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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밀사정치’ 막전막후

17대 국회 ‘밀사정치’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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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몰려왔다. 본회의장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원희룡 의원과 홍준표 의원이 본회의장 바깥에서 밀담을 나누는 광경이 목격됐다. 이어 홍 의원과 원 의원의 동선이 복잡해졌다. 열린우리당 김부겸, 김영춘 의원과 잇달아 만나는 장면이 포착됐다. 원희룡 의원에게서 당시 홍 의원과 나눈 얘기를 들어봤다.

“아무래도 박 대표가 과거사법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것 같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과거사법만 여당이 양보해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우리가 나서서 역할을 좀 하자’고 했다.”

이후 24시간 동안 여야간 막후교섭은 숨가쁘게 벌어졌다. 여야 의원들의 입을 통해 당시 상황을 모자이크해보자. 김무성 의원의 전언이다.

“전기 나가자 촛불로 대신한 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더라. 내가 여당 중진 K의원을 붙잡고 협박하다시피했다. ‘예산 안 되면 어떻게 할래’. ‘파병 연장 안 되면 국제적 망신 아니냐’고 했다. ‘이해찬 총리를 압박하라’고도 했다. 내가 알기론 몇몇 여당 의원이 실제로 총리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 날 오후 총리가 의장을 찾아와 협상을 종용한 것으로 안다.”



홍준표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여당 중진 K, Y의원과 연이어 접촉했다. 그쪽에다 ‘과거사법만 빼주면 된다’고 했다. 그쪽 분위기도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어서 얘기가 어렵지 않았다. 형식은 김원기 의장이 중재안을 내놓는 방식으로 갖췄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재오 의원 등과 의총장에서 분위기를 잡는 것으로 사전 조율했다.”

연말 여야 4대 법안 쟁투국면의 이면엔 이른바 ‘막후접촉’의 위력이 있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12월 30일, 31일 이틀간의 상황을 전기가 끊기는 정전 상태에 비유했다.

“이전까지 4대 법안 해법을 내놓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부영-김덕룡 라인이 30일 밤을 계기로 끊어지면서 여야 간은 암흑 천지가 됐다. 의원들은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인맥을 동원해 접촉면을 넓혔다. 전기가 나가자 촛불로 대신한 것이다.”

정치권에서 흔히 말하는 밀사정치는 보스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밀사가 상대측과 은밀한 협상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7대 국회에선 성격이 달라졌다. 대표나 원내대표의 하명(下命)이 아니라, 중진의원급이 밀사역을 자임하며 물밑접촉을 벌여 미봉안이나마 타협안을 끌어내 파국을 막아낸 것이다. 밀사정치의 양상도 ‘분권화’하는 양상이다.

사실 전통적 의미의 물밑접촉, 이면합의, 밀사 등의 용어는 신문지상에서 사라졌다. 달라진 정치환경을 첫째 이유로 꼽는 데 이견이 없다. 사회적 분위기도 물밑협상을 과거 제왕적 정치 시스템의 파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성격상 물밑거래를 싫어한다. 한 측근은 “박 대표는 당 운영도 공식라인을 선호한다. 대여 접촉에서 비공식 인사를 동원해 접촉하고 조율하는 것을 좋아할 리 있겠냐”고 말했다.

여당도 사정은 마찬가지. 참여정부의 당정분리 선언은 ‘이제 물밑협상은 없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2004년 10월 이해찬 총리의 한나라당 폄훼 발언으로 비롯된 보름 가까운 국회 공전사태나 연말 4대 법안 대치상황은 공식조직간 접촉으론 풀리지 않았다. ‘4인 회담’이라는 여야 공식조직간 대면 테이블이 특별히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풀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식접촉이 막히면 이를 뚫어주던 막후 이면접촉의 필요성이 여전하다는 의미다.

이부영(BY)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야당의 ‘넘버2’ 김덕룡(DR) 원내대표간의 막후접촉 창구는 결국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정치판이라면 이례적인 광경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밀사를 달가워하지 않는 환경이 낳은 ‘공개된 밀사’였다. BY-DR 라인은 연말 4대 입법 쟁투 국면뿐 아니라 이해찬 총리로 인해 빚어진 국회 파행 사태에서 격한 파열음을 내며 부딪힌 여야를 조율하는 윤활유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했다. 그러나 BY-DR 라인은 막판 결정적 ‘오버’로 무덤을 팠다는 게 정설이다.

이부영은 낙마, DR은 아프리카로

4인 대표회담이 성과 없이 종료된 12월27일 오전, 이부영 당시 의장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표와 1시간30여분간 단독 회동을 가졌다. 회동을 마치고 나온 이 의장은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구먼.” 이 의장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원칙론을 고수하는 박 대표 설득에 나섰지만 결국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이미 협상을 포기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음날인 28일, 이 의장은 김덕룡 원내대표와 통화한다. 이 의장이 입을 열었다.

“협상이 되려면 아무래도 박근혜 대표를 빼고 가야 할 것 같다.”

“….”

“대신 김원기 의장에게 도움을 청해보자.”

두 사람은 서울대 문리대 동기라 말은 잘 통하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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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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