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힌 ‘진짜 정보맨’

  •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0-10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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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부훈(部訓)이 지향하는 바 그대로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혔지만, '음'지에서 살다가 '음지'에 묻한 정보맨들이 훨신 많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죽은 자의 삶은 더러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미화되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지난 5월3일 타계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 ‘운명(殞命) 스토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국정원의 신화로 남을 모양이다. 그의 죽음은 ‘요절’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삶을 불태우고 갔다고 할까. 그래서 아쉬움이 더 크다.

    엄차장이 지난 2월7일 처음 간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5월3일 운명할 때까지의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삼성의료원 등에서 지병인 허리디스크를 고치려고 물리치료를 받아왔다. 별다른 차도가 없자 친구 소개로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침술 한방치료를 받았지만 허리통증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를 이상히 여긴 병원측이 2월7일 1차 정밀진단을 해본 결과 간암에서 전이된 종양을 척추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병원측은 환자 본인과 보호자(부인)가 동석한 가운데 그런 사실을 알리고 정밀진단을 권유했다.

    간암 판정하자 “내가 오래 살았구먼”

    엄차장이 처음 간암 판정을 통보받았을 때 보인 첫 반응은 뜻밖에도 “내가 오래 살았구먼. 집사람 덕분에 20년을 덤으로 살았어”라는 혼잣말이었다. 그 말은 아내에 대한 감사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 간염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도 이제까지 건강을 유지해온 것은 서울대 간호학과 출신인 아내의 각별한 내조 덕분이라는 뜻이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부인은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간암 판정을 통보 받고서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곧 “그래요. 당신은 오래 사셨어요”라고 ‘맞장구’를 치며 남편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남편에게는 물론 주변에도 슬픈 표정이나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다.

    한방병원에서는 삼성의료원에서 2차 정밀진단을 받아 거기서도 간암 확정판정을 받으면 그때 가서 치료 방법을 결정하자고 권유했지만 엄차장은 ‘현안 업무’를 처리하느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가 2월22일 정밀검사를 한 끝에 암세포가 이미 폐와 척추까지 퍼져 있다는 확정선고를 받았다. 삼성병원 주치의는 현 단계에는 암세포가 너무 퍼져 있어 수술이 불가능하며 기타 항암 요법도 어렵다고 했다. 대신 홀뮴 치료 및 진통제 투여를 제안하면서 즉시 직무를 중단하고 안정을 취하라고 권유했다.

    엄차장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확정판정을 받고 사직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임할 경우 투병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건강을 이유로 남북관계의 ‘중대한 현안’을 앞두고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우려했다. 또 갑작스레 사임할 경우 후임자를 임명해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기까지의 업무 공백과 조직의 동요가 걱정되었다. 결국 그는 진통제를 복용하며 2주에 한 번씩 암 전이 속도 등을 관찰하는 외래진료를 계속하면서 근무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병세 악화에 따른 통증과 체력의 저하로 정상적인 집무수행이 어려워지자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하루 앞둔 4월7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직서를 냈다.

    그때까지 엄차장은 자신의 신병에 대해 완벽한 ‘보안’을 유지했다. 그는 아내와 보좌관말고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도 단단히 다짐을 받아 사표를 낼 때까지 끝내 보안을 유지했다. 심지어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에게까지도.

    주변에서는 그의 초인적인 정신력은 국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공직자로서의 투철한 자세 그리고 철저한 직업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후배들이 엄차장에게 갖는 인식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66년 중앙정보부 공채(公採) 출신으로 안기부·국정원까지 34년간 재직하는 동안 말단 직원에서 출발해 역대 최초로 차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정통 정보맨이었다. 그것은 그의 명예이자 후배들의 꿈이었다. 그런 그가 국정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4월7일 사의를 표명하고 집무실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A4용지 3쪽 분량의 이임사를 남겼다. “돌이켜 보면 국정원 34년 재직중 대북 전략국장과 3차장(대북 담당), 2차장(국내 담당) 등 요직을 두루 거치는 영광을 안아 국가와 국정원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중 사표를 내게 된 아쉬움과 함께 후배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당부했다. 공직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조직의 화합이 필요하며, 부단한 자기계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이임사는 직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고 투병하는 동안에도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엄차장의 불굴의 정신과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본받자는 취지의 원내(院內) 전자메일이 돌았다.

    정상회담 때문에 딸 결혼식 불참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조직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강했으며 자신보다는 늘 국가와 조직을 먼저 생각하고 오로지 업무에만 전념했던 상사로 기억되고 있다. 공직자로서 그의 자세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94년 7월2일 안기부 대북 전략국장이던 고인(故人)은 당시 판문점에서 열린 정상회담 실무대표 접촉에 ‘총리보좌관’ 모자를 쓰고 참가하느라 외동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해 화제가 됐다. 당시 그는 “둘 다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노릇보다 공직자의 사명이 먼저”라며 결혼식장으로 가던 발길을 회담장으로 돌렸다. 그때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건네주지도 못하고 본 그의 사위도 국정원 직원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곁’을 안 주기로 유명하다. 국내 담당 차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그가 언론사의 부장급 이상 간부들과 접촉하는 일은 많았지만 공석에서말고는 그와 개별적으로 접촉한 일선 취재기자가 거의 없을 정도다.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지난 5월3일 엄익준 차장이 운명하자 국정원은 ‘국가정보원 2차장 신원사항’이라는 보도자료를 만들어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만 배포했다. 국정원이 공개한 그의 신원사항을 원문(原文)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성명 ː 엄익준 ▲생년월일 ː 1943년 9월1일 ▲본적 ː 전라북도 전주 ▲학·경력 ː 60년 2월 전주고 졸업, 64년 2월 고려대 정외과 졸업, 95년 국가안전기획부 제3특별보좌관, 97∼98년 2월 국가안전기획부 제3차장, 99년 6월 국가정보원 2차장 ▲가족관계 ː 부인 임미대자(59), 1남1녀.

    그의 신원사항에 64년 대학 졸업 후 95년 안기부 제3특보까지 30여년간의 경력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세세한 경력을 기록하다 보면 그가 역임했던 직책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아예 생략해 버린 것이다. 국정원의 내규가 그렇다. 정무직(차관급) 이상이 아니면 이름이나 직책 같은 기본적인 신원사항조차 공개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규정을 기자들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빈칸을 채우는 것은 기자의 몫이고 그 빈칸을 채워가다 보면 인간 혹은 ‘국정원맨’인 엄익준을 알 수 있다.

    1943년 전북 남원 태생이다. 중등학교 교사인 부친이 그를 일곱 살에 학교에 넣었는데 공부를 잘해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남들보다 2년을 빨리 졸업했다. 전북 최고의 명문인 전주북중·전주고를 졸업했다. 전주고 동기(37회)인 김동선 차관에 따르면, 공부도 잘했지만 핸드볼 등 스포츠도 만능이었다.

    남보다 한 살 빨리 입학한데다 월반을 해 ‘친구’도 남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교우관계가 동갑내기에서부터 위로 두 살 터울까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고·대학교 동기들과 ROTC(학군) 동기 등 친구 대부분은 그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서울대 간호학과 출신인 그의 부인도 대학 입학연도는 같지만 두 살 연상이다.

    동기동창들이 평하는 학창 시절의 엄익준은 한마디로 ‘의리의 돌쇠’다. 그때 동기생 중에 특히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만든 모임이 ‘벽우회’인데 사회적으로 출세한 친구들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다. 그는 운명하기 이틀 전에 벽우회 친구들을 불러모아 마지막 유언을 남겼고 바로 그 친구들이 그를 임종했다.

    4·19가 나던 60년에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해서는 그때 막 창설된 ROTC(학군)에 지원했다. 64년 졸업과 동시에 학군(2기) 장교로 임관해 66년 전역하면서 중앙정보부에 입부(入部)했다. 그 후 30여년간 보안·대공·기획·대북 업무 등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상황판단이 빠르고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기획 및 대북 전략 업무에 정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각종 내부 교육과정을 거의 모두 1등으로 수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거친 주요 보직(직책)은 중앙정보부 전주지부 정보과장, 안기부 기조실 과장, 1차장보좌관, 충북지부장, 대북 전략국장,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 3차장, 국정원 2차장 등이다.

    그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대북 지원업무를 맡고부터다. 그래서 흔히 ‘대북 전략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그때부터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받는 측면이 크다. 그는 원래 국내 보안정보 및 기획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5공화국 시절 김용갑 기조실장(현 한나라당 의원)은 특히 그의 기획 능력을 높이 사 그를 기조실에 붙잡아 놓고 일을 맡겼다.

    어쨌든 그는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낸 남북 고위급회담 지원(90∼92년)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92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그러다 나중에 문제가 된 이른바 ‘훈령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8차 고위급회담 때에 당시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임동원 통일원차관-이동복 국무총리(안기부장) 특보의 갈등(강온 대립)이 야기한 측면이 있다. 당시 그는 평양에 체류중인 고위급회담 우리측 대표단에 대해 본국의 훈령(전문) 업무를 지원하는 서울 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임동원 전 외교안보수석이 국정원장으로 임명되자 엄익준 차장과의 과거 악연과 앙금 때문에 갈등이 불거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 중 하나는 대북 관계업무에서 국정원 사람들은 매파(강경파)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국정원의 경우 부서에 따라 대북 접근방식에 차이(강온)가 있고, 또 국정원의 대북 전략도 국방부·통일부·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처에 비해 사안에 따라 강경할 수도 온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94년 6월 북한 핵 위기 때만 해도 그랬다.

    94년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으로 당시 한반도에는 마치 전쟁이라도 터질 듯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걸프전 ‘종군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대거 몰려오는 와중에 여론은 대북 강경론이 지배했다. 그런데 94년 6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회의에서 김덕 안기부장은 ‘핵문제 관련 대북제재 추진 동향’을 보고하며 미묘한 발언을 했다. 김부장은 “현재 북한이 김정일의 총괄지휘 아래 핵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전제하고 “비록 조잡한 형태지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회의가 끝난 뒤 신상우 정보위원장은 이런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상황이 민감했던지라 “핵무기가 개발됐을 것”이란 안기부장의 말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정보위 회의에 배석했던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황급히 기자실을 찾아가 “핵무기를 이미 개발한 것이 아니라 ‘개발 직전단계’를 잘못 말한 것”이라며 앞서 안기부장의 발언을 정정했다. 그의 무마로 언론 보도는 가까스로 ‘개발 직전단계’로 나갔으나 국내 강경 여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개발 완료단계’로 나갔더라면 강경(대북 제재) 여론과 파문은 더 거세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북제재는 북한의 거센 반발과 미국의 북한 핵 개발기지에 대한 선제공격 등 전쟁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정상회담 실무접촉의 ‘선수 겸 코치’

    다행히 카터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중재로 한반도의 전쟁 분위기는 대화 국면으로 일대 전환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반도를 덮고 있던 불안감은 한 순간에 걷혔다. 대북 제재를 주장하던 국내외의 강경론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북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나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행을 반대하는 일부 극우언론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세는 북한과의 대화였다. 정부의 관련 부처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바빠졌다. 주무기관은 청와대와 통일원 그리고 안기부였다.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94년 7월1∼2일 판문점 통일각·평화의 집에서 진행한 남북 정상회담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대표 접촉(실무회담)에 ‘차출’되었다. 그러는 바람에 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정상회담 자체가 카터의 중재로 우리측의 사전준비 없이 느닷없이 결정된 데다 일정까지 촉박해 여러 달 전에 잡아 놓은 결혼식과 겹치게 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정상회담 의제 등을 포괄적으로 결정하는 ‘얼굴마담’ 회담이라면 실무회담은 정상회담 대표단 구성과 규모, 회담형식, 체류일정, 선발대 파견, 왕래절차, 편의보장, 신변안전보장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하는 ‘전문가회담’이다. 따라서 회담도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실무회담 북한측 대표로는 백남준 정무원 책임참사와 최승철·최성익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이 나섰고, 우리측은 윤여준·구본태·엄익준 3인이 대표로 나섰다. 우리측은 안기부에 대한 북한측의 거부감을 피하려고 당시 윤여준 안기부장특보는 ‘국무총리 특별보좌관’,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국무총리 보좌관’이라는 ‘모자’를 쓰고 나갔다. 통일원에서는 구본태 통일정책실장이 나왔다.

    당시 안기부는 3명의 안기부장특별보좌관(정무직)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안기부장 1특보는 대북, 2특보는 법률, 3특보는 언론 및 공보 보좌역이었다. 그런데 청와대가 대북 업무를 보좌하는 제1특보 대신 안기부장의 언론 및 공보 창구역인 제3특보(윤여준)를 ‘대표선수’로 선발하는 바람에 대북 전문가인 엄익준 전략국장을 ‘선수’로 기용해 협상전략을 ‘코치’하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실무회담의 ‘선수 겸 코치’였다.

    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의 극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국정원 안에서 그의 거취는 국정원맨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한 번도 하기 어려운, 그래서 모든 직업공무원들의 꽃인 차관(차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것은 국정원 역사상 그가 처음이다. 국정원 출신으로 차장까지 오른 인물은 김근수·황창평·정형근·오정소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은 졸병(7급 공채)부터 출발하지 않은 정형근씨(현 한나라당 의원)는 내부 출신 차장으로 치지 않는다. 공채 출신 차장 1호는 김근수(金瑾洙·66) 현 상주시장이다. 김 시장은 61년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안기부 1·2국장을 거쳐 85년 1차장을 끝으로 옷을 벗었다.

    또 엄익준 차장은 유일하게 안기부(국정원)의 핵심부서인 1·2국장(현 대공정책실장)을 거치지 않고 차장으로 승진한 ‘행운아’다(앞서의 김근수·황창평·정형근·오정소씨는 모두 재임중 1·2국장을 거치거나 1국장 혹은 2국장을 거쳐 차장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호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국내정보를 수집(2국장) 판단(1국장)하는 ‘중책’은 호남 출신에게는 ‘금단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 호남 출신이 앉으면 핵심 정보가 야당으로 샐 수 있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두 번이나 차장에 오르는 행운을 맛보았다.

    첫번째 행운은 김기섭 전 운영차장의 ‘불운’ 덕분에 찾아왔다. 97년 3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김기섭 운영차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국정원 인사를 단행하면서 운영차장 자리를 없애고 3차장(대북 담당) 자리를 신설했다. 당시 김씨는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그에게 내부 정보를 제공하고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물러났다. 운영차장이라는 직제부터가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문민정부 초기 안기부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기조실장으로 들어간 김씨가 나중에 직급을 ‘차장’으로 올려 놓고 앉은 자리가 바로 운영차장이었다.

    안기부 직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우선 위인설관이 없어졌고 그 대신 대북 기능 강화라는 순기능을 가져왔다. 또 운영차장을 없애는 대신에 3차장제를 신설함으로써 안기부 차관급 6개직이 그대로 유지되어 내부 인사적체 우려도 피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인사(人事)에서는 차관급 보직에서 외부 인사(人士)를 줄이고 내부 인사를 승진 발령함으로써 외부 인사 기용에 불만이던 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북풍 수사가 몰고온 뜻밖의 불운

    지금은 특보관제가 없어졌지만 당시는 그때그때 임무를 바꿔가면서 안기부장을 보좌하는 참모조직인 1·2·3특보관을 두고 있었다. 특보는 계선 조직인 실무조직을 거느리는 1·2차장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차관급 대우를 받았다. 특보제는 안기부에서 실·국장(1급)을 거친 간부들의 경험과 전문성을 사장(은퇴)시키지 않고 안기부장을 보좌하는 데 쓰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되었다. 그런데 취지와는 달리 당시 6명의 차관급 중에 1명만 내부 출신이었다. 즉 당시 박일룡 1(국내)·이병기 2(해외)·김기섭 운영차장과 조만후 1(법률)·남정판 2(공보)·엄익준 3(대북)특보 중에서 내부 출신은 엄익준 3특보뿐이었다.

    그런데 97년 3월 차관급 인사에서 권영해 부장은 엄익준 3특보를 신설한 대북 담당 3차장으로, 이청신 3실장(대공수사실장)을 1특보로, 그리고 남영식 8실장(대북공작실장)을 3특보에 각각 승진 기용했다. 이로써 안기부 차관급 6명 가운데 3명(엄익준 차장, 이청신·남영식 특보)이 안기부에서 잔뼈가 굵은 공채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직원들에게는 엄차장이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계선에서 벗어나 있는 참모조직인 특보와는 달리 차장은 실무조직(실·국)을 관장하는 명실상부한 차관인데, 엄차장은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내부 출신이자 호남 출신이었다.

    유일한 내부 공채 출신이자 호남 출신 차장. 업무 능력을 떠나 이런 ‘희소성’ 때문에라도 엄차장은 정권 교체 후 새 안기부의 국내 담당 차장 1순위로 떠올랐다. 실제로 당시 김대중 당선자로부터 과도기(정권 인수기)의 안기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천용택 의원(정보위 간사)은 엄익준 차장과 교감을 갖고 그를 국민의 정부 안기부의 국내 담당 차장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운’이 찾아왔다. 구안기부 수뇌부가 대선 기간 북풍 공작에 개입한 혐의가 드러나고 이종찬 안기부장(초대 국정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특히 재미동포 윤홍준 기자회견(DJ 대북 연계 혐의 비방) 등에 안기부 조직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고, 안기부 수뇌부가 태스크 포스까지 구성해 조직적으로 특정후보 낙선활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내부 문건(오익제 편지사건 관련 기본 대응계획)까지 드러남으로써 50년 만의 정권교체에 걸맞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관련 문건 등에 따르면 권영해 부장, 박일룡 차장, 이청신 1·남영식 3특보, 임광수 101(기획판단)·임경묵 102(수집)·고성진 103(수사)실장, 공보관실의 부부서장급 단장과 처장들이 참여한 태스크 포스가 구성돼 ‘오익제 북풍’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는 국내 정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대북 담당 3차장이었고 더구나 호남 출신이어서 ‘태스크 포스’ 구성 멤버에서도 제외됐다. 하지만 ‘물갈이’ 명분에 밀려 98년 3월 간부 전원이 옷을 벗게 되었다. 따라서 정통 정보맨인 그의 퇴진은 호남 출신이라는 지역 배경 때문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불운처럼 그의 두 번째 행운도 의외였다. 99년 6월 천용택 국정원장 체제가 들어서자 천원장은 정권 인수기에 점찍어 둔 엄익준 전 안기부 3차장을 국정원 2차장(국내 담당)으로 불렀다. 그때 그는 고향인 전주 우석대 초빙교수로 이제 막 시작한 강의에 재미를 붙이려던 참이었다. 50년 만의 정권 교체와 조직적인 선거 개입 전과(前過) 탓에 조직 개편과 ‘인적 청산’을 감수하며 숨죽어 지내던 국정원맨들에게 그의 복귀는 활력을 주었다.

    국정원의 경우 원장과 차장 등 수뇌부가 바뀌면 즉시 신임 원·차장을 자택으로 모시러 간다. 가서는 업무 현황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과 자택에 대한 통신 점검 등 제반 보안 조처를 강구한다. 신임 엄익준 차장이 업무를 인수인계받은 전임 신건(辛建) 차장은 그의 전주고 1년 선배이다. 신구(新舊) 차장 교체기에 보좌관을 지낸 편○○ 과장(△△지부)의 말이다.

    “경기도 분당 자택으로 그분을 모시러 갔다.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엄차장의 입에서는 업무와 관련된 지시사항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국정원 업무에 정통한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업무 인수인계 및 현황 브리핑하러 갔다가 브리핑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준비된 차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달 모셨는데 정말 상황 판단이 빠른 분이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에 대한 대책이 이미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았다.”

    정부는 4월26일 엄차장의 사직원을 수리하고 후임에 김은성(金銀星) 대공정책실장을 승진 발령했다. 신임 김은성 차장은 용산고·서울대를 졸업했으며 안기부 대전지부장, 정보학교 교수, 국회 정보위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 조직 개편으로 만들어진 대정(對政)실장이라는 자리는 과거 1(분석)·2(수집)국과 서울지부까지 합쳐 놓은 거대 부서다. 김실장의 차장 승진은 엄차장에 이은 내부 발탁 인사라는 점에서 직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인사는 인사권자의 권한이지만 한 번의 불운과 두 번의 행운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진 엄차장의 거취는 직업공무원인 국정원 직원들에게 내부 인사의 차장 승진 전통과 기대를 안겨주었다. 하긴 이제 국정원도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되었다.

    신분 공개할 수 있는 직원은 4명뿐

    미 버지니아주에 있는 CIA(중앙정보국) 현관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을 볼 수 있다. 전세계 각처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비밀 정보·공작원들의 이름이다. 이들의 죽음은 오직 가족에게만 알려질 뿐이다. 순결한 공작? 그런 공작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칠레 아옌데 좌파 정부 전복, 이란 팔레비 왕조 옹립 같은 CIA의 ‘추악한 비밀 공작’을 수행하다 순직한 직원들이다. 그러나 ‘순결한 공작’이건 ‘추악한 공작’이건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들과 직원들의 가슴에 ‘영원한 익명’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의 이름은 CIA 현관에서만 공개될 뿐이다.

    비밀공작은 비밀이 지켜질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비밀공작원의 신분 공개는 상대방의 카운터공작과 외교 분쟁 그리고 전쟁을 낳을 뿐이다. 흔히 ‘간첩’ 하면 우리는 무시무시한 자결용 독약 앰풀이나 요인 암살용 소음기가 부착된 권총을 떠올린다. 수없이 목격한 ‘남파 간첩’이 낳은 학습효과다. ‘북파 간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엄차장의 개인적 불행은 이름 없이 죽어간 비밀 정보·공작원들에 비하면 ‘행복한 죽음’이다.

    그의 개인적 불행은 96년 10월1일 괴한에게 피살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최덕근(崔德根·당시 54세) 영사와 비교해도 ‘행복한 죽음’이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았다. 배재고·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최영사도 엄차장과 비슷한 시기에 ROTC 출신 공채로 들어가 죽 해외파트에서 일했다. 그는 순직으로 보국훈장(천수장)을 받고 이사관으로 추서되었다. 최영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빈소가 마련된 곳도 삼성의료원 영안실이었다. 또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공개된 비밀이지만 그는 외무부 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안기부 부이사관이었다. 최영사는 피살 당시 북한 공관원들의 마약 밀매 혐의와 평양의 위폐공장 첩보 등 북한 내부의 깊숙한 고급첩보를 다수 입수하고 있었다. 또 최영사는 북한측 고급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이(李)모씨를 정보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등 공작을 벌이려 했다. 그의 양복 안쪽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이와 같은 첩보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최영사 피살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가령 북한의 소행이라면 북한은 그에 상응하는 외교적 대가를 치르거나 얼마 뒤 어디선가 한 북한 외교관의 피살 소식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힘에 의한 보복은 이스라엘 모사드를 필두로 모든 첩보·공작기관의 불문율이자 생존방식이다.

    당시 안기부 내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첩보·공작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했으므로 안기부장(葬)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안기부장(葬)은 주재국에 최영사가 안기부 직원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불가한 일이었다. 더구나 북한의 범행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원(院)내에 들렀다 가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최영사의 장례식은 삼성의료원 영안실 내 영결식장에서 유족과 ‘외무부 직장 동료’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주검은 30년 동안 봉직한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간단히 노제 아닌 노제를 치르고 생가가 있는 경기도 평택시 석정마을에서 노제를 지낸 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국정원의 수천명 직원 중에서 이름과 신분을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은 공보관실 직원을 빼고는 고작 4명뿐이다. 원장과 두 차장 그리고 기조실장뿐이다. 나머지 수천명은 본인과 가족이 죽어도 부음(訃音)란에 ‘직업’을 공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느 망자(亡者)의 빈소에 국가정보원장이 보낸 조화(弔花)가 있다면 그 망자의 직계가족 중에 국정원 직원이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익명(匿名)의 숙명이다. 고(故) 엄익준 차장의 ‘직업’도 몇해 전까지는 다른 부하들처럼 ○○문화사 직원이거나 ○○연구소 연구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과 명예는 이름을 공개할 수 있는 지위(차장)에까지 오른 그의 직업적인 성공 덕분에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부훈이 지향하는 바 그대로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혔지만, ‘음지’에서 살다가 ‘음지’에 묻힌 정보맨들이 휠씬 많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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