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1월 23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가운데)등 임시정부 요인들.
과거의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깊은 지하 갱도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처럼 ‘역사의 광부’가 돼야 한다. 우리 민족은 필설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난을 강인한 불사조 정신으로 극복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에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다. 어두운 역사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참회와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광명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
해방이냐, 광복이냐
2005년은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60년 전인 1945년 8월15일이 한국 현대사에 주는 의미는 간단치 않다. 광복이 되자 해외에 머물던 정치지도자들이 하나 둘 귀국했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해방정국은 크게 출렁거렸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8·15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세계사에서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현대의 기점은 1945년 8월15일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는 세계의 식민통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민족의 얼과 말, 그리고 역사를 송두리째 없애려고 했고, 심지어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복속하게 만들려 했다.
식민통치의 이론적 근거는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과 같은 근원을 가진 혈연적 연대관계라는,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민족말살정책으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일제는 무자비하고 악랄한 통치를 감행해 식민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과 인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제 36년사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역사이고 불행한 역사의 대명사다. 그렇기 때문에 8·15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민족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8·15가 지닌 역사적·국제정치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먼저 8·15를 해방으로 보느냐, 아니면 광복으로 보느냐는 엄격히 말하면 큰 차이가 있다. 해방과 광복은 일제 식민통치의 사슬이 끊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해방은 타율적 개념이고 광복은 자율적 개념이다. 해방으로 규정할 경우, 우리 민족의 독립이 연합국의 전후 처리과정의 일환으로 이뤄진 현실은 반영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오직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반면 광복으로 규정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살지만, 1945년 8월15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8·15는 해방과 광복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또한 8·15는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8·15는 해방·독립·광복이라는 긍정적 의미 외에 분단·분립·분열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8·15는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가져온 비극적인 기념일로 재평가해야 한다. 8·15가 지닌 긍정적 의미는 계승·발전하고, 부정적 의미는 다시는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은 이처럼 8·15의 성격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8·15가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자체 역량으로 성취한 ‘완전한 광복’이었다면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은 매우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8·15는 1945년 시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에게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축복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국토분단이라는 비극을 맛보게 했다. 8·15는 결과만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적 역량의 성과라기보다는 연합국 전승(戰勝)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해방을 제공한 연합국의 전략적·군사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요리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더욱 냉철하게 말하면 8·15는 강대국의 약소국가 지배라는 기존 질서의 재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자유주의는 근본 성격이 다르지만,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갈구하던 한민족 처지에서는 외세에 의한 지배체제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성립된 미 군정체제는 민족지도자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외연적 요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