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체 암 중 3분의 1 정도는 예방이 가능한 암이며, 두번째 3분의 1 정도는 조기진단에 의해 완치가 가능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현대적인 치료법에 의해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 최선의 암치료는 예방이며, 차선책은 조기발견이라는 것. 그래서 세계 각국의 의학계는 ‘암과의 전쟁’에서 예방과 조기진단이라는 신(新)무기를 개발해 전과(戰果)를 올리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가 지난해 7월 몸이 찌뿌드드하고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대학병원을 찾아가 종합진단을 받았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가, 3개월 후 몸이 계속 피곤하고 무거워 다시 병원을 찾았더니 “이미 늦었으니 주변 정리를 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씨로서는 날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월의 검사에서 말기암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7월에 검진을 받을 당시 이씨의 몸은 아무 이상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암세포가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었거나 자리를 잡고 있었을 무렵이다. 게다가 그 대학병원은 이씨가 1년에 한번 정도 정기검진차 ‘단골’로 다니던 곳이 아닌가.
건강검진으로 조기암 찾아낼까?
이주일씨의 건강검진 사연이 언론에 알려지자 폐가 걱정이 되는 사람들, 특히 골초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각 병원에는 종합검진으로 폐암을 조기진단할 수 없냐는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폐암은 여러 암 중에서도 가장 완치가 어려울 뿐더러 조기 발견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어 무조건 병원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도 사실. 그래서 금연이 최선의 폐암 예방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이주일씨 같은 경우를 겪은 암환자들이 적지 않다. 남부러울 것 없을 정도로 부를 축적한 부동산기업의 S사장(52·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내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으로 소문난 A대학병원 종합검진센터 정규회원으로 등록해서 매년 봄, 가을로 정기검진을 받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헬스클럽에 열심히 다니고, 영양제를 상시 복용하며 보약을 챙겨 먹는 등 몸 챙기는 일에 소홀한 법이 없었다.
S사장은 지난해에도 입춘이 지나자 전체적인 종합검진을 받았다. 큰 이상은 없고 약간의 고지혈증과 지방간이 있으므로 식사조절을 하라고 통보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 몸이 무겁고 속이 쓰리고 원인 모를 짜증이 자꾸만 생겨 다시 병원을 찾았다. CT촬영까지 해보아도 별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지내라”는 담당의사의 말을 듣고 일단 안심은 했다. 그렇지만 그 사이 그의 얼굴은 더 까매지고 체중도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암을 극초기에도 찾아낼 수 있다는 혈액정밀검사라는 게 있다는 걸 듣고 혈액검사 전문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AFP ALP2 TPA 등 간암표식자 항원 수치가 증가돼 있었다. 간암이 극초기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B대학병원으로 달려가 간암 정밀검사를 받아보았고 결국 암으로 확진됐다. 그나마 조기에 간암을 발견한 덕에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수술후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신 정기적으로 간암표식자를 추적하는 혈액검진만을 받아보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퇴원했다.
두 건의 사례는 일반적인 종합검진이나 건강진단만으로 암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혈액·요검사와 단순 X-레이 검사, 바륨촬영, 초음파 검사 등의 일반적인 방법들은 암세포 검출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항목이 아니라 암에 대한 간접 사인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종합검진에서 좀더 정확한 고가의 암 검사법을 기대하는 것도 비용 문제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암전문가들은 종합검진을 전적으로 믿은 나머지 암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물론 암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암세포의 고유한 특징에 있다. 암은 직경 1cm 크기는 돼야 X레이 검사 등 화상진단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암이 진행된 상태의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 조기발견이라고 할 수 없다.
유방암을 예로 들어보자. 유방의 종양세포는 이배화기간(二倍化其間, 1개의 암세포가 분열해 2배로 증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00일 정도. 한 개의 암세포가 1cm 크기로 자라려면 30번을 분열해야 하므로 3000일(30×100), 즉 8년2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무리 조기에 암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미 암세포는 수년전부터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얘기다.
일단 암은 진단이 가능한 크기인 1cm만 넘어서면 가속력이 붙어 기하급수적으로 덩어리가 자라난다.
더구나 암은 초기에는 암 특유의 증상을 보이지도 않는다. 수개월 전에 검사상 아무 문제가 없던 사람이 ‘갑자기’ 말기암 진단을 받는 경우가 생겨 환자는 물론 의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평소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암에 걸리면 인체는 미세한 신호를 보이기도 하지만 환자가 이 신호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내과 장석원 박사(‘희망을 주는 암치료법’의 저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을 들며 주요 암의 발생 신호와 조기진단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참조)
먼저 위암의 경우. 위염이나 위궤양을 전혀 경험한 일이 없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위암에 걸렸다는 소문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위암이 위궤양이나 위염의 전단계를 밟는다는 증거다. 위암의 초기증상 역시 소화가 잘 안되고 헛구역질이 나는 등 다른 위 질환과 증세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만성위축성위염이 위암으로 진행되는 데는 15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위궤양으로 위 절제수술을 받은 경우 나중에 위암이 발생할 확률이 정상인에 비해 2∼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염이나 위궤양 단계에서 잘 치료하면 위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위암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가 없는 경우보다 위암 발생률이 높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전적 요인을 꼽을 수 있고, 둘째로 위암환자의 직계 가족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활을 해온 만큼 위암을 일으킬 만한 환경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간암은 오른쪽 상복부에 불쾌감이나 통증이 있거나 때로 열과 황달을 동반하기도 한다. 간암 역시 간염, 간경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질환이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1명은 B형간염 보균자이고, 간암환자의 70% 이상이 간염 보균자로 밝혀졌다. 따라서 B형간염 보균자는 간암의 고위험군이며, 보균자가 만성간염을 거쳐 간경화증을 일으킬 경우 간암의 전단계로 해석한다. 간암은 건강한 간을 가진 사람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반면 간염이나 간경화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다.
서구화된 식습관과 연관이 깊어 선진국형 암으로 인식되고 있는 대장암은 초기에는 증세가 별로 없다. 암이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그 부위가 항문에서 가까우면 변비·혈변 등과 함께 변의 굵기가 작아지고, 항문에서 멀면 설사·복통·빈혈 등의 증세가 나타날 따름이다. 특히 대장암의 혈변 증세는 치질과 비슷해서 몇 년 동안 치질약만 바르다가 뒤늦게 손쓸 수 없는 상태에서 병원을 찾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대장암은 선종(腺腫, 양성종양)에서 발생하므로 선종 단계에서 잘 치료하면 암 예방이 가능하다.
유방암은 유방에 멍울이 생기거나 유방의 모양이 달라지거나 유두 분비물 등이 발견되면 바로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유방암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은 첫아이를 늦게 가진 여성, 이른 나이에 생리가 시작되고 나이가 먹도록 오래 하는 여성, 유방에 양성종양이 자주 생기는 여성, 먹는 피임약이나 여성호르몬제를 사용하는 여성 등이다. 또 어머니나 형제 중에 유방암 환자가 있는 경우 암 발생 위험도는 5배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암에 걸리면 기침·가래·흉통·호흡곤란·식욕감퇴·전신쇠약 등의 증세가 나타나지만 이미 증세를 알아챘을 때는 암이 상당히 진행된 뒤가 대부분일 만큼 치명적이다. 폐암은 흡연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일단 담배를 끊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아무튼 자신의 신체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그마한 변화라도 암과 연관됐다 싶으면 병원을 찾는 것이 상책이라는 게 암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병원에서는 세포 형태와 세포에서 나오는 단백질 등을 분석하고 영상사진을 검토해서 암 여부를 판별하는데 100%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정상세포는 수년에서 몇십년까지 서서히 암세포로 바뀌기 때문에 똑같은 세포에 대해 병리의사에 따라서는 암세포로 판정하기도 하고, 아직 암세포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 나라에 따라 똑같은 조직을 암세포로 분류하기도, 정상세포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번 검진받고 괜찮다며 몇년씩 방치해선 안된다. 몇 달 사이에 세포가 결정적으로 변화해서 암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최근 국립암센터에서는 한국인들에게 발병하기 쉬운 5대암에 대한 검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100여 명의 국내 암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든 이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특성에 맞게 개발한 것으로 병원 등에 암검진 권고안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그동안 각 병원에서는 중구난방으로 암 검진법을 사용해왔는데, 국내 최초로 각 분야 암전문가들이 합의해 도출한 표준 검진법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 참조)
그런데 에서 보듯 지난해 암사망 1위로 기록된 폐암은 빠져 있다. 이에 대해 김창민 국립암센터 연구소장은 암검진 프로그램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검진에 드는 비용 대비 치료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폐암의 경우 ▲검사에 의한 조기발견도 어렵고 ▲워낙 암이 빠르게 진행이 되므로 진단을 언제, 어느 선까지 해야 하는지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며 ▲무엇보다도 암을 발견했다고 해서 치료율이 높아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검진프로그램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도 전체 국민을 위한 폐암 검진 프로그램은 개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주일씨의 주치의이기도 한 국립암센터 부속병원장 이진수 박사는 “폐암은 담배를 끊으면 발병률을 90% 정도 낮출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밝힌다. 따라서 흡연자는 개인적으로 1년에 2회 이상 가슴 X-레이 사진을 찍고 가래세포검사를 받는 게 좋다. 요즘은 ‘나선형 컴퓨터단층촬영(CT)’의 도입으로 폐암에 대한 진단율 향상이 기대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폐암 전문가들은 폐암 예방의 제1조로 금연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강조한다. 그런데 세계적인 장수촌에서 100세를 넘긴 노인들이 수십년간 담배를 피우면서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외 중의 예외’로 보아야 하는 걸까. 이와 관련, 미국암연구학회(AACR) 홍완기 회장(미 텍사스의대 MD앤더슨 암센터 종양내과 주임교수)은 흥미로운 얘기를 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유전자에는 폐암을 유발하는 인자(因子)나 바이러스를 방해하는 특별한 특징이 있거나, 아니면 유전자 자체의 변형이 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15%는 폐암으로 진행된다. 이는 특정 유전자에 이상이 있는 사람일 경우 담배에 있는 발암물질을 방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유전자 구조에 의해 담배를 피웠을 때 폐암에 걸리거나 걸리지 않는 등의 차이가 있다는 ‘충격적인’ 설명이다. 이렇게 동일한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간에도 암에 걸릴 가능성, 곧 암에 대한 감수성에 차이가 있는 것을 두고 ‘유전적 다형성(genetic polymorphism)’이라 한다.
인간 유전자지도가 완성된 이후 암과 유전자와의 관계를 두고 의학계에서는 놀랄 만한 시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암은 유전인가라는 물음에 가족력이 중대하게 고려되는 유방암, 대장암 등 일부 암에서는 유전성이 인정됐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암이 유전성’이라는 쪽으로 급속히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봇물을 이루고 있는 대형 유전체 연구들이 암의 유전성향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들을 숨가쁘게 쏟아내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바로 얼마 전에도 국립암센터 박재갑 원장이 세계 최초로 유전성 갑상선암의 원인 유전자를 검사하는 DNA 마이크로칩을 개발, 세계적 암전문 학술지 ‘클리니컬 캔서 리서치’ 2월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칩을 이용하면 가족력이 있는 영유아의 유전성 갑상선암을 조기 검진하고 갑상선 절제 등의 방법으로 암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 이상을 찾아냄으로써 암을 예방하는 것을 ‘임상 종양 유전학’이라고 한다. 이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적지 않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의 80%가 자신이 암 발생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암에 대해 어느 정도 노출 위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고 암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이런 수요에 맞추어 5월부터 원자력병원 암유전 상담 클리닉에서 체계적으로 암 유전자 검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이 병원 홍영준 임상병리과 과장의 말.
“모든 사람들이 암 유전자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고 직계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암환자가 많아 암 발생이 염려스러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할 예정이다. 또 이 검사 이전에 유전성 혹은 가족성 암의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암은 첫째, 젊은 시기에 발병하며, 둘째 대개 양측성(유방의 경우 좌우 양쪽을 의미함)으로 생기며, 셋째 같은 가계 내에서 여러 대에 걸쳐 발생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유전성이 크게 나타나는 암으로는 유방암, 난소암, 대장직장암을 꼽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암 발생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암이 걱정될 경우 유전자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유전성 혹은 가족성 암의 고위험자군을 각각의 암별로 살펴보기로 하자. 유방암 및 난소암 고위험자군은 ▲본인 혹은 두 명의 가까운 친척이 50세 이전에 암을 진단받았거나 난소암이나 유방암이 발생한 경우 ▲본인 혹은 가까운 친척이 50세 이전에 양측성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경우 ▲남성에 생긴 유방암 혹은 남성 유방암 환자의 친척인 경우 ▲유방암 유전자(BRCA1 또는 BRCA2) 돌연변이로 확인된 사람의 가까운 친척인 경우다.
대장직장암 고위험자군은 ▲45세 이전에 대장암 혹은 자궁암으로 진단받은 경우 ▲어떤 연령이든 두 군데서 대장암이 발생하거나 대장과 자궁에서 각각 암이 발생한 경우 ▲대장암에 걸린 두 명의 가까운 친척이 있고 그중 한 사람은 55세 이하인 경우 ▲연령에 관계없이 3명의 가까운 친척이 대장직장암 혹은 자궁암으로 진단받은 경우 ▲본인 혹은 가까운 친척이 대장폴립증을 앓은 경우다.
이외에 어떤 연령이든 본인 혹은 가까운 친척이 여러 종의 원발성 종양(특히 내분비계·뼈·뇌 부위에서 선행질환이 없이 바로 암이 생긴 경우)을 앓은 적이 있거나, 50세 미만에 암으로 진단된 친척들이 많이 있는 사람은 암 유전자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가 이제 막 전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단계에서 검증되지 않은 암 관련 유전자 검사들이 남발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게 원자력병원 홍영준 과장의 말.
“암은 다른 유전질환과는 달리 여러 개의 다양한 유전자에 생긴 손상들이 누적되면서 점차적으로 발생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세포주기조절 유전자, 세포자살 유전자, DNA 손상복구 유전자, 발암물질 대사 유전자 등 암 발생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단계별로 대단히 많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의 이상만으로 특정 암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특정의 유전자 이상 하나만 가지고 암이 생길 수 있다고 겁주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내에서 정식으로 도입되는 원자력병원 암유전상담 클리닉에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환자의 병력과 가족력 및 생활습관을 철저히 조사해 일단 기본적인 암 발생 위험도를 평가한 뒤,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적절한 유전자 검사를 종합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유전자 검사가 일반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가족력 상담 및 유전자 검사 후 위험도에 따른 후속 프로그램의 연결이 가장 중요하다. 이와 관련 홍영준 과장은 미국의 유명한 암센터인 메모미얼 슬로언케터링 병원으로부터 ‘암발생 위험도 감소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러한 유전자 검사 과정에서 한국인이 자주 걸리는 암과 관련이 깊은 유전자들의 조합이 밝혀지고 데이터가 축적될 경우 앞으로는 간단한 피검사를 통해 다음처럼 개인의 암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암감수성 유전자 분석 결과 다른 사람보다 폐암에 걸릴 위험도가 약 3배, 방광암에 걸릴 위험도가 약 5배 높은 유전형으로 나왔으니 정기적으로 관련 전문의로부터 검진을 받고 예방조치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암과 유전자 관계는 치료의 영역으로 확대돼 가고 있다. 유전자지도 발견의 성과와 갖은 노력 끝에 암세포 전이 이전 단계 세포(pre-cancer cell)를 발견해내는 데 성공했으므로, 앞으로는 그 징후를 발견해 사전에 암세포로 발전할 세포를 제거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족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 방법을 이용하면 수술 후 암재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싹을 아예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유전자 검사 결과 희귀암인 가족성대장선종증(대장암의 일종)의 원인 유전자(APC)가 발견된 경우 향후 언젠가는 100% 암에 걸린다고 보고 그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권하기도 한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도 백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차단시키는 약물이다.
암 진단에 대해서는 유전자적 접근과 함께 면역학적 접근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암 발생의 경우 유전자 변형이라는 유전적 원인과 함께 인체 면역기능 저하라는 면역학적 관점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화가 암으로 되는 ‘기회’라면 면역 이상은 그후에 암으로 발병하지 않을까 하는 ‘징후’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암의 조기진단을 위해 면역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하는 면역검사는 일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암면역 도크(immuno-dock)’라는 것이다. 일본내 70여 개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암면역 도크’는 암의 징후를 조기에 알아냄은 물론 ‘암에 대한 저항력’을 추정해 암 발병에 대한 대책을 세워준다고 한다.
일본의 ‘암면역 도크’를 국내에 처음 도입한 안양병원 전인건강연구소 종양면역클리닉의 김태식 과장은 암면역도크를 이해하려면 면역 메커니즘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면역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면역이란 ‘자기(자신의 본래 세포)’와 ‘비(非)자기’ 혹은 ‘이물(異物, 자신의 몸 밖에서 들어온 세균이나 바이러스)’을 구별해 비자기나 이물을 배제하는 기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면역 하면 외부에서 침투해온 세균에 대항하는 반응(항원-항체 반응 등) 정도로 생각하기 쉽고, 실제로 침입자는 분명하게 비자기로 인식되므로 면역메커니즘이 작동해 제거에 나선다. 이를 의학적으로 ‘체액성 면역’이라고 정의한다.
문제는 암세포다. 원래는 자신의 세포였던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자기’가 아니다. 그래서 체액 내에서 비자기를 제거하는 체액성 면역 메커니즘이 반응할 수 없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세포성 면역기능. 이것은 세포에 숨어 있는 이상을 발견해 사멸시키려는 면역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암세포를 이물로 간주해 그 역할을 수행한다.
세포성 면역기능의 핵심은 백혈구. 무법자인 암세포를 체포하는 백혈구에는 여러 종류의 세포가 있다. 이중 암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임파구의 하나인 T세포와 내추럴킬러(NK)세포, 그리고 백혈구 전체가 협동해 역할을 잘 할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면역활성물질(인터페론-감마, 인터루킨-12, 종양괴사인자이다. 김태식 원장의 말.
“일본의학계에서는 바로 백혈구 안의 면역감시에 관여하는 물질들의 수치를 일일이 검사하는 동시에 ‘종양마커(암 관련 항원, 암세포가 체내에 존재하고 있을 때 만들어지는 이상물질)’ 검사를 실시함으로써 몸 안에 암이 존재하고 있는지, 또 피검사자가 암이 발병하기 쉬운 체질인지를 조사한다.”
이 검사에 의하면 종양이 형성되고 있는 암을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직 종양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발병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까지도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 말하자면 암면역 도크는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놔두면 암이 발병할 가능성이 높은 몸 상태, 즉 ‘암체질’을 발견하는 검진법이라는 의미다.
김과장은 암면역 도크에서 말하는 조기 암 진단과 일반적으로 의학계에서 말하는 조기 암 진단에는 개념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서구의학계에서 규정하는 조기 암 발견이 이미 종양이 발생해 발전하고 있는 단계를 이른 시기에 찾아내는 것이라면, 면역 도크의 조기암 진단은 면역이 저하돼 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암면역학 전문가인 일본의 우노 가츠아키(宇野克明) 박사(컴퍼트병원장)가 암 예방 차원에서 개발해낸 이 암면역 도크는 특히 인터페론-감마, 인터루킨-12 등 면역활성물질 등의 수치를 측정한 다음 정상인의 그것과 비교 조사하는 방법으로 암체질 여부를 가려낸다.
예를 들어 컴퍼트병원에서 확보하고 있는 임상자료에 의하면 건강한 사람 100명의 인터페론-감마의 생합성 능력은 평균치가 30이다. 이에 반해 암환자 421명의 평균치는 10 이하로 떨어져 있다. 인터페론-감마는 암에 대항하는 ‘최전선부대’인 킬러 T세포나 LAK세포 등을 활성화시키는 사이토카인(면역활성물질)이다. 따라서 암환자에게서 인터페론-감마 수치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암을 사멸시키는 세포의 활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인터루킨-12도 마찬가지. 건강한 사람 100명의 인터루킨-12의 생합성능력 수치(평균치 30)에 비해 암환자들의 수치는 8 이하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인터페론-감마와 인터루킨-12 등 주요 사이토카인이 현저한 저하를 나타내고 있으면,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면역세포(NK세포, 헬퍼 T세포, NKT세포)의 활성 역시 저하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수치들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해 환자의 암체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암면역 도크의 골자라는 게 김원장의 설명. 암면역 도크에서 암체질로 진단되는 경우는 ▲사이토카인 및 ‘헬퍼 T세포1계(Th1)’의 수치는 낮아지고 있고 ▲NK세포와 ‘헬퍼 T세포2계(Th2)’의 수치는 높아지고 있으며 ▲동시에 종양마커에서도 수치가 높은 양성 반응을 보이는 상태다. 비록 지금 종양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도 조기 암 상태로 돌입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암면역 도크’에 의해 암의 가능성이 나타나면 구체적으로 환자 상태를 관찰하거나 적절한 치료방침을 세우기 위해 X-레이 검사나 CT검사 또는 조직검사 등도 실시한다는 게 김태식 과장의 부연설명이다.
암면역 도크라고 해서 검사가 아주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피검사자에게서 20∼30cc의 피만 뽑아내면 된다.
일본인의 경우 암면역 도크 대상자는 40세 이상의 성인 중 종합검진 등에서 이상이 있거나, 암 예방이나 조기 발견을 원하거나, 현재 암을 치료받고 있으면서 그 경과를 관찰 혹은 전이 여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된다고 한다.
겉으로만 본다면 암면역 도크나 혈액정밀검진이나 사람의 피를 통해 검사하는 방법은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암면역 도크가 아직 발병은 되지 않았으나 장래에 암이 발생할 확률이 상당히 높은 ‘암체질’을 가려내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라면, 정밀혈액검진은 이미 암세포가 활동하기 시작한 극초기의 암을 찾아내는 데 역점을 둔다. 암진단혈액학 연구소 김형일 박사(‘살만하면 암에 걸린다’의 저자)는 정밀혈액검진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암은 크기가 최소 5mm 이상 되어야만 CT나 MRI와 같은 거시적 검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암세포가 수억개 이상 번져 있는 상태다. 반면에 미시적 검사인 혈액검진은 5mm 이하 극초기 상태의 암도 잡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염검사의 경우 1mm의 10만분의 42(=42nm)인 간염 바이러스에서 나오는 항원물질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는 혈액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암도 혈액에서 암을 확인할 수 있는 물질들인 종양표식자(Tumor markers)로 미세한 암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암 발생을 의미하는 종양표식자는 그간 수없이 많은 종류가 발견됐다. 예를 들어 간암에서는 AFP라는 물질이 나오고, 췌장암에서는 POA가 배출될 수 있으며, 난소암에서는 CA-25라는 물질이 발견되고, 골수암(혈액암)에서는 백혈병 세포가 나온다.
그러나 한동안 이런 것들은 암을 알아채는 예민도는 높은 반면 특이성이 낮고 암의 위치나 크기를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서 참고적인 검사로만 치부돼 왔다. 이를 테면 AFP는 모든 간암환자의 혈액에서 쉽게 발견되는 물질. 또 이것은 거시적 검사로는 암의 크기가 인정되지 않는 극초기에, 그리고 간암종괴가 어디에 있든지 혈액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AFP는 간암이 아닌 다른 장기의 암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간경화나 간염이 심한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예민도가 높고 특이성이 낮다고 말한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과거의 종양표식자들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단일클론성항원검사를 비롯해 초정밀미량검출법 등에 의해 암 특유물질이 속속 발견돼 진단에 이용되고 있다는 게 김형일 박사의 말이다. 이런 물질들은 암의 크기를 확인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변이단계에서도 검출이 가능하고, 다른 장기로 전이되기 이전에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김박사는 정밀혈액검사, 암으로만 좁혀 말하면 종양표식자 검사는 암의 발견뿐만 아니라 암의 수술이나 항암제 치료, 방사선 요법 등을 실시한 이후에 암이 다시 재발됐는지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더욱 용이하게 이용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CT나 MRI에 비하면 그 비용이 엄청나게 싼 혈액검사로 극초기의 암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조기진단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