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엔터테인먼트 왕국 꿈꾸는 삼성家 장손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

  • 이창희 < 한경비즈니스 기자 > twin92@kbizweek.com

    입력2004-10-29 1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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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삼성에서 독립한 이래 제일제당의 실질적 CEO였던 이재현 부회장이 마침내 그룹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일찌감치 식품·바이오·유통·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를 4대 미래산업으로 선정, 성장전략을 선도해 왔지만, 극단적인 ‘언론기피증’으로 베일에 가린 인물이다.
    삼성가(家)의 장손인 이재현(李在賢·42) 제일제당 대표이사 회장이 입사 17년 만에 정상에 섰다. 그는 2월28일 열린 제일제당 이사회에서 회장으로 승진, 명실상부한 최고경영자로 등극했다.

    그의 제일제당 근무경력은 평사원과 과·부장 7년, 임원 10년으로, 이미 대권을 승계한 비슷한 또래의 재벌 2, 3세들에 비해 결코 짧지 않다. 오히려 경영성적은 가장 뛰어난 축에 든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던 1997년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 현재 그룹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는 리딩 컴퍼니로 키워냈다.

    이만하면 이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을 대대적으로 알릴 법도 한데, 정작 제일제당측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재현 회장은 이미 대표이사 부회장 시절부터 경영 전반을 맡아왔다. 이번 이사회에서는 그의 직함을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바꿔 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취임식 같은 행사도 따로 열지 않았다.”

    제일제당 홍보실 관계자의 설명대로 이회장은 1998년 부사장에서 일약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사업 전반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외삼촌인 손경식 회장은 대외사업만 관장했다. 따라서 이회장은 부회장에 오르면서 사실상 대권을 넘겨받은 셈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도 “그동안 이회장이 오너의 위치를 확고히 구축해왔기 때문에 이번의 직위 변동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다만 손회장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일제당이 이재현 회장의 취임식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유난히 언론에 나서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최근 불거진 이회장 관련 악재가 제일제당을 숨죽이게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회장이 자회사인 CJ엔터테인먼트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싼 값에 사들여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겼다는 의혹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제일제당측은 “CJ엔터테인먼트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누구도 투자하려 들지 않자 이회장이 리스크를 안고 개인적으로 투자했을 뿐인데, 이것이 훗날 행운을 가져왔다고 해서 부도덕하다고 몰아붙일 수 있느냐”며 반박한다.

    어쨌든 그의 회장 취임은 삼성가 3세들의 시대를 본격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3세 시대’의 문을 연 사람은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이다. 조회장은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고문의 막내아들.

    하지만 재계는 이회장이 삼성가의 직계 장손인 데다 삼성 모태기업의 명실상부한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의 부상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회장은 이병철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맏아들이다.

    이회장은 1984년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을 앞둔 1983년, 삼성과 무관한 씨티은행에 입사했다. 다른 신입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입사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하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에게 왜 남의집살이를 시키냐”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1985년 당시 삼성의 주력계열사 가운데 하나인 제일제당 경리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회장은 1993년초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상무로 발령받을 때까지 제일제당에서 7년동안 부·과장 간부사원으로 지냈다. 그 7년을 경리부와 관리부에서 보냈다. 그가 재무통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회장은 삼성전자로 옮긴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제일제당에 복귀했다. 1993년 6월 삼성이 제일제당을 포함한 일부 계열사들의 매각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때 손경식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대표이사 부회장도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이회장이 당분간 상무 타이틀을 달고 손회장 밑에서 제일제당을 이끌기 위한 경영수업을 받게 되리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회장 자신도 독자적 생활문화그룹을 표방하는 ‘신제일제당 출범식’을 갖는 등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해 말 이회장의 부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출간한 두 권의 책이 이회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맹희 전회장은 수상록 ‘묻어둔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창업주 사망 후 ‘제일’자가 들어가는 삼성 계열사들과 안국화재를 재현이에게 넘겨주기로 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이맹희 전회장은 기자를 만나 “선대 회장이 동생인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 대권을 넘기면서 차기엔 아들 재현이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삼성가의 다른 가족들이 확인해주지 않아 이는 이 전회장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치고 말았지만 삼성가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제일제당의 한 전직 임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무렵 이재현씨는 제일제당에서 뿌리 내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삼성에게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부친이 낸 책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뛰었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봐야 이로울 게 없다’는 현실인식에 따른 행동이었다. 하지만 몇몇 언론에 기사가 나왔고, 이로 인해 삼성측이 재현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회장의 우려는 1994년 삼성측이 이학수 당시 삼성화재 부사장(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을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파견하면서 현실이 됐다. 이때부터 제일제당이 삼성 본관에서 1995년 4월 지금의 남대문로 본사로 이사하기까지 6개월 동안 이회장과 삼성간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제일제당 분리에 따른 삼성계열사 보유지분 처리가 최대 쟁점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갈등은 결과적으로 제일제당의 독립을 가속화한 요인이 됐다. 결국 이회장이 더 자유스런 여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전화위복이 됐던 것. 이회장은 1995년 4월 드림웍스사와 손잡고 자신이 꿈꿔온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이회장 체제의 실질적인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이회장의 대권 승계작업이 가동됐고, 6년 만인 지난 2월 최고사령탑에 오른 것이다.

    1996년 제일제당은 독자적인 그룹 출범을 알리는 그룹선포식과 CI발표대회를 열면서 “2000년까지 계열사를 국내 25개, 해외 20개 등 45개로 늘려 8조5000억원의 매출을 달성, 재계 15위권에 진입하고, 영상·음반·캐릭터·극장 등 소프트사업을 강화해 2010년에는 매출 28조원으로 10대 그룹으로 성장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그해 제일제당 그룹은 제일냉동식품 제일선물 PT·CSI 제일홍콩유한공사 제일아메리카 등 국내외 8개사와 드림웍스 SKG 제일­골든하베스트 제이콤 등 3개 영상소프트 합작법인 등 11개 계열사가 2조2230억원의 매출을 올려 재계 25위권에 이르렀다.

    당시 이회장은 상무로 영상소프트 등 신규사업을 맡고 나머지 부문은 손회장이 챙기는 이른바 ‘온라인·오프라인 조화형’으로 경영구도를 짰다. 1997년 삼성으로부터 법적으로도 독립하자 이회장은 “설탕이나 파는 식의 마인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향후 역량을 집중해야 할 4대 미래 성장사업으로 식품, 바이오, 신유통,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를 선정했다. 이 가운데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이회장이 직접 챙겼다.

    이회장은 1995년 시스템 통합업체인 CJ드림소프트를 설립했고, 1997년 4월엔 음악 전문 케이블방송 M네트를 사들였다. 같은해 11월에는 아시아지역 영화 배급업체인 CJ엔터테인먼트를 출범시켰고, 1998년에는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 1호를 열며 영화관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이로써 영화제작 및 투자, 배급 등 영화부문에서 수직계열화를 완료했다. 이들 사업은 1990년대 말까지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지난해부터 본궤도에 오르면서 영화사업부문은 지난해 1100억원 매출에 순익 200억원을 올렸다.

    이재현 회장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유통부문에도 관심을 보여 2000년 3월 TV 홈쇼핑업체인 39쇼핑(현 CJ삼구쇼핑)과 인터넷쇼핑몰인 i39를 인수했다. 또한 소재식품은 성장성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단체급식업체인 CJ푸드시스템과 외식 전문기업인 CJ푸드빌 등으로 분사를 단행, 시장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했다.

    그 과정에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매년 수십억원의 적자를 기록해 골칫거리였던 음료부문을 롯데칠성음료에 매각했고, 화장품사업부문도 계열사로 분리했다. 지난해 1000억여 원의 적자가 난 드림라인도 매각했다. 드림라인은 이회장이 주도한 사업 중의 하나. 따라서 재계 일각에서는 “이회장의 무리한 투자가 화를 불렀다”며 다른 투자사업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룹에 더 큰 피해를 끼치기 전에 한계사업을 과감하게 처분한 것은 그의 신속한 판단력에서 비롯됐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제일제당그룹은 1995년 삼성에서 독립한 후 매출규모가 1조5000억원에서 지난해 5조5000억원으로, 이익은 140억원에서 2050억원으로 증가하는 괄목할 만한 경영성과를 기록했다. 올해 매출목표는 6조1400억원, 순익목표는 3600억원으로 잡고 있다. 이는 1996년 그룹선포식에서 선언했던 목표치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IMF체제를 겪은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재무구조도 탄탄해져 IMF 이전에 233%였던 부채비율이 지난해 연말에는 130%로 낮아졌다.

    이회장은 대부분의 재벌 2, 3세들이 유학파인 것과는 달리 국내에서 대학을 나와 바로 경영일선에 뛰어든 순토종 오너다. 하지만 선진국형 디지털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1995년 이회장은 허름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피자집에서 중요한 협상을 성사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프리 카젠버그가 공동창업한 벤처영화사 드림웍스에 3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제일제당의 전직 임원은 “당시 이회장은 협상 건으로 스필버그를 자주 만나면서 기업문화를 유연화하는 방법까지 터득한 것 같다”고 했다. 중차대한 사안을 논의하러 가면서 청바지 차림을 한 것도 그렇거니와, 그후 회사에 파격적일 정도로 젊은 문화를 심어간 것을 보면 스필버그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는 것.

    이회장은 드림웍스 투자 등으로 외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선진국의 기업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혔고, 이를 제일제당에 도입하려 애썼다. 사내기업가 제도를 도입, 창의와 혁신을 불러일으켰고, 1999년에는 자율복장제를 도입, 검정색과 청색 위주의 정장 일색에서 벗어나 개성과 창의를 추구하는 복장혁신을 일으켰다.

    2000년에는 ‘호칭파괴’도 선보였다. 임직원의 직위에 따른 존대를 없애고 모두가 ‘홍길동님’ 식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제일제당은 사내 전화번호나 서류에도 직위를 표기하지 않아 상대방의 직급을 모른 채 전화통화나 회의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존대하고 자기 의견을 숨김없이 제시하는 기업문화를 낳았다고 한다. 제일제당에는 대리, 과장, 부장 등의 직위가 없다. 인사제도상의 직급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그레이드(grade, 등급)’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임원들이 해외출장을 갈 경우에도 현지 직원들이 마중을 나오는 등의 의전이 전혀 없다. 이회장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출퇴근 시간도 협의를 통해 사원 스스로 결정하는 플렉시블 타임제와 코어타임 근무제를 도입했다. 가령 1시간 늦게 출근하면 1시간 더 일하다 퇴근한다. 또한 사내 인트라넷망인 ‘CJ월드’를 통해 직원들 누구나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축했고, 네티즌의 소리도 리얼타임으로 올라오게 했다. 이회장은 임직원의 자유스런 의견개진을 위해 절대로 ‘노’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회장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삼성가의 내력이다. 이병철 회장도 술을 멀리했고, 이건희 삼성회장도 술을 입에 잘 대지 않는다. 제일제당 관계자는 “직원들과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이회장은 콜라로 대신한다”고 귀띔했다. 이회장은 그룹 사보 ‘CJ패밀리’ 2000년 1월호 인터뷰에서 “되도록 저녁 7∼8시면 퇴근해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웬만하면 저녁 술자리는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재현 회장의 정신적 지주가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라면 경영스승은 외삼촌 손경식 회장이다. 이회장은 겸허, 경청, 유비무환 등의 가르침을 남긴 조부의 뜻을 잇기 위해 가훈을 ‘겸허’로 정했다. 삼성에서 독립한 직후인 1996년에는 제일제당 본사에 조부의 좌상을 세우기도 했다.

    손경식 회장은 직원들로부터 ‘아랫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손회장은 1993년 안국화재 부회장을 그만두고 조카인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상무와 합류, 제일제당 독립의 선두에 섰다. 손회장은 이때부터 이회장의 실질적인 경영스승으로 나섰다.

    손회장은 경영위원회, 이사회, 본부장회의 등 회사의 주요 안건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활발한 토론에 의해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사업본부장들에게 사업 권한을 넘기면서 “부·과장들에게도 일을 많이 맡겨보라”고 주문했다. 이회장은 이런 손회장의 가르침을 눈여겨 배웠다.

    최근 이회장을 보좌하는 임원 중에는 40대 초·중반의 젊은 층이 많다. 이들 가운데 이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임원은 이성기(인사팀장·45) 상무, 김동성(경영지원실장·44) 상무, 정홍균(경영전략실장·42) 상무 3인방이다.

    이상무와 김상무는 이회장이 제일제당 경리부와 관리부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은 이회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한 1998년에 이사로 승진한 뒤 1999년 1월에는 상무보, 12월에는 상무로 나란히 진급했다. 이상무는 서울대 심리학과, 김상무는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 서울대 식품공학과 출신인 정상무는 1991년 제일제당 물류개선팀장으로 입사한 뒤 1995년 정보사업추진팀장, 1996년 정보전략추진팀장, 1999년 경영전략팀장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이회장이 젊은 임원을 대거 등용한 것을 두고 “이회장이 회사를 너무 가볍게 가져간다” “이회장이 인의 장막에 가려 판단이 흐려졌다”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이회장은 이병철 창업주가 살았던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모친 손복남(69) 여사, 부인 김희재(42)씨, 장녀 경후(17), 장남 선호(12)와 함께 산다. 두 자녀는 현재 해외유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인 이맹희 전회장은 대구에서 따로 살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부인이자 이회장의 조모인 박두을 여사는 2000년 1월 세상을 뜰 때까지 장충동 집에서 함께 살았다. 박여사는 평범한 여느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손주인 이회장을 잘 챙겨줬다고 한다. 이회장의 누나인 미경씨는 드림웍스와의 협상 때 막후에서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김희재씨는 이회장이 씨티은행에 근무할 때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회장의 장모인 김만조(74)씨는 제일제당에서 ‘김치박사’로 유명하다. 그는 제일제당이 미국 수출용으로 만든 김치 ‘크런치 오리엔탈(Crunch Oriental)’을 개발한 주역이다.

    김씨는 영국 리즈대에서 식품이학 박사학위를, 미국 월든대에서 식품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여대, 연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치 연구에 몰두했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위해 김치 통조림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회장의 재산은 얼마나 될까. 기업 주식평가 전문기관인 미디어에퀴터블이 상장사와 비상장사 주식을 포함한 금융자산 등을 기준으로 분석한 ‘2002년 한국의 부호 가문’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의 주식 시가총액은 4005억원이라고 한다. 부동산 등 기타 재산을 합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경영일선에 나선 오너들이 재산의 대부분을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재산은 4000억원대로 보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삼성가에서는 이건희 회장(1조1167억원), 이명희 신세계 회장(8967억원),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6073억원)에 이어 네번째다.

    그렇다면 이회장의 봉급은 얼마나 될까. 200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이회장의 건강보험료 월납액은 114만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423만원을 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 이 정도의 보험료(급여의 3.4%)를 내면 월급여는 2500만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인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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