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 글: 이이화 역사학자 history13@hanmail.net

    입력2004-08-27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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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문벌자랑을 하는 선비들에게 ‘조상 뼈다귀를 우려먹는다’고 호통을 치셨다. 貴賤이나 嫡庶를 가리지 않고 능력과 인품을 중시하신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나의 아버지 야산 이달(也山 李達 : 왼쪽에서 두 번째) 선생 주변은 주역에 통달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붐볐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나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는 어김없이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의 행적이 주변에 많이 알려진 탓일 게다.

    우선 당신의 제자들이 대구 대전 서울 등지에 퍼져 살면서 스승에게서 배운 ‘주역’을 강의했다. 그 가운데 한 분인 대산 김석진 옹이 아버지의 학문과 행적을 담은 ‘스승의 길, 주역의 길’(한길사)이란 책을 펴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조용운 교수는 아버지의 기행(奇行) 같은 행적을 담은 글을 신문에 연재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생애는 ‘신비스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분명히 나의 아버지 야산(也山) 이 달(李達)(감히 객관적으로 기술할 요량으로 존칭을 생략)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그랬기에 아들의 삶에 적지않은 고통을 떠안겼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재야사학자나 민중사학자라고 부르고 한문에 해박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영향 탓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 시기도 있고 심각한 갈등관계였던 적도 있다. 또 한때는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내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식으로 돈벌어 ‘이상촌’ 건설



    자, 지금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나는 열다섯 살에 가출하였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다. 그때 야산선생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옥가실이란 곳에서 삼일학원을 개설하고 한문과 주역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아버지한테 배우던 한문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가출을 결심하였다.

    초봄 어느 날, 나는 배우던 한문책을 싸들고 부여장터에 놀러 가는 척하면서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마을 어귀 작은 고개를 넘으면서 삼일학원을 바라보고 꾸벅 절하는 것으로 하직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입 속으로 ‘배반’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눈물을 삼킨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쯤에서 아버지가 살아온 역정을 간단히 더듬어보자. 아버지는 1889년 지례 원터(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에서 몰락한 향반(鄕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한문을 배울 때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장해서는 독학으로 주역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3·1운동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김천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잡혀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아버지를 둘러싸고 ‘주역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탓인지 아버지는 이내 풀려났으나 그때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40대 들어 대구로 나온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기미(期米, 주식 형태의 투기)’에 손을 댔다. 주역에 통달했다는 소문 탓인지 아버지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는 이 무렵 태어났다. 아무튼 아버지는 기미로 꽤 큰돈을 벌었으나 집안 생활비는 거의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집에서는 아버지가 혼수 자금이라도 보내줄까 기다렸으나 끝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혼례를 이틀 앞두고 무명 두 필 들고 와서 큰형수에게 던져준 것이 아버지가 한 일의 전부였다고 한다.

    대신 아버지는 기미로 번 자금으로 철원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20여호를 데리고 이주하였다. 고대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실천하는 이상촌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 2년 만에 집단농장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동료를 통해 백정들의 인권운동단체인 형평사에 자금을 보내주고 만주로 독립자금을 보내주었다고도 한다.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전시체제 아래에서는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참배나 동방요배(東方遙拜), 또는 묵도(默禱)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화를 소개해보기로 하자.

    대전역 광장을 지날 때 마침 묵도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렸다. 순간 모든 사람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묵도를 하였다. 그러나 야산선생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태연히 걸어갔다. 그러자 역전 주재소의 순사가 이 광경을 보고 일행을 불러 세운 뒤 왜 묵도를 하지 않느냐고 힐문(詰問)하였다. 그러자 야산선생은 느닷없이 그 순사의 뺨을 후려치며 “너야말로 묵도는 하지 않고 길가는 사람들을 눈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니 혼 좀 나야겠다”고 소리친 뒤 유유히 걸어갔다고 한다.

    “당신 ‘羅가’요, 나가!”

    그 뒤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해방 무렵에는 가족을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 둔 채 전국을 분주하게 유랑했던 것 같다. 또 해방 후에는 가족마저 대둔산 아래 수락리에 옮겨두고 당신은 대둔산 석천암에 자리잡은 채 주역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와서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야산선생이 도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산속으로 들어오다가 성을 잃어버렸소. 내 성을 좀 찾아주시오.”

    “허어, 그래요. 어느 아이가 이 산속에서 아버지를 잃었다면서 헤매고 있길래 성이 뭐냐고 물었더니 ‘나’가라고 합디다. 당신 나가요, 나가!”

    바로 그 사람의 성이 ‘나(羅)가’였다고 한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돌다보니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점점 더 늘었다.

    그 무렵 나도 산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어른들 틈에서 호된 수업을 받으면서 야뇨증과 말더듬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석천암에서 108명의 제자를 기르면서 정치를 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현실정치만큼은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경찰관, 사회주의자, 친일파, 순수한 한문쟁이 등 다양한 배경의 제자들은 서울말씨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를 뒤섞어가며 밤이면 밤마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 어린 나는 이 논쟁에 늘 귀기울였다. 가끔 그들이 들고 오는 신문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한창 성장할 나이였던 나는 이 절간 같은 곳에서 줄곧 배고픔에 시달렸다. 논산 등 인근에서 공부하러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 먹을거리를 들고 와서 뒤주에 부어놓았다. 하지만 서울이나 먼 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쌀 뒤주는 자주 비었으며 세 끼 모두 멀건 죽으로 때우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야산선생이 어디론가 편지를 써보내면 먹을거리가 제법 넉넉하게 공급되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3년을 지낸 뒤 한국전쟁 직전 서산 안면도(당시는 서산군에 속함)로 이주하였다. 좁은 안면도에 300여호의 주역패가 몰려들었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아버지가 3년간 살던 대둔산 수락리와 석천암이 한국전쟁 말기 빨치산의 손에 넘어가 모조리 불에 타버리고 안면도만 안전한 피난지가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야산선생을 신통한 예언자로 받들 수밖에 없었다.

    9·28 수복 후 아버지는 다시 제자들을 데리고 부여로 옮겨왔다. 나는 이 무렵 주로 아버지를 따라다녔으나 1년에 한 번씩 이리에 사시는 어머니에게 들렀다.

    가출과 고학생 시절

    이렇게 아버지가 나를 어머니에게 보내주신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아버지의 커다란 실수였다. 그때 나는 도시의 마을로 내려와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영어와 역사 등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의 말쑥한 교복과 내가 걸치고 있는 바지저고리를 비교하면서 무언가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무렵 나는 이광수의 ‘사랑’을 비롯해 소설을 여러 권 빌려 읽게 되었는데, 이런 신소설들을 읽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배우던 한문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도 가출의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가출할 무렵 어머니는 이리에서 부여읍내로 옮겨와 살고 계셨다. 어머니에게만 가출의 결심을 밝히고 여비를 얻어냈다. 어머니는 외가로 가서 외삼촌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고 일렀다.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경북 성주에 있는 외가로 달려갔다. 외삼촌들은 나를 극진하게 맞아 주긴 했으나 학교에 보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내가 머무르는 주소를 쓰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 가출의 뜻을 밝힌 한문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렇게 외가에서 1년쯤을 빈둥거리다가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 아껴주시던 고령의 이모부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트럭을 얻어 타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왕래하면서 이발소 같은 데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결국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부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처럼 고아 아닌 고아로서는 피난지 부산의 혼란이 오히려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아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든지, 초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든지, 이 학교 저 학교 옮겨다니면서 월반을 할 수 있었다든지 하는 따위 역시 이러한 혼란을 틈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고학생으로 부산 여수 광주 등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번듯한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나는 다른 학우들과는 다른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또래 아이들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다는 점이다. 학령(學齡)을 놓쳐 늦게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나이를 물어오면 나는 늘 머뭇거렸다. 남들보다 나이가 많은 이유를 한참 설명해야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 않은 탓에 수학 과학과 음악 미술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었다. 고학생 처지에 과외를 받을 수도 없었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셋째, 동료들보다 한문을 잘했다. 덕분에 유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당시 모든 교과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었던 터라 국어 역사 등 인문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를 능숙하게 읽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상계’ 애독자였다. 역시 한문 실력 덕분일 것이다. 인문과목의 선생님들만큼은 나를 귀여워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 아닐까? 더욱이 ‘고아’라고 속인 채 고아원을 떠돌아다닌 것은 정서에 상당한 갈등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가출죄’에 면죄부를 주었다. 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나를 한동안 멀거니 쳐다보다가 ‘나가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것으로 용서를 받은 셈이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가출한 뒤 어느 제자가 방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혼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다고 한다. 평소에 보지 못한 광경이어서 그 제자가 까닭을 물으니 ‘자식이 집을 나갔는데 어느 부모가 가슴이 아프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더란다. 또 내가 가출하면서 적어놓은 편지를 보고서는 ‘편지 쓰는 법을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제법 썼다’며 칭찬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칭찬을 받은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당신은 나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다시 말해 한문의 대가, 주역에 통달한 선비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아들이 이런 뜻을 저버린 채 자신을 배반하였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자식들 중에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어디 한둘이던가.

    내가 어렵게 대학에 다닐 적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고전 관련 서적을 몇 권 보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아버지는 동양학문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당부의 말씀을 담은 편지를 보내주셨다. 이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편지이다.

    아버지는 신학문을 철저하게 배격한 척사(斥邪)계열의 선비였다. 그러기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놈이 된다’며, 해방 뒤에는 ‘서양놈이 된다’며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고집불통의 선비였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누나 칫솔 한번도 안 써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문벌자랑이나 늘어놓는 부유(腐儒)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문벌을 자랑하는 선비들에게 ‘조상 뼈다귀를 우려먹는다’고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귀천(貴賤)이나 적서(嫡庶), 출신지역을 따지지 않고 능력과 인품을 중시한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평등주의자였다. 가끔 본관이나 고향을 묻는 일은 있었지만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알아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또 결코 신문물을 이용하는 일도 없었다. 기차나 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평생 비누나 칫솔, 화장품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사진은 딱 두 번 찍었다. 해방 뒤 정동한이라는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서고 나서 여러 사람의 권유에 이끌려 신랑 신부와 그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도민증을 낼 적에 순경이 찾아와 ‘도민증 사진을 찍지 않으면 제 목이 달아납니다’라고 호소하자 마지못해 찍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은 바로 그때 찍은 것이다.

    옷과 음식은 주변에서 마련해주는 대로 입고 먹었을 뿐 옷이 좋다거나 음식이 맛있다는 따위의 말을 아버지는 한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어느 날 큰며느리가 두루마기를 새로 지어 드렸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께서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며느리가 ‘혹시 두루마기를 어디 두고 오셨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태연스럽게 ‘추워 떠는 거지가 있어서 입혀주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며느리는 돌아서서 와락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러니 아버지를 기인(奇人) 또는 의인(義人)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지 않은가.

    내가 고학으로 공부하던 시절 입학금과 공과금이 모자라 아버지에게 돈을 좀 보내달라고 편지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제자들이 용돈으로 드린 돈을 모아두기라도 하셨는지 입학금의 일부분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내가 평생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돈이었다. 막내동생은 딱 한번 양복 한 벌을 얻어 입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는 남편을 둔 탓에 어머니는 참기름 장사에서 두부 장사까지 자식들을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을 나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정을 느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야뇨증과 말더듬 증세로 고통을 받으면서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다.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한 일도 적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부자가 한 밥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신동아’에 임시직 취업

    나는 20대 후반부터 역사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런데 잘 곳도 없고 먹을 곳도 없어서 정상적인 대학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 내 공부방이었다. 또 직장 생활을 통해 공부할 조건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에 월간지 ‘신동아’에서는 매년 신년호에 별책부록을 펴냈다. 당시 별책부록은 대부분 한국사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때 나는 동아일보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이 작업을 맡았다.

    덕분에 6~7개월 동안 여러 한국사 학자를 만나고 그들의 원고도 다루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작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내게는 동아일보 조사부의 도서를 대출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번 돈으로 약간의 저축을 하고,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사 또는 한국학 관련 논문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내 손으로 논문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어릴 때 배운 한문 실력으로는 어려운 원전을 독파하는 데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국역연수생을 양성하는 국역연수원에 들어가 한문을 다시 배웠고 뒤이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사업에 종사했다. 또한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작업을 했고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작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직장이 곧 나의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이었다. 이 시기에도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배운 한문이 기초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지금도 나의 형수씨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했다’고 하면 ‘서방님의 머리와 한문 실력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냐’며 나를 꾸짖는다. 옳은 지적이다.

    아버지의 역사관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관을 형성하는 데에도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나는 처음부터 막연하나마 민족사와 민중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역사는 무수한 외침에 시달린 끝에 식민 지배를 겪고 분단 구조 아래에 놓여졌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민족사를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사관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 역시 아버지의 척사(斥邪)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다음으로는 민중사적 접근이었다. 이는 곧 우리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 소외당한 사람, 차별받은 사람들을 역사에서 복권시키는 작업이었다. 노비 백정 등 천민과, 차별받았던 서자나 함경도 평안도 등 특정지역 출신들의 한(恨)과 비애를 역사에 기술하는 일이 내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분야였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인권과 평등의 관점에서 이들의 처지를 부각시켜 오늘날의 거울로 삼으려 했다.

    나는 집에 있을 때나 고학을 할 때나 처지가 너무나도 어려웠으며 자연히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나의 역사관에는 이런 환경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부자나 권력자를 보거나 만나면 어딘지 껄끄럽게 느껴졌다. 지금은 조금 변한 것 같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당시 경상도 사람들이 몹시 싫어하던 전라도로 가족들을 이사시켰으며 전라도 출신의 처자를 셋째며느리로 맞기도 했다. 당신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면 평안도 출신이건 전라도 출신이건 지역을 가리지 않았고 사회주의자건 친일파건 백정이건 천민이건 가리지 않았다. 더욱이 당색(黨色) 따위의 묵은 관념에 젖지도 않았다. 이것도 당시 부유(腐儒)의 통념을 깨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행동철학으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외국제품을 절대로 쓰지 않았다. 나도 70년대까지는 비누건 치약이건 외국제품을 쓰지 않고 대체로 국산품을 애용했다. 양담배도 거의 피우지 않았으며 양주도 몹시 싫어한다.

    아버지는 조직적 항일운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결코 정치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정치활동도 거부하였다. 어느 날 친구인 유시태(柳時泰)라는 분이 대둔산 석천암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나는 곁에서 두 분의 대화를 귀기울여 들었다. 유시태 옹은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서울로 올라가 나와 함께 정치투쟁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사반대’와 같은 구호가 적힌 성명서를 찢으며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시태 옹은 부산 피난 시절 이승만을 저격한 장본인이다.

    나는 나름대로 학술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나 정당에는 결코 가담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후원회에 명함을 내밀지 않았으며 후원금도 내지 않았다. 또 권력자들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았다. 다만 내게 큰 도움을 준 동료 몇 사람에게만은 보답한다는 뜻으로 예외를 두었을 뿐이다.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지만 열렬한 민주투사는 되지 못하였다. 그저 술자리에서 분노를 토해내고 흥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인생관이나 행동 역시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는 우리 역사를 기술하면서 개혁과 평등을 화두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는 계급투쟁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박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내게는 늘 진보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다. 나 역시 ‘딱지’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도 이런 성향의 인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보니 적대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나는 기질적으로 인생관이나 현실관이 다른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기질은 분명히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도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의 ‘신비주의’

    마지막으로 밝혀둘 것이 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추구했던 신비주의적 성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주역을 가르치면서 주역 이론에 따라 선천(先天) 중천(中天) 후천(後天)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태동한 변혁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곧 반상(班常)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의 출현을 갈망하는 이론이었던 것이다.

    후천개벽사상은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 민족종교에서 모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민중사상의 한 흐름을 정리해 제시한 것이다. 아버지는 여기에 ‘중천’이라는 중간 시기를 두어 앞으로 도래할 후천을 준비한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주역에서 말하는 자연순환의 이론을 빌린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머지않아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 다분히 종교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사실에 토대를 둔 실사구시(實事求是), 또는 과학적 역사를 세울 수 없다. 나는 역사를 기술하면서 신비주의적 접근을 삼갔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주역을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학(家學)’을 중시했다. 곧 부조(父祖)에게서 가족 전통의 학문을 익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술(祖述, 선현의 학문을 따르고 기술하는 것)과 가학을 맹목적으로 따르면 개인의 창의력 계발과 학문 발전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나는 가학을 거부한다기보다 내 창의와 내 역사관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담뱃대에 맞은 흉터

    어찌됐든 나는 혈연적 관계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인생관 형성에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등을 겪으며 아버지의 권위와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버지와 나는 긴장관계의 연속이었다. 이 양면의 의식구조는 지금도 나에게 자유로움을 주지 못한다.

    내가 물질적으로 안정을 누리면서 역사를 공부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역사학자가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긴장이 풀어져 느슨한 삶을 살고 현실에 영합하는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고생스럽게 살아온 길을 서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려고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며 옛 일을 회상해보았다. 그러다가 이 나이에도 회한과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글썽였다.

    지금쯤 부자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아버지는 대꼬발이(어릴 적 담뱃대를 부르던 말)로 내 이마를 내리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실 것 같다. 내 이마엔 조그만 흉터가 있다. 아버지가 내리치신 대꼬발이에 맞아 난 것이다. 지금도 희미하게 남은 흉터를 만져보며 빙긋이 웃어본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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