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악’이라는 오명을 얻은 18대 국회. ‘폭력국회’ ‘망치국회’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18대 국회 전반기를 이끌며 여야 격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김형오 국회의장. 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는 어떤 것일까.
-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회를 만드는 일은 실현 불가능한 꿈인가. 5월29일로 2년의 의장 임기를 마치는 그를 일요일인 5월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의장 공관에서 만났다.
“이건 내가 심은 할미꽃, 저건 여우꼬리, 이쪽은 치자나무고…. 벼랑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은 다른 할미꽃과 달리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왜 그런지 아세요? 벌과 나비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랍니다.”
전문가 수준에 가까운 김 의장의 야생화 얘기는 끝이 없었다. ‘저걸로 인터뷰를 때우려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들기도 했다. 옆에 있던 허용범 국회대변인에 따르면 공관 정원에서 자라는 다년생 수목들을 제외한 야생초 종류는 모두 김 의장이 입주한 이후 심은 것이란다. 정원 가운데는 104종 5만100여 본의 위치와 옮겨 심은 날짜를 기록한 ‘의장공관 야생초 식재 현황도’까지 세워놓았다.
▼ 원래 야생화에 대해 많이 아셨어요?
“공관에 오기 전까지는 야생화의 ‘야(野)’ 자(字)도 몰랐어요. 2008년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어 60주년 제헌절을 맞아 외국인 귀빈들을 초청했는데 황량한 정원밖에 보여줄 게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야생초를 심었고, 재미가 붙다보니 어느덧 마니아가 됐다는 것.
▼ 제 기능을 못하고 마비돼버린 국회를 흔히 ‘식물국회’ 라고 하잖아요?
“(정색을 하며) 그건 식물모독이에요. 식물이 얼마나 정직하고 생존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30여 분간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자신의 손때가 묻은 야생초들을 어루만지는 그의 등 뒤에서 공관을 떠나는 서운한 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 의장 임기를 마치고 ‘보통 의원’으로 돌아가는 소회가 있을 법한데요.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차기 의장부터는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보다 성숙하고 조화로운 국회를 만들 수 있도록, 떠나는 순간까지 그런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싶어요.”
권한은 엘리자베스, 책임은 박정희만큼
▼ 흔히 하는 말이지만,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아쉬운 일을 들라면….
“원칙을 세우려 노력했어요. 그 때문에 손해도, 오해도 많았지만. 2009년도 예산안은 2008년 12월10일까지 처리하자는 여야 합의를 지키도록 했고, 올해 예산안도 해를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끊임없이 협상·대화·타협을 하는 곳이 국회라는 것을 강조했어요. 처음엔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쳤지만, 나중에는 여야 간에 대화로 하자는 분위기가 일게 됐어요.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에서도 차기 원내대표가 대화 협상을 강조하는 것도 전반기 지도부가 강경일색이었다는 반성인 거죠.”
▼ 2008년 7월10일 취임 인사말에서 “국민을 하늘같이 두려워하되 국회의 권위와 권능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하셨죠. 실제 그렇게 됐나요?
“개인적으로는 초지일관 그런 자세를 가졌고, 국회의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그런 신념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18대 국회는 불행히도 타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어요. 국회의장은 대화와 타협을 부르짖었지만, 의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직권상정말고는 없더라고.”
김형오 국회의장은 의장공관에 104종 5만100여분의 야생화를 심었다.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의 야생화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한테는 적용 안 해도 좋으니까 차기 의장한테라도 좀 권한을 줘야 한다, 국회법을 고치자고 1년 이상 얘기했는데도, 아직도 지엽말단적 내용을 갖고 논의 중이에요. 미국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반의반만큼이라도 권한을 줘야 해요. 여야가 강경파들한테 이끌려가서는 협상이 안 돼요. 아무리 말해도 안 듣다가 양당 지도부가 연명책으로 국회의장한테 (국회 파행 책임을) 덮어씌웁니다. 덕분에 내가 역대 어떤 국회의장보다 매스컴에 많이 났을 거요. (씁쓰레 웃으며) 국회에서 권한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만큼밖에 없는데,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만큼 요구한다니깐.”
▼ 의장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요?
“의장에게 직권상정 이전에 직권중재 권한이 있으면 좋겠어요. 의사일정 작성 권한도 의장에게 좀 줘야 해요. 지금은 국회법상 국회의장이 여야 원내대표들과 협의를 통해 의사일정을 결정하도록 돼 있는데, 실제론 여야 원내대표가 다 결정하죠. 의장은 본회의가 내일 열릴지 모레 열릴지 알지 못해요. 이런 국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의사일정은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내용을 갖고 여야가 싸워야 하는데, 우리는 의사일정을 갖고 여야 원내대표가 샅바싸움만 하다가 내용은 토론도 못하고, 그러다 날치기를 해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돼요. 그래서 나는 상시국회를 하자는 주장입니다. 일부 여당 의원들과 정부의 국무위원들은 ‘지금도 괴로운데 상시국회를 하면 매일 불러들이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지만, 상시국회란 캘린더 국회를 뜻합니다. 연말에 내년도 달력이 나오듯 의사일정이 죽 나오는 거죠. 본회의는 언제 열고,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는 언제 연다, 이렇게 말이죠.”
▼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하원에서 연설할 때 조 윌슨 의원이 “거짓말 한다!”고 소리쳤다가 역풍을 맞았는데, 우리 국회의원들은 격투기 수준의 난동을 부리고도 끄떡없는 비결이 뭐죠?
“첫째는 국회법이 엉성해요. 둘째는 국회법이 있다 해도 지키려는 의사가 별로 없어요. 국회의장의 권한이 없는데다가 국회운영에 관한 세칙도 두루뭉술하고, 목소리 큰 사람에 의해 이끌리다 보니까, 20세기 초반 국회 수준이에요. 이를 고치려 하니 야당탄압이라고 해요. 선진국들은 의회에서 엄격한 룰이 정착돼 있습니다. 국회의장한테 ‘사기꾼’ 운운하는 의원이 버젓이 의정단상에 앉아 있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 국회폭력 사태로 빚어진 고소 고발 사태는 어찌 됐죠?
“고소 고발의 주체는 의장이 아니지만 나는 절대 흐지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어요.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엄한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취하한다면 스스로 법을 우습게 여기는 거죠. 나는 그 때문에 야당한테 ‘쩨쩨하다’는 개인적 공격도 많이 받았어요. 나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18대 후반, 19대부터는 국회가 좀 더 나아져야 한다는 신념에서 폭력에 대한 비타협 불관용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어요. 오늘에야 그 고통을 말합니다만.”
준비 안 된 한나라당, 서서 죽자는 민주당
▼ 의장의 자리에서 바라본 한나라당은 뭐가 문제던가요?
“나는 스스로 이명박 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이라고 자부해요. 그러나 우리가 10년 야당세월의 한을 씻는 데 너무 몰두했어요. 여당이 되고 나서 정부를 어떻게 이끌고 대야(對野)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너무 생각을 못한 것 같아요. 대선에서 사상 최대치인 531만표라는 득표차를, 총선에서 친박연대까지 합치면 180석에 육박하는 역대 최대 의석을 얻다보니 자만이 생겼어요. 타협과 협상보다는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을 추진한 것이죠.”
▼ 야당인 민주당은 어떻던가요?
“야당은 반대로 대선도, 의석수도 최대의 참패를 하다보니 타협하다가는 죽는다, 강경하게 밀어붙이자, 서서 죽더라도 꿇어앉지 말자는 선명·강경론이 득세를 했어요. 거기에 새 정권 출범 초 촛불시위로 모든 문제가 국회 아닌 밖으로, 광화문으로 세종로로 가버렸어요. 원내는 그저 장외투쟁을 위한 보조수단이 돼버렸어요.”
▼ 이명박 정부의 대(對)국회 역량이랄까, 자세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명박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성공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정부는 정부대로 할 일과 논리가 있지만, 국회에는 국회 나름의 논리가 있어요. 국회는 여야가 함께 공존하며 대화 타협을 해나가는 곳이에요. 목표지상주의가 아니라 과정과 절차를 좀 더 중시하는 곳이 국회라는 점을 행정부가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행정부는 신속 효율을 생각해야겠지만, 국회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 손해 보는 사람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국민대변기관이에요. 큰 틀에서는 같으면서도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 지난해 7월 국회에서 미디어법 직권상정 처리를 놓고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의장을 원망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한나라당은 처음엔 직권상정을 비공식적으로 요구하더니, 다음엔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중엔 (안 한다고) 비판을 했어요. 하지만 여당으로서 기본전략이 부재(不在)했어요. 직권상정이란 다수의 권리가 소수에 의해 부당하게 막혀 있을 때 부득이하게 적용되는 것인데, 미디어법을 2008년 12월18일에야 제출해놓고 24일에 처리해달라니…, 문방위원들조차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직권상정을 해달라면 어찌 되겠어요. 의원총회에서도 내용 한번 제대로 설명이 없었는데, 이걸 직권상정 안 해준다고 비난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물리적으로도 안 되고 절차적·내용적으로도 못하는 것인데, 안 해준다고 의장을 비난하다니…. 물론 야당도 의장실과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당원이라는 사람들을 버스로 동원해서 밀고 들어오는 한심한 일을 했고요.”
김 의장이 재임 중 직권상정으로 가결한 안건은 예산부수법안 35건을 포함해 모두 40건에 달한다. 역대 의장 가운데 가장 많다. 그는 “다시 그때 상황이 와도 직권상정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직권상정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잘했고 못했고는 국민이 판단할 일이지만, 자신의 책임하에 했기에 떳떳하며, 그 길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국회 위에 있는 정당, 헌법정신에 배치돼
▼ 미디어법이나 노동법 같은 쟁점법안 처리를 앞두고 청와대와 친정인 한나라당으로부터 ‘압박’도 좀 있었죠?
“일국의 국회의장에게 직접 ‘이거는 언제까지 처리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청와대 쪽에서 비공식적으로 법안처리를 희망하는구나 하는 느낌은 받았죠.”
18대 전반기 국회는 법안통과율(발의법안 중 가결된 비율)이 역대 최저(10.65%)에다 폭력과 파행으로 얼룩진 ‘최악의 국회’, ‘실패한 국회’였다는 평이 많다. 김 의장은 이렇게 된 원인 중의 하나로 ‘국회보다 정당이 위에 선 정치풍토’를 꼽았다.
“국회에 권한을 위임하면 되는데, 지금은 국회 위에 정당이 있어요. 헌법정신과는 배치되는 현실이죠. 국회의원이 헌법기관이라면서 자율권은 없어요. 미디어법도, 4대강 예산 문제도 당론으로 얽어매니 타협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미디어법은 내가 가지를 많이 쳐냈어요. 일각에서는 누더기라 하지만, 누더기라도 타협을 해서 통과되는 게 낫죠. 나중에 문제가 있으면 또 개정을 하면 되니까. 여든 야든 100% 맘에 안 들더라도 타협을 하고 나가야 합니다. 법이라는 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의 최대공약수를 확대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불리하다 싶으면 원천적으로 반대를 하고 당론결정 과정도 비민주적이에요. 막후에서 몇 명이 결정하고선 ‘당론’이라며 끌고 가려는 풍토도 고쳐야 해요.”
▼ 의원직 사퇴한다고 큰소리 치면서 사퇴서 제출했던 의원들 있잖아요, 그냥 본인들 소원대로 ‘확’ 사표 수리(受理)해버리지 그러셨어요. 박수 치는 국민 많았을 텐데….
“그 사람들 정치쇼하는 것 국민이 다 알아요. 기분 같아서야 수리를 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국민이 선택한 헌법기관을 국회의장이 함부로 수리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맞지 않아요. 만일 내가 수리를 하는 선례를 남긴다
면 앞으로 사퇴서 제출에 대해 선별적으로 수리한다든지,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가 있어요. 미국처럼 사표가 제출되면 선관위 같은 데서 즉시 수리하도록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어요.”
국회의장 공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김형오의장.
“시대변화에 항상 눈을 뜨고 그 변화 한가운데에 들어서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다음으로 국회의원의 품성으로 도덕성, 상식, 그리고 전문성, 이렇게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를 다 갖추면 좋겠지만 그중에서도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정치인은 도덕에 관해 자기한테 적용하는 잣대와 남한테 적용하는 잣대가 달라요. 자기한테 엄하게 하고 남한테는 관대해야 하는데 거꾸로들 하고 있어요.”
김 의장은 임기를 마치면 국회법 때문에 2년간 가질 수 없었던 당적(黨籍)을 회복하게 된다. 그는 원 소속당인 한나라당에 복귀한 뒤 이르면 6월 말 또는 7월 초쯤으로 예상되는 당 대표 경선에 나설 생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장을 지낸 뒤에는 정계를 은퇴해 원로로 지내는 것이 우리 정치에서 하나의 관행처럼 여겨져왔으나 김 의장은 이제 겨우(?) 63세니까, 은퇴를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일지 모른다.
▼ 국회의장은 국가 의전서열상 대통령 다음의 넘버2인데요, 선배 의장들과 달리 임기를 마친 뒤 당 대표 경선에 나서려 하신다는데 맞습니까? 항간에는 대권의 꿈도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던데….
“때가 되면, 국민이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죠. 대권 얘긴 내가 아직 한 적이 없고요. 무리하게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조건이 맞아야죠. 나는 비움의 정치를 해왔어요. 뭐가 있을 때마다 양보를 해왔어요. 내가 뭘 하겠다고 떠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어요. 국회의장을 마치기가 무섭게 바로 당 대표에 나간다면, 당내 의원들이 ‘좋은 거는 너 혼자 다 해먹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국민과 당이 내 역할을 필요로 한다면 주저하지는 않을 겁니다. 준비 안 된 사람들의 시행착오가 적지 않은데, 내 스스로는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나갈 거예요.”
누더기법안이라도 타협으로 통과되는 게 낫다
▼ (김 의장은) 계보도 없고, 국회의장을 지냈지만 대중성도 그다지 높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있는 밑천으로 뭘 갖고 있다고 보세요?
“뭐, 없어요. 확고한 지지세력이 없지 않으냐,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때 조직적으로는 열세였는데, 결과는 압승이었어요. 국회의장 후보 경선 때도 마찬가지예요. 계보나 계파가 없어도 내가 바른길로 가고 건전한 길로 가면 그게 맞다는 의원들도 있어요. 나한테 때가 오지 않는다면 무리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 지금 한나라당에 필요한, 또한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어떤 것일까요?
“시대변화의 중심에 있고, 도덕성과 상식, 전문성을 갖춘 리더십이 필요해요. 지역 간 세대 간, 또한 경제상 갈등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을 청산해야 해요. 우리는 좁은 나라여서 갈등이 격화될 소지가 많아요. 나는 이 갈등구조를 청산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지도자들이 너무 한(恨)이 많아선 안 돼요. 편협하고 옹졸한 정치인들은 전면에 나서지 말고 2선으로 물러섰으면 좋겠어요,”
▼ 국회에 제출돼 있는 세종시 수정안 관련 입법을 둘러싸고 여야는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친이(친이명박), 친박(친박근혜)계 사이에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원안이냐, 수정안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수정안 쪽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원안대로 9부2처2청을 이전하려면 과천 식으로 해서 인구 5만명이면 충분한데, 그런 도시를 만들려고 서울과 세종시를 나눌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수정안도 심사숙고할 대목이 있어요. 기업 중심의 경제과학도시를 만든다는데, 지금은 인위적으로 뭘 조성하기가 힘든 시대예요. 지금 우리나라 도시들이 계속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디서 그런 인구를 가져올 겁니까? 송도국제도시도, 새만금도 세계적으로 키워야 하고 전남에도 J벨트를 만들어야 하고, 제주에도 국제자유도시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힘을 분산시켜도 되는 것인지…, 좀 차분히 논의를 했으면 합니다.”
김 의장은 지난해 7월17일 제헌절 기념사에서 국회 차원에서 개헌 논의를 공식화할 것을 제안했다. 국내외 헌법학자와 정치학자 13명으로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두어 지난해 8월 결과보고서를 제출받기도 했다.
김형오 의장은 평소 붓글씨를 즐긴다.
“개헌의 내용에 관해서는 국민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여론조사를 보면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어요. 우리가 벌써 4차례나 직선제 대통령의 폐해를 되풀이해왔잖아요. 헌법적 문제 때문에 폐해가 되풀이되고, 국회가 매일 대선의 전초전, 연장전 차원에서 움직여요. 18대 국회 전반기가 개헌하기에 참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워요. 정치지도자들이 당리당략을 벗어나 조금만 안목을 가졌어도 추진할 수 있었는데…, 하반기에도 이 사람들 또 싸울 겁니다. 대통령과 국회가 책임을 분명히 하는 제도가 되던지, 아니면 의원내각제 식으로 가야 해요.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국회가 무한책임의 대통령을 뽑기 위한 싸움터 노릇만 하고 있어요.”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치할 때
김 의장은 선상(船上) 부재자 투표의 입법화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지역구(부산 영도구)에 장기간 해상생활을 하는 선원이 많다는 점도 작용했을 법하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에 따라 4월 국회에서 선거기간 해외에서 조업을 하는 선원들이 팩스를 이용해 선상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 반대론이 비등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선상투표제는 비밀투표 침해 우려 때문에 논란이 있는데, 꼭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뭐죠?
“선진국 모든 나라가 선원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있어요. 일본 최고재판소엔 비밀·직접 선거가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보다 더 큰 기본권인 국민참정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판례도 있고요. 우리 헌법재판소도 재외국민과 선상의 선원들에게 투표권을 안 주는 것은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어요. 작년에 여야 원내대표가 선상투표안에 합의했고, 금년에도 의장 앞에서 합의문까지 작성해놓고 안 지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김 의장은 경남고를 나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3년가량 ‘신동아’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외교안보연구원을 거쳐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국무총리실 정무비서관을 지낸 뒤 1992년 14대 총선 때 원내에 진출해 5번 내리 당선됐다.
▼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대통령 하면 흔히 가난, 고난, 자수성가, 투쟁, 역경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잖아요. 김 의장은 집안도 평범하고, 학창시절도 평범하게 보냈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고, 무슨 운동 때문에 감옥에 다녀온 적도 없어서 뭔가 대중에게 확 꽂히는 게 없다는 평도 있던데….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한, 정상적인 정치를 할 때가 됐어요. 정치의 정상화를 이뤄야 하잖아요. 비정상이 정상적인 것처럼 돼선 안 되죠. 나는 정상적 가정과 환경에서 정상적 교육을 받고 정상적 생활을 해온 것을 너무 고맙게 생각해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을 평가하지만, 나는 좀 더 정상적 상황에서 넓게 보는 훈련을 받아왔어요. 이제는 한의 정치, 편협한 정치를 극복할 때도 됐어요.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돌려주고 싶어요.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가는 데 힘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죠.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제는 정치의 주류가 바뀔 때가 됐어요.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역할을 해야 해요.”
▼ 요즘 이스탄불에 푹 빠져 있다면서요?
“올 2월 터키를 방문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중세 건축 문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세계에서 가장 오랜, 1600년 동안이나 제국의 수도가 있었고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교차하는 중심이었잖아요. 무엇이 문명의 중심을 이루고, 어떻게 문명이 교차했는지 갈수록 관심이 끌려요. 그래봤자 10분의 1도 다 공부하기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