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평생 전국을 걸어다닌 ‘江湖의 낭인’ 신정일

“길 위에 모든 것이 있다”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4-08-27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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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주일에 4일은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하루 평균 100리를 걷는다. 20여년 동안 오르내린 산이 300여개나 되고 남한에 있는 강이란 강은 모조리 답사했다. 어릴 적 섬진강 자락을 바라보며 키워 온,
    • ‘모든 강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그로 하여금 산천을 누비게 했다. 그의 인생의 8할은 자신의 발냄새
    • 배인 ‘길’이었다.
    평생 전국을 걸어다닌 ‘江湖의 낭인’ 신정일

    신정일씨는 전형적인 시골사람 풍모이지만 날이 선 콧대에서 결단력과 뚝심이 묻어난다.

    방외지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춰야 한다. 우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출퇴근하는 사람은 방외지사가 될 수 없다. 월급쟁이 치고 인생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라 하지 않았던가! 1만권의 책을 읽었으면 1만리를 가보아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어야 방외지사다. 마지막으로 되도록 많이 걸어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차를 타고 다니면 ‘주마간산’에 그치고 만다. 산천을 두발로 딛고 걸어 다녀야만 불꽃이 일고 불꽃이 일어야 깊이가 생기는 것 아닌가?

    삼백산(三百山) 삼백사(三百寺)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인물이 전북 전주에 사는 신정일(辛正一·50)씨다. 전형적인 시골사람 풍모라서 대면에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콧대는 날이 서 있다. 만만한 코가 아니다. 결단력과 뚝심이 있음을 말해준다. 자존심과 자기주장이 강한가, 아닌가는 얼굴의 콧대를 보면 안다. 그가 지난 20년간 전국 산천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닌 힘의 상당부분은 콧날에서 나왔지 싶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도대체 안 가본 데가 없다. 필자도 지난 십여 년 동안 국내 어지간한 명소는 두루 가본 편이지만, 그와 초식을 겨뤄보니까 상당히 밀린다.

    그는 답사단체인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이끌며 1박2일 또는 2박3일 일정으로 수백 개의 사찰과 명산, 문화유적지를 돌아다녔다. 답사일정은 1주일에 평균 2회. 즉 1주일에 최소 4일은 전국 곳곳을 구경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오르내린 산이 몇 군데나 되냐고 묻자 300여 군데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천산(千山) 천사(千寺)’를 다녀보는 것이 일생의 목표라고 하던데, 그는 이미 ‘삼백산(三百山) 삼백사(三百寺)’ 과정을 마친 셈이다.



    -그동안 다녀본 산 중 어떤 산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합천의 가야산 건너편에 있는 ‘매화산’이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대개 가야산만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조금 더 가면 매화산이 있다. 산봉우리의 형상이 매화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등산객이 별로 없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산봉우리들이 아주 인상적이다. 여기에 있는 청량사도 분위기가 독특하다.”

    -산을 다니면서 얻은 철학이 있다면….

    “산에 오르는 일은 그 무엇보다 평등한 운동이자 휴식이다. 산에서는 누구나 두 발로 걸어야 한다. 예외가 없다. 그래서 산은 평등함을 가르쳐준다.”

    어떤 사람은 땀을 흘리고 몸 속 노폐물을 빼기 위해서 산에 간다. 필자의 경우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기(地氣)를 받으러 산에 간다. 신정일씨는 산에 가서 평등을 느낀다. 이처럼 같은 산이지만 사람마다 쳐다보는 목표점은 각기 다르다.

    변혁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금강

    그는 산만 다닌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강을 대부분 걸어보았다. 그가 두 발로 걸어다닌 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금강이다. 발원지인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 뜸봉샘에서 장항제련소가 보이는 금강 하구둑까지 총 401km를 걸었다. 14일이 걸렸다고 한다(2000년 9월). 다음으로 섬진강.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대미샘에서 시작해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까지 총 213km 거리다. 9일이 걸렸다(2001년 2월). 그리고 한강. 삼척시 하장면 검용소에서 시작해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까지 514km를 걷는 데엔 16일이 걸렸다(2001년 4월).

    낙동강은 태백시 황지읍 천의봉 너덜샘에서 출발하여 부산시 사하구 을숙도까지 517km를 흐른다.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는 데엔 15일이 걸렸다(2002년 9월). 98km 물길이 이어지는 만경강은 3일만에 걸었다(2002년 8월). 동진강 54km 물길을 걷는 데엔 2일이 걸렸다(2001년 9월). 148km인 영산강은 5일이 걸렸다(2002년 10월). 남한에 있는 강이라는 강은 전부 답사한 것이다. 거리만 해도 도합 2000km다.

    그런가하면 조선시대 전남 해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던 삼남대로(三南大路) 413km를 2004년 4월 12일에 걸쳐 답파(踏破)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14좌 완등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신씨의 국내 답사기록도 ‘대장정급’에 해당한다.

    -강에 대한 소감을 말해달라.

    “강은 인간생활과 밀접하다. 한 방울, 두 방울이 합해지면서 점차 낮은 곳으로 흐른다. 중간에 오염된 물이 유입되어도 이를 받아들이고 정화해가면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포용한다. 우리나라의 강은 강마다 느낌이 다르다. 금강은 변혁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이다. 호남에서 시작하여 북진하다 계룡산을 멀리 싸고돌면서 다시 내려온다. 그 역류하는 강변마다 구체제에 대항했던 민초의 삶이 얽혀 있다. 섬진강은 퍼주고 또 퍼주고도 준 티를 내지 않은 누이 같은 강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흐른다. 한강은 민족의 동맥 같은 강이다. 힘과 활기가 느껴진다. 낙동강 물줄기를 보면 한민족의 정신사를 보는 것 같다. 상처와 영광이 아울러 깃들어 있다. 영산강은 강 중간 중간에 물막이댐이 많아서 허리가 잘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가장 오염된 강은 낙동강이다. 1970∼80년대 경상도 지역이 산업화하면서 낙동강이 그 직접적인 상처를 입은 것 같다. 그래서 ‘안동의 똥물을 대구사람이 먹고, 대구 똥물은 부산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나왔다. 이에 비해 한강은 깨끗한 편이다. 수도권의 식수라 그런지 비교적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한강은 경치도 제일 아름답다. 강물을 따라 걸으면서 강이 크고 길어야만 여러 가지 경치를 빚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장하게 흘러야 볼거리가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한강 경치 중 특히 아름다웠던 곳은, 남한강이 흘러오다가 단양에 이르기까지의 물길이다.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동강과 서강이 만나서 남한강이 되는데, 그 중간 중간에 고씨동굴, 온달산성이 있고, 영춘 일대, 단양팔경, 도담삼봉 일대 경치가 낭만적이다.

    낙동강 하류는 오염되었지만 상류는 아주 아름답다. 봉화 청량산과 도산서원의 중간쯤에 위치한 가송리 일대가 낙동강 경치 중에서 가장 볼만하다. 하지만 이곳에선 사람을 볼 수 없었다. 특히 청량산 기슭인 석포에서 명호에 이르는 구간은 한나절을 걸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길을 물어보려 해도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신정일씨의 인생행로를 보면서 ‘필드(field)가 그의 선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있다. 책상과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적거리기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뛸 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드 정신의 계보를 추적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선배가 한 명 있다. 18세기 중반을 살았던 이중환이다. 그가 쓴 ‘택리지’는 무려 20년에 걸친 현장답사의 결과물이다. 좋게 말해서 현장답사이지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20년간의 정처 없는 강호유랑(江湖流浪)이었다. 강호유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못하는 일이다. ‘끈 떨어진 연’이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은 끈이 떨어져봐야 비로소 산천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이중환은 나이 38세(1727년)에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 노론정권이 들어서면서 남인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는데, 이중환이 그 남인계보에 속해 있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끈 떨어진 사람이 시도할 만한 일이 주유천하(周遊天下) 아니던가.

    이중환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마음 편하게 살 만한 곳을 물색했다. 환갑 무렵 그 물색의 결과물을 책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택리지’다. ‘택리지’는 ‘정감록’과 함께 조선후기에 가장 많이 필사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택리지를 보고 각 지역의 특산물이 무엇이고 물류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고,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은 전국의 지세와 명당을 자세히 알 수 있었으며, 산수유람가에게는 여행가이드북이 되었다.

    신정일씨는 이중환의 계보를 계승하였다. ‘택리지’의 필드정신을 계승한 책이 그가 2003년에 내놓은 ‘다시 쓰는 택리지’(3권)다. 전국의 산과 강을 걸어본 강호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그는 길 위에 모든 것이 있다고 설파한다. 두 갈래 길을 만날 때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었다. 왜냐면 스스로를 강호(江湖)의 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호파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들어가 보는 사람이다.

    어둠, 고요 그리고 죽음의 공포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낙동강변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승부역’이 나온다. 이 승부역에는 승부터널이 있는데, 그 길이가 600m나 된다. 혼자 타박타박 이 터널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역무원이 팔을 붙잡았다. ‘무엇 때문에 굳이 걸어서 터널로 들어가려 하느냐. 조금 있으면 기차가 오니까 그 기차를 타고 가라’고 말하더라. 나는 ‘낙동강을 걸어서 내려오는 중이고 반드시 걸어야만 할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역무원이 랜턴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굴속이 깜깜해서 랜턴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평소 해질 무렵이면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랜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면서 역무원이 오후 5시45분에 기차가 터널을 지나간다고 알려줬다. 손목시계를 보니 5시20분. 기차가 통과하려면 25분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25분이면 600m 터널을 걸어서 빠져나가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평생 전국을 걸어다닌 ‘江湖의 낭인’ 신정일

    ‘세상은 걸을 만하다’는 신정일씨. 그는 앞으로 북한의 강을 비롯해 나일강 등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된 강을 걸어볼 작정이다.

    역무원의 걱정스런 얼굴을 뒤로하고 터널로 들어갔다. 한 발짝 한 발짝 50m쯤 들어갔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둘러쌌다. 순간 어둠과 고요의 절대공간으로 들어와 버렸음을 느꼈다. 터널이 곡선으로 뚫려 있어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한 발짝씩 떼어놓을 때마다 침목에 걸리는가 하면 철로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번뜩 ‘이러다 기차에 치여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45분에 온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내가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수시로 기차가 달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터널 중간에서 기차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쪽으로 엎드려야 할 것인가. 침목의 틈새에 바짝 엎드려야 할 것인가. 설사 엎드린다 해도 기차 바퀴가 나의 팔이나 등을 스쳐 지나갈 게 아닌가.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한 발 한 발 전진해갔다. 구부러진 터널이라 급히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손과 이마가 터널 벽에 부딪치곤 했다. 그때마다 몇 분 안 남았는데, 하는 강박이 밀려왔다. 엎어지면 다시 일어나 정신을 수습했다. ‘나는 나갈 수 있다’는 자기암시를 반복했다.

    악몽과 같은 어둠의 터널에서 기다시피 해서 나아가는데 저 앞에 빛이 빠끔하게 보였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 속에 지옥 같은 터널을 벗어나니까 눈앞에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났다. 그 계곡 옆에 내가 좋아하는 흰색 구절초 꽃이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땀을 닦으며 구절초 꽃을 보고 있는 사이에 기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금강을 걸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는데, 통과하는 지점이 금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지천’이라는 곳이었다. 지천을 건너려는데 다리가 없었다. 강을 건너려면 백마강교까지 가야 했는데, 3km도 넘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 마침 길옆으로 오토바이 2대가 오고 있었다. 지천에서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아 가지고 오는 현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붙들고 통사정을 하였다. ‘백마강교까지만 태워다 주면 기름값을 주겠다’고. 그러나 몇 번을 알아듣게 이야기해도 일절 반응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아였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걸어야만 했다. 그 거리가 어찌나 길던지….

    길을 걷다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도 많다. 공주에서 금강대교 근방을 지나갈 때의 일이다. 금강대교에서 공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게시판이 하나 서 있었다. 그 게시판에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삼대가 망하리라’고 씌어 있었다. 특히 ‘망’자는 빨간 페인트로 씌어져 내가 다니면서 본 게시판 글씨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게시판 부근에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삼대사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삼대가 내리 망하거나 흥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나 싶다. 아무튼 효과 만점인 경고였다.”

    ‘저 모퉁이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길에 대한 그의 설명 중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은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영남대로에 관한 것. 지금은 없어진 길이지만 조선시대 영남대로에는 세 갈래 코스가 있었다고 한다. 열나흘(14일)길, 보름(15일)길, 열엿새(16일)길이 그것이다. 열나흘길은 청도와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보름길은 울산에서 의성, 풍기, 죽령을 넘어 단양에서 남한강 상류의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열엿새길은 김해, 성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과거 보는 선비들은 죽령은 ‘쭉 미끄러진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해 피하였다. 반대로 문경새재는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고 해서 선호했다고 한다.

    열나흘길의 중요 포인트는 청도읍 고수리에 있던 납딱바위였다. 여행객이 이 바위에 앉아 청도천의 푸른 물결을 보면서 밥도 먹고 땀을 식히곤 했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철도신호대에 표지판만 남아 있다.

    -힘들 때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는가.

    “희망이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천근 만근 무겁게 느껴질 때는 앉은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 싫었다. 이대로 누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힘은 바로 희망이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릴까 하는 기대감이 계속 걷게 한 원동력이었다. 새로운 풍경이 나를 기다린다는 설렘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 희망을 가지고 한 발을 내디디면 그때부터 10리, 20리를 걸어갈 수 있다. 또 한 가지 길을 걸으면서 깨달은 원리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 속담이다. 이 속담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처음에 한 걸음을 내디디면 결국 천릿길을 끝내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우선 한 걸음 내디디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처음에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왜 강을 걸어다닐 생각을 하였는가.

    “내가 태어난 곳이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이다. 덕태산(德太山·1130m) 아래 자리잡은 마을인데 덕태산은 후미진 산골이자, 섬진강 자락이기도 하다. 어릴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저 강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궁금했다. 강 전체를 한번 보고 싶었다. 섬진강 중간 중간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면서 강 전체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부분만 볼 게 아니라 전체를 봐야 제대로 강을 본 것이 아닌가. 가장 먼저 섬진강 길을 걸었다. 섬진강을 걷고 나니까 우리나라 4대 강을 모두 걸어봐야겠다는 의욕과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강을 걷게 된 것이다.”

    -후원자는 있었는가.

    “없었다. 후원자를 기다렸다면 아마 걷지 못했을 것이다.”

    전국유랑 인생이 상팔자

    그가 하루에 걷는 거리는 평균 40km, 100리에 해당한다. 아침 7∼8시에 길을 나서 해질 무렵까지 걷는다. 낙동강 구간에선 하루에 64km를 걸은 적도 있다. 많이 걸은 날은 몸 구석구석이 아파서 숙소에서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부대낀다. 잠잘 때에도 걸어가는 꿈을 꾼다.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중간 중간 길가 식당에서 사먹기도 하고, 농촌의 비닐하우스에 들러 농부들의 새참을 얻어먹기도 한단다. 식당이나 사람을 못 만날 때를 대비해 비상식량을 준비하는데 건빵 2봉지와 물통이 전부다. 인적이 드문 고갯길을 걸어갈 때는 건빵을 먹는다. 한적한 고갯길에 혼자 앉아서 건빵을 먹고 있노라면 조선시대 봇짐을 지고 팔도를 걸어다니던 보부상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짐은 배낭에 넣고 다닌다. 옷은 티셔츠 포함 3벌을 가지고 다니며 2∼3일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추울 때는 내의도 준비한다. 세면도구, 책 1권, 건빵, 물통, 비옷은 필수품이고 한글학회에서 나온 ‘지명총람’중 해당구간의 참고사항을 복사해 간다. 현재의 지명과 옛날의 지명이 같은가 다른가를 대조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챙기면 15∼20㎏들이 배낭이 가득 찬다.

    그렇다면 그의 체력은 어느 정도일까. 키는 170cm에 체중은 54kg. 그리 좋은 체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쉰이 넘은 나이에 전국의 이곳저곳을 답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돈 벌기를 포기하고 전국유랑 인생이 상팔자라는 신념을 가진 것이다. 그는 40세 무렵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길을 떠났다. 둘째, 소식(小食)을 한다.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절대로 과식하지 않는다. 셋째, 폭음하지 않는다. 먹어 봐야 소주 2∼3잔을 넘지 않는다. 넷째, 일찍 잔다. 밤 11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고 밤참은 절대 먹지 않는다. 다섯째, 많이 걷는다. 걸으니까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을 걱정할 일이 없고 몸에 군살도 없다. 굳이 다른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신정일씨는 어떻게 전국을 걸어다닐 엄두를 냈을까. 오늘날 한국인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고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고역을 감내할 수 있는 내성(耐性)은 어디서 왔을까. 먹물이 많이 든 사람은 고역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 내성은 그의 출신성분(?)과 관련이 깊다.

    신씨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더 다니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진안군 글짓기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담임 교사가 “너는 앞으로 글을 쓰면 좋겠다”고 격려해준 것이 마음속에 각인됐다. 이후로 언젠가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책읽기를 즐겨했다. 산골집의 호롱불 밑에서 밤새워 읽고 또 읽었다.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낮에는 교복 입고 중학교 가는 친구들을 쳐다보며 소 먹일 꼴을 베야 했지만, 밤에는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책을 읽으려 노력했다.

    ‘세상은 걸어다닐 만하다’

    15세가 되던 해 ‘가출’을 했다. 스님이 되겠다고 구례 화엄사로 ‘출가’한 것이다. 2개월여 화엄사에서 생활했지만 주지스님이 차비를 주며 ‘너는 아무래도 중이 될 팔자가 아닌 것 같다. 집으로 가거라’고 해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냥 집으로 가기도 뭐해서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여수로 내려갔다. 여수에서 한려수도를 보며 내쳐 부산까지 갔고 부산에서 울산으로 올라갔다. 울산에 가니 차비가 바닥났다. 울산에서 대구까지는 도둑기차를 타고 왔지만 그 이상은 차를 탈 수 없었다. 돈이 떨어진 상황에서 공간을 이동하는 방법은 두 다리로 걷는 것뿐이었다.

    대구에서 전북 진안까지 걷기 시작했다. 1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농사일을 도와주고 얻어먹고, 산딸기를 따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시골집에서 재워주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면서 1주일을 걸었다. 그때 ‘세상은 걸어다닐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고향집에 돌아와 농사일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니체, 카뮈와 같은 외국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제대 후에는 제주도에 갔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를 읽고 정말 이어도가 있는지 알아보러 간 것이다. 2년 반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는 일을 했다. 당시 신제주에 제주도교육청, 제주여객터미널, 제주MBC, KBS 건물을 신축했는데, 이 건물의 벽돌 중 상당부분은 그가 등짐 지어 올린 것이란다. 이 와중에서도 ‘문학사상’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같은 잡지들을 구독했다. ‘언젠가 글을 쓰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밤에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았고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제주도에서 번 목돈을 가지고 전주로 갔다. 그리고 전북대학교 앞 건물 지하에 세를 얻어 카페를 차렸다. 카페 이름은 ‘당신들의 천국’으로 지었다. 이청준의 소설 제목이다. 당시 전북대 학생들 치고 이 카페에 들르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는데 자연스럽게 전북대 가정과에 다니던 오현신이라는 여학생을 알게 됐고 결혼까지 골인했다. 주변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다.

    이 무렵 그는 ‘황토현문화연구회’라는 답사단체를 주도했다. 1985∼86년쯤이었다. 버스 1대에 40∼50명의 회원을 태우고 전국을 훑고 다녔다. 답사에 치중하다 보니 카페는 언제나 적자였다. 결국 생계는 고등학교 교사인 부인이 책임을 졌다. 그가 답사에 몰두할 수 있었던 힘은 부인 오씨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1990년대 초 그는 동학의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세우는 일로 김지하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지하 선생으로부터 ‘동학은 민초들의 혁명이다. 신정일 당신도 민초가 아닌가. 당신 같은 사람이 열심히 동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격려와 권유를 받았다. 이후 신씨는 동학을 비롯한 민중종교 사상가들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학의 기반이 되는 김일부와 강증산, 그리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에 대해 깊이 알아보았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공부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씨는 40세가 넘어 처음으로 들은 ‘공부 좀 해라’는 소리가 무척 감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35평 아파트 방마다 꽉 들어차 있는 6000여권의 책은 대부분 이때부터 읽기 시작한 것이다.

    풍부한 현장답사 경험에 인문학적인 소양까지 갖추게 되니 이제 비로소 평생 소원이던 책을 쓸 수 있게 됐다.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지워진 이름 정여립’ ‘금강, 401km’ ‘섬진강 따라 걷기’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신정일의 낙동강 역사문화탐사’ ‘다시 쓰는 택리지’가 바로 그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대안교육의 모델이기도 하다.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면 그는 방외지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전국의 모든 강을 걸어다닐 생각을 하였겠는가. 무학력에 이리저리 잴 게 없는 여건이 그로 하여금 전국의 산하를 걷도록 만들었다. 그는 학벌도 없고, 조직의 보호도 없고, 월급도 없는 삶을 뚝심 하나로 살아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영남대로 420여km를 걷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북한의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을 걷겠단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강, 나일강을 걷는다는 포부를 세워놓고 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길 위에서 걷는 인생을 고집해나갈 것 같다.

    두 갈래 길에 마주칠 때마다 ‘어느 길로 가야 맞는 것인가’ ‘이 길이 나의 길인가’ 수없이 고민했다는 신정일씨. 하지만 혼신을 다해 걷고 나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 바로 자신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인생살이도 그러한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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