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br>●1948년 전북 임실 출생<br>●순천농고 졸업<br>●덕치초교 교사,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소월시문학상<br>●시집 ‘섬진강’ ‘시가 내게로 왔다’ 등
작은 분교로 발령이 났다. 1970년 5월이었다. 학교는 정말 엉망이었다. 공부 시간도 끝나는 시간도 구분이 없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뛰어놀았다. 나는 선생이 처음이어서 열심히 가르쳤다. 재미없었다. 하기 싫었다. 아이들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했다. 그래도 공부시간을 열심히 지키며 선생을 했다. 어느 날 월부 책장수가 그 먼 시골 구석까지 책을 가지고 왔다.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책을 사 보았다. 책은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월부 책장수는 내게 책을 자꾸 가져다가 월부로 팔았다. 그 학교에서 1년 반 있다가 고향으로 왔다. 학교 여선생 한 분이 5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여선생에게서 전집을 월부로 샀다. 책 속에 빠져 지냈다. 내 독서의 범위는 자꾸 넓어져 갔다. 전주로 진출했다. 헌책을 사 날랐다. 방에 책들이 쌓여갔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죽고 또 생각이 일어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할 사람이 내겐 없어서 일기는 늘어갔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의문을 책을 통해 해결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게 신가? 나는 내가 쓴 것이 시인지 몰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들을 썼다. 신기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다 보니, 선생이라는 것이 참 중요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선생을 하자. 그동안 간간이 하던 대학 가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작은 마을에서 내가 졸업한 이 작은 학교에서 평생을 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거야. 나는 그 생각을 굳혔다. 나는 여기 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평생을 살기로 작정했다. 모든 잡생각을 몰아다가 강물에 흘려보내버렸다. 선생의 일은 재미있고, 흥미로웠으며, 신났다. 선생을 그만둘 때까지 나는 선생으로 행복했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딱 믿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마침내 그렇게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을 산 것이다.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평생 선생을 하다가 그 학교에서 그만두었다. 학교가 나였다. 학교에서의 하루하루가 내 인생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나날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내 삶으로 가꾸었다.
홀로 문학 공부를 한 지 13년이 된 어느 날 나는 시를 잡지사에 보냈다. 덜컥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되었다고 해서 내 일신상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를 쓴다고는 했지만, 내 주위에는 시를 아는 사람도 시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그냥 생각이 나면 시를 썼다. 그게 내 시가 되어주었다. 나는 시인이 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나는 평생을 선생으로 살기로 했기 때문에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게 없었다. 선생을 하며 평생을 살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승진도 일찍 포기했다. 성가신 일이고 또 승진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 선생으로서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정말 많이 벌어졌다. 선생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격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던 것이다. 나는 놀랐다. 선생을 잘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절대 승진을 하면 안 되었다. 나는 그냥 선생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38년 동안 선생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선생을 그만두고 나는 강연을 하며 살고 있다. 나도 강연을 이렇게 많이 할 줄을 몰랐다. 내가 선생이 될 줄을 몰랐듯이, 내가 시인이 될 줄을 몰랐듯이, 나는 강연을 이렇게 많이 하며 세상을 돌아다닐 줄을 몰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해서 평생 영화를 보며 살았다. 나는 또 그림을 좋아해서 평생 그림을 보며 살아왔다.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영화에도 출연을 했다.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에 시 강사로 출연했더랬다. 영화에 대한 책도 냈다. 그림에 대한 책도 낼 생각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것이 내 일이 되어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사는 세세한 일상이 내 글이 되었다. 따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이 내 글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일이 글이 되어주어서 나는 글을 쓰려고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나와 아이들과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 속에 자연이 내 원고지 위로 걸어 들어와주었던 것이다.
세상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나라고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살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가난했다. 내게도 희망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돈을 생각하지 않고 담배를 사 피우는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담배를 외상으로 사 피웠다. 한 달간 외상 담배를 피우다가 월급을 타면 담배 외상값을 갚았다. 오래전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를 우연히 끊었다. 그 꿈은 자동 소멸되었다. 또 한 가지 소원은 돈을 생각하지 않고 책을 사보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책에 너무 목말랐다. 오랫동안 나는 전주의 한 책방에서 책도 외상으로 사 보았다. 월급날이 되면 책방으로 달려가 외상값을 조금 갚고, 외상으로 보고 싶은 책을 몇 권씩 사왔다. 나는 책에 ‘허천병’(기가 쇠약한 병인 虛喘에서 온 말로 기갈증의 뜻으로 쓰이는 전라도 사투리)이 나 있었다. 1995년에 나는 책 외상값을 다 갚았다. 지금은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사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희망도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내 어릴 적 희망 중의 하나가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볶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도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반찬을 아주 좋아한다. 나에게 또 하나의 희망은 영화를 마음껏 보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이룬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내 분수에 맞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희망이나 소망이 성가신 것임을 일찍 알았다. 나는 지금 되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다. 희망이 없는 삶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나와 남을 괴롭히지 않는 삶인가.
나는 가난한 그 옛날이 참 좋았다.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다.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밤을 뒤척이며 시를 쓰던 그 가난한 시절이 좋았다. 고통도 괴로움도 나는 버리기 싫었다. 그것들이 다 내 삶이었다. 내 삶을 힘으로 삼았다. 그러나 나는 또 지금이 좋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나는 아직 나만큼 잘 산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는 늘 지금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지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금이 좋은 삶이,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바라는 바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 살다가 보면 내게 새로 오는 그것이 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