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김정일은 서두르고 있다”

  • 정리·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4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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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당초 방북 언론사 사장 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기획했다. 언론인의 눈으로 본 북한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설문조사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방북 언론사 사장단이 두 차례에 걸쳐 “귀국한 뒤 자사 매체에 기고, 타인의 이름으로 집필, 인터뷰나 방송출연 등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방송협회 한중광 사무총장은 “2차로 방북하게 될 언론인들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자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는 이번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인식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전화 또는 팩스로 설문에 답한 사람은 모두 8명이다. 몇몇 인사는 언론사 사장단 합의사항을 이유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북한 사람들이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온 경우도 있었다. 방북 언론사 사장단의 답변 내용은 기존의 어떤 보도자료보다도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신동아’는 취재에 응해준 방북 언론사 사장단의 요청에 따라 익명을 전제로 해서 답변 내용을 싣는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설문에 대한 답변을 방북기 형태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독자들이 북한의 정확한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동아’ 설문지 내용

    1. 이번 방북을 통해 북한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셨습니까. 목격하신 점, 느끼신 점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2. 김정일위원장에 대한 느낌이랄까, 평가는 어떤 것입니까. 인간 김정일, 북한지도자로서의 김정일, 남북화해를 주창하는 김정일에 대한 사장님의 솔직한 평을 부탁드립니다.

    3. 이번 방북 경험 등으로 미루어 앞으로 남북관계는 어떻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전망해주시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북한방문 기간중 있었던 에피소드나 비화, 인상깊었던 장면을 소개해 주십시오.

    5. 남북문제와 관련해 현재 우리 사회내부에 적지 않은 갈등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앞으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6. 이밖에 남북화해시대에 언론이 수행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 등 추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북한이 우리 페이스에 말리겠다

    북한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고립돼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한테 잘못 보이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김정일은 인간미와 감성이 풍부해 보였다. 가식과 쇼맨십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 같았다. 자라나면서 아버지에게 단단히 수업을 받아서인지 상식도 풍부하고 남쪽 사정을 아주 잘 알았다. 우리 테이블 사람들에게 건배를 제의하면서 “YTN 아무개 기자는 참 똑똑하다. 아주 잘하더라”는 말까지 했다. 기자 이름까지 기억하는 걸 보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이 포도주를 들고 테이블을 도는데 인간적인 면모가 보였다. 사장들에게 “오늘 잘 대접했으니, 내일 신문 한번 봅시다”라는 말도 했다.

    당초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는 것은 예정에 없었다. 그런데 ‘한겨레’ 최학래 사장이 북측 선전선동부장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날마다 매달렸다. 나중에는 최사장이 “정말 못 만나게 할 거냐. 일정을 조정해달라”며 말싸움까지 했다. 그러니까 선전선동부장이 “여러분들이 김위원장의 일정에 맞춰야지, 어떻게 김위원장이 여러분들 일정에 맞추느냐”고 말했다. 헤드테이블에서 최학래 사장과 KBS 박권상 사장이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얘기하는 걸 보고 북측 사람들이 상당히 놀란 것 같다.

    김위원장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간 북한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쪽 페이스에 말릴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 북한은 너무 못산다는 생각이다. 대동강 부근 150m 높이의 주체탑에서는 평양시내가 다 보인다. 평양은 아주 잘 꾸며진 계획도시였다. 하지만 외곽으로 가니까 페인트를 칠한 빌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가 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평양시내 주변에는 평야가 많았다. 옥수수를 많이 심었는데 황토가 대부분이어서 잘 안된다고 들었다. 옥수수밭 주변에는 원두막이 있었다. 그곳은 옥수수를 누가 훔쳐갈까봐 감시하는 곳처럼 보였는데 수행원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묘향산으로 가는 길은 썰렁했다. 2시간 동안 겨우 7대의 차가 지나갔을 뿐이다. 북한 사람들은 주로 걸어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대동강 인근의 봉화 초대소에 묵었다. 그곳은 예전에 봉화불을 올리던 장소였는데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가 살았다고 했다. 백두산 가는 길에 있는 삼지연 초대소에도 갔는데 아주 고급이었다. 돈이 없어서 페인트칠은 못했지만 깨끗하게 꾸며놓았다.

    두 사람에 한 대씩 승용차가 배정돼서 그걸 타고 다녔다. 자동차는 10년도 넘은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다닌 사람은 신문사 부장인데 김일성대 출신이다. 하지만 매우 경직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문사에 갔을 때 2층까지만 보여주고 그냥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일하는 방을 보자”고 하니까 “시간이 없다”며 거절했다. 숙소에서 내방으로 오라고 해도 안된다고 하고, 사는 집을 구경하자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한다”고 하니까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기사 쓰는 것으로 안되니까 영어공부 열심히 하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는 군대에서 8년 동안 복무하고 기자가 되었는데 한달에 70불을 받고 부인은 유치원 선생인데 45불을 받는다고 했다.



    남쪽의 김정일신드롬도 알고 있어

    북한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이 변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북한이 주체사상에 입각해 변화를 거부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골고루 만나보니까 정말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있는 사람들이 북한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나는 사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유훈통치를 계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까 김정일 위원장의 카리스카가 이미 김일성 주석의 후광을 넘어선 것 같다. 김위원장은 북한의 당·정·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북한 사람들은 자주적인 의식이 강해보였다. 개방을 하되 중국식 개방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중국이 개방을 해서 부익부빈익빈이 더욱 심해졌는데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남쪽을 이길 수도, 먹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쪽이 잘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자존심을 중시하고 있었다. 남쪽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체제에 대한 자부심은 훨씬 강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책을 많이 봤는지 아는 게 많았다. 순간 판단력도 뛰어났고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막힘이 없었다. KBS와의 악연에 대해 “본의 아니게 KBS를 욕할 때가 있었다. 본의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참 절묘하게 피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우리중 한사람이 포도주를 조금 따라주니까 김위원장이 “이게 인사입니까”라고 말했다. 이왕 따를 거면 가득 따르라는 뜻이었다. 제주도 사람에게는 “한라산에 가야지요”라고 말하고, 전주 사람에게는 “시조 묘에 참배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아무나 북쪽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좋은 파트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은 판단력도 빠르고 어떻게 해야 북한이 살아갈 수 있을지를 아는 것 같았다. 김정일 체제가 안정적으로 가면 남북관계도 좋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 군부에서 누가 나타난다면 복잡해질 것이다. 김위원장 주변에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았다. 누가 “젊은 사람들이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 하니까 한 친구가 “남쪽에서도 386세대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으니, 북쪽에서도 젊은 세대가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모든 것이 김위원장으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은 “내가 결심하면 내일이라도 미국과 수교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수행원과 안내원은 꼬박꼬박 ‘위대한 영도자’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안내원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으니까 “당과 김정일 장군을 위해서 몇 년 더 일하고 천천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북쪽 사람들은 남쪽에서 이른바 ‘김정일 신드롬‘이 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헤어스타일과 선그라스가 유행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물었더니 인기가 괜찮다고 했다. 안내원과 수행원은 김대통령을 언급할 때 꼭 ‘각하’라는 존칭을 붙였다.

    백두산으로 일출을 보러 갔을 때다. 천지에서 보트를 탄 사람도 있고 산천어 회를 먹은 사람도 있다. 일부 사장들은 안내원들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내곁에 있어주’를 불렀다.

    북쪽 사람들은 6·16 공동선언을 남북통일의 ‘성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대로 실천하면 통일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북한이 급속한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며 이로 인해 남측과 화합을 통해 국제적인 신임을 얻고자 하는 속셈이라고 본다. 나아가 남북통일을 이루어 북한 주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기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돌파구라고 생각된다. 남쪽과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 화합과 통일의 붐을 타 고립되다시피 한 북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미국 등과도 거리를 좁히는 사업을 펼칠 것으로 본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수단을 발휘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솔직한 심정이 이해된다. 남북화합이 열쇠이며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에서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조급함을 엿볼 수도 있다. 남북통일을 꾀해 폐쇄적 굴레에서 벗어나고 노벨 평화상이라도 받아 국제적인 새 지평을 열겠다는 의욕이 김정일의 변화를 불러온 원인이 아닌가 싶다.

    성급한 진단은 금물이겠지만 전쟁이나 도발은 억지되리라고 본다. 북한이 세계적으로 더 이상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묘향산 국제친선 전람관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외국에서 선물받은 21만점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인상깊었다. 국가지도자가 받은 선물을 개인이 소장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내어놓은 것과 이를 관리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실향민 등이 북한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김정일의 태도변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반론도 펴고 있다. 우리는 이런 반론이나 이의 제기를 수용해야 하고 언론도 비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민주주의 국가답게 갖가지 이론이 혼용되고 이를 합일화하는 끈기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9~10월에 파격적인 일 벌어질 듯

    과거 우리 대표단이 평양에 갔을 때는 안내자들과 우리 대표단이, 어느 쪽 체제가 우월한가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것이 최근 남북 관계에서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경직된 사람이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불량스런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소탈했고 잘못한 것은 시인할 줄 알고,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위원장은 우리가 상상 못한 이야기까지 했다. 남북 교류와 남북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자기 고집대로가 아니라 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남북관계가 급진전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김위원장이 “휘발유도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비행기가 서해로 돌아갈 이유가 있느냐. 직항로로 비행기를 띄우자”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말한 대로 9∼10월에 파격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가 그러한 제의(직항로)를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 방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백두산의 산림 지대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그 밖에도 북한이 개방하면 훌륭한 관광 단지가 될 만한 곳이 많았다. 가슴 아픈 것은 평양 시내에서는 옛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평양시내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북쪽 사람들은 “6·25전쟁때 하도 폭격을 당해 잿더미가 된 것을 다시 일구었다. 완전히 새판을 짰다”고 말하더라.

    평양은 한산하고 깨끗하고 오염이 되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이 있고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터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북한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은 듯 했다. 야산을 개간해서 밭으로 쓰느라고 헐벗은 산이 많아 마음이 찹잡했다. 하루 빨리 남북 교류가 이뤄져 이러한 분야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통일에 중점을 두고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는 데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 통일을 국익으로 생각하고 언론은 중상을 자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용순 비서, 너희가 비판받아야 돼”

    북한 권력의 상부는 변화에 대한 의지도 있고 노력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감정에 복받혀 ‘통일’을 외칠 뿐, 통일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과 절차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인식이 없는 것 같았다. 권력 상부의 경제협력 등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같은 노력을 하는 것이겠으나, 밑에서는 위에서 하라니까 하는 것이다 보니 ‘오래 헤어졌던 민족의 만남’ 같은 감정적인 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비록 남루한 옷차림이었으나 눈빛은 달랐다. 자신의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머를 섞어가며 거침없는 화술을 구사했다. 일반 언론인도 아니고 언론사 사장 50명을 초청한 자리다 보니 분위기가 딱딱해지기 쉬웠을텐데, 그는 이런 면모를 과시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주장도 확실했고 비판의식도 강했다. 그의 지식은 놀랄 만했다. 대화 도중 방송 얘기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NHK, CNN, BBC 등에 대해 코멘트를 했고, 영화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어린 시절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발언과 행동은 얼핏 보기엔 즉흥적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철저히 계산되고 曼宙?것이 아닌가 싶었다. 가령 현대 정몽헌 회장 얘기를 하면서 그는 한번도 ‘회장’ 직함을 붙이지 않고 “몽헌이가…” “입이 찢어졌어” 하는 식으로 말했다. 충분히 조심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도 굳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외교와 관련된 얘기를 하다가 그는 “나는 평양에 가만히 앉아서 외교한다. 외국에 안 가도 자기들이 다 나를 찾아온다. 작은 나라일수록 명예와 자존심이 있어야 무시 당하지 않고 대접받는다”고 하기도 했다.

    북한의 유일체제는 확고해 보였다. 김위원장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도 절대권력자의 파워를 과시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김용순 비서에게도 “용순비서, 너희가 비판받아야 돼!” 하면서 하대했으며, “군부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남북한 모두 ‘통일’부터 강조해선 안된다. 그렇게 하면 성급하게 장미빛 미래만 꿈꾸게 돼 서로에게 안좋다. 먼저 상호 신뢰 분위기를 정착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삶을 어느 선까지는 끌어올려줘야 한다. 이번에 북한 갔을 때도 어딜 가나 누구나 ‘통일 통일’ 하길래 내가 “지금 통일이 급한 게 아니다”고 설득했다.

    통신 때문에 죽을 고생했다. 사장단 방북활동 풀 기사를 썼던 사람은 몹시 힘들어 했다. 평양시내에서 작성한 원고를 송고하려면 숙소인 봉화초대소까지 가야 했다. 평양근교에 있는 봉화초대소는 평양시내에서 편도 30km나 되는 거리다. 평양시내 오찬장에서 기사를 쓰면 30km를 달려 초대소까지 가서 전화로 기사를 불러주고 다시 30km를 달려와 평양시내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전화나 팩스 한 대만 있어도 송고를 할 수 있는데, 시설이 없는 건지, 시설은 있지만 사용을 못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북한에선 핸드폰 쓰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봤다.

    언론이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해 전문적, 거시적 시각을 갖추고 많은 연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간 우리 언론이 북한에 대해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의심스럽다. 북한의 웬만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고 있다. 언론이 지식을 갖춰야 정부의 대북정책을 제대로 지지하고 비판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정부도 언론에 북한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는 듯 했다. 접촉이 없어 일반 주민들의 생각까진 읽을 수 없었으나 행사 안내원이나 숙소 직원들의 태도에는 분명 전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가 친절했고 때로는 ‘남쪽을 열망하는 듯한’ 말이나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남쪽이 잘 사는 것 우리도 다 안다’는 식의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 언행 속에서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호소‘에 가깝도록 남한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었다.

    김위원장은 솔직한 사람으로 보였다.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모든 것이 ‘쇼맨쉽’이 아닌가, ‘뭔가 얻어내기 위해 가식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신뢰할만한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어린 소년처럼 천진하고 웃음 많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방북기간 중 노동신문, 중앙텔레비전 기자 등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남북관계에 대한 우리 대표단의 시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이나 92년 남북기본합의서도 흐지부지되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의 정세는 당시와 다르다. 냉전은 가고 화해와 통합이 새 화두가 된 시대다.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의 연설문대로,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해 북의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이랄까. 그런데 막상 그곳 주민들의 얼굴을 보니 말로 다 할 수 없이 측은한 감정이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대화는 못 나눠봤지만, 표정과 차림새만 봐도 생활이 쉽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갈등도 있고 의견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두산 개발하면 ”닭도리탕과 러브호텔이 뒤덮을 것”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파격적인 발언과 겉모양으로 볼 때 김 위원장의 태도와 아직 크게 바뀌지 않은 북한체제 사이의 괴리에 대해 솔직이 당혹스럽다.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성지’(聖地)로 여기고 있는 체제와 ‘선물창고’로 표현한 김위원장 사이의 괴리는 무엇인가?

    김정일 위원장은 분명히 남한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만큼 북한의 변화도 주도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관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관계 발전의 핵심이 여기 있다고 본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 침엽수림, 이면수 폭포 등 절경에 감탄했다. ‘관광지로 개발하면?’ 이라는 물음에 ‘닭도리탕집과 러브호텔이 뒤덮을 것’이라는 화답을 듣고 일행이 모두 씁쓸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범민련 행사를 중단하겠다”며 “친자식 의붓자식 구별해서는 통일이 안된다”고 한 발언에 의미를 두고 싶다. 여러 방면의 교류, 협력, 안보와 동북아시아의 안정 등 따져볼 문제가 산적해 있는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못지않게 ‘시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다.



    변하고 있다는 느낌 강하게 받아

    북한을 처음 가봐서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10년쯤 전에 가봤더라면 여러 가지로 비교해서 말할 수 있겠지만, 처음이어서 그냥 관찰하기만 했다.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은 여러 곳에서 강하게 받았다. 사실 언론사 사장단이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사건 아닌가. 일반 시민들과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여서 아쉬움이 있다.

    평양시는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공공기관 건물은 정말 웅장했다. 먼훗날에 가서는 그 건물들이 외국의 역사유적처럼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엔 맞지 않는 것 같다. 평양의 거리는 자동차가 없고 인위적인 느낌이 풍겼다.

    55년만에 서로 갈등하다가 이제야 만난 것이다. 북한이 당장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이해하면 달라질 것으로 본다. 체제문제야 어차피 시간이 걸릴 문제고 경제적으로 서로 돕다보면 복잡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본다. 나는 6·25때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확고한 안보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서로 필요하다면 보탬이 되는 쪽으로 가야 할 것이다.冬



    이런얘기, 저런얘기

    북한도 자본주의화 될 것

    00일보 A사장 “북쪽 수행원의 친절함에 감동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이것 저것 살펴주었다.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없이 사장단을 접대했다. 그래서 돌아오기 직전 운전사와 안내원에게 조그만 성의를 표했다.”

    00일보 B사장 “호칭문제 때문에 애를 먹었다. 위원장이라는 말이 어색해서 그냥 ‘김정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안내원 표정이 금새 달라지더라. 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국방위원장님’이라고 고쳤더니, 안내원도 ‘김대중 대통령 각하께서’라고 대답하더라.”

    00방송 C사장 “북한 식량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관리원에게 물었더니 작년보다 작황이 좋지 않아 걱정된다고 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듯했다. ‘이젠 북한도 자본주의화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00방송 D사장 “미국에 관심을 갖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북미관계가 불편하지만, 북미관계가 해소되면 미국 자본이 북조선에 투자할 것’이라며 ‘북한 경제는 희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00방송 E사장 “남쪽 방송을 자주 본다고 했다. 남쪽 연예인 이름도 알고 텔레비젼 프로그램도 알았다. 남쪽이 북쪽보다 더 재미있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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