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범려는 도(陶)라는 고을에 이르자,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이고 유통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곳에 멈췄다. 이번엔 상업과 농업을 결합해 역시 수년 내에 천하의 거부로 알려지게 됐다. 후세에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이 부호의 대명사가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범려의 인생 행각이 현대에 남기는 경험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였으며 보기 드문 경영자였다. 생각건대 범려는 고대인이기 때문에 비록 현대 교육학의 이념인 ‘전면적 발달’은 아니라 해도 일반 교양에 관심을 갖고 다방면으로 독서하고 사색했던 지성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이른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세 철학을 터득하고 실천한 모범을 보였다. 이 점은 좀더 부연할 필요가 있겠다.
주역의 교훈과 중국 지성인
노자(老子)는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의 처신을 이렇게 가르쳤다. “공을 이루면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것이 하늘의 도리다”고(功遂身退, 天之道. 老子, 9장). 역사적 과제의 수행, 시대적 요청의 해결, 정권의 당면 수요 충족 등이 일단락되면 더는 욕심내지 말고 뒤늦지 않게 물러서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계를 지닌 과도적 존재인 인간답게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나 역할기대(role expectation)를 인지할 수 있다면, 그 정도에서 물러나는 편이 슬기롭게 살아남는 길이라는 일깨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한계를 헤아리고, 결코 미련을 두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처세의 담백함은 난세에서 살아남는 요체다. 현대 중국의 사학자 한조기(韓兆琦)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범려가 바로 그러한 노자 사상으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권세나 지위에 연연치 않는 은퇴의 용기를 사군자다운 미덕이라고 찬양해왔다. 문제는 은퇴의 시기 선택이다. 범려의 경우 ‘장기 집권은 결과가 좋지 않다(久處尊名不祥)’는 행동강령에 충실했다고 한다(韓兆琦, 史記題評, 越世家, 北京, 2000).
이에 대한 ‘반면교사’의 사례를 문종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비밀서신을 보냈다. “쏘아댈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이라도 사장되며, 사냥할 토끼가 없어지면 사냥개마저 삶아 먹지요. 게다가 월왕의 관상을 보아하니 목이 길고 새 주둥이 꼴이오. 환란을 같이할 수는 있으나, 안락을 함께할 사람됨은 아니오. 귀하도 시기를 놓치지 말고 떠나심이 어떠하겠소?”
그래도 문종은 망설이며 설마 했다. 그러나 나중엔 그도 신병을 가장하면서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신배가 문종의 모반 가능성을 참언했다. 결국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구천왕은 문종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이런 문종과 대조적으로 부각되는 범려는 오늘날도 중국인들에게 ‘이상적 인간상’으로 경애받고 있다. 슬기롭고 도량이 활짝 트인 큰 인물이며, 천하를 활보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큰돈을 벌고 벼슬을 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뿌리는가 하면, 관직에서 제때 물러날 줄도 알아 난세를 훌륭하게 살아낸 처세술의 능수라는 것이다.
무릇 은퇴는 그 시기가 중요하다. 앞서 범려가 노자의 은퇴사상으로 무장했다는 사학자의 견해를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가 은퇴의 성패에 있어 으뜸으로 중시한 시기 측정에 주역(周易)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첨언하고 싶다. 주역은 춘추시대에 유난히 부각된 제1의 교양서적이었다.
주역은 그 첫머리에서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을 바라볼 뿐이니 위험하다(亢龍有悔)’고 가르친다. 마루턱에 이르면 더 욕심내지 말고 내려서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범려가 언제나 명심하고 실천한 그대로다.
또한 주역 33괘는 은퇴 문제만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일깨워주는 바가 많다. 우선 시기의 선택이 중요하니, 최후의 갈림길에 이르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다음으로 은퇴 후에는 자기의 종전 주장이나 권위 등을 전혀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신임 집권자의 불만을 사게 되는 까닭이다). 은퇴한 이상 자신의 안락이나 추구하지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권위 회복의 유혹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거듭 명심할 바는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범려의 실천은 이 같은 조목들에 어긋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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