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 매몰돼 자신 외의 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공부모임을 통해 ‘나와 우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모임에서 천문학 지구과학 생물학 유전학 등 자연과학 학습과 해외 탐사를 통해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것이다.
- 모임을 이끄는 박문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을 만났다.
과학자 한 명과 보통 사람 24명이 이 기원을 찾아 지난해 여름 홀연히 서호주로 탐사를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탐구하는 일도 예사롭지 않은데, 왜 하필 서호주일까.
호주의 6개 주(州) 가운데 가장 넓은 서호주는 면적이 남한 땅의 약 33배이며, 호주 대륙의 3분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구는 23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주도(州都) 퍼스에 180만 명이 살고 있고 그 외의 지역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다. 서호주는 철광석, 석유, 금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초기 지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과학자 한 명은 바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인 박문호 박사이며, 보통 사람들은 박 박사가 이끄는 학습 모임 ‘박자세(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mhpark.co.kr)’ 회원들이다. 2011년 3월부터 7월까지 14주 동안 매주 일요일 4시간씩 자연과학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책 속에서 추상으로 이해한 자연을 현실로 느껴보기 위해 해외 탐사를 떠났다.
11박12일 동안 탐사대원들은 다섯 대의 승합차에 나눠 타고 남쪽 퍼스에서 북쪽 벙글벙글 레인지(Bungle Bungle Range)까지 7000㎞를 이동했다. 이번 탐사의 일지를 기록한 이는 탐사대원 가운데 가장 어린 대학생 이모 양(ID 아샤)이다. 머리 희끗한 중년이 대부분인 탐사대원 가운데 유일한 젊은 학생이었다. 대학 졸업반 학생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수재이지만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회의하던 중 박 박사의 강의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가 탐사 기록서인 ‘서호주’(도서출판 엑셈)에 이렇게 적었다.
‘빅뱅이 만든 우주의 지문이 찍힌 위성사진을 보고, 아샤는 놀라 눈물을 흘렸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서로를 결정하는 상대성이론과 무기물이 모여 유기물이 되는 생명의 레시피 실험, 요동치는 양자의 세계와 내 안에 꿈틀대는 미토콘드리아를 만났다. 현미경 속 자그마한 것들부터 천체망원경 밖 우주 저 끝까지, 알고 보니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넘쳐났다.’
탐사대원들은 호주에서 천막 야영을 하며, 곳곳에 숨은 지구 과학적 원리를 찾아나섰다. 20억 년 전 철광층과 최근 화산 지층이 한데 공존하는 카리지니 국립공원의 데일스 협곡,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의 마을, 지구상에 처음 산소를 만들어낸 원시원핵 생물인 시아노박테리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샤크베이 해변 등에서 지구와 생명의 기원을 떠올렸다. 평원에 밤이 찾아오면 하늘을 우러러 마젤란 성운과 남십자성을 보며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
박문호 박사는 지난해 서호주 탐사에 이어 올해 3월 22명을 데리고 미국 남서부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콜로라도, 뉴멕시코, 유타, 애리조나 주가 만나는 지점인 포 코너스(four corners)의 인디언 유적지, 그랜드캐니언, 데스밸리 등을 탐사했다. 지질학 천문학 유전학 고생물학 등의 현장학습시간이었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박 박사와 마주 앉았다.
자연과학 공부에 미친 사람들
▼ 탐사대의 성격이 궁금합니다. 학문적 성취를 위한 탐사인가요,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가요?
“국내에도 정수일 문명교류연구소장이 이끄는 실크로드 답사나 바이칼포럼 등 여러 탐사모임이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 전문가가 인솔하고 현지에서 비전문가들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형태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은 탐사 전에 참가자들이 분야를 나눠서 3, 4개월 동안 공부를 하고 각자가 전문가가 됩니다. 제가 총괄하고, 외부 전문가는 초청하지 않습니다. 이번 미국 탐사에서는 특히 인디언 유적지를 여러 곳 방문했는데 10여 명이 사전에 지질학 천문학 등 전문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탐사 전후에 각각 발표회를 갖습니다. 그 뒤에 ‘서호주’의 경우처럼 책으로 엮습니다. 두 번째 책은 미국 남서부 지역 탐사를 다룰 예정입니다.”
▼ 탐사대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양한 계층, 직업의 사람이 섞여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연과학 공부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재로 삼은 책은 모두 대학의 자연과학 교과서다. 그보다는 오히려 출발 전에 한 회원들의 선행학습이 탐사에 큰 도움이 된다.
“막상 탐사를 가려고 할 때 참조할 만한 자연과학 책이 별로 없어요. 관광지를 소개하는 책자는 탐사 지역을 주마간산으로 보고, 서정을 얘기하는 데 그칩니다. 그 지역의 지질이나 생태 등 깊은 이야기를 알 수 없어요. 서호주 탐사에 앞서서도 참조할 만한 지질학 책이 별로 없어서 고민했습니다. 선행학습과 탐사의 결과물인 책 ‘서호주’는 탐사대가 만든 지질학 교과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호주 샤크베이의 시아노박테리아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압권이지요.”
박 박사 일행은 ‘서호주’에서 시아노박테리아 관련 부분에 100쪽이나 할애했다. 시아노박테리아가 도대체 뭔가.
“광합성을 하는 남조류인 시아노박테리아는 지금도 각 가정의 목욕탕에서, 혹은 대청호에서 수질오염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런데 이 박테리아가 광합성을 해서 포도당을 만들어내고, 그 포도당의 끈적이는 점액질에 모래알이 붙고 그것이 수천 년 동안 쌓여서 바위가 됩니다. 그런 바위를 스트로마톨라이트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지질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이미 암석으로 형성돼 있어요. 호주 서부 샤크베이에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시아노박테리아가 살아서 산소를 내뿜으며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만들고 있는 현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성 지구를 순례하다
시아노박테리아는 가스로 가득 찬 초기 지구의 대기에 산소를 내뿜어 푸른 지구를 만들었다. 즉 그 산소가 식물의 엽록체를 만들고, 생명활동을 촉진했다. 호주 샤크베이 지역의 살아 있는 스트로마톨라이트 덕분에 과학자들은 35억 년 전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구조의 생명체가 살았음을 알게 됐다. 샤크베이 지역이 195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심 5m 정도의 따스한 바다에서 푹신푹신한 스펀지 같은 외형을 하고 산소를 내뿜는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보며 탐사대원들은 시공을 넘나드는 사색에 잠겼다.
‘그 바위(스트로마톨라이트)가 뿜어내는 공기방울을 통해 생명이 태어나고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마침내 나에 이르게 된 믿지 못할 사실로 한동안 생각에 잠기기에 충분하다.’ (‘서호주’ 가운데)
박 박사는 ‘서호주’ 책을 펼쳐 탐사대가 찍어온 시아노박테리아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에 서호주 땅이 붉게 보이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시아노박테리아가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 광합성을 하자 물이 산소와 수소로 분해됐습니다. 초기 대양에는 철입자가 많았는데 물에서 분해된 산소가 대기로 올라가 철과 결합해 산화철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수억 년 동안 반복되면서 호주대륙은 모두 붉은 토양을 갖게 됐습니다. 호주의 호상철강상은 지구 철강 생산량의 80%를 차지합니다. 포항제철도 그곳에서 철강을 대량 수입하고 있어요. 호주의 시아노박테리아와 한반도가 그렇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책을 포스코 회장에게도 보냈어요.”
박자세 회원들은 탐사를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행성 지구를 순례한다’라고 거창하게 표현한다.
“우주적 세계관을 갖고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지구에 최초의 산소를 만들어준 현장에 가는 것이니 본래 우리의 고향에 가는 느낌을 갖는 겁니다. 미국항공우주국에 따르면 지구에서 화성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바로 서호주 카리지니 공원이라고 합니다. 만약 지구에서 화성을 느껴보고 싶다면 그곳에 가면 돼요. 그러니 행성 지구를 느낀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 서호주를 탐사지로 정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요?
“지구상에 35억 년 된 지층이 남아 있는 곳은 캐나다 북부 순상지대, 호주 서부 샤크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인데, 샤크베이 쪽에 가장 넓은 지층이 분포합니다. 서호주는 또 완벽한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 완벽한 밤하늘은 무엇을 말하는 거지요?
“서호주에서 맑은 날 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밤하늘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별 보기 좋은 곳으로 몽골 사막, 태평양 한가운데, 히말라야 산맥, 서호주를 얘기합니다. 건조기 때 서호주의 평원지역에서는 시야를 막는 장애물이 없어 180도로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컵라면 먹다 은하수 만나다
지난해 호주를 방문한 ‘박자세’ 탐사대원들이 거대한 바오밥나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북반구에서 유일하게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은하인 안드로메다 갤럭시를 서호주에서 마젤란 성운과 함께 보다니,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이미 이루어진 거다. 호주를 다녀온 사람이 많으나 호주의 밤하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젤란 성운 하나만으로도 호주에 갈 만한 이유가 된다.’
▼ 마젤란 성운이 그토록 아름답습니까? 한국의 밤하늘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마젤란 성운은 북반구에선 볼 수 없는 성운입니다. 서호주의 밤하늘에는 여느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막의 어둠은 갑자기 엄습해옵니다. 10년 전 처음 서호주 사막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해가 질 무렵 혼자서 급히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이상해요. 가만 보니 은하수가 제 곁에 내려와 있는 겁니다. 그 느낌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걸 한번 보셔야 합니다.”
▼ 은하수가 옆자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요?
“밤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밝게 빛나는 별을 연결해서 별자리를 만들잖아요. 그런데 호주 원주민들은 별이 없는 어두운 점들을 연결해서 별자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 의미를 아셔야 해요. 별이 너무 많아 별자리 찾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호주 사막에서 밤하늘을 본 사람은 평생 못 잊어요. 모든 인식이 다 바뀝니다. 우주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며 원초적 우주 현상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 탐사의 목적이 지구의 기원, 생명의 기원, 우주의 기원을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했나요?
“그렇죠. 저는 10년간 호주를 세 번 방문하고, 태양계 내에서 행성 지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습니다. 자연과학의 학문적 업적을 체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자연과학을 통해서도 어떤 종교나 문학보다 더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탐사대원들도 탐사 과정에 만족감을 표시하나요?
“만족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곳에서, 절대 자연 앞에서 같이 울었어요. 완벽한 밤하늘을 보고 나면 그 잔영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평생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요.”
절대 자연 앞에서 울다
▼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無限)이나 절대(絶對)를 느끼면서 감정이입 상태가 됩니다. 인문 예술 종교를 통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낮은 차원이라고 봅니다. 철학이나 종교는 아무리 뛰어나도 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뇌가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자연 속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탐사대는 자연에 가서, 그 철학과 인문학과 예술을 만든 뇌의 본질에 가서 자기 생각구조가 완전히 용해되고, 사라지는 걸 느껴요.”
▼ 자기가 너무 미약하다고 느끼는 건가요?
“단순히 그런 건 아닙니다. 스스로가 우주적 현상에 동참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내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와 동일하다고 배웠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가서, 문명의 이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별을 보면서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네 차례 탐사를 다녀온 ‘박자세’ 김현미 연구원이 여기에 공감을 표시했다. 김 연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대인 미국 하와이 칼텍천문대를 방문했다가, 그 아래 해발 2000m 벌판에서 야영하며 천문학 공부를 하던 중 눈물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내가 말 그대로 날것의 자연 속에 있고, 나 또한 그 일부이고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과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 경험 뒤 일상생활에선 어떤 변화가 있는지요?
“박자세의 ‘137억 년 우주의 진화’ ‘특별한 뇌과학 강의’ 등을 통해 익힌 자연과학적 생각 구조를 잊지 않으면 내가 발 디딘 자연과 이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저하게 대학 교과서 중심
박문호 박사가 일반인 대상으로 자연과학 강의를 하고 있다.
“간혹 우리 공부모임을 신흥종교 같다고 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철저히 입증된 자연과학 교과서를 공부합니다. 공부를 해나가다 겪는 인식의 변화는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개인적 의견이 개입되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 서호주 탐사 때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같이 움직이면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반목이 생긴 경우는 없었나요?
“굉장히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샤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막에서 수십 명을 인솔하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일은 그야말로 극단적 상황입니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산악 등반대처럼 대장 중심의 명령체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때 의견을 제시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전두엽에 가장 좋은 경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전두엽요?
“네, 뇌 가운데 판단력을 관장하는 부분입니다. 미국에 가서도 굉장히 험악한 자연환경을 만났습니다. 비가 오고 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해발 2000m까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순간적 판단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좋게 보면 모든 경험과 지식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박 박사는 10년 전 멜버른의 학회에 참석했다가 서호주 일대를 처음 여행했다. 당시 남쪽 퍼스에서 북쪽 도시인 다윈까지 61시간 버스를 타고 여행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5년 전 6명과 함께 본격 탐사를 시작했다. 3년 전엔 70명과, 지난해엔 24명과 같이 서호주를 탐방했다.
과학에서 철학이 사라지다
순수한 민간 자연과학 학습 모임인 박자세는 박문호 박사를 중심으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관련 학문을 통섭(通涉)적으로 공부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직업이나 계층도 다양한 1000여 명의 회원은 우주의 역사, 생명의 진화, 의식의 탄생에 이르는 근본 지식을 배우며 자연과학적 사고를 키워나가고 있다. 박자세는 종교와 정치, 인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 보편타당하고 효율적인 자연과학의 힘을 더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박문호 박사는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삼성경제연구원, 서울대, 불교TV 등에서 우주와 자연, 뇌를 주제로 강의했으며, 베스트셀러인 ‘뇌, 생각의 출현’의 저자이기도 하다. 체계적인 독서법을 통해 자연과학 분야에서 3000여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박 박사는 “자연과학은 훈련을 통해 학습근육을 키워야 즐길 수 있다”며 ‘시공 사유, 기원 추적, 패턴 발견’ 등의 학습법을 강조한다. 박 박사의 강의가 끝나면 회원들이 돌아가며 발표를 하고, 탐사를 하는 등 살아 있는 학습으로 만들기 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강의는 주로 서울에서 진행되며, 연간 50회 정도의 강의가 이어진다.
서호주 해변에서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화석 스트로마톨라이트.
“10년 전 ‘수유+너머’에서 뇌과학을 강의하면서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과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치 철학 인문학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특히 뇌과학은 종교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요. 출판 방송계 종사자 대부분이 인문학 전공자이다 보니 국민이 인문학적 옷을 입은 자연과학을 만나게 됩니다. 과학도 산업 발전에 필요한 공학 혹은 기계적 물질문화에 경도돼왔습니다. 과학이 철학적 개념 없이 공학으로 전락하다보니 우주와 자연을 연구하는 본연의 정신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바꾸고 싶어 이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 교재로 대학 교과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리 모임에 공부하러 와서는 심령과학이나 정신현상에 관심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학을 종교와 연결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리고 검증된 교과서로 참고문헌이 있는 내용만 공부하자고 강조합니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내용을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종교에 기대거나 통속 심리학이나 계룡산 도사를 찾는 것에 반대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저는 과학을 종교로 삼자고 주장합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인류가 국가예산으로 과학적 지식을 구축해놓았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문학이나 소설 인문학에 답이 있다고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대중의 과학화 필요
▼ 그런데 과학은 아직도 교육하는 사람이 어렵게 가르치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박 박사님도 칼 세이건이나 빌 브라이슨 같은 작가들처럼 복잡한 과학 현상을 흥미롭게 풀어서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요?
“저는 정반대입니다. 대부분 과학을 접할 때 재미있고 쉽게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이해력이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밥을 비유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밥은 그 자체로는 별 맛이 없고 덤덤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식품은 먹을 때는 맛있지만 비만 초래 등 부작용이 있습니다.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간식이나 인스턴트식품을 달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대전 지역 기업인들에게 그런 내용을 강의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정부가 과학을 홍보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만 국민의 과학 실력은 제자리걸음입니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과학계의 지상과제는 과학의 대중화였다. 과학이 대중에게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딱딱한 음식을 씹지 않아 이가 약해지듯 ‘딱딱하지만 몸에 좋은’ 과학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약해졌다는 게 박 박사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박 박사는 반대로 ‘대중의 과학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한다.
“시와 과학의 차이점을 봅시다. 시는 누구나 감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중력장 방정식이나 뉴튼의 역학을 즐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뉴튼의 역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논리구조를 이해해야 해요. 미분과 적분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즐길 수 없어요. 서점에 가보면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이 50권도 더 나와 있어요. 그 책들 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요.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어놓은 그런 책들을 읽느라 보내는 시간에 차라리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수식을 풀어보는 게 더 나을 수 있어요.”
▼ 일반인이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쉽지 않은데요.
“어렵지 않아요. 마라톤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본 적이 있나요? 그거 정말 쉽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연간 10만 명이 풀코스를 뜁니다. 그들에게 마라톤이 쉬운지 어려운지 물어보세요. 대부분 어렵다고 할 겁니다. 어려운데 어떻게 뛰는 거지요?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니까 뛰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완주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왜 공부는 그렇게 못하나요? 처음부터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익숙해지는 게 중요해요. 제가 뇌과학을 공부하다 보니 기억된 뒤에, 익숙해진 뒤에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 복잡한 과학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이해보다 익숙해져야
▼ 그런데 수식을 풀려면 수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이해해야 할 텐데요.
박 박사는 “제가 지금 공부하는 방식을 보여줄게요”라면서 수첩에 빼곡히 적힌 수식을 보여준다. 그 수첩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수식으로 가득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수식이라고 했다.
“저도 이런 수식을 계속 풀어요. 보통 사람이 일반상대성이론의 참 의미를 깨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그런데 수식을 암기하는 데는 1주일이면 됩니다. 그 이론의 전체 수식구조에 익숙해지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어요. 기자님은 별과 별 사이의 진공을 느낄 수 있나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과학은 그렇듯 감각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감각이 끝난다는 말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상징을 통해 수식으로 전개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지막지하게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겁니다.”
수학에 질린 기자가 박 박사에게 다시 묻는다.
▼ 수학을 꼭 공부해야 합니까?
“수학을 피해가면 안됩니다. 정면 승부하면 됩니다. 공부도 쉬운 데서 어려운 데로 단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40, 50대가 되면 추상적 사고에 익숙해서 ‘추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갈 수 있어요. 단지 그것을 어렵게 생각해서 낮은 단계부터 공부하다 보면 언제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 수 있느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높은 산에 빨리 올라가는 방법 가운데 헬리콥터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왜 그런 학습법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요.”
박 박사의 조언은 간단하다. 기본적인 수식을 암기하고, 질문하지 말 것! 학습의 원동력이 되는 질문은 품어서 더 크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울 것!
▼ 과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인 ‘ E=mc2 ’(모든 에너지는 그에 상당하는 질량을 갖는다는 개념. E=에너지, m=질량, c=진공 속의 빛의 속도)를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겁니다. 그런데 대충이나마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이들까지 과연 그 수식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그 과정을 다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도는 고정된 게 아니고 학습에 따라 심화돼가는 과정입니다.”
박 박사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은 자연과학 학습을 등한시해온 한국 사회에 울림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박 박사는 박자세의 강의가 새로운 개념의 일반 과학운동이라고 말한다. 백화점식 문화교실 수준을 벗어나서 일반인의 과학지식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연을 보라
▼ 자연과학의 눈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는 종교가 많은 사회입니다. 저도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어요. 문제는 우리나라에 수많은 주의(主義)가 있음에도 가장 필요한 과학주의가 없다는 점이에요. 엄밀한 과학의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모든 문제를 과학이라는 틀로 해결해보려는 자세 말입니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답해왔어요. 그런데 그 답이 ‘난센스’일 때가 많아요. 유전자에 관한 얘기조차 종교에 묻는 경우가 그런 예지요.”
▼ 과학은 깊이 들어가면 종교와 만나지 않나요?
“엄밀히 말하면 종교가 과학 속으로 들어옵니다. 종교가 과학의 부분집합입니다. 일본 뇌과학자 요로 다케시의 말입니다. 철학이 아무리 위대해도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뇌 활동은 아무리 위대해도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공부합니다. 자연 속에는 생명 현상, 무생물 현상이 있습니다. 생명현상 속에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인간 안에 언어 사회 종교가 있습니다. 자연을 공부하면 당연히 종교가 따라옵니다.”
▼ 그런데 우주가 끝이 없다고 하고, 무한개념 앞에선 과학보다는 종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요.
“종교가 사고를 통해 무한을 의식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수학에선 집합으로 표현해요. 무한을 측정하고, 조작해요. 종교로 무한개념에 접근하면 영원히 어떤 느낌만 가져요.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밖에 없어요. 수학으로 무한개념에 접근하면 그것을 가공하고, 다룰 수 있어요. 완전히 다르죠. 자연과학적 시각으로는 무한개념도 다 설명이 됩니다.”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쓴 프리초프 카프라는 양자역학 이론이 불교 이론과 아주 많아 닮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카프라는 불교와 자연을 같이 놓고 봤고, 저도 그의 책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과학주의는 종교도 인간의 현상이니까 다 자연과학 속에 있다는 겁니다. 자연과학을 종교보다 더 높게 상정해야 합니다.”
▼ 자연과학을 학습하고, 자연을 대하는 인식을 바꾸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오는지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취미생활이잖아요. 취미는 목적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이익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생각하면 강박관념이 생겨 뇌가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마라톤도 누가 시켜서 하라고 하면 못할 겁니다. 자기가 좋아서 해야 해요. 이런 비유를 드는 이유는 제가 마라톤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풀코스를 뛴 뒤로 거기서 많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수만 명이 동시에 하는 이유가 뭐지? 공부에 중독되는 일이 왜 그렇게 드문 현상인가 하면, 거기에 ‘가치(value)’를 붙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공부하면 좋은 직장을 얻고, 성공한다는 식의 가치가 오히려 공부를 방해합니다. 오히려 공부하면 인생이 실패할 거라고 선언하고 나면 거기에 더 중독될지도 모릅니다. 뇌를 공부해봤더니 그런 패러독스에 일리가 있어요.”
▼ 박 박사님의 과학운동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하는 과학운동은 사회를 자연에 부합된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요. 제대로 된 인간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인간사회 아닌 자연의 시스템을 만나야 해요. 인간이 지구 표면에 흔적을 남긴 건 45억 년 역사 속에서 200만 년밖에 안 됩니다. 자연을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