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아들의 신앙 허락해준 참 자유인

  • 글: 현길언 한양대 국제문화대 교수·작가 hyunku@hanyang.ac

    입력2003-03-25 19: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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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은 혈육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노력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옷차림에 마음을 쓰셨다. 별로 배운 것은 없지만 아버지는 정연한 논리와 반듯한 글씨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셨다. 그 힘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그리고 타인에 대한 친화력에서 나온 것이다.
    아들의 신앙 허락해준 참 자유인

    1985년 현길언씨가 한양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자리를 함께한 부모님(왼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어느 날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아버지 모습을 보고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었어도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아이로 있었는데, 어느 새 내가 아들 앞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엄숙함과 거리감을 지금은 내 아들이 내게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두렵게 했다.

    아버지는 항상 나보다 먼 데 있는 어른이셨고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이 아니셨던가? 나는 그분보다 많이 배웠고 사회 생활의 폭도 넓으며 인생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께서 자신을 지키면서 흔들림 없이 살아오신 것을 생각하면, 나는 아버지의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분께서는 학교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하셨다. 한평생 제주도 산골 집성촌의 작은집안 장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의무와 당신의 동생과 자식들과 집안 식구들에 대한 책임으로 일생을 사신 분인데, 그 점은 내가 앞으로 백년을 더 살아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다.

    당신은 육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화려한 꿈은 꾸지도 않으셨다. 하루하루 가족이 무사함을 소망하며 살아오셨고 무정한 세월에 노쇠해 가는 육신을 지켜 가까이 있는 사람들 앞에 구김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 자존심이 이제 늙음의 나이에 접어든 나에게 부럽기 그지없이 다가온다.

    명당 찾기에 여념이 없었던 증조부



    아버지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던 경술(庚戌)년 목축과 밭농사로 100여 호가 모여 사는 현(玄)씨 집성촌에서 작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셨다. 나라 형편이 뒤숭숭하자 집안 어른이신 나의 증조부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시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조상 묘 자리를 찾는 데만 관심을 두셨다. 시골 살림이지만 머슴을 데리고 살았던 형편이라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을 집안에 살게 하면서 조상 묘를 쓰기 위한 명당 찾기에 열을 올리셨다.

    아버지는 그러한 당신의 할아버님(나의 증조부) 밑에서 한문을 읽다가 옛 현청 마을에 신식학교가 문을 열자, 친구를 따라 그곳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부님이 증조부님의 명을 받아 소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아버지를 불러내 그 길로 집으로 데려오셨다. 증조부께서는 장손이 신식 공부를 하는 데 반대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뭔가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어 집안을 뛰쳐나와 제주에서 가까운 마을에 사시는 고모(내게는 왕고모)네를 찾아가 그곳에서 정식으로 학문을 공부하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전학력이다.

    증조부께서 명당 찾기에 열을 올리는 사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다 날아가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 아래 6남매를 두고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나셨다.

    그때부터 집안의 장손 역을 맡게 된 아버지는 동생과 어른을 섬기며 집안 일을 떠맡았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한평생 일이 되었다. 어느 집안의 가장이 식구들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하겠는가마는, 아버지께서는 해방과 4·3사태라는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도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해나가셨다.

    해방이 되고 마을이 뒤숭숭해지자 아버지는 처지가 매우 어려웠던지 고향을 떠나 외지로 몸을 피하셨다. 중산간 부락인 우리 마을은 빨치산의 해방구처럼 되었으므로 경찰 토벌대에 의해 집이 완전 소각돼버렸다.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는 터라 나와 형님은 외갓집으로, 연로하신 증조부님은 종조부님 댁으로, 그리고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고향 마을에 남게 되었다. 함께 있는 것보다는 서로 흩어져 있어야 어느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집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어른들의 논리였다.

    그런데 외지로 피신하셨던 아버지는 고향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식구들이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음을 무릅쓰고 고향의 면소재지까지 와서 가족을 구해낼 계획을 세우셨다. 극히 비밀리에 추진한 일일 텐데도 어떻게 어머니와 연락이 닿아 가족을 해변 마을로 하산시키는 데 성공하셨다.

    그렇게 해변 마을로 소개되었건만 우리 가족은 몇 주 후 이른 아침에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와 형님을 떼어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셨다. 철이 들어서 안 일이지만, 아버지께서는 한치 앞의 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가족을 흩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어려운 시절인데도 아버지는 사상에 의심을 받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신분 보증을 서셨다. 아직도 해안부락으로 피신하지 못한 증조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산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다니셨다.

    그러다 소재를 파악하고는 경찰 토벌대를 따라 빨치산 점령 구역으로 들어가 증조할아버지를 구해내셨다. 아버지는 불과 불혹의 나이에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장손으로서 의무를 다해낸 것이었다.

    4·3사태가 종식되고 살림살이가 조금 펴지자, 아버지께서는 증조부와 조부님이 다하지 못하신 조상 묘소를 치산(治山)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증조부님의 열정으로 윗대 선조의 묘소는 섬 안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아버지는 한라산 중턱에 있는 고조부님 묘소 산역(山役)을 시작으로 꽤 많은 돈을 들여가며 4·3사태 때 제대로 치산하지 못한 여러 산소의 산역을 마무리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내가 살았을 때 하지 않으면 어느 아들이 나서서 이 일을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셨다. 지나고 보니 그 말씀이 옳았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 일을 앞장서 할 자신이 없다. 아버지는 그 일이 당신 몫이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다가올 세태의 변화까지도 예견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집요한 산역은 둘째로 태어나 어릴 때 집을 떠나 살아온 나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30대 중반까지도 제주 풍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력 8월 초하루에 전조상의 묘소를 벌초하는 일조차도 생활의 바쁨을 핑계로 참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우리 형제는 셋이나 되고 4촌들도 많았지만 형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지로 나가 살아, 8월 초하루 성묘 날에 한곳에 모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는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해내셨다. 그러한 일이 아버지의 삶의 중심을 지탱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유가적(儒家的) 가풍에서 엄격하게 자란 분이 아니셨다.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기셨고 술은 못하셨지만 고향에는 친구 분이 많았다. 아랫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고 특히 없는 자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셨다. 시골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여유도 가지셨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많은 빚을 졌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고향에서 예배당에 다녔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신앙에 대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유교적 제례를 철저하게 지키는 집안의 전통 때문에 그 많은 제사와 명절이 돌아오면 배례(拜禮)하는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아마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기독교 신도의 갈등이었을 것이다.

    나는 조상의 제사상 앞에서 배례를 하였지만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런데 어느 추석 명절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형제들과 같이 배례하려는 내게 손짓을 하시더니 뒤로 물러서 있도록 했다.

    “이제부터 제사 때 배례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으로만 해라.”

    나는 아버지의 결정에 대해 뭐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러한 결정을 하시기까지 내게 하고 싶은 말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파제(罷祭) 후 음복(飮福)을 할 때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조마조마하였다. 제사에 배례하지 않는 문제로 친척 형제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어렵게 된 이웃을 많이 보아왔었다. 그 문제로 형제와 부모·자식간에 갈등을 빚은 사례가 많은 것이 제주의 실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장손으로서 당신이 보여온 도량과 해오신 일을 돌아본다면, 아버지께서는 나에게도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강조했을 만한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한 관대함에 대해서 나는 지금도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넘어서 아들을 인격체로 존중해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아들에 대한 존중이 아들의 신앙에 대한 존중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미련스럽게도 한참 뒤였다.

    나는 나의 신앙으로 인해 집안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을 설득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게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내 형제들은 학생 때에는 나보다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으나 장성해 가정을 이룬 다음에는 신앙을 유지하지 못했다. 형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안의 장손 몫을 감당하느라 신앙을 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둔한 생각에 아버지께서 언젠가는 신앙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입으로는 아버지께 “예수를 믿으십시오”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그 문제로 고민하고 많은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간 아내가 아버지께 “예수를 믿으십시오. 저희는 아버님의 신앙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간곡히 권유하였다.

    “내게는 조상의 유업을 이어갈 책임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래 고맙다만, 나는 네 청을 들어줄 수 없구나. 나는 집안의 장손으로서 조상의 유업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살아온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조상님께 면목이 없게 된다. 대신 너희는 열심으로 믿음 생활을 해라”고 며느리의 마음을 달래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종교심은 소박한 수준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분명히 삶의 가치를 선택하는 차원에서 종교를 바라보셨을 것이다. 그런 기반 위에서 며느리에게 선택한 삶을 변경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진심을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아도 좋다고 허락하신 그분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아버지는 “나는 남에게 못할 짓을 하면서 살지는 않겠다”고 한 소박한 삶의 지표대로, 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그러한 선택은 나를 매우 쓸쓸하게 하였다. 내 믿음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영혼에게도 구원이 필요했지만, “아버지 식으로 세상을 사시면 돌아가신 후 영혼의 구원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신앙의 취약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버님이 베풀어주신 마음에 대한 아들로서의 작은 보답이기도 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15년이 되었는데 적잖이 후회가 된다. 이따금씩 아버지는 꿈에 나타나셔서 아주 어리거나 더 젊은 나를 앞에 놓고 책망하시고 섭섭해하시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나는 매우 우울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혈연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관계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각각 홀로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셨던 그 관대함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아들의 신앙을 허락해주시면서 인간적으로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조상 제사에 배례하지 않도록 허락하시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아프셨을까. 당신의 제사에도 절하지 않을 아들임을 아셨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당신께서는 둘째아들의 신앙 선택이 정당하다는 것을 아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내 믿음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장손으로서 당신이 지고 있는 의무를 외면할 수 없어 당신은 당신대로 그렇게 살아가셨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강한 고집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을 하지 않으셨다. 체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담배는 매우 즐기셨다. 주무시다 한밤중에 깨어나시면 담배부터 한대 피우실 때가 많았다. 그렇게 담배를 즐기셨는데 어느 날 고향에 들러보니 담배를 끊으셨단다. 약간 천식을 앓으셨던 아버지였지만 건강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반가워서 그 연유를 여쭈어보았다.

    “자식 손자놈들에게 추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담배를 피우면 가래가 끓고 그것을 뱉어내는 소리가 싫으셨던 것이다. 노인 방에서 풍기는 야릇한 냄새에 담배 냄새가 겹쳐치면 얼마나 역겹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한 방에 어느 손자가 와서 할아버지와 즐겁게 놀아주겠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존심을 매우 소중히 간직하며 일생을 사신 분이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가까운 혈육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으시려는 아버지의 노력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세가 높아지실수록 옷차림에 마음을 쓰셨다.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시골은 시골인데도, 내 앞에 나타나신 아버지의 옷차림은 늘 30년 더 젊은 나에 못지않게 밝고 깨끗했다.

    아버지는 깔끔한 옷차림만큼이나 반듯하게 세상을 사셨다. 많이 배운 것이 없으신데도 정연한 논리와 차분한 말씀과 반듯한 글씨로 주위를 제압하셨다. 그 힘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타인에 대한 친화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별로 공부를 하신 것도 아닌데 아버지의 글씨는 온 면(面)에 소문이 났다. 아버지께서 친척들의 결혼을 위해 예장을 써주시면 사돈 될 집안에서도 부러움과 존경이 쏟아졌다. 나는 악필인데 이는 아버지의 치밀함과 도량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공부도 했고, 사회와 사람을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고, 강단에서나 작품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다.

    내가 더욱 부러워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다. 그 옛날의 여느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권위주의적이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다. 빠듯한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의 옷과 밥상을 정결하고 풍성하게 해드렸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는 생전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고향의 풍습도 많이 변해 돌아가신 분에 대한 탈상 기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 제주도에서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돌아가신 분의 빈소에 2년간 상식(上食)을 올렸다. 그러나 이제는 이 기간이 6개월, 3개월로 줄어들었다.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88년 초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1년간 빈소를 모시기로 했고 어머니께서도 겉으로는 동의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탈상을 한 후 1년간 어머니는 삭망(朔望) 때가 되면 아버지 묘소를 찾아가 직접 상식을 올리셨다. 어머니의 그러한 정성은 아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행동을 지켜본 조카아이는 “나도 할아버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그 달라짐으로 인해 혼란이 더해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정은 더욱 깊어간다. 그분께서는 늙고 추해짐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79세라는 아쉬운 연세에 자식들에게 부담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어느 날 아침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자식에게는 한스러운 일이지만, 당신은 평소의 소원을 이루신 것이리라.

    이제 늙음의 추함과 외로움과 무력감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된 나로서는 조카아이의 말처럼 아버지의 일생이 부럽고 또 두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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