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축구계에는 스타플레이어가 감독으로 변신하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존재했다. 그러나 주제프 과르디올라 FC 바르셀로나 감독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 스페인 리그 6회, FA컵 2회, 유럽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 등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끈 그는 2008년 불과 37세의 나이로 친정 팀의 지휘봉을 잡아 세계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감독 데뷔 시즌이던 2008~09 시즌 전무후무한 ‘트레블’(한 시즌 3개 대회 동시 우승)을 달성했고, 그의 휘하 선수들로 구성된 스페인 축구대표팀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다. 지난 5월에는 모든 축구팀의 ‘꿈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서 한 번 더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 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모두 ‘명장’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제치고 얻은 성과라는 점에서 더 값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 주장이었던 그는 독일의 우승을 이끌어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이듬해인 1991년에도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이름을 올리는 등 축구사의 한 면을 장식했다. 은퇴 후 여러 클럽에서 감독을 맡은 그는 독불장군 식의 팀 운영으로 가는 곳마다 마찰을 일으키며 지도력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 알렉스 퍼거슨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주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 거스 히딩크 전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등 선수 시절 경력은 별 볼일 없지만 세계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기록을 쓴 스타 감독들과 대조적이다.
스타 선수가 스타 감독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후보 선수나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수의 능력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스타 출신 감독은 “내가 지금 경기에 나가도 너보다는 잘하겠다”는 식으로 후보 선수들을 대하기 일쑤다. 팀워크가 좋아질 리 없다. 감독이 되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준비를 하지 않고 선수 시절 명성만 믿고 “감독으로도 잘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앞세우는 것은 자신은 물론 팀 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 3년의 감독 경력으로 이런 선입관을 깨부수며 현대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쓴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이 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축구단으로 평가받는 스페인 FC 바르셀로나의 주제프 과르디올라(Jos、ep Guardiola·40)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애칭인 ‘펩(Pep)’ 과르디올라로 더 유명한 이 감독은 선수 시절 명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고, 비슷한 시기에 축구계에 데뷔한 다른 선수들이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을 때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감독이 된 첫해 모든 축구 감독의 염원인 ‘트레블(Treble)’을 달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3배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트레블은 어떤 스포츠에서 한 팀이 3개 대회를 우승했다는 말이다. 프로 축구의 트레블은 한 클럽 팀이 동일 시즌에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 3개 대회는 자국 정규리그, 자국축구협회(FA·Football Associations) 챔피언스리그, 유럽 축구의 왕중왕전 격인 유럽축구협회(UEFA·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 챔피언스리그를 가리킨다.
2008년 6월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된 과르디올라는 감독을 맡은 첫 시즌에 FC 바르셀로나를 스페인 정규리그인 프리메라 리가, 자국 축구협회인 코파 델 레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 우승시키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당시 나이는 불과 37세였다. 과르디올라는 현재까지 트레블을 달성한 가장 젊은 감독이다. 명장 알렉스 퍼거슨도 60대가 넘어서 트레블을 달성했고, 과르디올라의 가장 강력한 적수인 주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도 40대 후반에야 이를 이뤘다. 축구 전문가들은 상당 기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훌륭한 선수가 되거나,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일 하나만도 힘든데, 불혹의 나이에 이 둘을 모두 달성한 비결은 무엇일까.
과르디올라가 누구인지, 그의 리더십 요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려면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FC 바르셀로나라는 축구 구단이 갖는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흔히 ‘바르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FC 바르셀로나는 단순한 축구팀이 아니라 카탈루냐 사람들의 존재 이유 그 자체다.
카탈루냐의 심장 FC 바르셀로나
그 이유는 스페인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페인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다. 표준 스페인어인 카스티야어 외에도 스페인 서북부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카탈루냐인, 포르투갈 국경 북쪽의 갈리시아인, 스페인 동북부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바스크인이 쓰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은 소수민족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에 특히 카스티야 지방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15세기 말 카스티야 지방의 이사벨라 여왕은 카탈루냐를 비롯한 나머지 지방의 왕국을 모두 흡수하며 스페인의 전국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각 지역의 문화, 전통, 풍습 등이 워낙 달랐던 탓에 이후 50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완전한 통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스페인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인 고유의 카탈루냐어를 쓰는 카탈루냐 사람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섞어놓은 듯한 언어로 프랑스어에 좀 더 가깝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간 지역감정은 1920년부터 더욱 격해졌다.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리베라 장군은 민족주의가 꽃을 피우던 카탈루냐를 억압하기 위해 FC 바르셀로나부터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국가에 야유를 한 바르셀로나 관중의 행동을 빌미 삼아 FC 바르셀로나의 누캄프 경기장을 3개월 동안 폐쇄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뒤에는 그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FC 바르셀로나라는 클럽 이름과 문양도 강제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의 수뇰 회장은 내전 중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군대에 의해 살해됐다.
프랑코 총통의 유례없는 레알 마드리드 편애는 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후 국가원수에 오른 프랑코 총통은 레알 마드리드의 열렬한 팬이었다. 하지만 그의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사랑은 도가 지나쳤다. 이는 1950년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군림했던 아르헨티나 출신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영입을 둘러싼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영입 전쟁에서 프랑코 총통이 입김을 불어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53년 디스테파노가 남미 리그를 평정하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동시에 그의 영입에 뛰어들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바르셀로나였고 디스테파노와 도 합의했다. 하지만 스페인 축구연맹은 디스테파노의 바르셀로나행(行)을 아무 이유 없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스페인 축구연맹의 결정 뒤에는 프랑코 총통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 결국 그를 영입한 팀은 레알 마드리드였다. FC 바르셀로나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다.
디스테파노를 얻은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챔피언스리그 5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스페인 리그와 컵 대회를 합하면 레알 마드리드가 거둔 우승 경력은 무려 열다섯 번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20세기 최고의 팀’이라고 공인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억울하게 디스테파노를 뺏긴 FC 바르셀로나나 카탈루냐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실상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경기는 일개 스포츠가 아니라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사람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했다. 두 팀의 경기가 영어의 클래식(Classic)을 의미하는 ‘엘 클라시코(El Clasico) ’ 더비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르디올라는 누구인가
과르디올라가 왜 카탈루냐의 영웅이 됐을까. 쉽게 말해 그가 뼛속까지 FC 바르셀로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탈루냐에서 태어났고, FC 바르셀로나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그의 스승인 요한 크루이프 또한 FC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영웅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과르디올라는 1971년 바르셀로나 근교의 시골 산트페드로에서 태어났다. 13세에 FC 바르셀로나의 청소년 팀에 몸담으며 축구와 인연을 맺은 그는 선수 시절의 대부분을 FC 바르셀로나에서 뛰었고, 은퇴하자마자 이 팀의 감독이 되어 바르샤(FC 바르셀로나의 애칭)와 카탈루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FC 바르셀로나 청소년 팀에 있을 때 과르디올라는 FC 바르셀로나의 홈 구장 누 캄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전설적 선수들의 볼보이를 했다.
19세 때인 1990년 과르디올라는 그보다 앞서 축구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은 네덜란드 출신의 축구 스타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게 발탁됐다. 선수 각자가 자기 포지션을 지키며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공격과 수비 구분 없이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획기적 전술, 즉 ‘토털 사커’의 창시자이자 역시 FC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불리는 요한 크루이프 현 FC 바르셀로나 명예회장은 1973~74년 시즌 FC 바르셀로나에 선수로 입단했다.
크루이프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독재자 프랑코가 지원하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고 싶지 않기 때문에 FC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이방인에서 순식간에 카탈루냐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카탈루냐를 사랑했던 크루이프는 아들의 이름에도 ‘요르디(Jordi)’라는 카탈루냐식 이름을 붙여 애정을 과시했다. 입단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우승으로 이끈 크루이프는 1988년 감독으로 팀에 돌아왔다. 그는 과르디올라를 비롯해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하지, 고이코에체아, 과르디올라 등이 크루이프의 지도 아래 새 역사를 썼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리그 연속 우승을 이룬 것을 포함해 크루이프는 총 11개의 우승컵을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바쳤다.
주제프 과르디올라 어록지난 5월 FC바르셀로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은 뒤 선수들이 과르디올라를 헹가래 치고 있다.
서른이 된 2001년 과르디올라는 FC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외국의 주요 명문 팀은 모두 축구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남다른 리더십과 노련미를 지닌 그를 탐냈다. 그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토트넘 홋스퍼 FC, 리버풀 FC, AC 밀란, 인테르 밀란 등의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브레시아 칼초를 거쳐 이탈리아의 명문팀 AS 로마에 입단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스테로이드 양성 판정으로 넉 달간 출장 정지 처분까지 받았다. 결국 과르디올라는 유럽을 떠나 멕시코 클럽인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의 선수가 됐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뛴 지 6개월 만에 그의 팀은 성적 부진으로 1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강등됐다. 과르디올라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선언 직후이자 스테로이드 양성 판정을 얻은 지 6년이 지난 2007년 10월 그는 약물 복용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초짜 감독, 스승에 이어 FC 바르셀로나의 아이콘이 되다
과르디올라는 2007년 6월21일 FC 바르셀로나의 2군인 B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그의 지도하에 FC 바르셀로나 B팀은 하위 리그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2008년 6월 FC 바르셀로나의 회장 후안 라포르타는 성적 부진에 시달리던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을 해임하고 그를 감독으로 앉혔다.
당시 FC 바르셀로나에는 아프리카가 낳은 최고 공격수 사무엘 에투, 브라질의 축구 스타 호나우지뉴, 갓 성년이 된 리오넬 메시 등이 있었다. 하지만 에투는 종종 레이카르트 감독과 호나우지뉴와 갈등을 빚었고 팀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2007~08시즌에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리그 3위에 오르는 FC 바르셀로나답지 않은 성적을 냈다. 특히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엘 클라시코’에서 무려 1-4로 대패했다. 대패 후 바로 다음 날 라포르타 회장은 레이카르트 감독을 경질하고 과르디올라를 호명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7세였다.
당시 많은 사람이 라포르타 회장의 이 결정에 의문을 보냈다. 아무리 선수 시절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지만 감독 과르디올라의 경력은 보잘것없었다. 1군 팀 감독은 아예 맡아본 적도 없고 2군 팀 감독도 고작 1년이 전부였다. “이런 햇병아리를 최고 명문구단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임명하다니 제정신이냐”며 스페인 언론과 축구계가 뒤집혔다. 하지만 라포르타 회장은 “과르디올라야말로 FC 바르셀로나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며 “그가 FC 바르셀로나의 영광을 되찾아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라포르타 회장의 결정은 옳았다. 과르디올라는 1군 지휘봉을 잡자마자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하며 팀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 FC 바르셀로나의 최고 스타 선수였던 호나우지뉴(브라질)를 이탈리아의 AC 밀란으로 보내버렸다. 대신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 팀플레이에 능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했다. 메시 1명만으로도 어지간한 스타 선수 10명과 맞먹는 기량을 지니고 있지만 과르디올라는 늘 “나는 1명의 리오넬 메시보다 10명의 패스 마스터를 원한다”고 FC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다그쳤다.
과르디올라는 공격 점유율의 극대화를 팀의 최우선 과제로 선택했다. 사람이 공보다 빠를 수 없지만 그는 짧고 간결한 패스를 통해 공보다 선수가 빠른 축구팀을 만들어냈다. 공을 갖지 않은 선수 또한 흡사 섀도복싱(shadow boxing)을 하듯 부지런히 좌우 공간으로 움직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보다 선수도 빨라지고, 상대 팀의 수비도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핵심 공격수 다비드 비야, 미드필더인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수비수 카를레스 푸욜까지 모두가 이 극단적인 공격 점유율과 선수 간 유기적 호흡을 중시하는 축구를 그라운드에서 실천했다.
선수 시절 크루이프의 수제자였던 과르디올라는 감독이 된 후에도 크루이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의 밑에서 선수로 화려한 시절을 보낸 과르디올라가 크루이프의 패스 철학을 이어받아 다시 ‘크루이프의 시대’를 연 셈이다.
결과도 눈부셨다. 과르디올라는 부임 첫해에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 빼앗긴 스페인 리그 우승컵을 3년 만에 찾아왔고, 여세를 몰아 트레블까지 달성했다. 이후에도 FC 바르셀로나는 3년 동안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3연패를 비롯해 총 10개의 트로피를 모았다. 초조해진 레알 마드리드는 역시 트레블을 달성한 명장인 주제 무리뉴를 인터밀란에서 데려왔지만 천하의 무리뉴 역시 아직 FC 바르셀로나의 최근 성과를 능가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과르디올라의 FC 바르셀로나 축구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로 떠오른 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 때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은 ‘무적함대’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월드컵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2010년 이전 스페인 대표팀이 거둔 가장 좋은 성적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의 4위가 고작이었다. 유럽 3대 빅 리그로 불리는 프리메라리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나머지 빅 리그를 보유한 이탈리아, 독일, 영국은 물론 프랑스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스페인이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2010년 월드컵 우승으로 천하제패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역시 뿌리 깊은 지역 갈등이 가장 컸다.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스페인 대표팀에서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 선수 위주로 대표팀이 구성됐을 때 잡음이 많았다. 쟁쟁한 명장들도 이 모래알 대표팀을 끈끈한 팀으로 바꿔놓지 못했다.
하지만 2010년 월드컵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지휘했던 스페인 대표팀은 과르디올라 휘하의 FC 바르셀로나 멤버들을 대거 대표팀 주전으로 발탁했다. 2010년 스페인 축구대표팀의 주전인 베스트 일레븐 중 FC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는 무려 7명에 달했다. 중앙 미드필더인 사비 에르난데스와 세르히오 부스케츠, 좌우 날개(윙)를 맡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페드로 로드리게즈, 베테랑 수비수 카를레스 푸욜과 중앙 수비수 헤라르드 피케, 원톱 공격수 다비드 비야가 그 주인공이다. 반면 레알 마드리드는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 중앙 미드필더 사비 알론소, 오른쪽 풀백 세르히오 라모스 등 3명에 불과했다. 왼쪽 풀백 호안 캅데빌라는 비야 레알 소속이었다. FC 바르셀로나의 간판스타 리오넬 메시가 모국인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바르셀로나 주축 선수를 대표팀에 옮겨놓은 모양새였다.
델 보스케 감독은 바르셀로나 멤버들을 주축으로 한 빠르고 정교한 패스워크 전술을 잘 활용했고 결국 꿈에 그리던 사상 첫 월드컵 제패를 이뤄냈다.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갈등을 넘어 바르셀로나 중심으로 재편한 무적함대가 이뤄낸 성과였다.
과르디올라의 성과가 기업 리더들에게 주는 시사점
팀워크와 조직력은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FC 바르셀로나가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주축 선수들이 유아 때부터 한솥밥을 먹었다는 점이다. 과르디올라 본인도 그랬지만 현재 FC 바르셀로나의 핵심 멤버인 메시, 에르난데스, 이니에스타, 발데스, 피케, 세스크, 부스케츠, 페드로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 출신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팀에서 뛰어온 이들은 설사 동료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어도 성공률 90%에 육박하는 감각적인 패스를 자랑한다. 그만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고, 서로 잘 알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레알 마드리드가 FC 바르셀로나만 만나면 작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직력과 팀워크가 FC 바르셀로나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는 웨인 루니, 마이클 캐릭, 루이스 나니, 안토니오 발렌시아 등이 다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소년 아카데미 출신이었다면 맨유가 두 번이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허망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아무리 퍼거슨이라는 천하의 명장이 있다 해도 몇 년마다 주축 선수가 바뀌는 팀과 어릴 때부터 손발을 맞춰온 선수들이 뛰는 팀의 팀워크는 다를 수밖에 없다.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은 오랫동안 반복 훈련을 통해 팀 전체가 한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팀워크를 다져왔다. 리오넬 메시가 현재 세계 축구계를 호령하고 있지만 사비와 이니에스타가 없다면 메시의 공격력과 득점력은 배가되지 않는다. 메시는 FC 바르셀로나만의 팀워크라는 탄탄한 골격 위에 서서 마침표만 찍을 뿐이다. 즉 수백억원을 들여 영입한 스타보다 중요한 것은 스타를 받칠 수 있는 건실한 시스템, 즉 팀워크다.
또한 FC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자신들이 카탈루냐의 자부심이라는 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스페인에 억압받았던 카탈루냐 출신 세계적인 선수들은 오로지 자신의 지역을 빛내기 위해 뭉쳤다. 천문학적인 몸값을 제시하는 다른 나라 명문 구단의 유혹을 뿌리치고 수년째 바르셀로나를 지키는 선수들이 많은 이유이자 과르디올라 감독이 “우리는 똑같은 DNA를 지닌 진정한 하나의 팀”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FC 바르셀로나는 1899년 창립 때부터 2010년 터키항공과 스폰서 계약을 맺기 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동안 선수들의 유니폼에 스폰서 회사의 로고를 붙이는 것을 거부해온 축구단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2006년 7월에는 천문학적 비용을 댈 용의가 있는 세계적인 대기업들 대신 유니세프(UNICEF)와 5년 계약을 맺어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움직이는 광고판이나 다름없는 선수들의 유니폼 상의에 유니세프의 로고를 새기는 조건으로 FC 바르셀로나는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축구단 연간 수입의 0.7%인 약 1900만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유니세프에 기부해왔다. 정치, 이권, 사리사욕이 판을 치는 프로 축구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카탈루냐에 대한 자긍심, 다른 프로 구단처럼 단지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FC 바르셀로나 선수단만이 가질 수 있는 긍지다. 이는 메시처럼 굳이 카탈루냐 출신 선수가 아니라 그 어느 지역에서 온 선수라 해도 FC 바르셀로나라는 토양에 잘 스며들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엄청난 몸값에 모셔온다 해도 그 인재들이 해당 기업의 설립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팀워크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성과가 날 리 만무하다. FC 바르셀로나는 단순히 팀워크만 강조하는 게 아니다. 유소년 팀에 연간 1500만 유로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해 세계 각지의 축구 유망주를 모으고, 이들에게 FC 바르셀로나의 DNA를 이식한다. 크루이프가 창시하고 과르디올라가 완성한 FC 바르셀로나 식 축구를 유소년 시절부터 깊이 주입하기 위해서다.
리더는 뛰어난 전략 수립보다 선수단 융화에 힘써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과르디올라는 감독이 되자마자 팀 분위기를 흐리던 호나우지뉴, 데쿠, 사무엘 에투 등을 과감히 내보내고 FC 바르셀로나 청소년 팀 출신의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재편했다. 당시 21명의 FC 바르셀로나 1군 선수 중 절반이 넘는 11명이 청소년 팀 출신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스타 선수들에게 “너희는 경쟁자가 아닌 한가족”이라고 강조한다. FC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나 맨유 등 쟁쟁한 경쟁 팀을 꺾는 일을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을 이기는 것’에 비유한다. 과르디올라는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는 절대 권력형 감독이 아니다. 나이 마흔도 안 된 그가 카리스마를 내세우기도 어렵겠지만, 그는 FC 바르셀로나라는 팀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보다 여러 스타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많은 스타 선수가 모여 있지만 선수 간의 갈등이 없는 팀으로도 유명하다. 사비나 이니에스타 등은 최고의 선수로 불릴 능력을 갖췄지만 메시에게 늘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메시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메시도 마찬가지다. 메시는 13세 때 FC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뽑혔다. 당시 FC 바르셀로나는 신장이 136㎝에 불과한 이 작은 소년과의 계약을 망설였다. 초조해하는 메시와 메시의 부모에게 당시 FC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 감독은 “내가 책임지고 경영진을 설득하겠다”며 점심을 먹다 말고 냅킨 위에 계약서를 썼다. FC 바르셀로나는 이후 엄청난 금액을 투자해 메시에게 매일 성장호르몬 주사를 투여하는 등 그를 보살폈다. 즉 그를 낳은 사람은 그의 부모지만 현재 세계의 축구 황제인 메시를 키운 양부모는 FC 바르셀로나다. 메시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구단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나는 FC 바르셀로나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공언하는 이유다.
선수 개개인의 심리 및 성격 파악에 뛰어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팀워크를 배가시켰다는 면에서 그는 필자가 ‘Leadership in Sports’ ⑤편에서 다뤘던 필 잭슨 LA 레이커스 감독과 비슷한 점이 많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을 비롯해 데니스 로드맨, 스코티 피펜,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 과거 잭슨 감독이 지도했던 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그만큼 강한 개성과 자존심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감독이 통제하기 힘들었고 성깔도 만만치 않았다. 잭슨 감독은 이 콧대 높은 스타들에게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을 발휘해 팀워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고, 자신이 맡은 팀을 11번이나 미국 프로농구(NBA)의 정상에 올려놨다.
일각에서는 잭슨이나 과르디올라의 성공을 스타 선수를 보유한 덕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스타 선수를 보유했다 해도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능력은 아무 지도자에게나 나오지 않는다. 과르디올라 이전에 FC 바르셀로나를 맡았던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휘하에도 현재의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에 맞먹는 스타 선수가 많았지만 레이카르트 감독은 이 좋은 선수단을 가지고도 초라한 성적을 내고 해임됐다.
즉 37세에 부임한 초짜 감독이 부임 3년 만에 무려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FC 바르셀로나를 최고의 축구 구단으로 만든 건 결코 스타 선수들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스타 선수들에게 올바른 동기를 부여하고, 이들 개개인의 역량을 모아 최선의 시너지를 낼 줄 아는 과르디올라만의 지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르디올라가 선수들을 훈련할 때도 개개인의 기량 향상보다는 선수들 간의 유기적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훈련 계획을 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