 신고식을 하는 겁니다. 눈 깜짝할 새에 일 저지르고 들어온 거죠. 다시 만나 반갑다고 인사하지만, 타성에 젖어 절도하다 붙들려온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한편 불쌍하기도 하지요. 하루는 농담삼아 일류 음식점 식사보다 교도소 밥이 더 좋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좋은 음식점도 보온밥통에서 밥을 꺼내주지만, 교도소에서는 끼니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밥을 주니 더 고급이라는 거죠.”
-얼마 전 한 지방 교도소에서 담배 차입 등 부정이 드러나 교도소장이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교도관들의 부정은 재소자를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더 큰 분노를 사는데요, 재소자를 교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범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다른 범죄와 질적으로 다른 것 아닙니까.
“교도관의 기본 교육이 안 되었을 때 터져나오는 사건이지요. 대개 그런 문제에 가담하는 교도관들은 임용된 지 2~3년이 안 된 경우가 많습니다.
교도소에서 담배는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의미를 갖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재소자들의 경우 답답한 게 많으니까 그러는 것 같아요. 입소할 때 항문에 담배 한 갑을 넣어온 사람도 보았습니다. 뜯지 않은 담배갑을 꼭꼭 쥐었다 놓았다 해서 동그랗게 만든 것을 비닐에 싸서 항문에 숨겨 가지고 입소한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문화민족, 선진국을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들 중에 유독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겁니다.”
-교도관 입장에서 가장 힘든 재소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손톱깎이를 꿀꺽 삼키는 사람도 있고, 못이나 유리, 돌멩이나 쇠붙이 같은 것을 삼키는 경우도 있어요. 그것도 교도관이 뻔히 보고 있는 눈 앞에서요.”
-항의 표시일까요.
“그것보다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를 잘못 건드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그런 뜻이지요. 교도관을 겁줘서 분위기를 유리한 쪽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어떤 재소자는 감방 마룻바닥에 발을 내놓고 발등에 못을 박더라니까요. 부하직원한테 보고를 받은 경우 중에는 교도관이 보기 싫다고 실과 바늘로 자기 눈을 꿰매버린 사람도 있었어요.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렇게 자기를 학대해야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는 거니까요.”
-우리나라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서도 편히 지낸다고들 하고요. 그러다 보니 재소자들이 교도행정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핸가 사면이 있고 나서 한 재소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소장님, 어망은 큰 고기가 잡히고 잔챙이는 빠져나가는데, 법망은 큰 건 다 빠져나가고 잔챙이만 걸리네요.’ 그냥 농담 한 마디 들은 셈치고 넘기려고 했지만 속으로는 기가 찹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교도소만큼 뼈아프게 다가오는 곳은 없을 겁니다. 정치를 하거나 법을 만드는 분들, 사법처리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은 재소자들의 이런 생각을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도소는 불평불만의 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중죄를 저지른 사람도 자기는 억울하게 잡혀 들어와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주위 환경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이해가 가는 재소자, 마음이 가는 재소자도 있는 반면 정말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어요. 반찬 그릇을 내던지며 ‘이걸 먹으라고 주느냐’고 따지는 재소자를 부드럽게 대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특히 상상하지 못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뻣뻣한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면 정말 화가 나지요.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염치도 없이 반찬 투정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지요.
괜히 교도관들에게 으름장이나 놓던 그런 인물들이 검사나 판사 앞에 가서는 어떻게든 동정을 받으려고 애쓰곤 합니다. 허리를 90도로 꺾어서 연신 꾸벅꾸벅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울컥 신물이 올라옵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다짐은 하지만 교도관도 별 수 없이 사람인걸요.”
“소장님, 석 달만 같이 살아요”
-여자 교도소에서도 근무하셨더군요. 다른 교도소와는 사정이 다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재소자 중에도 성격이 거친 이들은 다른 재소자를 두들겨 패거나 머리채를 잡아끌며 한 다발씩 뽑아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남자 교도관 입장에서는 여자들을 다루는 것이 간단치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혹시 유혹하려고 드는 재소자는 없었습니까.
별 기대 없이 던진 짓궂은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윤씨는 옛 기억 몇 자락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교도관과 재소자 사이라지만, 남자들끼리보다는 남자 대 여자가 더 사건도 많고 할 말도 많은 모양이었다.
“언젠가 45세 안팎의 여자 재소자를 면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달리 불안과 초조를 느끼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면담을 해야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재소자가 제 얼굴을 보자마자 펑펑 울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한참을 울고 나더니 사연을 털어놓더군요.
같이 살던 남자에게 매일같이 모욕과 구박을 당하고 산 여자였어요. 개처럼 얻어맞고, 가정부로 번 돈도 빼앗기고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지 자고 있던 남자를 넥타이로 목졸라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너 같은 인간 말종은 없어져야 한다’는 심정이었다는 거지요. 어찌 됐건 살인을 저질렀으니 끔찍한 일이지요.
그렇게 죽 이야기를 하고 나더니 감정이 조금 풀렸는지 ‘소장님하고 석 달만 함께 살다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러는 겁니다. 화들짝 놀라 얼른 방으로 돌려보냈지요. 당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는데, 미결 통산일수를 포함하면 지금쯤 풀려났을 겁니다.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위암에 걸린 여자 재소자가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마중하러 왔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은 장암 말기 환자인 거예요. 갇혀 있던 아내보다 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지요. 그런데도 껍질뿐인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아내를 데리고 나가더군요.
그날 퇴근하는 길에 전파상에서 노래가 한 곡 흘러나오더군요. 김수희의 ‘애모’였어요.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하는 가사를 새기다 보니 왜 그리 낮에 만났던 부부가 생각나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디다.
한 달이나 지났을까요. 남편이 짧은 시간 함께 지내다 먼저 사망했다는 소식이 어렴풋이 들리더군요.”
남자 재소자들은 출소 이후 교도관을 찾는 일이 거의 없지만, 여자 출소자들은 찾아오는 이들이 간혹 있다고 윤씨는 말한다.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 교도소에 놀러오는 출소자들도 있었다는 것. 윤씨가 은퇴한 이후에는 집으로 연락이 오기도 한다.
1987년 청주교도소 재직 당시 재소자 위문 공연을 위해 방문한 공옥진씨(왼쪽에서 세번째)와의 기념 사진
“자기가 택시를 몰고 있다면서 한사코 타라고 하더군요. 모범운전사로 벌써 5년째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답디다. 성당에는 훔친 돈의 백 배는 더 헌금했다면서, 반드시 천 배 헌금을 하겠노라고 마음먹고 있더군요. 모든 재소자가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소자들을 만나다 보면 재판이나 형벌 체계에 대해 느끼는 것도 있을 텐데요.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돈이 없어 제대로 변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변호인의 정성어린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 예를 들어 미성년자나 70세 이상인 노인, 농아자나 심신장애자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따로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으면 부득이 법원이 선정한 국선 변호인이 소송을 수행하는데,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수가 많아요. 국선 변호인이 피고인을 찾아가 사건의 경위나 내용 등을 정성껏 확인해 소송을 대행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거죠.
이들 피고인 중에는 ‘변호인이 있으면 뭐하냐’며 절규하거나 좌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는데, 교도소장이 드러내놓고 이들을 위로하자니 범죄자와 동조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내색도 못하고 공연히 분한 마음으로 혼자 먼 하늘만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언뜻 교도소 안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듯한 교도소장도 알고 보면 속 많이 썩는 자립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는 성격인 모양입니다.
“마음이 상할 때는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풀어야 할 텐데, 이제까지 한 방울도 입에 대본 적이 없습니다. 또 그런 식으로 고통을 달랜다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오죽하면 제 좌우명이 ‘싸우지 말자’겠습니까.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될 일도 안 되거든요. 거짓말 같겠지만 아내와도 싸움 한번 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것은 자식들에게도 철저히 교육시켜왔습니다. 얻어맞고 다니는 한이 있어도 대들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폭력으로 인생이 망가진 재소자들을 오래 봐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됐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은 그럴수록 성격이나 인성이 나빠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저 정직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정도지요.”
그런 성격 탓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통제하고 교화하는 데 익숙한 교도관이라는 신분 탓이었을까. 그가 여기저기 발표한 수필을 찾아 읽어보니 대부분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도덕 설교조의 글이었다.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읽는 사람들이 고리타분하다고 하지 않더냐고 물어보았다.
“살아온 생애가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저는 소박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농촌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란 때문이겠지요. 남들은 보수가 적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부족을 한번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으로 일한 33년이 행복할 수 있었던 거지요.”
아무것도 없으되, 부러운 인생
안빈낙도라 했던가. 윤씨는 은퇴 이후에 오히려 더 바빠졌다고 한다. 손주를 데려다 키우는 재미도 좋고, 가끔씩 출판사에 나가 교정을 보는 일이며 친구들과 함께 조촐한 동아리를 만들어 글을 쓰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이야기였다. 윤씨는 요즘 교도관 재직 경험을 살려 몇몇 교도소에 책을 보내고, 각종 사회 단체에 교도소 방문에 필요한 자문을 해주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거대한 부나 엄청난 명예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세상에서의 일을 다 마친 후 또 다른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부러워 할 만한 것이었다.
“제게 글을 쓴다는 것, 문인의 꿈을 품는다는 것은 법과 복무 규칙에 충실해야 하는 공무원으로서의 삶이 주지 못한 다른 무엇을 채우는 도구였던 것 같습니다. 딱딱한 모범공무원으로서 일생을 살자니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이 남고, 그렇다고 가난한 글쟁이로 삶을 꾸려나가자니 빈곤과 불안정이 두려웠다고 할까요.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였는지는 의미 없는 질문이지요. 오히려 두 가지를 모두 맛볼 수 있었으니 참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별다른 게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살았고, 나이가 들어 후회가 없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