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교육자와 관련된 모습으로, ‘옛것을 받아 새것을 만들어낸 존고창신(存古創新)의 교육자’라는 표현을 비롯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백산학교 설립을 주도하던 시기의 모습을 권오기는 ‘청년 교육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은 ‘한국 민족의 스승’, 고 김수환 추기경은 ‘수많은 인재를 키워낸 선구적 교육자’라 했으며, 교육역사사회학자 김기석은 ‘우민화(愚民化) 정책에 맞선 원대한 교육가’라고 했다.
둘째는 ‘민족의 거성(巨星)’을 비롯해 대인(大人), 위인(偉人), 영웅(英雄), 거인(巨人), 거목(巨木), 어른 등의 표현이다. 조병옥은 195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추모사에서 인촌을 일러‘민족의 거성’이라고 표현했고,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은 1980년 인촌 서거 25주기 추모사에서 ‘평범한 위인, 범용한 영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고 김수환 추기경은 ‘모든 사람을 한 품에 포용하는 거인’ ‘아무라도 그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거목’이라고 표현했는데, 그의 문장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중앙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설립·운영했지만 인기 있는 교사나 유명한 학자는 아닙니다. 또 경성방직을 설립한 것은 사실이나 대재벌의 기업가도 아닙니다. 동아일보를 창간했어도 대기자가 아니며,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산파였으나 대정치가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덕망 있는 교사나 유명 교수가 인촌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많이 나오고 훌륭한 기술자나 산업역군이 인촌 선생의 기업에서 배출되었으며, 일제의 폭압에 대항하고 민중의 참 길잡이가 되는 대기자가 인촌의 신문사에서 육성됐으며, 인촌 선생이 창당한 정당에서 나라의 동량이 될 만한 대정치가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교육적 인간상으로서 인촌에게서 볼 수 있는 면모는 바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큰 그릇’이자 ‘어른’의 풍모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보성전문을 인수하며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민족 최고의 지성을 모셔다놓은 사람이 인촌이었고, 해방 정국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고려대학교 안에서 자유토론이 보장되도록 권장했던 사람이 인촌이다.
셋째는 그의 인품과 관련된 것으로 인(仁)과 덕(德),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은 인촌의 인간됨을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들이다. 특히 인촌(仁村)이라는 아호가 고향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를 아호로 쓰게 되는 과정을 보면 1920년 초 영남의 명인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가 지어주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여기서 인이란 “청허(淸虛)로써 자수(自守)하고 비약(卑弱)으로써 자지(自持)하는 것”이라 하였다. 맑은 물에는 오히려 물고기가 많이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인한 품성은 스스로를 맑게 비워 지키고, 스스로 낮추어 보존하는 모습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그려지는 인촌의 모습은 카리스마적 권위나 공식적 직책에 따른 권한에서 비롯되는 하드파워(hard power)보다, 비전의 공유나 일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끌어내는 비공식적 힘에서 비롯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의 리더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맹자’에서 대인이란 “자기 몸을 바르게 함에 남이 바르게 되는 자를 이른다”하였다. 인덕(仁德)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대인(大人)의 모습이야말로, 보수와 진보로 편 가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인간상이 아닐까?
가정교육과 좌우명-공(公)과 신의(信義)
교육적 인간상으로서 인촌이 21세기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의 두 번째 요소는 가정교육에 의해 형성된 그의 좌우명 혹은 가훈의 교육적 의미라 할 수 있다. 인촌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이하 원파공)에게 세 살 때에 입양되었다는 점에서 유교적 전통이 강한 가정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이하 지산공)과 양부 원파공은 아래윗집에 함께 살며 남다른 형제애를 보였다고 하는데, 특히 양부 원파공이 기거하던 방에는 ‘양입계출(量入計出)’ ‘민부국강(民富國强)’ ‘공정광명(公正光明)’ ‘춘풍화기(春風和氣)’라는 4가지 좌우명이 쓰여 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수입에 맞추어 지출을 헤아리면, 국민이 넉넉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며, 매사 공정하고 분명하면 봄바람처럼 화기가 넘친다”라는 내용으로, 결국 쓰임새를 수입에 맞추기 위해서는 검소함이 몸에 밸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인색하지 않고 덕을 베푸는 것이 공정광명의 가치일 것이다.
고려대 본관 앞에서 (오른쪽은 인촌, 왼쪽은 현상윤 초대총장)
“‘욕심 없고 밝은 뜻’을 의미하는 글로 생각되는데, 인촌은 평생을 통해서 사욕을 부린 적이 없고 그가 지닌 뜻 혹은 지조는 명명백백한 것이었다. 욕심이 없었기에 무슨 일에나 뒷전에서 힘썼고 뜻이 밝고 분명했기 때문에 동지들이 안심하고 인촌 주변에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건대 ‘담박명지’였으니까 ‘공선사후’하고 ‘신의일관’할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입지(立志)의 선비 : 역사적 내비게이션
인촌에게서 볼 수 있는 교육적 인간상의 세 번째 모습이자 21세기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세운 뜻을 올곧게 지키는 역사적 의식인으로 선비의 모습이다. 인촌의 교육구국의 꿈은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대학에서 무르익은 것이라 한다. 스물세 살의 열혈 청년이 교육을 통해 구국의 뜻을 세운 데에는 이미 영신학교를 세운 양부 원파공으로부터 보고 배운 바가 있겠지만, 일본 유학시절을 통해 게이오의숙의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나 와세다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와 같은 경세가들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교육적 인간상의 입장에서 입지(立志)란 주체적 자기 형성의 나침반을 갖는 것이다. 인생 계획표에서는 속도보다 방향을 보여주는 나침반이 중요하다. 비록 속도는 느려도 그 방향이 틀리지 않다면, 비록 끝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삶의 과정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하더라도, 방향이 잘못된 사람들은 자신이 낭비한 인생을 후회하며, 뒤늦게 ‘삶의 길’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입지의 선비에게 요구되는 것은 현재 나의 공간에서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혹은 내비게이션)뿐만 아니라, 역사적 흐름 속에서 나의 선택이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시해주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교육적 인간상으로서 ‘입지의 인간’은 바로 선비(士)의 마음(心)을 세우는(立) 것이다. 선비는 자신의 뜻을 세워, 이를 오롯이 하는 사람이며, 선비가 뜻을 세우면 그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직간(直諫)을 하는 가운데 유배지로 귀양 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인촌이 일본에 유학하기 위하여 가출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유학에서 돌아와 백산학교 설립의 꿈을 품었던 것도, 그리고 학교 설립이 좌절되었을 때 이를 대신하여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결행한 단식투쟁도, 그리고 보성전문을 인수한 후 총독부의 지난한 통제와 회유와 억압 속에서도 그가 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어쩌면 그의 교육입국에 대한 입지의 강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촌의 이러한 인간상이 21세기의 교육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리해보면, 첫째로 ‘인덕의 대인’이란 단지 생래적인 것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지향해야 할 가치다. 즉 과거의 카리스마적 권위나 공식적 직책에 따른 권한에서 비롯되는 하드파워보다, 비전의 공유나 일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끌어내는 비공식적 힘에서 비롯되는 소프트파워의 지도자상으로 제시될 수 있다.
둘째로 ‘공과 신의’의 개념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구되는 핵심적 가치다. 앞의 인덕 개념과 함께 신의를 공정광명하게 실현할 때, 사회 전체는 봄바람의 화목한 기운(春風和氣)이 충만한 살기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셋째로 ‘역사적 의식인으로 입지의 선비’는 현대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을 줄여주기 위하여 자기 나름의 주도적 선택에 의한 뜻 세우기, 즉 입지의 중요성을 제공하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 떠날 때에 다음 세대에 자신이 세운 뜻을 남겨 보여주는 사람이 선비이다. 그리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뜻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져 뜻있는 역사가 될 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그리고 그의 죽음조차 의미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