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명 1년 10개월 만에 경제부총리 등극.
- 그러나 김진표 신임 경제부총리의 초고속 승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상사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보조를 맞추는 자세,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한 ‘끊임없는 준비’, 복잡하게 얽힌 사안의 가닥을 명쾌하게 풀어가는 탁월한 조정 능력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 관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와서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사람이 김부위원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들로부터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 어교수의 발언은 개혁성향이 강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교수와 재야 인사들이 대거 인수위원으로 발탁된 상황을 빗댄 표현이었다. 주류 무대에서 활동해온 학계 인사와 경제관료들이 대부분 인수위에서 배제된 마당에 김부위원장은 어교수가 믿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시점이었다.
김부위원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와 공식적으로 인연을 맺은 후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에 외로이 떠 있는 섬’에 비유했다. 그의 주변에는 개혁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포진했고, 노당선자로부터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공무원”이라고 극찬을 받은 김 부총리는 풍랑 속에 갇힌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은 신세였다.
‘월권’ 시비에 한동안 침묵
당시 김부위원장은 국무조정실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사무실도 두 개였다. 처음에 그는 인수위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경제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기자들 앞에 나와 입을 열기도 했다.
새 정부의 재벌개혁 강도에 대한 우려가 높던 1월8일, 김부위원장은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별관 기자실로 내려와 “재벌개혁은 자율적·점진적·장기적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따를 것”이며 “인위적이지 않고 시장친화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진행한다는 것이 노 당선자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초에 김대환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가 언급한 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에 대해서도 “(구조본은) 형태가 다양하고 법률적으로 제재할 방법도 없다”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의 말에 노대통령의 힘이 실려 있어서인지 개혁 성향의 인수위원들은 이날 아무런 이견도 내놓지 않았다.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인수위 사무실을 방문한 1월21일에도 김부위원장이 나섰다. 기자실에 들러 무디스의 방문 결과를 직접 설명한 것. 당시 무디스와의 면담에는 이정우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현 청와대 정책실장)와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일부 인수위원들은 “무디스와 인수위원들의 면담이었는데도 김부위원장이 무디스측과의 대화를 주도했고, 일부 대목에서는 인수위원들의 발언을 중간에서 끊기까지 했다” “김부위원장은 다른 인수위원들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얘기를 많이 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부위원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한 것에 대해서도 ‘월권’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인수위원들이 작심하고 김부위원장에게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1월23일 한경 밀레니엄 포럼이 끝난 직후였다. 인수위원들은 이날 김부위원장이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 등으로 기업의 투명경영이 정착되고 나면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을 문제 삼았다.
정태인 인수위원은 “집단소송제가 도입된다고 해서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없애겠다는 것은 인수위 방침과는 다르다” “인수위 경제분과에서 그같은 방안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으며, 김부위원장은 월권행위를 했다”고 격하게 비판했다. 그후 김부위원장이 “진의가 와전됐다”고 해명하고 이정우 경제1분과 간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겉으로는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으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부위원장은 이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무조정실장으로서 고건 부총리후보자의 국회 청문회 준비를 돕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인수위 사무실에 나와서도 더 이상 기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제 ‘끝장’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다.
그러나 김부총리는 노대통령이 장관 인선 작업에 착수한 이후 끊임없이 이런저런 하마평에 올랐다.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청와대 정책실장,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 등으로 거명된 것. 그러자 상당수 인수위원들은 “김진표가 경제부총리가 되면 경제개혁이 끝난다” “노대통령이 관료의 덫에 빠지면 안 된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정권 창출을 위해 한 배를 탔던 인수위원들의 정서적 거부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새 정부의 첫 경제팀 수장으로 김진표를 선택했다. 김부총리에 대한 노대통령의 신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배경은 몇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재경부 세제실장이던 김부총리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 김부총리가 노대통령에게 ‘똑똑하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분명하다. 세법에 정통한 변호사 출신인 노대통령이 세법 전문가인 김부총리와 교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노대통령은 한번 믿음을 준 사람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고 하지만, 인수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경제부총리로 전격 발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한 인사는 “노대통령이 자신의 얘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김부총리를 꼽았다”고 말했다. 인수위 활동 과정에서 김부총리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지만, 정작 노대통령이 경제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본 사람은 인수위원들이 아니라 김부총리였다는 얘기다.
김부총리가 취임 직후 “세금 감면과 비과세 조항을 줄이고, 법인세율을 단계적으로 인하하겠다”고 발표하자 청와대 비서실의 일부 관계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법인세율을 낮추면 조세 형평성을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노대통령은 3월10일 재경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일부에서 오해하듯이 대통령이 법인세 인하 방안을 제지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부총리의 ‘판정승’이었다.
김부총리는 ‘윗분’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이라기보다는 위에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성실성, 자신의 코드(code)를 윗선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그래서인지 그는 상사로부터는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지만, 밑으로부터는 “‘미리 준비하라’는 지시 때문에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올 만큼 ‘모시기 힘든 상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92층 걸어오르기와 禁酒 결심
김부총리가 재무부 사무관으로 일하던 1970년대 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재무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민속주 공급 확대 방안을 내일 아침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깜짝 놀란 차관은 담당 국장을 찾았고, 담당 국장은 다시 담당 과장을 찾았지만 과장은 이미 퇴근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진표 사무관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던 국장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듣고 난 김사무관은 “마침 민속주에 관해 만들어놓은 자료가 하나 있다”며 보고서를 내놓았다. 덕분에 아무 탈없이 보고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1993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의 뒤에도 김부총리가 있었다. 그때 김부총리는 세제심의관이었는데, 홍재형 당시 재무부 장관이 일요일마다 그를 만나 의견을 들었을 만큼 준비상태가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1982년 제정된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과 외국의 사례,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할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 등에 대해 꼼꼼한 검토를 끝낸 터라 실명제에 관한 한 어떤 질문에도 답변할 태세가 돼 있었다고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마련한 금융실명제 방안을 현실에 맞게 뜯어고치고 보안을 유지하면서 짧은 시간에 준비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데는 김부총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부총리는 상사와 보조를 잘 맞추기로도 유명하다. 1996년 9월 한승수 당시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한부총리가 세계 최고 높이의 92층짜리 ‘페트로나스’ 빌딩 옥상까지 걸어서 올라가겠다고 하자 김진표 비서실장도 기꺼이 따라 나서 ‘등정’에 성공했다. 92층 건물 꼭대기까지 따라올라간 그의 체력도 체력이지만, 상사와 보조를 함께하려는 태도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당시 재경원 관료의 얘기다.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국무총리 지명자로 내정되자 당시 국무조정실장이던 김부총리는 그토록 좋아했던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여러 부처의 업무를 조정하는 업무가 워낙 과중하다 보니 건강을 위해 술을 자제할 필요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여성 국무총리를 제대로 모시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상 총리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준이 부결되자 그의 금주(禁酒) 결심도 흐지부지됐지만, 윗분을 확실하게 모시려는 자세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상사를 극진히 모시는 김부총리를 상사로 모셔야 하는 부하 직원들이 그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 미래를 대비하려는 김부총리는 맡긴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새로운 일을 주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기대 수준을 충족시킨 직원들에겐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내지만, 그렇지 못한 직원들에게는 아예 일을 맡기지 않을 만큼 호(好)·불호(不好)가 뚜렷하다.
과감한 업무 추진 능력,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는 빠른 판단력 또한 김부총리의 장점으로 꼽힌다. 그가 오래 근무한 재경부 세제실은 업무 특성상 여러 부처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문제들을 ‘교통정리’해야 할 때가 많다. 갖가지 민원이 쏟아지고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제각각이다 보니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시간만 흘려보내고 정작 일은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제실 직원들은 “김부총리는 보통사람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뚝심 있게 추진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부총리가 세제실장으로 있던 1999∼2000년에는 에너지 세제 개편이 큰 이슈였다. 휘발유·경유·액화석유가스(LPG) 간 가격 차이가 지나치게 커 이를 시정할 필요성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었지만,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누구도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당시 경유 가격은 휘발유 가격의 절반 수준이었고, LPG 가격은 4분의 1에 불과할 만큼 가격 불균형이 심했다. 이에 비해 다른 OECD 국가들은 경유 가격이 휘발유의 80%, LPG는 60% 수준이었다.
김부총리는 일단 의견이 모이자 석유제품 가격체계를 OECD 국가 수준으로 바꾸는 에너지 세제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관련업계뿐 아니라 정부 부처, 정치권 등에서도 거세게 반발했다. 경유를 사용하는 화물차업체와 버스회사들은 “경유 값이 오르면 영업수지를 못 맞춘다”며 시위를 벌였고, LPG를 쓰는 택시회사들도 아우성이었다.
이들의 표를 의식한 집권 민주당도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
그러자 김부총리는 이해찬 당시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그는 “지금 에너지 세제를 개편하지 않으면 경유 차와 LPG 차만 팔리게 되어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시장이 왜곡된다”며 협조를 구했다.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병행했다. 결국 민주당은 김부총리의 주장에 동의해줄 수밖에 없었다.
업계에는 ‘각개격파’식으로 접근했다. 택시회사와 버스회사, 화물차업체들에겐 가격 상승분의 절반을 경영보조금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LPG차를 모는 장애인들에게도 별도의 혜택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또한 세율 조정으로 늘어나는 재원을 연금 소득공제 등에 활용하겠다고 제안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손실 발생분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까지 보상하겠다고 약속한 후 세제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2006년까지 경유와 LPG 가격이 단계적으로 오르는 것은 김진표 부총리 덕분(?)이다.
발로 뛰며 현안 해결
김부총리는 2001년 4월 진념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강력한 추천으로 세제실장에서 곧바로 재경부 차관에 발탁됐다. 진 전 부총리는 “김차관은 경제관료로 대성할 사람”이라며 그를 무척 아꼈다.
김부총리는 재경부 차관 시절 궂은 일을 도맡아 소리나지 않게 처리하는 일솜씨를 보여줬다. 한나라당이 공적자금 상환용 국채발행 동의안에 반대하자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공적자금 사용처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명한 사람도 그였고, 자금세탁방지 제도를 도입하고 여·야·정 포럼을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
김부총리는 지난해 상반기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일할 때도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최대 관심사는 ‘월드컵대회의 성공적 개최’. 청와대의 월드컵 담당은 교육문화수석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처들과 여러 경로의 업무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일은 김부총리에게 떨어졌다. 그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관련 부처 회의를 열고 해결책을 찾았다.
김부총리는 일단 결론을 내리면 주변의 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내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관계 부처를 직접 찾아간 것도 여러 차례다. 월드컵 참가 인사들에 대한 경호 문제가 논란이 되자 국방부로 달려가 장관을 면담했고, 대회 기간에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여권 발급과 분실 문제가 불거지자 외교부를 찾아갔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김부총리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들이 그처럼 쉽게 풀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월드컵 직후인 지난해 7월 국무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렇듯 여러 부처간에 얽힌 문제를 푸는 데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과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 등 두 명의 국무총리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준이 부결돼 어느 때보다 마음 고생이 많았지만 해결사로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김부총리는 조정능력과 균형감각을 갖춘 경제팀 수장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재경부 차관에 임명된 날부터 따지면 1년 10개월, 1급 관리관이 된 날로부터 따져도 4년 3개월 만에 경제부총리가 됐다. 직업 관료 출신으로 이처럼 초특급 승진을 한 것은 김부총리가 처음이다. 초고속 승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임창열 전 부총리가 차관급인 조달청장에 오른 후 경제부총리가 되기까지 2년 11개월이 걸린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속도다.
김부총리는 둥그스름한 얼굴, 온화한 표정에 늘 미소를 머금고 얘기한다. 달변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충분히 알아들을 때까지 차근차근 설명하는 스타일이다.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량으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재주도 비상하다. 정이 많아 부하 직원들에게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재경원의 위세가 막강하던 1996년에 은행보험심의관을 했지만 금융계에서도 호의적인 평판을 얻었다. 또한 공보관 시절에는 언론계의 마당발로 통했을 만큼 대인관계가 원만하다.
그러나 한번 눈밖에 난 사람은 마음 속으로 가차없이 내치는 차가운 면모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하 직원들 중에는 그를 대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의 냉정한 일면은 재경부 간부급 인사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리라고 내다보는 이들도 있다.
그는 부총리가 되기 전까지 한번도 다른 부처의 장관을 하지 못했다. 조정자로서, 그리고 해결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정부 부처의 장(長)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세제 분야에서 주로 일했기 때문에 경제 전체를 바라보는 ‘시력’은 다소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험난한 대외 변수
김부총리가 1970년대 중반 대전지방 국세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할 때 잠시 대전 공무원연수원에서 교수요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연수원장은 군인 출신이었는데, 그 지역의 예비군 대장과 군 시절 라이벌 관계였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공무원연수원 직원들이 예비군 훈련을 받았는데, 그 예비군 대장이 직접 나와 집체교육을 엄하게 시키고 기합을 줬다고 한다. 예비군 대장은 교육생으로 온 연수원 직원들을 혼내주려고 육사 생도라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다. 그러자 대열 뒤에서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없는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황당해진 대장은 다시 난해한 질문을 던졌고, 그 직원도 다시 소리소리 지르면서 뜻모를 대답을 했다. 피차 못 알아듣는 질문과 대답이 몇 차례 더 오간 뒤 대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훈련을 끝냈다.
훈련을 마친 뒤 김부총리가 대열 뒤에 있던 그에게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뜻을 묻자 그는 “저 사람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을 했는데, 무슨 답을 하는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했다. 그때 김부총리는 ‘이런 식으로도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김부총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화를 자주 얘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해결책을 찾아나가려는 김부총리의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김부총리의 앞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북한의 핵개발 추진으로 국가 위험도가 높아지고 있고, 내수 침체로 경기마저 침체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새 정부 경제팀이 노대통령 임기 초반에 경제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단기적으로는 상충될 수 있는 ‘경제 살리기’와 ‘개혁 추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김부총리는 안정형 경제관료들과 함께 새 정부 경제팀을 구성했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과도 큰 마찰 없이 정부내 이견 조율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주변에는 혼자 힘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대외 변수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얼마만한 돌파력을 보여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