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나가는 경영컨설턴트이자 방송인이 대학총장직을 그만두고 공직에 뛰어들었다. 그것도 9급부터 고위공무원단까지 공직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연수기관에, 61년 역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임명된 민간인 출신 수장으로. 취임 1년을 맞이한 그가 ‘외계인’의 시선으로 본 공직사회와 공무원, 그리고 소통하는 법.
“벤치 주변에 색깔 예쁜 파라솔 몇 개만 갖다놔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져요. 요즘 젊은이들 좋아하는 게 점심 얼른 먹은 뒤 커피 한잔 뽑아 들고 볕 좋은 데 나와 수다 떠는 거잖아요. 뭘 좀 바꾸자고 하면 늘 예산이며 인력 타령이 앞서는 게 공직사회라지만, 돈 안 들이고도 달라질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아요.”
2007년부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으로 일했던 그가 차관급 정무직인 교육원장에 취임한 것이 지난해 5월13일. “관례대로 행정안전부 고위직 가운데 임명될 줄 알고 연쇄승진을 기대했던 이들은 실망도 했던 모양”이라는 그는 “민간인을 사관학교장에 임명한 셈이니 공무원들 자존심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의를 받고 고위공무원을 지낸 선후배들에게 물어보니 반응이 정확히 둘로 갈리더군요. 한번에 과감히 다 바꾸라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차피 안 되니까 내버려두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죠. 공무원들이 눈치가 9단이고 버티기는 10단인데 어설프게 덤벼봐야 절대 안 바뀐다는 얘기였어요. 같은 공무원이 부처만 옮겨도 전학생 취급을 받는데, 저는 아예 외계인인 거죠. (웃음)”
그렇게 1년이 지났고, 교육원은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최근 펴낸 책 한 권에 담긴 개혁과제가 모두 5개 분야 70여 개. ‘생각의 틀을 바꿔라!’라는 제목부터 책장마다 넘쳐나는 ‘변화’와 ‘혁신’ 같은 단어들, 집무실에 걸려 있는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공정하게’라는 슬로건만으로도 한눈에 분위기가 읽힌다. 회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윤 원장이 1초가 아깝다는 듯 바로 본론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왕년의 ‘시(時)테크 전도사’답다.
찾으면 방법은 많다
“임명권자가 뜯어고치라고 보내놨는데, 안 고치면 제가 잘릴 판이에요. (웃음)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인재개발원에 직원들을 모두 모아 교육을 하면서 변화를 강조하곤 했거든요. 공무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일이 진척되지 않고, 그러자면 교육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공무원이 느리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다. 공무원이 반 박자 빨라지면 기업이 살고 국민이 편안해진다’고 얘기하시더군요. 정리하면 ‘다 바꿔라, 그것도 빠르게 바꿔라’가 되는 겁니다.”
▼ 와서 보니 정말 그렇던가요? 민간조직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라고 느끼셨나요?
“김정운 명지대 교수가 책에서 ‘중앙공무원교육원은 강사들의 무덤’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강의하기 제일 힘든 상대가 공무원이라는 거죠. 박수도 질문도 없고 아무리 웃긴 얘길 해도 어금니 깨물면서 참아가며 ‘얼마나 잘하나 보자’ 그러고 있다는 거죠. 이렇게 인간미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창의력이 나오겠느냐는 얘기였어요. 처음 교육원에 와서 한 얘기가 그거였어요. 근데 사실 이건 공무원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요즘 민간 분야에서는 교육도 축제처럼 즐길 수 있게 합니다. 환경과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한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열 받으면 나오는 말이 ‘나도 인간이다’예요. 감성적인 민족이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취임 후 첫 6개월 동안 하고 다닌 말이 ‘공무원도 인간입니다’였어요.
그 다음 6개월 동안 자주 한 말은 ‘공무원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해집니다’였습니다.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무원이 행복해야 제대로 된 서비스가 나온다는 겁니다. 기업인 친구들에게 이런 얘길 하면 ‘니들끼리 행복해라, 우린 힘들어죽겠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내가 얘기했죠. 뒤집으면 ‘공무원이 성질나면 국민만 괴롭다’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건 다들 맞다는 거예요. (웃음) 공무원들에게 헌신과 봉사정신을 요구하려면 존중과 인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게 1년이 지났어요.”
▼ 그렇지만 말이 쉽지 즐거운 교육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데요.
“찾아보면 방법은 많아요. 부임하고 보니 당장 이틀 뒤부터 국가전략세미나라는 프로그램을 열도록 계획이 잡혀 있더군요. 정부 국실장 1200여 명에 공공기관 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정의제 교육인데 강사가 현직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들이에요. 일정이 안 나오니까 토요일로 스케줄을 짜놓았는데, 일단 교육원 직원들부터 걱정이 태산인 거예요. 휴일에 교육받으러 오라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다 뜯어고쳤죠. 우선 기수당 5회로 잡혀 있던 걸 4회로 줄였어요. 어정쩡한 것보단 한 달로 딱 자르는 게 낫다는 거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런 작은 부분이 중요한 겁니다. 거기다 가장 먼저 등록한 사람에게는 얼리버드상, 진지하게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열공(‘열심히 공부하는’의 네티즌 줄임말) 포토제닉상을 주는 식으로 크고 작은 동기부여를 하는 거죠.
제일 신경 쓴 부분은 사진입니다. 포토존을 만들어서 강의가 끝나면 수강생끼리 혹은 강사하고 사진을 촬영하게 해주는 거죠. 그런 일이 없었으니 처음에는 멋쩍어하다가도 이내 장관 팔짱 끼고 열심히들 찍더라고요. 사진은 다음 휴식시간까지 바로 뽑아서 주고요. 집에 가서 청와대 수석들하고 찍은 사진 보여주니 가족들이 ‘엄청 중요한 일 하고 왔나 보다’하고 좋아하더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설문을 돌려보니 만족도가 98%까지 나온 거예요. 교육원 직원들은 내내 주 6일 근무를 한 셈이지만, 아마 비슷한 프로그램으로는 가장 열의가 높았을 겁니다.”
신임 사무관 왕자병 고치려면
윤 원장이 강조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거시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국가가치 교육과 국정가치 교육의 분리다. 전자가 국가관이나 역사관, 공직윤리 등 항구적인 주제를 다룬다면 후자는 현 정부의 국정철학이나 과제를 공무원들에게 전파하는 교육이라는 설명이다. 이전까지 두 분야가 뒤죽박죽 섞여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나눴다는 것. “이를테면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해외 자원개발을 통한 경제영토 확장, 한류나 한식 세계화를 통한 문화영토 확장, 공정사회 등이 이번 정부의 국정가치 어젠다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 신임 사무관들에게는 항구적인 주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지금 현장에서 활약하는 고위공무원들에게는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는 식이겠군요.
“앞으로 수십 년 공직생활 할 사람들에게는 현 정부 철학보다는 긴 시간 유효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죠. 사실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바로 신임 사무관 교육과정입니다. 군대로 치면 사관학교 교육 아닙니까. 행정고시 패스하고 나면 6개월간 교육을 받는데, 교양강좌류를 주로 듣고 현장 한 바퀴 돈 다음 해외연수 갔다 와서 필기시험 보면 흩어지는 거예요. 강사들은 ‘여러분 중에서 장관도 나올 텐데’ 하면서 열심히 바람을 잡고, 현장실습은 굴지의 대기업에 가서 대접받으며 브리핑 듣는 식이에요. 그러니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는 왕자병 공주병만 키우는 거죠.
그래서 역시 싹 뜯어고쳤죠. 삼성 LG 대신 중소기업에 가서 일주일씩 합숙을 해요. 작업복 입고 거친 밥 먹으면서 근로자들 얘기, 외국인 노동자들 고충 들어보라는 거죠. 해외연수도 유럽이나 북미 대신 중남미나 아프리카, 동티모르 같은 곳에 가서 고귀한 고생 하고 오는 프로그램으로 바꿨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동반상생 얘기해봐야 쉽지 않은 건 책상 앞에서 만든 정책이기 때문이잖아요. 국민은 ‘당신들이 우리 고통을 알아?’하고 튕겨내기 마련이거든요. 현장에 뛰어들어 ‘두 손으로 봉사하는 법’을 익혀야 된다는 겁니다.”
청와대 지시면 공직자는 따른다?
그러면서 윤 원장은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세상은 이제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뉘고 속도가 승부를 결정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일찍이 토플러는 한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나라로 꼽았지만, 공무원들만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장 위험한 공직자는 반달곰형”이라는 비유도 재미있다. 여름까지는 왕성히 활동하지만 정권이 후반기에 접어들면 동면 준비하느라 바쁘고 말기에는 겨울잠에 빠져 옴짝달싹 안 하는 고위공직자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화가 생긴 것은 공무원들 본인의 책임보다는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전 정부에서 ‘잘나가던’ 인물들을 배척하는 그간의 인사패턴 탓이 더 크다는 ‘변호’도 잊지 않는다.
“사실 공무원들의 역량이 복지부동 때문에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건 정부 성향과 무관하게 국가적인 낭비죠. 결국은 국민이 낸 세금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우선 강사만 해도 부르면 당장 오는 사람만 쉽게쉽게 초청하는 식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교육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방송할 때 경험만 봐도 섭외가 쉬워지면 프로그램의 질이 확 떨어져요. 그래서 제가 만든 말이 십삼고초려(十三顧草廬)입니다. 세 번으로는 부족하고 열세 번을 청해서라도 최고의 강사를 모시고, 그래도 안 되면 제가 직접 나서겠다고 했어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크로톤빌 연수원에 가서 보니, 우리가 아는 쟁쟁한 CEO들이 주말마다 부문별 리더를 모아 강의를 해요. 그게 최고리더의 핵심 업무 가운데 하나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대통령도 와서 강의하셔야 한다고 건의했죠. 전략적 의제를 공유하고 토론 과정에서 인재도 발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요. 대통령이 듣고 있는데 토론이 겉돌거나 심상할 수 있겠어요? 이명박 대통령 본인이 워낙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3월5일에 교육원에 오셔서 중앙부처 주무과장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신 거고요.
까놓고 얘기해서 공무원들은 청와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그렇더군요. 뉴스에는 늘 청와대 오찬 만찬 얘기가 나오지만 사실 공직생활 수십 년 해도 식사는 고사하고 대통령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도 없다는 거죠. 흔히들 청와대가 시키면 공직자는 무조건 따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교만이에요. 마음을 열려면 대통령이 직접 공무원들을 만나 소통하는 자리가 필요한 겁니다.”
▼ 대통령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교육원장 임명 자체가 MB의 뜻이었다고들 하더군요. 경영컨설턴트나 방송인으로 ‘잘나가던’ 분이 공직에 발을 들여놓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제가 이 자리에 오니까 대통령과 무슨 관계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게 사연이 좀 깁니다. (웃음) 제가 KBS에서 라디오 생방송을 만 6년 했어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장이 바뀌었고, 라디오와 TV에서 각 세 사람씩 진행자를 교체했죠. 추정컨대 타깃은 따로 있었고 저는 들러리로 잘린 거겠죠. 겉으로는 ‘인사권자 결정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홀가분한 척 받아들였지만, 사실 술을 먹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부아가 많이 났어요.
여행을 다녀온 뒤에 우연히 교통방송 본부장을 만났다가 끌려가다시피 다시 방송을 시작했어요. 그때가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이었고요. 가끔 특집방송에 나오시면 저도 자세히 봤고, MB도 저를 기억하게 된 것 같아요. 여느 고위공직자와는 달리 CEO 출신 특유의 감각이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가 서울시 공무원 의식개혁 작업을 할 때 저도 변화 혁신 전문가로 초빙을 받아 참여했죠. 그때만 해도 공직에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고, 대선 캠프에 참여한 것도 아니에요. 당선 직후 정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가 왔었는데, 신설 대학 총장을 맡은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어렵다는 뜻을 전했죠. 대신 국가브랜드위원회 같은 비상임직을 맡았고요.
그랬다가 지난해 갑자기 교육원장을 맡으라고 하시더군요. 시간을 달라고 청한 뒤 곰곰 생각해보니까, 우선 교육은 제가 평생 해온 일이잖아요. 기업과 학교를 거쳐 공직 교육까지 경험하면 대한민국에서 모든 교육 사이클을 완성하는 첫 케이스가 되는 거니까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죠. 다른 건 몰라도 교육과정을 뜯어고치는 건 자신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고위공직자와 민간기업 CEO가 함께 현안을 논의하는 ‘민관합동 CEO 정책포럼’, 현장방문과 동영상 중심의 강의 프로그램, 국제협상과 글로벌 리더십 네트워크 형성 같은 실무중심의 국제화 능력 배양 등 지난 1년간의 교육 프로그램 개혁 아이디어들이 모두 민간에서의 경험에서 나온 거겠죠.”
심리학이 중요한 이유
인터뷰 마무리 삼아 윤 원장은 자신이 기억하는 MB와의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 청와대 오찬에 가보니 설렁탕이 나왔는데, 45분 만에 식사를 마친 대통령이 “설렁탕 먹으니 시간도 절약되고 좋지요?”하고 묻더라는 것.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덧붙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티박스에서 스윙 연습하는 것을 두고 못 볼 정도로 성격이 급해서 보통 네 시간 걸리는 라운딩을 두 시간 만에 끝내곤 했는데, MB 역시 그에 못지않게 골프 스타일이 빨랐다는 것이다.
“MB 자신이 누구보다 스피드를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압축 경제성장이나 IT혁명을 생각하면 사실 이명박 정부는 역대 어떤 정부보다 빠른 정부일 겁니다. 연설문만 봐도 ‘반 박자 빨리’ ‘선제적으로’ 이런 어휘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하니까요. 물론 부정적으로 보자면 성격이 급하다거나 조심성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제는 느리면 죽는 시대예요. 속도를 놓치는 순간 한국같이 작은 나라는 죽어요.
다만 이미지 관리는 필요하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대통령은 심사숙고하기를 기대하니까요. 가끔은 정부가 그간의 성과를 알리는 일에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정부에 가장 필요한 것이 국민의 마음을 파고드는 심리학적 접근이라고 봅니다. 제가 원장으로 와서 처음으로 심리학 자문단을 만든 이유가 그거였거든요. 교육과정이 수강자들에게 얼마나 파고들 수 있는지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을 꾸린 거죠. 정부도 그런 접근방식의 중요성을 좀 더 염두에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