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폐쇄적 민족주의가 김종훈 사퇴 불렀다”

김영근 세계한인네트워크 회장

  • 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입력2013-03-21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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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동포’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의 자진사퇴를 계기로 재외동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 시각이 도마에 올랐다. 재외동포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해온 김영근 세계한인네트워크 회장을 만나 이번 일로 불거진 재외동포들의 우려와 새 정부가 취해야 할 재외동포 정책에 대해 들어보았다.
    “폐쇄적 민족주의가  김종훈 사퇴 불렀다”
    김영근(57) 세계한인네트워크 회장은 1981년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떠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부동산사업으로 성공한 자수성가형 사업가다. 2003~07년 워싱턴 한인연합회 회장, 2005~06년 세계한인회장대회 의장을 지냈다. 2005년엔 ‘재외동포 참정권연대’를 만들어 재외동포들이 참정권을 얻는 데도 기여했다. 2007년 말 한국으로 돌아온 김 회장은 세계한인네트워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세계한인네트워크는 지역한인회장 출신 등 세계 30여 개국 1000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월 제3회 재외동포정책포럼을 연 데 이어, 4월 10일 재외동포의 역할과 독도를 주제로 한 포럼을 준비하고 있다.

    ▼ 성공한 재미동포로 주목을 받은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논란 끝에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분은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분 아버지가 볼티모어 한인회장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사퇴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일각에서 ‘애국심으로 장관직을 수행하겠다고 해놓고 너무 쉽게 사퇴했다, 애국심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비난도 있지만, 그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는 어려서 이민 온 1.5세대다. 한국인이나 한인 1세대와는 사고방식이 좀 다르다. 한국적 애국심은 민족주의란 이름 아래 맹목적으로 자신과 가족이 희생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미국식 애국심은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국가에 기여하면서 자부심도 가져야 하는데,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현실에 실망이 컸을 것이다. 미국도 인사청문회를 철저하게 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애국심 이전에 무책임한 인신공격과 모욕에서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보호하는 게 더 중요했을 것이다.”

    재외동포를 보는 이중성

    ▼ 검증 과정에서 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봤을 때는 어이없는 일이다. 내가 듣기로 한 재미 언론인이 청와대에 투서를 했다고 한다. 자기 소유의 비행기를 타고 도박이 합법인 도시에 가서 도박을 한 게 뭐가 문제인가. 또한 외환위기 때 부동산값 폭락을 막기 위해 한국 정부가 나서서 재외동포들에게 한국 부동산을 사라고 설득했다. 그때 애국하는 마음으로 많이들 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몇 배가 올랐으니 부동산 투기라고 하질 않나, 뉴저지의 룸살롱을 갔다면서 마치 범죄를 저지른 양 인신 비방하는 것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 CIA (미 중앙정보국) 간첩설까지 나왔다.

    “그가 CIA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오히려 CIA에서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훈 후보자가 CIA 자문위원을 했다는 것인데, 그 정도 성공한 인물은 이런 저런 기관의 자문위원에 위촉되게 마련이다. 그 논리라면 앞으로 성공한 한인은 아무도 한국에 돌아가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 미국은 간첩사건에 엄격하다. 로버트 김은 별것도 아닌 내용을 한국 친구에게 이야기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우리도 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되는 것이지, 외국 국가기관과 관련이 있었다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 김 후보자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안타깝다. 나도 처음 미국에 갔을 땐 이제 삶의 터전이 그곳이니 미국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민권도 취득했다. 그렇다고 한국인임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재외동포들은 해외에 나가 있어도 자신이 태어난 나라 대한민국을 잊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된다. 그런데 한국에선 우리가 해외에 있을 때만 동포로 여기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외국인 취급을 한다.”

    ▼ 이번 일에 대해 재외동포들의 시각은 어떻던가.

    “폐쇄적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면서 실망하고 우려하는 분이 많다. ‘글로벌 시대’와 ‘세계화’를 이야기하고 ‘700만 재외동포는 우리의 소중한 인적자원’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배척하는 걸 보고 나도 ‘아직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싶었다. 이번 일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 와서 뭔가를 하고 싶은 2, 3세들이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재외선거 보완 필요”

    현재 우리 재외동포는 175개국 7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리 인구가 4500만 명이니 16%에 달하는 많은 숫자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재외동포에게 제대로 눈을 돌린 건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신재외동포정책’을 내놓은 게 계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외동포법을 제정하고 재외동포재단을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계 한인의 날을 제정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복수국적을 일부 허용됐다.

    “한인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게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이 일관성이 없고 근시안적이라는 점이다. 미국을 방문하는 정치인들에게 재외동포 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관심 밖이었다. 우리에겐 투표권이 없어 표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5년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사무총장을 하면서 헌법소원을 냈고, 2007년에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재외동포도 참정권을 얻을 수 있었다. 2007년 대선 때부터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결사반대했다. 재외동포들을 보수층으로 인식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2008년 겨우 법률이 통과돼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에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투표결과를 보니 민주당 지지표가 더 많이 나왔더라.”

    “폐쇄적 민족주의가  김종훈 사퇴 불렀다”

    지난 2월 열린 ‘재외동포 정책포럼’에서 김영근 회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재외동포 투표는 낮은 투표율과 과도한 비용 지출 때문에 비효율적이란 주장도 나온다.

    “참정권을 가진 재외동포는 약 223만 명이다. 이 가운데 22만여 명이 지난 대선 때 유권자 등록을 했고, 15만 명 정도가 투표했으니 실제 투표율은 7% 라고 할 수 있다. 투표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국내에서는 투표당일에 지정된 가까운 투표소에 가서 투표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재외동포는 유권자 등록기간에 직접 총영사관 등 지정된 곳에 가서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하고, 투표 당일에 또 가야 한다. 투표소도 많지 않아 몇 시간씩 걸리는 먼 거리를 두 번이나 가야 한다. 시간도 돈도 많이 든다. 그래도 앞으로 투표율이 더 높아질 것이다.”

    ▼ 불편한 투표 방법을 개선할 방안이 있다면.

    “투표소를 대폭 늘리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우편투표나 인터넷투표도 고려할 만하다. 현재 새누리당은 우편투표를, 민주당은 인터넷투표를 주장한다. 서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을 주장하니까 합의가 안 된다. 미국은 우편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공인인증시스템을 활용하면 인터넷투표도 비밀투표가 가능하지 않겠나. 재외동포의 편의를 돕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유권자 등록 방법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한번 등록하면 2, 3년 동안 유효하게 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나. 새누리당이 영주권자에게 별도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는 방안을 구상 중인데, 적극 환영한다.”

    ▼ 재외동포 투표가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국내에선 1인당 투표비용으로 2만 원이 소요되는데 재외국민은 1인당 투표비용이 60만 원이나 된다는 주장인데, 계산 방법이 잘못됐다. 국내 투표에서는 선거에 들어가는 총비용을 총유권자 수로 나눠 계산하면서, 재외동포는 총비용을 총유권자 수가 아닌 실제 투표자 수로 나눠 계산했다. 총 관리비용 293억 원을 참정권을 가질 수 있는 재외동포 숫자인 223만 명으로 나누면 국내 비용과 큰 차이가 없다.”

    동포재단 활성화 기대

    ▼ 새 정부에 제안하고 싶은 재외동포 정책이 있나.

    “보여주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피부에와닿는 정책을 펴주길 바란다. 가령 국무총리실 산하 재외동포정책위원회는 재외동포 정책의 큰 틀을 만드는 곳인데 회의가 1년에 한 번 정도 열린다. 유명무실한 재외동포정책위원회를 사무국을 둔 상설기구로 강화해야 한다. 또한 재외동포재단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1년 예산 450억 원, 직원 50여 명에 불과하다. 720만 재외동포를 관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최소한 직원 100명 이상, 예산 1000억 원 이상으로 늘려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 재외동포를 지원하는 기관으론 어떤 곳들이 있나.

    “재외동포재단 외에 교과부, 문광부, 여성부, 무역협회 등에 흩어져 있다. 예산도 쪼개져 제각각 사용하다보니 중복지원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무역협회의 옥타(OKTA)와 재외동포재단의 한상(韓商)은 행사 이름만 다를 뿐 참가자가 똑같은 재외동포 경제인들이다. 이런 비효율성을 줄이기 위해 청와대 안에 재외동포 정책을 담당하는 비서관을 둬야 한다. 담당 비서관이 컨트롤타워가 돼 각 부처 간 업무를 조정해야 한다.”

    ▼ 재외동포처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는데.

    “그래야 재외동포의 위상이 올라가고 인물 데이터베이스라도 만들 수 있다. 현재 재외동포가 720만 명이라고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관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단기체류자나 유학생은 주민등록번호가 있지만 재외동포 영주권자는 국적만 한국으로 돼 있지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이들에게 별도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재외동포 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재외동포처를 만드는 것에 대해 외교부에서는 국제관례에 어긋나고 거주국과의 마찰이 있을 수 있다며 우려하는데, 마찰이 생길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조선족 때문이다. 거시적 시각에서 재외동포 정책을 바라봐야 한다.”

    ▼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사업도 필요할 것 같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앞두고 ‘워싱턴포스트’가 한국계 미국인 고등학생에게 어느 팀을 응원할 거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코리아’라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한인 2세지만 부모가 한국말을 가르치고 한국 문화를 들려주니까 자신이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3세, 4세로 내려가도 우리말과 문화가 이어질지 모르겠다. 말과 문화를 잃으면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한국어 교육, 문화 교육에 적극 나서야 한다. 지금 전 세계 재외동포가 2세에서 3세로 넘어가는 시기다. 지금 하지 않으면 그들은 거주국 국민이 되고, 우리가 재외동포 인재를 활용할 기회는 점점 사라진다.”

    65세 영주권자 역차별

    ▼ 이중국적 문제는 어떻게 보나.

    “현재 복수국적을 허용하는 경우는 3가지다. 먼저, 한인 영주권자가 2세를 낳으면 그 아이에겐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22세가 넘었을 때 한국에서 일하고 싶으면 미국 국적을 쓰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된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인재(과학, 예술, 스포츠 등)의 경우 복수국적을 인정한다. 마지막으로 65세 이상 시민권자도 복수국적을 인정한다. 한국에서 살려면 외국 국적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된다.

    재외동포 사회에서는 복수국적을 전면 허용하거나, 최소한 연령을 55세로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지난 대선때 55세로 내리겠다고 공약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국민정서상 아직 복수국적에 대해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65세 이상 시민권자만 복수국적을 인정하면서 영주권자들이 역차별을 받는 문제가 발생한다. 65세 시민권자는 주민등록번호가 나오는데, 65세 이상 영주권자는 여전히 한국 국적이면서도 거소증을 써야 하는 모순이 생겼다. 정부가 이런 세부적인 문제에 신경써 주기 바란다.”

    김 회장은 “재외동포가 인적자원’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재외동포에 대한 정책은 다문화정책이나 해외원조정책보다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현실”이라며 “김종훈 후보자 사퇴를 계기로 재외동포 정책을 새롭게 세워 해외 인재들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마오쩌둥 주석이 스무 살에 미국에서 수학,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첸이라는 천재 중국계 미국인을 1975년에 중국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미국에서 거부했다. 우주학 분야의 촉망받는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6·25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장교 15명과 맞교환하면서까지 그를 데려왔다. 첸은 중국 과학연구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지금 중국이 우주과학에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았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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