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의형제’ 황장엽·김덕홍 결별 내막

황장엽, 김덕홍의 ‘訪美’와 ‘망명정부’를 거부하다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0-29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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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2월 전세계를 놀라게 하며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김덕홍씨가 서로를 비난하며 갈라섰다. 왜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두 사람 사이의 담합과 이별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해 보았다.
    1997년 2월12일 중국 베이징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하며 한국대사관으로 망명한 황장엽(黃長燁·79)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金德弘) 전 여광무역 사장이 최근 사이가 크게 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탈북자들을 상대로 한 폭넓은 취재로 확인한 것이다.

    사선을 함께 넘은 동지인 두 사람이 멀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외부에 알려진 이유는 황장엽씨의 방미 문제 때문이다. 지난 1월17일 황씨는 성명을 통해 “내가 미국 방문을 그만두면 마치 국정원이 개인연구소를 지어줄 것처럼 회유하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에 맞지 않는다”며 “국정원은 이런 작용을 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황씨는 “내가 국정원의 회유로 정치적 주장을 바꾸고 양심을 판 것처럼 주장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며 “이미 작년 9월 ‘월간조선’ 등에 (내가 할 이야기들을) 다 발표했는데, 그런 문제(북한 핵·생화학무기 실태 따위)를 되풀이해 논증하기 위해 미국에 갈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덕홍씨는 다음날 발표한 성명에서 ‘황씨와 국정원 간의 유착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 성명에서 김씨는 “나는 국정원이 형님(황장엽)의 개인연구소 건설에 대한 집착을 미국 방문과 대치시켜 배후공작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우리 두 사람의 방미를 저지하기 위한 국정원의 배후공작은 현정부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날짜 조선일보는 김씨가 측근을 통해 “현재 황씨는 국정원과 이해관계 차원에서 야합해 있다”는 주장을 전해왔다고 보도하였다. 김씨의 이러한 주장은, 황씨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서 미국 방문을 포기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과연 황씨는 자신의 신조를 바꾼 것일까.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主體라는 용어를 소개한 지식인


    황장엽씨는 북한에서 조선로동당 비서 등의 공직을 맡긴 했지만, 그의 인생은 학문연구로 점철된 학자의 길이었다. 소련 모스크바국립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54년 이후 황씨는 김일성대학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며 철학과 강좌장(철학과 학과장)을 맡았다. 1956년 황씨는 김일성대학 창립 10주년 기념 논문집에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황씨는 세계 역사는 정(正)-반(反)-합(合)의 변증법적 논리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을 소개한 그는 이러한 역사 발전을 걸어온 나라는 역사를 정-반-합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주체성이 있었다며, ‘주체’를 강조했다. 이것이 북한사회에 주체라는 단어를 공식 등장시킨 최초의 계기였다.

    1970년 조선로동당은 제5차 당대회에서 ▲주인다운 태도인 자주적 입장을 견지한다 ▲창조적 활동으로 자기혁명을 시도한다 ▲남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 갱생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내용으로 한 주체확립 중심개념이라는 개념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 정치체계에 채택된 ‘주체’는 이후 김일성 유일지배 사상을 만들어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북한은 황장엽씨가 주체라는 말을 소개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이 주체라는 말을 썼다며 역사 조작까지 하였다. 1926년 10월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할 때 결성했다고 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약칭 ‘ㅌㄷ’)에서 주체사상이 처음 언급되었다고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1930년 6월 열렸다는 카룬회의에서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는 주체형(主體型)으로 당조직을 운영하였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유일한 철학박사였던 황씨는 학문적 실력을 인정받아 1965년 김일성대학의 총장으로 승진했다. 단순한 학자에서 공적인 인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김덕홍씨는 한국의 경찰청과 유사한 사회안전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김일성대학의 교무지도원(교직원)으로 옮겨옴으로써 총장이던 황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79년 황씨는 조선로동당 사회교육 담당 비서 겸 주체사상연구소장으로 옮겨가고 1984년에는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되었다. 학문의 세계에서 정치의 세계로 몸을 옮긴 것이다.

    이러한 황씨를 약간의 시차를 두고 따라간 것이 김덕홍씨다. 황씨 밑에서 일하던 김씨는 조선로동당에서 운영하는 여광무역이라는 무역회사를 맡게 되었다. 이 회사는 중국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 김씨는 베이징에 자주 머물렀다. 1995년 황씨는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자리라 황씨의 외국행이 잦아졌다.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을 맡았지만 황씨는 그가 처음 소개한 ‘주체’가 김일성 부자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이념적 도구로 전락한 데 대해 크게 좌절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외국으로 바로 이어지는 직항로가 거의 없다. 따라서 외국에 가려면 먼저 베이징(北京)으로 나와야 한다.

    베이징에 온 황씨는 여광무역을 운영하는 김씨를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씨 또한 베이징에서 자본주의의 맛을 본 다음이라 북한 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황씨는 그의 한국 망명을 결정적으로 도운 전 KLO 부대장 이연길(李淵吉)씨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연길씨와의 대화는 황장엽·김덕홍씨가 망명하는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

    1997년 2월12일 황장엽·김덕홍씨는 전격적으로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망명을 단행했다. 안기부는 이연길씨를 통해 두 사람이 망명해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던 두 사람은 얼마후 안기부의 보호 아래 필리핀으로 옮겨갔다가 1997년 4월20일 김포공항에 들어왔다. 이날 황씨는 “우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마지막 힘을 다 바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민족 앞에 속죄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김씨도 비슷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안기부 조사를 마친 두 사람은 일심동체로 북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두 사람, 특히 황장엽씨는 한국사회에 들어와 어렵게 살아가던 탈북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탈북자들은 김정일에 반대한다는 의식만 있을 뿐 어떤 논리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씨는 싸워야 하는 논리와 방법을 조목조목 세워주었던 것이다.

    1999년 3월9일 황씨를 정신적 지도자로 삼은 탈북자들은 국정원의 지원을 받아 탈북자동지회(이하 동지회)라는 사단법인체를 만들었다. 국정원은 사무실 임대 비용과 회보를 발간할 수 있을 정도의 운영비는 제공했으나, 모임은 탈북자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동지회 회원들은 황장엽씨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김덕홍씨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황장엽씨는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이 시기 김대중 정부는 김정일 정권과의 대화를 추진하는 햇볕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2000년 4월에는 베이징에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 부위원장 간에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밀담이 있고, 이어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남북정상회담은 탈북자들을 매우 곤란하게 만든 이벤트였다. 김정일 신드롬이 일어날수록 반(反)김정일을 주장해온 탈북자들에게는 자기가 몸담았던 조직을 배신하고 나온 배신자라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김정일을 칭찬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린 탈북자들에게 황장엽씨는 아주 중요한 사고(思考)의 지침을 알려주었다. 황장엽씨는 남북정상회담을 하되 김대중 대통령은 반드시 김정일로부터 탄압받고 있는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왕좌왕하던 탈북자들에게 중요한 방향 설정이 되었다.

    동지회는 회보인 ‘민족통일’을 통해 황장엽씨의 주장을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동지회를 국정원이 좋아할 리 없었다. 이때의 국정원장은 박지원 장관 이상으로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움직여온 임동원(林東源)씨였으니, 국정원이 동지회에 냉담하였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황장엽·김덕홍씨는 국정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임동원 원장이 이끄는 국정원과는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부에 머물러 있던 1997년 2월25일 김정일의 처이질 이한영(李韓永)씨가 분당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한영씨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 다음이라 안기부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씨의 죽음이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황장엽·김덕홍씨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고 한다. 국정원의 보호를 통해 안위를 도모해야 한다는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허구를 폭로해야 한다는 ‘명분’ 사이에서 두 사람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황장엽씨는 먼저 명분을 택했다. 그러나 황씨의 목소리는 남북정상회담 성공에 가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므로, 국정원 측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되고 이듬해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부시 행정부가 황장엽씨의 증언을 들으려고 하면서부터 동지회와 국정원은 심각한 대립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2001년 여름부터 미국의 보수진영은 황씨를 미국으로 초청해 미 의회에서 북한의 실상을 연설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남북정상회담 이후 조성된 남북 화해무드는 일순간에 깨지게 되므로 자연 국정원은 황씨의 언론자유를 통제하게 되었다. 동지회 회보 ‘민족통일’의 발간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황씨는 국내 보수언론과 산케이(産經) 같은 일본의 보수언론을 통해 자신의 글을 발표하며 저항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의 초청을 받아들여 미국에 가겠다며 국정원을 압박했다. 자유국가인 한국에서 범법자도 아닌 황장엽씨가 자유의사로 미국에 가겠다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다. 이에 국정원은 황씨 등이 자유의사에 따라 미국에 간다면, 국정원은 그를 자유인으로 여겨 더 이상 국정원 안가에서 보호해주지 않겠다는 논리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러한 국정원의 ‘태클’은 이한영씨의 죽음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미국에 가고 싶으면 가되 목숨을 내놓고 가라’는 국정원 측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황씨와 김씨는 또 다시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황씨는 국정원의 동의로 미국 비자를 받아 미국에 가겠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국정원이 황씨의 미국행에 동의할 이유가 없는 만큼, 황씨의 이러한 논리는 국정원에 대해 사실상 승복한 것일 수도 있다.

    대신 황씨는 자신의 생각을 언론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명분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덕홍씨는 다른 선택을 했다. 김덕홍씨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국에 가서 증언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북한 망명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황씨는 온건론을, 김씨는 강경론을 외치기 시작했지만, 이때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엔 공통 분모가 있었다.

    김씨가 국정원의 감시를 피해 황씨의 글을 국내외 언론에 전달하고, 미국의 보수파 의원과 지식인을 만나 반김정일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선택을 한 만큼 두 사람의 행동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차이를 먼저 감지한 것은 두 사람과 자주 접하는 동지회 사람들이었다.

    강경론자인 김덕홍 회장이 동지회의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에 대해 동지회 멤버들은 처음에는 저항하지 않았으나 그 빈도가 잦아지자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지회는 김덕홍씨를 중심으로 한 소수파와 동지회부터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다수의 온건파가 맞서는 형국이 벌어졌다. 그 결과 김회장의 운영에 반감을 품은 간부가 사퇴하는 등 적잖은 파문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식은 황장엽씨에게도 알려졌다. 황씨는 “그 사람(김덕홍), 이제는 내 말도 안들어…”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김덕홍씨가 실수를 했다. 동지회 정관에 따르면 회장의 임기는 2년인데, 김씨는 임기가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회장직을 수행한 것이다. 이것이 동지회 회원들을 자극했다. 2001년 10월8일 김씨에 맞선 동지회 회원들은 2대 회장 선출을 결의하고 홍순경(63)씨를 2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홍씨는 회장 출마를 극구 사양했으나 탈북자들이 강권하다시피 요청해 출마, 당선되었다. 홍회장은 전임자인 김덕홍씨를 동지회 고문으로 추대했으나, 김씨는 동지회와의 인연을 끊음으로써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김덕홍씨는 모처에 독자적으로 사무실을 내고 과거 그가 사용하던 전화번호 등을 전부 바꿔버렸다. 이러한 소동에 대해 황씨는 “조직의 민주화가 더 중요하다”며 홍회장을 뽑은 동지회 측을 지지했다.

    해가 바뀐 지난 1월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미국의 인사들이 황씨를 미국으로 초청했으나 황씨는 거절했다. 황씨는 1월17일 성명에서 밝혔듯이 북한 핵문제 등은 잡지 등을 통해 충분히 밝혔으므로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갈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방미 초청을 거절했다.

    반면 김덕홍씨는 황씨가 반드시 미국에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황씨의 거절은 국정원의 회유 때문이라고 반박하였다. 김덕홍씨는 그 이전에 ‘월간조선’을 찾아가 국정원이 황장엽씨를 회유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씨의 주장은 ‘월간조선’ 2월호에 ‘국정원의 황장엽 회유 공작 성공단계’란 제목의 기사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 기사가 실린 잡지가 발매되기도 전에, 황씨가 자신이 방미를 거절한 것은 “국정원의 회유 때문이 아니다”라고 밝힘으로써 무색해져 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김덕홍씨가 완전히 떠나갔지만, 동지회는 여전히 황장엽씨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모습이다. 동지회 측은 지난해 9·11 미국 테러 이후 황장엽씨의 운동 방향이 좀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며 이렇게 소개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것을 동지회는 크게 반기는 바이다. 미국은 9·11테러가 있은 후 테러를 근절하는 반(反)테러 전쟁에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반테러 전쟁을 반독재 투쟁으로 바꾸자는 것이 황장엽 선생과 동지회의 입장이다.”

    과연 황씨는 반테러전쟁을 민주화 투쟁의 계기로 전환하는 운동에 나선 것일까. 출판사 ‘시대정신’은 최근 황장엽씨가 새로 쓴 ‘세계 민주화와 인류의 마지막 전쟁: 황장엽의 세계 민주화 전략’의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 책에서 황씨는 반테러전쟁을 민주화 투쟁으로 돌려야 한다며 이런 요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북한은, 탄압하는 김정일 독재정권과 탄압받는 북한 주민으로 나눠보아야 한다. 한국은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대북정책을 해서는 안되고 북한 주민을 도와주는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국내 여행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때는 지원조건으로 주민들에 대한 통행증 제도를 없애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는 조건부 지원을 펼쳐야 한다.

    테러를 일으키는 세력은 대개 독재정권에 기생하고 있다.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선 나라에서는 테러를 일으키거나 테러를 지원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 아프간도 탈레반 독재정권이 있었기에 오사마 빈 라덴의 9·11테러를 지원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 세력을 축출하는 반테러전쟁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독재정권이 사라지게 하는 데 주력하여야 한다. 미국의 반테러전쟁은 반독재전쟁으로 바뀌어야 한다.’



    소수파로 몰린 김덕홍씨


    황씨의 주장은 과거 그가 소개한 진짜 ‘주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황씨는 이 책에서 인류는 주체성을 갖고 역사 발전에 반대하는 독재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씨는 자신의 이러한 세계전략을 밝힐 기회를 준다면 미국에 갈 수 있어도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김덕홍씨는 무조건적으로 미국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다 황씨와 결별하고 말았다. 지난 2월10일쯤에는 김씨가 황장엽씨의 노선을 비난하는 편지를 여러 인사들에게 보냄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김씨의 비난에 대해 황씨는 매우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한 소식통은 “온갖 비난과 악소문에 대해서도 초연히 지내온 황선생이건만 김덕홍씨의 비난에 대해서는 화를 냈다. 황선생은 김덕홍씨가 그의 곁을 떠난 데 대해 많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탈북자의 절대 다수는 동지회와 황장엽씨 쪽으로 모여들고 동지회에서 떠난 김덕홍씨 세력은 김씨 측근만으로 구성된 소수파가 되었다. 사선을 넘어야 하는 절박한 시절에 합심했던 두 사람이 북한 민주화라는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시점에 와서 갈라선 데 대해, ‘왜 두 사람은 좋은 시절이 도래하는 데 갈라섰냐’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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