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중국동포 인권 지킴이 최황규 목사

“재외동포법 개정해 자유왕래, 취업 허용해야”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11-27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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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서울 중국성교회의 최황규 목사는 국내 체류중인 중국동포와 한족 중국인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는 “가리봉동을 중국동포와 중국인, 한국인들이 서로 돕고 살아가는 ‘중국동포 타운’으로 특화시키자”고 주장한다.
    중국동포 인권 지킴이 최황규 목사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시장은 흔히 조선족 거리로 불린다. 요즘은 조선족이란 어휘가 적합치 않다고 해 중국동포로 부르고 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에서 내리면 여느 거리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한자어나 약식 한자로 된 간판들이다. 이 거리는 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동포들과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들이 주로 살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동포와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중국동포 타운’을 건설하려는 목회자가 있다. 최황규(40)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점퍼 차림의 최목사에게서는 공사판에서 힘깨나 쓰는 십장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아닌게아니라 악수하려고 내민 손바닥은 말 그대로 솥뚜껑이다. 서글서글한 표정, 어떤 질문이든 거침없이 대답하는 품이 장군의 인상도 풍긴다.

    중국동포들은 서울 가리봉동, 구로동, 대림동, 가산동, 독산동 등지에 밀집해 살고 있는데 그 중 가리봉동이 대표격이다. 중국동포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는 주거비용이 타지역보다 싸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곳이 범죄의 온상으로 불린 적도 있지만 최목사 같은 목회자와 봉사자들이 활동하면서 지금은 개성 있는 마을로 변했다.

    “중국동포들은 가리봉동을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뒤에서 도울 뿐이죠.”



    최목사는 이곳으로 들어온 계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가리봉동이 중국동포 마을이라지만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겠지요.

    “물론이죠.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인도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동포와 한족 중국인이 대다수죠. 중국동포는 대략 3만에서 3만5000명으로, 중국인은 8000에서 1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동포들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와 충돌하고 갈등하지만 결국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배척하고 이단시하며 외면할수록 민족 에너지만 분산시키는 꼴이죠. 뭉치면 더 좋은 과실을 얻을 수 있는데 왜 못하는 건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 마을을 민족통합의 실험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는 분단된 민족의 통합을 이뤄야 하는데 막연한 관념적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요. 여러 가지 시도와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통합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에게서 젊은 목사들이 보이는 긍지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또 생김새가 시원시원해 신뢰감을 주었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말이 적합치 않다면서 대신 ‘중국동포’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도 말하는 중에는 중국동포와 조선족이란 용어를 혼용했다. 아직 중국동포라는 말이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족 중국인 위해 봉사

    -언제 이곳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지난 5월 이곳으로 들어와 중국인 근로자를 위한 교회를 세웠어요. 이전에는 구로동의 조선족교회에 있었지요. 조선족교회는 이제 안정 단계에 있기 때문에 제가 아니어도 잘 꾸려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목사는 가리봉1동 남구로역 아래 100m 지점의 건물 지하를 빌려 중국성 교회를 세웠다.

    -왜 하필이면 중국인 교회입니까.

    “한국에 온 중국인들은 용기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설교 때 ‘중국인은 모험을 할 줄 아는 민족이고 꿈이 있는 민족이며 고난을 뚫고 나가는 용감한 민족’이라는 말을 합니다. 제가 이런 분들을 위해 교회를 세운 것은 이분들과 함께 꿈을 가꾸고 세상을 열어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 중국을 만드는 전령이 되려고 나선 것입니다.”

    현재 중국성교회의 중국인 신자는 20여 명. 이곳에 처음 온 신자들은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제 밥 먹고 제 할 일이나 하지 왜 남을 도와주며 고통을 받느냐는 거죠. 유물론적 가치관이 그들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나타나요. 이들은 대통령도 비판할 수 있는 언론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요. 또 종교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국수도 말아주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것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죠. ‘나중에 큰돈을 뜯어갈 미끼가 아니냐’고 오해하기도 하고요. 그런 오해들을 풀어주고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중국성교회라 이름 지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선 교회의 고유 명칭부터 밝혀야겠군요. 중국성교회가 아니라 ‘서울 중국성교회’입니다. 앞으로 지방에도 중국성교회가 세워질 예정이라 서울 중국성교회로 명명한 것이죠. 저는 1999년 말부터 중국인 난민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해왔습니다. 당시 서울 조선족교회에서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족 동포를 돕는 일과 중국 한족을 돕는 일이 겹치니까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한족 중국인을 돕는 일이 더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안정적인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사목의 본질로 보지 않는다. 즉 아무나 그 자리에 가도 안정되게 업무가 꾸려지는 곳에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신도수가 3000명이 넘어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들어선 조선족교회에서 나왔다.

    -가리봉동에 사는 중국인들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8000명에서 1만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중국인 집단 거주지입니다. 이곳으로 모이는 이유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족과는 대화도 통하고 같은 중국 인민이니까요.”

    -가리봉동은 중국동포와 한족 중국인이 함께 살아가는 중국 동북3성(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중국 동북3성과 달리 조선족이 아니라 한족 중국인이 소수민족이죠. 즉 조선족이 주류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한족 중국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어요. 자신들이 살아가기에도 벅차니까요. 그저 통역이나 해주는 정도죠. 조선족에게는 이곳이 조국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돌아가는 혜택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족 중국인은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제가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중국인과 중국동포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한족 중국인은 다분히 대륙적입니다. 한마디로 사고의 틀이 크고 범위가 넓죠. 그러면서도 실용적이고 낭비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중국이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했는데 아마도 이런 기질 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동포는 대체로 순박하고 어질지요. 정이 있고 눈물이 있어요. 기분파적인 면도 있어서 한족 중국인보다 씀씀이가 커요. 어떤 때는 헤프다 싶을 정도로 쓰죠. 아마도 춤과 노래를 즐기는 한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국인은 신의와 의리를 존중하고 단결을 잘하며 지도자에 대해 순종적입니다. 조선족 동포들은 낭만성과 저돌성, 진취성을 갖고 있어요. 이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비애를 이야기하면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서는 차별을 덜 받는다고 하더군요.”

    -이곳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막상 중국인 교회를 열었지만 저는 중국어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이순덕 집사님이 통역을 해주고 있죠. 종종 이집사님이 제 말을 제대로 통역하지 못해 중국인 신자들이 잘못 알아듣는 경우도 있어요. 설교가 오해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친근하게 느껴져요. 중국인 신자들이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통역도 없어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죠. 그런데도 의사전달이 됩니다.”

    -중국인들이 겪는 애로사항은 중국동포가 겪는 것과 많이 다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로사항으로는 체불임금, 사기 피해, 산재 피해, 여성인 경우 성희롱과 성폭행이 있습니다. 중국인의 경우 언어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 조선족과 특별히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한중 친선의 다리가 되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많이 배우고 있어요. 중화주의에 근거해 무턱대고 인접국이나 주변지역을 패권적으로 보거나 지배하려는 의식도 자연스럽게 없어지고요. 이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1960년대 우리의 대학졸업자들이 서독 광부로 가던 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한국에 온 중국인들 중 상당수는 지식인입니다.”

    중국동포 인권 지킴이 최황규 목사

    최황규 목사는 지역 민간인들과 함께 ‘가리봉 중국동포 타운’이라는 지역신문을 만들었다. 관계자들과 회의하고 있는 모습.

    -중국인 교회를 세우기 전에는 조선족 교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8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경기 북부 외국인 노동자 선교센터를 운영했고 1999년에는 탈북자 돕기 활동을 벌였어요.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무척 피곤했기에 당분간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조선족 교회에서 같이 일하자고 신신 당부하더군요. 그래서 2000년부터 3년간 조선족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교회에서 본 중국동포들의 실태는 어떻던가요.

    “2000년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조선족 동포는 약 15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대개 불법체류자였죠. 매일매일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또는 중국에서 사업을 할 밑천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재산 전부를 내던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1∼2년 일하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고국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중국으로 돌아간 동포가 많습니다.”

    -중국동포의 불법 체류 문제는 남한 당국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요.

    “조선족 동포는 순박한 기질이 있으나 개인적인 싸움에선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무척 강인하죠. 이는 혹한의 기후조건을 가진 만리 타국에서 그런 억센 기질을 가지지 않고는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저절로 익힌 정신입니다. 이런 성향을 알아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농촌부터 대도시, 공장직원에서 의사까지 출신지나 직업 분포가 다양합니다. 비록 노가다(공사장 막노동꾼)나 파출부, 식당 서빙, 간병인, 공장 지배인 등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하지만 그들의 혈관에는 자긍심이 흐르고 있어요. 그것을 무시하거나 돈 좀 있다고 과시할 때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죠. 우리가 그들을 하층민 다루듯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들은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신분 보증이 필요한 입장입니다. 이 점을 악용하는 악덕 기업주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아요. 남의 약점을 잡아 이익을 챙기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거죠. 만약 불이익을 당하면 그들은 복수마저 생각합니다.

    남자들의 경우 현장 막노동을 많이 하는데, 동포 신분을 감추려 주민등록등본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만 해도 주민등록등본을 수도 없이 떼어줬습니다. 주민등록등본 한 장으로라도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으려고 하는 그들의 절박성을 헤아려줘야 합니다.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휴대전화가 유일한 통신 수단입니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구입하려면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해요. 그래서 제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만들어준 경우가 많은데, 요금이 체납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물어준 적도 있지만, 대체로 사고를 당한 경우지 악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 온갖 핍박 받아

    최목사는 중국동포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탄 청년들에게 쫓기는 중국동포를 숨겨주었다가 범인은닉죄로 경찰서에 넘겨져 6시간 동안 갇힌 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청년이 오토바이족에게 쫓기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조선족이 지갑을 가로채 달아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선족 청년은 자신은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왜 도망갔느냐고 물었죠. 그는 쫓아오니 납치하는가 해서, 또는 불법체류자 단속반원인 줄 알고 도망갔다고 하더군요. 저는 조선족 청년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몰래 도망가도록 도와줬죠. 그랬더니 범인은닉죄로 경찰에 고발되더군요.”

    그는 이런 일화는 너무나 많다며 또 한 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2년 전 밀입국하다 조직책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가까스로 조선족 교회로 숨어들어와 구조를 요청한 중국동포 청년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맞았는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고 눈두덩에 피멍이 들어 앞을 못 볼 정도였어요.

    그래서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청년을 데려가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경찰이 덤벼드는 겁니다. 교회 숙소 안에 밀입국 동포 50명이 숨어 있었는데 그 청년으로 인해 들통이 난 거죠. 경찰은 이들 조선족 동포를 체포하려고 교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어요. 두들겨 맞은 청년은 거의 죽어가고 다른 동포들은 하얗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신이 없었죠. 저는 ‘우선 죽어가는 사람부터 구해놓고 보자’고 하소연했죠. 경찰 간부들은 몇 차례 논의하더니 철수하더군요. 그때 절망에 사로잡혔던 동포들이 저를 에워싸고 울먹이며 감사하다고 말하던 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한편의 휴먼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다른 일화를 더 소개한다.

    “한번은 공사 현장에서 한국인 인부와 조선족 동포 간에 싸움이 벌어졌어요. 한국인 인부가 쇠파이프로 동포의 얼굴을 때려 광대뼈가 바스러졌습니다. 조선족 인부가 얻어맞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가해자는 이미 도망가버리고 없고 동포 인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더군요. 제가 ‘가해자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치니까 한국인 인부 4∼5명이 제게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비겁한 놈들이다. 연변에서 홀로 와 외롭게 일하고 있는 동포를 도와주기는커녕 어떻게 왕따시키고 놀려대고 폭행을 할 수 있느냐. 남자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다’고 나무랐지요. 그들은 처음에는 망치 들고 대들다가 제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들의 부당한 태도를 지적하자 하나둘 자리를 피했어요. 결국 가해자가 나타나서 사과를 하고 치료비를 물어주었지요.”

    그는 중국동포들이 신장판막증, 폐암, 기타 산재병 등으로 쓰러져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아 7000만∼8000만원의 치료비가 나왔는데 이를 갚지 못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잦아서인지 이젠 병원에서도 중국동포의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안타까워했다.

    형평성 잃은 재외동포법

    -가리봉동 중국동포 마을에서는 강력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런가요.

    “무엇보다 이곳이 공권력의 사각지대이기 때문이죠. 경찰이 적극적으로 치안유지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조선족 동포들이 대개 만주에서 일본군, 토비, 마적떼 등과 싸운 선조들의 후손이다 보니 그들 몸에 용맹스런 피가 흐릅니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어요. 이런 강인한 생존법이 몸에 배어 있어 한국에 와서도 그런 습성이 나타나는 거라고 봐야죠.

    거칠긴 하지만 이들 역시 아픈 역사의 피해자입니다. 독립운동의 요람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온 선조의 후예들이죠.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은 그런 선조의 값진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배척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풍찬노숙과 간난고초를 겪어온 그들을 외면한다는 건 민족의 자긍심에 스스로 상처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동포들의 신앙 태도는 어떻습니까.

    “사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심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종교의 가치를 모르죠. 또 안다고 하더라도 무속의 한 방법이나 주술적인 대상으로, 혹은 기복종교의 패턴으로 이해합니다. 이들에게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선교방법입니다.”

    최목사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밖에서는 처량하게 비가 내렸다. 창문도 없는 사무실에는 조도 낮은 형광등이 실내를 침침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시무하는 서울 중국성 교회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교회로 들어서자 이색적인 설교단이 눈에 띈다. 쌀뒤주를 설교단으로 세워놓은 것. 십자가 역시 고목을 주워다 틀을 짠 것이다. 가난의 때가 묻어 있지만 어떻게 보면 멋스럽다는 인상도 받는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아픔을 겪는 중국동포들의 아픔을 달래줄 정책은 없을까요.

    “우리의 법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게 큰 문제입니다. 현재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미국동포나 일본동포는 자유롭게 왕래하며 취업할 수 있으나 중국동포나 러시아 고려인은 제한받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가난한 나라에서 오는 동포는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남미의 가난한 동포들이 자국에 들어와 돈을 벌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말이죠.

    우선 재외동포법을 개정해 자유 왕래와 취업을 허용해야 합니다. 200만 중국동포는 민족의 번영과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자 세력입니다. 우리의 ‘맨파워’를 이룰 에너지원이라는 거죠.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됩니다.”

    최목사는 가리봉동에 중국동포 타운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 8월22일 발기한 ‘가리봉 중국동포 타운 만들기 운동 취지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국을 찾은 중국 동북3성의 동포들은 분단의 벽을 넘어서 온 민족 화합의 가교이며 이젠 고국에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건설역군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국은 동포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동포들에게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만이라도 만들어줘 고국의 따뜻한 정을 안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불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국동포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랑의 안식처를 만들어줌으로써 한국인의 동포애를 세계 만방에 떨쳐 민족통합의 물꼬를 트자.”

    그는 또 경기도 안산시의 ‘국경 없는 마을’처럼 구청이나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아 가리봉동을 중국동포와 한족 중국인이 한데 어울리는 마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이곳을 중국동포 불법체류자의 소굴 정도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집중 단속 때 이곳을 이 잡듯이 뒤집니다. 그러다 보니 동포들은 한국에서 숨쉬고 살아갈 곳이 거의 없어요. 중국동포 마을은 따지고 보면 민족 통합의 실험장인데 말이지요. 여기서 동포들은 한국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몸으로 익히고 배우고 있죠. 중국 베이징, 선양, 칭다오에도 코리아타운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중국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이곳을 방치하고 있어요.”

    -중국동포 타운 조성은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습니까.

    “가리봉동의 종교인과 민간인들이 참여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가리봉 중국동포 타운’이라는 지역신문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습니다. 또 중국동포 봉사단이 구성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청의 지원은 어떻습니까.

    “구청에서 ‘가리봉 중국동포 타운’이라는 간판 하나를 세워줬으면 합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을 중국동포 타운역으로 바꿔주면 지역특성도 살아날 것으로 봅니다. 서울시에서 이 지역을 중국동포 타운으로 지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동포들의 기초질서 지키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갈 방침입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 분리 수거하기’ ‘범죄 없는 마을 만들기’ 등이죠.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또 절기마다 축제를 열어 중국동포 만남의 장을 만들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가리봉동이 제2의 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불쌍한 사람 도우며 하나님 사랑 실천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가 왜 목사가 됐는지 물어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왜 목사직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기도를 하면 성적이 올라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떨어질 정도였어요. 그리고 의정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경을 26차례나 독파했지요. 그런데 성서를 읽을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더군요.”

    그는 장로회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고교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좋아 일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데 왜 신학대학을 가느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신학자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곧바로 방황의 시기가 왔다. 성경이 중동지역 종교문학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즉 영적인 대상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으로만 이해됐다. 어릴 적부터 믿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이 생겼고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결국 정신분열 직전까지 갔다.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한 그는 학교를 나와 공장 직공 생활을 했다. 그러는 중에도 산꼭대기에 올라 바위에 누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세계가 오기를 빌었고, 나타나지 않음을 괴로워하며 울부짖다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런 고뇌 끝에 복학한 그는 학부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수석으로 합격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교육전도사로 활약했다. 갈등, 고뇌, 번민, 회의 끝에 내린 정착점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 사회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교육시키면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동포와 한족 중국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의 실천이지요. 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어디든 달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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