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상륙작전에서 대테러전까지 전천후 다목적군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04-10-29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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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 유일의 상륙사단인 해병대 1사단. 상륙작전엔 죽음을 무릅쓴 용맹성과 강인한 체력이 요구된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혹독한 훈련을 거듭하는 해병용사들의 투혼.
    바다는 사납게 몸을 뒤채며 그르렁거리고 있다. 언덕 위 작전장교가 무전으로 지시하자 8대의 상륙돌격장갑차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왱왱 하는 요란한 소리가 해변을 뒤흔든다. 4대씩 2개조로 나뉘어 대열을 형성한 장갑차들은 맹렬한 기세로 바다로 뛰어든다.

    기자 일행이 탄 장갑차도 곧 파도와 맞부딪쳤다. 바깥을 보기 위해 출발할 때부터 선체 상부 덮개를 젖혀둔 터였다. 병력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파도군(軍)이 결사적으로 달려와 장갑차를 들이받는다. 그때마다 파도가 뿜어내는 허연 피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 장관을 구경하느라 일행은 옷이 젖는 줄도 모른다. 집채만한 파도가 눈앞에 솟구칠 때면 저절로 고개가 움츠러든다. ‘다행히도’ 장갑차는 가라앉지 않고 반쯤 잠긴 상태에서 파도를 제압해나간다. 깊은 바다로 나아가자 파도의 리듬을 타는 듯 요동이 덜해졌다. 바다 위에 흰 점으로 박혀 있던 갈매기들이 저공비행을 시작하고 하늘엔 언제 나타났는지 헬기가 독수리처럼 빙글거리고 있다.

    이윽고 돌격명령이 떨어지자 8대의 장갑차들은 나란히 머리를 돌려 출발지점인 해안을 향해 일렬횡대로 달려간다. 해안 가까이에 이르러 장갑차들은 하얀 연기를 내뿜어 일시적으로 몸을 숨겼다. 일종의 배기가스로 적의 해안포 공격에 대비해 연막을 치는 것이다. 이어 쾅쾅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난다. 각 장갑차에서 연막탄을 연쇄적으로 터뜨린 것이다. 누렇고 매캐한 연기가 흙먼지처럼 일어나 해안을 뒤덮는다. 연막탄 발사는 적의 적외선 잠망경으로부터 장갑차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연막을 방패삼아 해변에 닿은 장갑차들은 성난 코뿔소처럼 뭍으로 내달렸다.

    오후 5시. 낙조에 가까운 한풀 꺾인 햇빛과 소금에 절은 쌀쌀한 바람, 진동하는 화약냄새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이곳은 국내 유일의 상륙사단인 해병 1사단이 도사리고 있는 경북 포항의 한 해변이다.





    위험 따르지만 전략효과 높아


    경남 진해가 해군의 고향이라면 포항은 해병의 고향이다. 해병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포항 땅을 밟아야 한다. 신병훈련을 비롯해 해병 양성과 관련된 모든 기본훈련이 포항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독한 훈련과정을 마친 신병들이 가장 많이 배치되는 곳이 바로 1사단이다. 1사단은 해병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와 전통, 혁혁한 전공에 빛나는 부대다. 해병대의 역사는 1사단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해병대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49년 4월. 380명의 적은 병력과 빈약한 장비로 경남 진해에 있는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됐다. 한국전 초기 해병대는 대대 병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전쟁중 활약에 힘입어 1950년 12월 연대 규모로 커졌다. 이것이 1사단의 전신인 해병 1연대다. 1연대는 1952년 10월 훨씬 규모가 커진 1전투단으로 거듭났고, 1전투단은 전쟁이 끝난 후 1여단으로 발전했다(1954년 2월). 이를 근간으로 이듬해 1월 경기도 파주에서 해병 1사단이 탄생했다. 1959년 3월 1사단은 근거지를 포항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특수목적군인 해병대의 대표적인 임무는 상륙작전 수행이다. 이 작전의 고전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해군의 상륙함정에 병력과 장비를 탑재해 해상으로 이동한다. 해안 가까이에 이르면 해병대는 상륙돌격장갑차와 고무보트, 상륙주정 또는 헬기에 옮겨 타고 해안 상륙을 시도한다. 이때 엄호를 위한 후방 지원이 필수적인데 대규모 작전이 벌어질 경우엔 함정뿐만 아니라 항공기 지원도 받는다. 해상을 거치지 않는 방법도 있다. 육상기지에서 발진한 헬기 또는 수송기를 타고 직접 목표지점에 날아가 공중으로부터 수직돌격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상륙작전엔 상당한 위험과 모험이 따르지만 성공할 경우 전략적 가치는 매우 높다. 한국전 당시 인천상륙작전에서 드러났듯 일시에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륙부대는 해상을 통해 적 후방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해 병력과 장비, 물자를 축적한다는 점에서 일반 부대와는 전투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전략군으로서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상륙전 수행 능력을 가진 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적에게 큰 부담을 주므로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후방 및 해안방어임무를 강요하는 것이다. 상륙작전이 주임무인 해병 1사단은 북한군 OO개 사단을 묶어놓는 전략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해병대의 전투부대로는 1사단 외 2사단, 6여단, 연평부대 등이 있다. 상륙작전 외 중요한 임무로는 도서방어와 해안방어를 꼽을 수 있다. 도서방어가 주임무인 부대는 백령도와 연평도를 방어하고 있다. 또 2사단은 상륙훈련도 실시하면서 수도 서울의 서측방을 방어하고 있다.

    1사단에서 상륙작전을 상징하는 전투부대는 상륙장갑차대대와 수색대대다. 약칭해 상장대대로 불리는 상륙장갑차대대는 수륙양용장갑차를 이용해 상륙작전 선봉에 선다. 한미연합훈련 등 대규모 훈련에서는 해군 함정을 이용해 바다로 나가지만 일상훈련에서는 글머리에 소개한 대로 독자적으로 근해까지 나갔다가 출발지인 해안을 향해 돌격하는 연습을 한다.

    장갑차마다 3명의 승무원이 탄다. 차장은 하사가 맡고, 조종수는 일병 또는 상병, 부조종수는 이병이 맡는다. 장갑차 4대의 책임자는 반장으로 불리며 중사가 맡는다. 장갑차 8대, 즉 2개 반이 모이면 한 소대다. 소대장은 중·소위. 각 장갑차에는 21명의 보병이 탄다.

    해군함정(LST)에 실려 바다로 나가는 상륙돌격장갑차는 통상 목표해안 4000야드(1야드는 약 91.44㎝) 앞에 이르면 함정에서 내려 돌격작전을 개시한다. 작전장교(소령)에 따르면 주로 야간을 이용하는데, 자체 레이더가 없기 때문에 해상에 있는 함정에서 거리와 방향을 알려준다.

    고무보트가 은밀한 작전에 적합한 반면 장갑차는 고무보트에 실을 수 없는 중장비 및 대규모 병력 탑재가 가능하고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장갑차에 딸린 무기로는 기관총과 기관포, 유탄발사기 등이 있다.

    온화한 인상의 대대장 김근수 중령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상륙전 장비에 비교하면 기동력이나 화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말했다.

    “1사단 상장대대 대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전군에서 유일하게 상륙돌격장갑차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장갑차에 올라타면 후퇴란 없다. 오로지 전진이 있을 뿐이다.”

    요즘 새로 도입한 신형 장갑차는 측면에 굴곡이 져 있다. 이는 파도와 부딪쳤을 때 선체 요동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김중령은 “구형 장갑차는 정비소요가 자주 발생해 점차 신형으로 교체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상장대대와 더불어 1사단에서 손꼽히는 수색대대는 해병대가 자랑하는 최고의 특수부대다. 해병훈련 하면 수색훈련을 떠올릴 정도다. 수색대 훈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IBS(7인승 고무보트) 훈련. 일명 상륙기습훈련으로 불린다. 105㎏에 이르는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에서 구보하는 모습은 일반인에게도 매우 친숙한 장면이다.

    훈련장교인 이경복 대위가 신호를 하자 7명이 한 조를 이뤄 고무보트에 올라탔다. 야간 기습침투훈련이다. 가운데 1명, 양옆에 3명씩 나눠 앉아 힘차게 노를 젓는다. 가운데 앉은 사람이 조장이다. 보트가 파도를 타고 넘실거렸다.

    이들은 복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방수가 되는 얼룩무늬 복장에 얼굴도 얼룩무늬로 분장했다. 상의엔 공기부력장치가 부착돼 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방수용 장화를 신었다. 보트를 타는 동안 K1 소총은 등 뒤로 둘러멘다. 상륙한 이후엔 보트를 감추고 옷도 일반 전투복으로 갈아입는다.

    조장인 허남일 하사에게 몇 가지 물어봤다. 시커멓게 얼룩진 얼굴에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밤에 보면 사람 눈인지 짐승 눈인지 구분이 안될 듯싶다. 옷 재질이 좋아 겨울철에도 물에 들어가는 것이 견딜 만하다고 했다. 체온이 유지되고 완전방수가 된다고 한다. 가장 힘든 훈련은 머리에 보트를 이고 뛰는 훈련이다.

    그가 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2000년 9월. 입대를 후회한 적 없냐는 질문엔, 예상은 했지만, 씩 웃으며 “후회한 적 없다”고 말했다. 분장 탓인지 웃을 때 드러난 이빨이 달빛이다.

    수색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10주간의 특수훈련을 받아야 한다. 고무보트, 스쿠버, 전투수영, 인명구조, 폭파 등 다양한 훈련을 거친다. 탈락률은 10% 안팎. 이렇게 해서 수색요원이 된 뒤에는 이번엔 정예요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공수훈련, 동계 설한지 훈련, 고공낙하훈련 등을 받는다. 수색대대장 여승주 중령에 따르면 ‘제대로 된 수색요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1년 정도 꾸준히 훈련받아야 한다.

    얼마 전에도 고공낙하훈련을 자원해 받고 왔다는 여중령의 눈빛엔 살기가 번뜩인다. 몸집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고공낙하훈련은 통상 5000∼1만피트 상공에서 실시한다. 1피트가 30.54㎝이므로 1만피트라면 약 3000m, 즉 백두산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사내는 해병대 수색대의 임무를 이렇게 설명했다.

    “육군 특수부대의 수색대 기능에 상륙수색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보면 된다. 주임무는 수로 접안 이상 유무를 살피고 상륙군이 침투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해안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또한 해상 및 공중 침투요원을 지원하고 중요 표적은 직접 파괴하기도 한다.”

    훈련중 사고 가능성을 묻자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며 “각종 안전대책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고위험이 따르는 고공낙하훈련을 계속 받는 이유에 대해 “숙지훈련을 하지 않으면 기술이 퇴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병대 표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표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해병 현역·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엔 ‘불가능은 없다’는 해병대 정신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 바로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다.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에 대한 자부심과 타군과의 배타성을 강조하는 이 표어는 해병대를 지원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처럼 그간 강인한 사내들의 세계로 인식돼 온 해병대에 최근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금녀의 영역이던 각군 사관학교에 여자 생도들이 입학한 것을 계기로 해병대에도 여성 장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해군은 20명의 여성장교를 배출했다. 일반 대학 학사 이상 출신인 이들은 필기시험을 거쳐 지난해 3월 해군사관후보생 96차로 입교했다. 남자들과 함께 1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7월1일 소위로 임관했다. 20명 중 해병간부후보생은 7명. 해간(해병 간부) 기수로는 87기다. 7명 중 4명은 보병에, 나머지는 헌병, 통신, 보급 병과에 각각 1명씩 배치됐다.

    이 중 1사단에 근무하는 조윤정 소위를 만나봤다. 헌병 병과인 조소위는 교통 소대장을 맡고 있다. 사단 영문 보초를 서는 헌병들이 그녀의 부하다. 올해 27세. 모자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얼른 보아 여느 여성과 다르지 않다. 홍조 띤 얼굴과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외모로 해병대 여성장교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소위는 해병대 입대 동기에 대해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육군은 너무 많이 뽑아 싫었다. 기왕이면 소수정예군에 들어가고 싶었다. 해병대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다. 가장 강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가 맘에 들었다.”

    조소위와 같은 기간에 같은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임관한 남성해병장교는 170명이다. 어떻게 배겨냈을까, 하는 의문은 그녀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답변 앞에 맥없이 풀려버렸다.

    “육체적 고통은 참을 만했다. 그 순간만 지나면 되기 때문이다. 정작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식사시간에 노래를 틀어줄 때는 맘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여자라고 훈련에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체력이 우리보다 못한 남자들도 있었다. 구보에서도 절대 안 뒤졌다. 악기(氣)로 버텼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조소위는 장교 임관 후 후반기교육을 육군에 가서 받았다. 그때 육군 관계자들로부터 “눈이 반짝반짝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조소위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이다.

    남자들과 함께 병영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여자들은 괜찮은데 남자들이 오히려 더 불편한 듯싶다. 사단에 온 지 얼마 안돼 체력측정훈련을 할 때였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몸이 옆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 양팔로 무릎을 꽉 감싸안아야 한다. 그런데 사병들이 남자 장교의 무릎은 잘 잡아주면서도 내가 할 때는 쑥스러워서인지 겨우 발목만 잡았다.”

    장기근무를 원한다는 조소위는 해병훈련을 받은 후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남한테 의지하는 태도가 사라지고 바깥사회에 나가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60㎜박격포 소대에 근무하는 임종원(24) 하사도 1사단이 내세우는 화제의 인물. 임하사는 얼마 전 병역기피소동을 일으켜 지탄을 받은 가수 유승준씨와 비교되는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군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미국에 7년 동안 거주했다는 그는 워싱턴주립대 3학년 재학중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귀국했다. 현재 연세대에 편입학한 상태. 그가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조소위와 비슷하다. “가장 세다고 해서”다.

    “한국에서 남자 구실 하려면 군에 갔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무조건 군대를 가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다. 외조부는 직업군인으로 20년 동안 복무했고 아버지는 나처럼 해병대를 지원했으나 평발이 문제가 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7월 입대한 임하사는 훈련소 시절 훈련관들의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고생 꽤나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영어만 사용하다보니 국어에 어두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말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부대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

    소규모의 특수부대로 출발한 해병대는 창설된 지 1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에서 전사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귀신 잡는 해병대’니 ‘무적해병’이니 하는 애칭은 모두 한국전 당시에 얻은 것이다.

    최초의 승전은 진동리전투. 1950년 8월 미 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데 목표는 진주 탈환이었다. 경남 마산 진동리 부근의 수리봉 서북산 등 주요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전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 장병들은 눈부신 전과를 올림으로써 해병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통영지구작전도 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인민군은 기수를 남해안으로 돌렸다. 거제도를 점령한 인민군 7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진해·마산항을 봉쇄할 목적으로 통영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해병대는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적을 격퇴하고 통영 지구를 방어했다. 진동리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의 잇따른 전과로 해병대는 전군 최초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미국 뉴욕타임스의 여기자 마거랏 히킨즈는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찬사를 썼다. 이것은 뒷날 한국 해병대의 대표적인 애칭으로 자리잡았다.

    해병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마도 1950년 9월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낙동강전선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맥아더 사령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주력부대는 미 해병대 1사단. 여기에 한국 해병대가 가세했다.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올리는 영예를 누렸다. 세계전사에서도 꼽히는 인천상륙작전 참가는 한국 해병대에 상당한 자부심을 안겨줬다.

    1951년 6월에 벌어진 도솔산지구전투도 기억할 만하다. 1차 전투의 주인공은 미 해병대 5연대였다. 미 해병대는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는 도솔산 지구의 고지들을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 미군 대신 나선 한국 해병대 1연대는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적을 격멸하고 24개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치하하기 위해 국방부장관 및 미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해병대 1연대를 방문해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전달했는데, 그후 ‘무적해병’은 해병대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구호로 널리 사용하게 됐다.

    김일성고지전투는 해병대의 임전무퇴 정신을 국내외에 과시한 전투다. 도솔산전투에서 ‘무적해병’의 용맹을 떨친 해병대는 중동부전선으로 재출동해 만대리분지(일명 펀치볼) 북단 능선 일대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는 인민군과 대치했다. 약 1600명의 인민군 1사단 3연대는 이중삼중의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완강히 저항했다.

    당시 아군의 병력은 훨씬 열세였다. 이에 해병대 지휘부는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이름 붙여 장병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밀고 밀리는 4일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결국 해병대의 손에 떨어졌다.

    양도전투는 작전의 승리였다. 양도는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에 있는 3개의 섬(길주양도, 명천양도, 강후의도)을 일컫는다. 섬과 육지 사이의 거리는 4㎞가 채 안된다. 인민군은 처음엔 양도 대안(섬 건너편 해안)에 1개 중대를 배치했다가 이후 총사령부 직속의 63보병연대를 배치함으로써 병력을 강화했다.

    1952년 2월20일 해병대 독립43중대는 인민군의 맹렬한 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시작했다. 열세한 전투력이었지만 매복과 기습작전을 펼쳐 적 주력을 유인해 하루 만에 격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일부 인민군은 범선을 이용해 도주했는데 이 역시 해병대에 의해 해상에서 괴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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