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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한반도 핵 위협 분석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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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도 핵무기 관련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북핵 6자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북측 수석대표인 이용호 외무성 부상이 2011년 9월 21일 오전 중국 베이징 장안구락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6·25전쟁의 발발 배경과 원인에 핵무기 문제가 있다. 핵의 힘을 믿었던 트루먼의 방심과 스탈린의 오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여 경제와 복지로 전환하고자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저렴하게 군사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했던 것도 핵무기의 힘을 믿었던 탓이 컸다.

비밀 해제된 중앙정보국(CIA)의 문서들을 보면 미국은 6·25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다.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 될 북한의 남침을 지시할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극동사령부는 “미국의 군사적 힘에 의해 전멸”될 각오를 무릅쓸 만큼 북한도, 중국도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전면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는 원자폭탄”에 있다고 봤는데,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에는 소련이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침을 지시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핵 억제에 대한 자신감은 스탈린의 또 다른 믿음과 대치된다. 1949년 내내 김일성의 남침 승인 및 지원 요청을 뿌리쳤던 스탈린은 1950년 5월 14일 마오쩌둥에게 서신을 보내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해, 통일을 향한 북한의 (남침) 제안에 우리는 동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가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이란 소련의 최초 핵실험(49년 8월 29일), 중국의 공산화 및 중화인민공화국 선포(49년 10월 1일),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의 선포(50년 1월 12일), 중소 동맹조약 체결(50년 2월) 등이었다.

특히 핵실험 성공은 스탈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를 분석한 이브구에니 바자노프(Evgueni Bajanov)는 스탈린이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핵실험 성공에 있었다며, “그는 공산권의 힘에 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소련의 외교 전문은 “승리의 분위기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고 우리 입장이 평양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는 사실로 인해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기술했다.



스탈린의 중국 앞세우기 작전

결국 6·25전쟁은 트루먼과 스탈린 모두 ‘핵의 위력’에 대한 맹신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소련의 ‘꼭두각시’ 정도로 간주하면서 미국보다 핵전력이 크게 뒤졌던 소련이 북한과 중국에 남한 공격을 명령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상당 기간 핵 독점과 우위를 자신했던 트루먼은 재래식 군사력을 줄이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건 방심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 선포는 미국의 개입 의지에 심각한 의문을 야기했고, 핵의 위력을 믿고 단행한 재래식 군사력의 대대적인 감축은 미군이 6·25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한 물리적 요인이었다.

반면 핵실험 성공으로 대담해진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역시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불사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개입 가능성도 낮고 개입하더라도 중국을 앞세우면 소련이 직접 피 흘릴 일은 없다고 봤다.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6·25전쟁에 신속히 개입하자 스탈린은 미국의 힘을 빠지게 해 냉전체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역시 오판이었다. 6·25전쟁을 소련이 일으키는 제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한 미국은 엄청난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대소(對蘇) 봉쇄를 위한 동맹체제 강화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요동치는 세계 지정학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과신이 6·25전쟁 발발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당시 미국의 압도적인 핵 우위는 신속한 개입을 가능케 한 물리적인 힘이었다. 6·25전쟁 개입을 선택한 미국의 가장 큰 우려는 소련의 유럽 침공 가능성이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트루먼은 6·25전쟁 개입 직후인 7월 11일 영국에 원자탄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 B-29를 배치했다. 이는 동북아에 쏠린 미국 군사력의 공백을 틈타 소련의 유럽 공격을 억지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 전문가인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와 버드(Kai Bi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원자폭탄은 미국의 6·25전쟁 참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유럽 방어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전 초기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패퇴를 거듭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원폭 사용을 둘러싼 논란이 격화됐다. 미 육군은 “지금 단계에서의 원폭 사용은 아시아인의 생명을 멸시한다는 미국 정책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고, 미 공군의 정보부대 역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아시아의 반미감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상이 있었다.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에는 터널과 다리가 많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차단공격을 하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할 둘도 없는 곳이다.”

맥아더의 청원을 접한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7월 중순 일본 도쿄를 방문해 맥아더와 핵무기 사용에 관해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원폭 투하가 필요하다며, B-29 전폭기의 운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주면 그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맥아더는 북한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는 한편 “적의 주요 축선을 방사능 물질로 만들어 한반도를 만주와 분리하겠다”는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최대 10일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훗날 북중 국경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기 전에, 북한에 “30~50개의 원자폭탄 투하를 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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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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