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商道’의 작가 최인호 당대 유명작가들을 평하다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입력2004-11-01 18: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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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생각하면 김지하에게 미안함 느껴, 이문열은 문학적 영향력으로 오류 범해, 황석영, 타고난 작가지만 필요 이상 존경받는 건 문제”
    작가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商道)’가 지금 추세대로라면 7월경에는 판매 300만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5권짜리 소설이니 권당 60만부가 팔려 나가는 셈이다. 작년 10월부터는 MBC TV에서 드라마로 방영돼 sbs의 ‘여인천하’와 팽팽하게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드라마 시청자들이 책을 사보면서 ‘상도’의 판매에 가속도가 붙어 하루 1만권 가량이 팔린다고 한다. 이문열의 ‘삼국지’가 1000만부 가량 팔렸지만 평역(評譯) 소설이고 순수한 창작소설로는 상도가 새로운 기록을 수립중이다. 책이 3000부만 팔리면 수지타산을 맞춘다는 출판 풍토에서 ‘상도’는 초대형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단편소설 ‘벽구멍으로’로 데뷔한 최씨는 1973년 ‘별들의 고향’으로 26세에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시장의 반응만을 놓고 보면 최씨의 작품활동은 다소 부진한 편이었으니 ‘상도’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느낌이다.

    조선시대는 여러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최고 지도자로는 세종대왕이 있고, 군인은 이순신이 있다. 학자로는 이율곡과 이퇴계를 꼽을 수 있고 과학자로는 장영실이 있다. 예술에서도 뛰어난 장인이 많았다. 그림은 정선과 김홍도였고 문인으로는 정철이라는 가사문학의 거봉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비즈니스맨을 꼽으라면 선뜻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조선시대가 상인을 사농공상 계급구조의 맨 밑바닥에 두고 장사를 천시하던 사회였던 탓일 게다. 최씨는 오래된 문헌들을 뒤져 임상옥이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비즈니스맨을 발굴했다. 그는 ‘상도’를 통해 감히 경제의 신철학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두 차례의 공백기


    밀리언셀러 대박을 터뜨린 여백출판사에서 최씨를 만났다.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던 청년문화의 대변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씨는 대학생 때 결혼해 딸을 일찍 가졌고 그 딸이 시집가 아들을 낳아 얼마전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7년 동안 매일같이 청계산에 가거든요. 오늘 아침에도 갔다왔어요. 정해진 시간은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원고 쓸 일이 없어 아침 7시 반에 산에 가 1시간 반 산행을 했습니다. ‘신동아’ 인터뷰를 생각하면서 산을 걸었어요. 내가 1974년 ‘신동아’ 손세일 기자(전 국회의원)와 인터뷰를 했어요. 그때 29세 밖에 안된 청년을 ‘신동아’가 주요 인물로 다루었으니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이었죠. 오늘 28년 만에 다시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것이지요. 인터뷰어는 달라졌지만….”

    인기작가는 ‘신동아’ 인터뷰어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년이 없는 창작활동을 할 수 있으니 부러운 직업이다.

    ―데뷔해 반짝하다가 시드는 작가도 많지 않습니까. 부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시기가 있었다면 언제이며 무슨 일을 하고 지냈습니까.

    “나로서는 작업을 계속해왔죠. 다만 큰 파도가 있고 작은 파도가 있듯이 아무래도 이번에 ‘상도’가 큰 파도처럼 느껴집니다. 1983년에 ‘길 없는 길’은 100만부 가량 팔렸습니다. 오늘 아침 산에서 쭉 생각했는데 슬럼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두 번 정도 분기점은 있었어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을 때 유신 독재체제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으로서 가치관의 혼란이 왔어요. 미국으로 떠났죠. 글 쓰는 것에 회의가 생기고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0년초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처음으로 낭인생활을 했죠. 돌아와서 ‘깊고 푸른 밤’을 썼습니다.

    두번째 분기점은 1987년 가톨릭에 귀의했던 시기로 2∼3년 공백기가 있었죠. 철저하게 공백이었지요. 문을 걸어 잠그고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한달에 몇천매씩 쓰던 작가가 소설을 하나도 안 쓰고 ‘샘터’ 연재로 달랑 ‘가족’ 원고만 썼죠. 그때가 저로서는 내적 변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계속 달렸습니다. 마라톤처럼 스피드를 내 빠르게 뛸 때도 있었고 천천히 뛸 때도 있었지요. 아마 그 두 번이 저한테는 작가로서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출세작 ‘별들의 고향’이 100만부 넘게 팔렸다지요.

    “당시는 100만부가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못됐습니다. 그때까지의 출판기록을 깨뜨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수가 나갔지만…. 정확히 헤아려 본 적은 없어요.”

    ―지금까지 소설책을 모두 몇 권이나 펴냈습니까. 그중 어느 게 가장 애착이 가는지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몇 권인지 몰라요. 어림 잡아 100권이 넘을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제가 책을 많이 낸 사람 중 하나로 꼽히지요. 나는 피임을 안해 수태하는 대로 애를 낳아 그렇습니다. ‘별들의 고향’이 출세작이니까 애착이 가고 ‘길 없는 길’도 아끼는 작품입니다. ‘상도’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품을 늘 꿈꾸지요. 저는 과거완료형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사실 작품이 나온 뒤에는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앞으로 태어날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일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창작을 하다보면 본인도 모르게 전에 썼던 문장을 다시 쓰는 일이 왕왕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작가로서 가장 무서운 겁니다. 김주영씨가 한때 절필했을 때 동어 반복을 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구스타프 플로베르가 말한 것처럼 가장 정확한 표현은 하나뿐이거든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라고 하지요. 창작은 진짜 하나밖에 없는 표현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어떨 때는 동어 반복을 하게 되죠. 일종의 문장 매너리즘입니다. 요즘에는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표현에 살이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살이 많은 문장이 없어졌습니다.”

    ―방송작가와 PD에 의한 ‘상도’의 재해석이 마음에 드는가요. 원작과 지나치게 다르게 나갈 때는 불만스럽지 않습니까.

    “내 작품이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문학 외적으로 확산된 경우가 많습니다. TV 드라마는 분량이 엄청나 원작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TV 드라마는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내 재미를 유지시켜야 하는 속성이 있어요.

    드라마도 내가 쓰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원작과 왜 다르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나로서는 일단 시집 보낸 출가외인이니까 PD가 잘 데리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장르가 다르니까 내가 나서서 뭐라고 얘기할 수 없죠. 원작을 살리려고 애를 써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확장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마 원작대로 했으면 10회를 끌고 가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상도’가 안방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어 책의 판매에도 도움을 주고 있지요. 책의 판매에서 시너지 효과 같은 것이 실제로 느껴집니까.

    “확실히 그게 있는 것 같아요. 작년 10월말 첫 방영이 되면서 가속도가 붙더라고요. TV가 바보상자로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너무 영향력이 커 이건 핵폭탄 상자입니다. 실제 방영하고 나니까 일반 부녀자들 사이에서 불이 붙었어요. 한 50만부 정도는 덕을 본 것 같아요. 직장 다니는 남자들은 바빠서 책을 안 읽고 보통 여자들이 많이 읽습니다. ‘상도’는 비즈니스맨들에게 확산이 돼 판매에 도움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책을 많이 내봤는데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입니다. 웬 복인지 모르겠어요. 보통 한 1년 지나면 내려가거든요. 요즘 같으면 계속 많이 나갈 것 같아요. 요즘 소설이 안된다고 하는데, 책을 안 읽던 사람들이 많이 읽어서 독서인구가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MBC 홈페이지에는 원작과 너무 다르게 각색을 한다는 항의가 적잖게 들어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원작에서는 임상옥의 부친이 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돼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참수를 당한다. 거상 임상옥에 관한 기록은 호암 문일평의 임상옥 평전과 조선왕조실록이 거의 전부다. 임상옥이 태어나 사업을 벌인 신의주에는 구전(口傳)이나 기록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볼 수 없다. 임상옥 부친의 죽음은 최씨가 창작한 부분이고 이것을 방송작가와 프로듀서가 원작과 다르게 재해석한 것이다.

    ―최선생님 견해에 대해서 반론을 펴자면 윤동주 한용운 시인이 일제치하에 저항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지금 말한 방식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까.

    “현실에 참여하더라도 문학으로 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말이나 웅변이라기보다는 시와 소설을 통해서 나타났으면 하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왕 말을 꺼냈으니까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요. 이문열씨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책 장례식이라는 행위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독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박완서 선생도 거기에 대해서 나무랐던데…. 작가가 밉다고 해서 책 장례식을 치른 것은 너무 오버한 거죠. 다들 너무 극렬한 것 같아요. 작가가 싫으면 작품을 읽지 않으면 됩니다. 어린아이를 앞세운 것도 보기에 좋지 않고…. 저도 1970년대 청년문화로 비슷한 공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알아요. 장례식까지 한 것은 잘못입니다.”

    ―아까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을 했는데 미래에는 어떤 작품을 쓰실 계획이 있는지요.

    “제가 10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는 건데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생애를 쓰려고 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던 말이 20세기 최고의 유행어였거든요. 2000년 전의 목수가 도대체 뭔데 그를 믿건 안 믿건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인격적인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상도’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한 3∼4년간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같은 나라에 가서 그분의 행적을 연구하겠습니다. 최씨에 곱슬머리 옥니박이니까 붙들고 늘어지려고 그래요.

    요즘에는 철학이 재미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철학의 사조가 변해가잖습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신학이라면 철학은 인간학이거든요. 철학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이 두 과제가 앞으로 숙제입니다.”

    작년에 박모 시인이 어느 여성 시인에 대해 ‘오늘 외출했다가’라는 제목의 욕시를 발표해 파문을 던졌다. 신인 여성 시인으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박시인이 고소를 부추긴 것으로 오해한 선배 여성 시인을 공격한 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문학을 사적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해 현존 인물이나 개인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글쓰기에 대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박완서씨가 옛날에 검찰에서 너무 위압적인 조사를 받고 나서 소설로 쓴 적이 있죠. 검사들이 그걸 읽어보고 반성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 건 작가로서 당당한 권리일 수도 있겠죠. 검찰은 개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사적인 비난은 안된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도 자기에게 속한 개인의 권리가 아니거든요. 권력을 자기 거라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있는 거죠. 문화적 권력도 마찬가지지요. 왜 말과 글이 다른 겁니까. 왜 내가 될수록 말을 안하려고 하냐면 말은 즉물적이거든요. 글은 필터를 거쳐야 나오니까 정제돼 있습니다. 작가의 붓은 신성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같은 작품에서 붓의 힘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것을 개인의 원한이나 감정풀이에 사용해서는 안되죠. 차라리 편지를 쓰는 게 낫지요. 작가정신의 문제지요.”

    ―언론이나 문학이나 글쓰는 작업인데 언론은 공인을 비판하고 문제점을 까발리잖습니까. 소설이나 시도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기자와 작가는 다르죠. 공인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기자의 권리이자 의무죠. 그러나 작가는 결과적으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보는 존재거든요. 괜히 문학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게 우리의 책무죠.

    고흐도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그린 것이죠. 작가는 인간 존재의 영혼성을 표출해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쓴 작품은 화장실에 쓴 낙서라고 할 수 있죠.”

    ―42세에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으셨는데 세례명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입니다.”

    ―늦게 신앙에 귀의해 종교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썼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나로서는 완벽한 내적 혁명이었습니다. 제가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옛날에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단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톨릭에 귀의하고 나서 3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는데 그때 참 행복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은 극히 찰나이고 먼지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이 밝아졌다고 할까요. 아직도 나는 위선덩어리죠. 위선덩어리라는 걸 아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요. 아직도 머릿속은 투 도어(Two door) 냉장고죠. 냉장실과 냉동실이 따로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뒤 작가는 글을 통한 수도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위선자인 건 분명합니다만 글과 생각이 합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가족은 신비한 존재


    ―‘샘터’에 쓴 연작소설 ‘가족’을 가끔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아까 외손자 봤다는 얘기도 했는데…. 가족 이야기를 해보지요. 혹시 가족관계를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바람을 피운 경험은 없습니까. 이번 인터뷰를 통해 주간지성 특종거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요.

    최씨는 이 대목에서 “다 알고 물으시는 것 같은데 노코멘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생(前生)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작가에게 가족은 중요한 화두입니다. 관찰의 많은 부분이 가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샘터’에 ‘가족’을 연재할 때 법정스님이 ‘가족에 대해 할 말이 뭐 그렇게 많이 있다고 미주알 고주알 쓰냐’고 묻더군요. 그게 벌써 한 30년 돼갑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만 50년을 끌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족이 얼핏 얘깃거리가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얘깃거리가 많은 공간이죠. 아내를 통해 여인을 보고, 아내를 통해 세상의 어머니들을 봅니다. 요즘 생활이 참 단조로워요. 산에 다녀와 오전에 글쓰고 집에 오후 6시에 들어갑니다. 아들 성재(28)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나와 삼성전자에 취직했고 딸 다혜(30)는 미국 가서 삽니다. 마누라하고 둘이서 세 시간 동안 밥 먹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9시면 잡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상한 여정에서 가족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문화인을 소개해주시죠. 문인은 빼고요.

    “나는 문인하고는 별로 가깝지 않아요. 문화인은 ‘명성황후’ 연출자 윤호진씨를 좋아하고 영화감독으로 이장호 배창호와 가깝습니다. 영화배우 안성기하고 친하게 지냅니다.”

    ―글에 피천득 선생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요. 연배 차이가 날 텐데 어떻게 가깝습니까.

    “제가 피천득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그분 아드님이 피수영이라고 중앙병원 부원장인데 나하고 친합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어린애 같고 재미난 분이세요. 91세일 겁니다. 건강해요. 그 분도 내가 좋아하는 국내 작가에 넣어주세요. 짧은 글에 묘미가 있죠. 요즘에는 쓸데없이 글이 길어요.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보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즐거운 글이죠. 글에 미덕이 있습니다.”

    최씨가 작년에 출간한 수필집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에는 이런 요지의 글들이 나온다.

    ‘난쟁이처럼 키가 작아 볼품없던 어머니는 요절한 아버지 몫까지 하느라 공사판 인부처럼 손이 두꺼워졌고 툭하면 동네사람들과 소리를 질러대며 싸웠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외가 어른들의 고루한 사고 때문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아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생선장수가 팔지 않겠다고 할 만큼 끈질기게 물건값을 깎았다.’

    ―최선생님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198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작가 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책이나 한 권 써서 헌정하는 것 외에는. 우리 어머니야 국민학교도 못 나오고 키는 150㎝도 안되는 난쟁이처럼 작은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들을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한번 꿈을 꿨습니다. 그런 꿈이 단순하게 그냥 꾸어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꿈 속에서 꽃 같은 처녀로 나타나서 나를 쳐다보더라고요. 꿈을 깨고 나서 생각했어요. 나무꾼과 선녀라는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고 있는데 나무꾼이 옷을 가져가 애를 둘 낳고 살다가 옷을 찾아서 하늘로 돌아가는 이야기 말입니다. 어머니가 위대한 영혼을 지닌 정말 아름다운 선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에서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와 이상한 인연으로 우리를 낳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귀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죽음이라는 두레박을 타고 자기가 이세상에 올 때 잠시 잃어버렸던 선녀의 옷을 입고 우리도 알 수 없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그런 느낌에서 나온 겁니다.”

    어머니의 유전 탓인지 최씨는 단구(短軀)에 속한다.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체중과 신장을 물어보았다. 키는 165㎝이고 체중은 59㎏이다.

    ―어떻게 그렇게 마른 몸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한때는 64㎏까지 나갔습니다. 당뇨가 있어 52㎏까지 빠진 적도 있지요. 7년 동안 매일같이 산을 타면서 건강관리합니다. 그게 즐거워요.”

    대우그룹 계열사 사장으로 일하던 최정호씨가 친형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은행과 기업 일만 해온 정호씨에게도 동생 못지않은 문재(文才)가 있다고 한다. 동생의 등단작품에 ‘견습환자’라는 제목을 붙여준 것도 형이고 ‘별들의 고향’이라는 제목도 형제간의 의논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한다.

    “정호 형과 다섯 살 차이입니다. 형이 문재는 있지만 작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에요. 작가는 나중에 퇴고를 하더라도 단숨에 써내려가야 합니다. 이 양반은 원고지 한줄 쓰기 위해서 원고지 열 장을 버려요. 형도 기업으로 가지 않고 언론 계통으로 갔으면 명기자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겨울 나그네’도 형이 붙여준 제목이지요. 형이 그걸로 친구들한테 많이 자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때는 대우 계열사 사장을 지냈는데 대우가 저렇게 되니까 요즘은 어렵죠.”

    ―교도소에 안갔습니까.

    “형은 다행히 교도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예요. 한때 잘 나가 폴란드 센트룸 대우 사장도 하다가 물러났지요. 아마 핵심 측근으로 계속 계셨더라면 지금쯤 푸른 수의를 입었을지 모르죠.”

    최인호씨의 집은 여백출판사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다. 여백출판사 사무실에서 최씨의 3층집이 보인다. 여백출판사는 김재순 샘터사 이사장(전 국회의장)의 셋째아들 김성봉씨가 창업한 출판사다.

    “월간 ‘샘터’에 ‘가족’을 연재하고 ‘길 없는 길’을 출간한 인연으로 김성봉씨가 출판사를 차렸다고 해서 ‘상도’를 여기서 낸 거죠.”

    베스트셀러 작가들 중에는 출판사와 인세 문제로 다투다 스스로 출판사를 차리기도 한다.

    ―여백이 최선생님 출판사인 줄 알았습니다.

    “출판사까지 꾸리자면 글쓰기에 방해가 돼요. 작가도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합니다. 나는 번거로운 것은 싫습니다. 난 단순한 생활이 좋아요.”

    ―자꾸 지갑 속 이야기를 물어서 죄송합니다. 경제부에서 일할 때 생긴 버릇인데 잘 고쳐지지 않아요. 인세는 얼마나 받습니까.

    “책값의 10%를 받습니다.”

    7500원짜리 책이니 권당 750원씩 자동적으로 들어오는 셈이다. 300만권이 팔리면 22억5000만원의 소득이 생긴다. 세금을 떼더라도 작가로서는 어마어마한 수입이다.

    최씨는 골프를 일찍 시작했다. 구력 24년이다. 전성기에는 핸디캡이 싱글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지금은 23개 정도라고 한다.

    원고지 메워 높은 소득을 올려 골프를 치는 문인들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진흥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임상옥을 소설로 쓰려고 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한 10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소재입니다. 우연히 의주 출신 역사학자 문일평씨가 쓴 임상옥 평전을 접했어요. 내용이 200자 원고지 20매 분량 정도로 5 페이지 남짓입니다. 그것을 읽고 이 분은 뭔가 존경할 만한 상인이라는 판단이 들어 공부하기 시작했죠. 문일평씨가 임상옥 문집에서 몇 개의 시를 번역해 평전에 옮겼습니다. 국회도서관을 비롯해 여러 군데를 뒤져봐도 그 문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제 생각에는 북한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료가 모자라 소설로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야담집에서 거상 임상옥과 계영배(戒盈杯)라는 이야기를 찾아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몇 개의 에피소드와 계영배라는 야담이 합쳐지면 소설화가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자료에 의한 것은 거의 없고 몇 개의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새로운 인물을 형상화한 거죠.

    러시아와 동구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21세기는 경제가 화두가 되는 시대일 거라는 예감이 들더군요. 주위에 기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이 ‘역사적 인물 중에 본받을 만한 기업가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조선시대는 상업을 아주 천하게 취급하는 바람에 자본주의가 늦게 발달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상옥에 관한 기록이 딱 한번 나온다. 1834년 순조 34년 의주에 물난리가 나 피해가 막심했는데 임상옥이 수재의연금을 많이 낸 공로로 곽산(郭山) 군수가 되었다. 그런데 6개월 만인 헌종 1년 귀성(龜城) 부사로 영전시키자 일부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취소시켰다. 순조실록은 의주의 수재에 관해 수몰된 민가가 2000호에 이를 정도로 혹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영변(寧邊) 부사 이긍우를 위유사(慰諭使)로 보내 관심을 표시할 정도였는데 임상옥은 수재민 돕기 재물을 많이 내 상인으로서는 드물게 벼슬자리를 받았던 것이다.

    ―상업을 천시해 산업자본의 형성이 늦어지고 나라가 흥성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 상업을 천시한 배경은 뭘까요.

    “중앙일보에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해신(海神)’을 연재하느라 1200년 전 역사와 인물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장보고를 무역왕이라고 하잖습니까? 흥덕왕이 ‘무역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는 말을 했던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흥덕왕의 의지에 의해 장보고라는 사람이 청해진 대사가 될 수 있었죠. 고려 때 코리아가 알려진 것도 고려상인 때문이라고 않습니까? 개성상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짐작컨대 이조에 와서 상인을 천시한 것은 아마 개성에 살던 고려왕조의 사람들이 벼슬길이 막히자 상인으로 나서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중국도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명나라 사람들이 상인으로 나섭니다.

    임상옥은 국내 상인이 아니라 국제 무역상인입니다. 임상옥의 힘이 강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불매동맹을 해 죽이려고 했죠. 임상옥은 인삼을 불태우는 전략으로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인삼이 불타면 중국 사람들이 곤란해지니까 굴복하고 말았죠. 당시로서는 참 보기 드문 상인일 뿐 아니라 상도를 지킨 훌륭한 의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를 깊이 연구한 서울대 정옥자 교수(규장각 관장)는 조선시대에 상인을 천시한 원인을 유교적 가치관에서 찾는다. 조선시대에 사(士)는 지배계급이었다. 농(農)은 당시 전체 국민의 90% 이상이 꾸리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기술자라고 할 수 있는 공(工)은 대개 중인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다리에서 상(商)은 가장 바닥이었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보면 직접 생산하지 않고 남이 생산한 물건을 거래해 이문을 챙기는 상업은 군자가 할 일이 못되었다.

    ―지난 시대의 인물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인물을 재발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상옥이라는 인물한테서 요즘 비즈니스맨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뭐라고 봅니까.

    “‘상도’를 한국일보에 연재할 때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가 왔거든요. 소설 연재가 끝나고 2년 전에 출판됐을 때는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동아일보에, 상도가 없으니까 ‘상도’가 잘 팔린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경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임상옥이 인삼을 불태운 정신이 기업가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IMF 경제위기는 우리 민족의 위기이자 최대의 기회였습니다. 부정부패 정경유착 등 잘못된 것들을 송두리째 죽일 수 있는 기회였지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사기꾼으로 모는 요즘의 분위기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한국 경제풍토에서 상징적 샘플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과오를 한 사람에게 센터링 해버리고 잊어버리면 곤란하죠.

    김회장도 아마 어느 순간 임상옥처럼 자기 기업을 불태운다는 각오를 했더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구조조정을 잘했더라면 아마 앞서가는 경제인의 표상이 될 수 있었겠죠. 불과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대우증권 같은 알토란 기업들을 팔아서 군살을 뺐더라면 국가적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생즉필사(生則必死) 사즉필생(死則必生)이라고 했는데 참 좋은 말입니다. 김우중씨가 그때 사즉필생으로 임했더라면 앞선 기업인이 될 수 있었죠.

    그런 면에서 임상옥의 교훈이 중요합니다. 그 양반은 마지막에 기업인이 아니라 시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홍경래가 그 분을 유혹합니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임상옥을 유혹했던 거지요. 임상옥은 자신은 상인이지 정치가가 아니라면서 거절했어요. 홍경래 난은 실패한 혁명이니까 반역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임상옥은 권력에 대한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쳤습니다. 평생 벼슬에 대한 환상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상인이라도 돈이 있으면 벼슬을 살 수 있었지만 그런 환상을 갖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재산을 자손에게 다 물려주지 않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나서 시인으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기업인들이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임상옥은 홍경래 난이 실패하리라고 내다보고 자금을 대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다른 사람의 지갑 속에 대해서 묻는 것은 실례인 줄 알지만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요. MBC에서 원작료는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젊었을 때는 스포츠 스타들이 연봉 승강이를 벌이는 것처럼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신문소설이 많았거든요. 내가 많이 받아야 다른 사람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거고…. ‘상도’를 놓고 MBC와 KBS가 경합했습니다. 이거 싸움을 잘 붙이면 원작료가 오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에 대해 신경을 덜 씁니다. 원작료는 5000만원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싸게 했냐고 하는데 드라마 덕분에 ‘상도’가 확산되니까 좋습니다. 연봉 싸움은 젊었을 때 하는 것 아닙니까?”

    ―계영배의 철학이 시중의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70%를 넘게 채우면 잔 속의 술이 모두 새버린다는 계영배는 실제로 존재하는 잔입니까.

    “박근혜 의원이 기자들에게 계영배를 선물했다는 가십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내가 계영배를 실제로 보여드리죠.”

    그는 여기서 푸른색이 도는 잔을 꺼냈다. 동아일보 오명철 문화부장이 일본에서 구입해 선물로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계영배는 말 그대로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다. 잔의 바닥에 작은 구멍이 비스듬하게 나 있다. 물이나 술을 3분의 2가량 따를 때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 따르면 압력이 세져 구멍으로 모두 새버린다. 최씨가 직접 실험을 해보는 데 신비스러웠다.

    “옛날 선비들은 계영배라는 잔을 갖고 다니면서 자기 처신의 교훈으로 삼았죠. 가득 채우려고 하면 모두 없어지는 거죠. 임상옥과 계영배라는 야담에 실제로 나오는 겁니다. 문일평씨 자료만으로는 뭔가 부족한데 계영배라는 야담을 본 순간에 ‘아 이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절대 만족은 없습니다. 70%의 자족을 할 때 그것이 최고의 성취입니다. 이게 실천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끊임없이 추구하고 채우려다가 비극이 생깁니다.”

    ―드라마 제작진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지요. ‘상도’가 방영된 이후 40%를 차지하던 sbs ‘여인천하’의 시청률이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이병훈 프로듀서는 ‘허준’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분이죠. 제가 KBS를 선택하지 않고 MBC로 갔던 것도 작가와 프로듀서의 역량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을 믿고 맡기는 거죠. 주위에서 드라마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작품의 주제가 근년에 종교 역사 등 육중한 것으로 옮겨졌는데요. 이런 변신의 과정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나는 원래 도시적인 감수성을 지닌 도시 작가죠.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지방 출신이 많습니다. 소설가에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황순원 이호철씨 같은 피란민 문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온 하숙생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청준씨가 지방 출신의 서울 생존기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부친의 고향이 평양이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적이죠. 나는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도시적인 감각이 제가 쓰는 소설의 특장이었다고 할 수 있죠. ‘별들의 고향’이 그런 소설입니다. 도시가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를 쓴 것이지요.

    내가 역사소설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복식 고증 같은 문제 때문에 역사소설 쓰기가 매우 어렵거든요.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KBS 일을 맡아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문화를 집중적으로 리포트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역사소설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문화가 사라졌는데 일본에 가니까 백제가 살아있더라고요.

    백제는 이미 140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인데 일본의 곳곳에 백제라는 이름, 하다못해 사람의 성에 백제라는 성이 있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습니다. 쓰다보니 나름대로 노하우를 축적했습니다.

    내가 가톨릭에 귀의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BC에서 AD로 넘어오듯이 내 개인사도 BC에서 AD로 넘어왔어요. 가치관이 180도 달라지더라고요.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만 불교에 대해서도 개안을 했지요. 가톨릭 신자인 제가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책을 썼더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때는 수덕사에 가서 한 2년 동안 머물렀죠. 정말 행복했어요. 심봉사가 눈 뜬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작가라고 했지만 눈먼 장님이었구나 하는 인식이 들었죠.

    3년 동안 글을 못 쓰다가 쓰기 시작한 게 불교를 다룬 ‘길 없는 길’이었죠. 작가는 의도적인 변신을 할 수 없거든요. 다만 당시에 느낀 것을 글로 쓰다보니까 소재가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관심이 역사와 종교, 경제로 확산이 됐고 앞으로도 그런 쪽에 더 매달리고 싶어요.”

    최씨는 신문 연재소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여러 군데 썼다. 그를 출세시키고 돈을 벌게 해준 ‘별들의 고향’과 ‘상도’가 모두 신문소설이니 신문소설에 갖는 애착이 남다를 만도 하다. 영향력 있는 언론사 간부를 만날 때마다 지면에서 신문소설을 줄이는 제작방침에 대해 항의한다. 미국 신문을 보면 연재만화는 많지만 연재소설은 거의 없다. 텔레비전 연속극에 빠져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것도 모르는 주부도 많다지만 신문 연재소설을 읽는 독자는 갈수록 줄어든다. 장편소설을 하루용으로 토막낸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있기에는 인터넷 등에 훨씬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많아졌다.

    “신문연재 소설은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신춘문예라든가 연재소설이 일본 영향으로 생겼지요. 신문지면이 8면일 때 연재소설이 두 개였습니다. 신문과 작가는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면이 되는데도 연재소설을 싣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들이 신문에 부응을 못해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연재소설은 신문의 조강지처 같은 존재거든요.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이 신문 연재소설입니다.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한강’ ‘아리랑’이 모두 신문연재소설이에요. 신문은 소설의 카네기홀과 같아요. 노래 잘 부르는 가수가 없다고 해서 카네기홀을 없애버리면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신문 연재소설은 숨을 데 없는 사각의 링입니다. 그런 걸 통해서 체질이 강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거든요. 작가를 키우는 면에서도 신문연재를 포기해서는 안될 거라고 봅니다. 요즘 소설이 스케일이 작아지고 디테일만 강해지는 원인이 신문연재 같은 게 없고 혼자 컴퓨터만 두들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동아’에도 지금 연재소설 없잖아요? 옛날 유주현씨의 ‘조선총독부’ 최명희씨의 ‘혼불’이 ‘신동아’ 연재소설입니다. 여성지에도 연재소설이 없습니다. 문화 매체들이 그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연재소설 독자가 옛날만큼 열렬하진 않지만 그래도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강력한 매체에 작가들이 설 수 있는 소설적 공간을 조금 남겨두기 바랍니다.”



    ‘현대문학’과 동양극장


    ―매체들은 생존이 급박하거든요. 새로운 매체들이 시장을 파고 들어오고 동종 매체들과의 경쟁이 날로 격화하고 있습니다. 언론산업이 시장의 수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최선생님 주장을 반박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소설은 단행본 출판을 통해 직접 시장에서 독자들로부터 평가받는 시대로 바뀌는 걸 느껴요.

    “시대적 추세죠. 미국에서는 출판사 문학담당 편집자가 작가에 대한 심판 노릇을 하죠.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런 것 아닙니까. 수십 군데에 원고를 보냈는데 어느날 한 편집자가 발견한 거죠. 외국에서는 대부분 그래요. 처음부터 장편소설로 승부하니까 더 알찬 작가가 나올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조금 다르죠.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가 등단하거든요. 등용문이죠. 뽑아놓은 뒤에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 돼서는 곤란합니다. 지금 신문이 똑같다는 소리를 듣는데 좋은 소설을 연재하면 제 생각에는 신문을 기다리는 기쁨을 더 만족시킬 수 있을 겁니다.”

    ―월간 ‘현대문학’이 극심한 경영난을 겪으며 매년 1억원 가량 적자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최선생님이 560호를 넘긴 최장수 문예지를 살리기 위한 성명에 참여했더군요. 1억원 적자라지만 공적자금 규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시장에서 죽게 내버려둬야 하는 걸까요.

    “순수문학이 고사 상태예요. 큰일났습니다. ‘현대문학’뿐만 아니라 ‘문학사상’ 등 여러 문예지들이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현대문학’은 역사가 거의 반세기 가까운 이례적인 문학잡지입니다. 동양극장 앞을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백년 넘은 극장이 어느날 갑자기 다른 용도의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현대문학’이 동양극장처럼 돼서는 안됩니다.”

    ―문예지 원고료는 정부에서 일부 보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문예지원을 비롯해서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할말은 없습니까.

    “문학사상사에서 주관하는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것은 1년에 한 10만부 이상 나가요. 저널리스틱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수상작품집이 매년 10만부 이상 고정적으로 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까 베스트 셀러 순위 8위에 올랐더라고요. 그러니까 문학 독자가 없는 게 아니죠. 작가 스스로 반성하고 나서 정책적 지원이 따라야 하지요. 나는 작가에게 직접 원고료를 주거나 창작기금을 지급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작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가 문화인들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최씨의 작품 가운데 ‘별들의 고향’을 비롯한 30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1977년에는 감독으로 나서 ‘걷지 말고 뛰어라’를 제작했고, 시나리오도 10편 이상 썼다.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 ‘적도의 꽃’ ‘고래사냥’ 등은 제법 흥행이 됐다.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가인 ‘고래사냥’은 1970∼8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불린 노래다. 특히 데모 현장에서. 최씨가 직접 가사를 썼다.

    ―‘고래사냥’ 가사 때문에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지요.

    “내가 등단했을 때 문단에는 두 갈래 흐름이 있었습니다. 현실참여파와 미학파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나는 체질적으로 체제주의자가 못되고 반체제주의자도 못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주의자예요. 사회는 어지럽고 정말 암울했거든요. 스스로 체제·반체제 논리는 맞지 않고 비체제라고 생각했죠. 물론 용기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죠. 그런 논쟁이 싫었어요. 글쓰기를 방해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견딜 수 없더라고요. 영화를 좋아해 의도적으로 영화 쪽으로 가려고 했지요. ‘바보들의 행진’이 나중에 문제가 됐어요. 암울했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젊은 대학생들이 ‘고래사냥’을 많이 불렀어요. 그래서 정보부에 두어 번 끌려갔죠. ‘고래가 뭘 의미하냐’고 묻는데 미치고 환장하겠더라고요. 젊은이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자유가 없다는 말이냐’고 따져서 애 먹었죠. 저는 어디 가서 웃기는 성격이라서 심하게 얻어맞지는 않았죠.”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 통치기간은 문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권력과의 투쟁이냐 아니냐의 선택을 강요한 불행한 시대였다. 문학의 현실참여 논쟁도 문인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말살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선생님은 지금 유신시대를 암울했던 시절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에는 글이나 행동으로 유신의 부당성을 비판한 일이 없었습니다. 유신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면서 체제도 반체제도 아니고 비체제였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부족했던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그거 참 좋은 지적이에요. 비체제라고 어디에 공표한 건 아니에요. 비체제주의자라고 하니까 체제주의자 쪽에서 보면 대마초나 태우는 퇴폐주의자가 돼버려 입장이 곤란해요. 반체제 측에서 보면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가 되는 거죠. 당시에 사회에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죠. 1970년대를 살아간 작가들의 마음속에는 김지하가 있습니다. 나는 늘 김지하한테 미안했다고 어딘가에 쓴 적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그런 행동을 통해 프리미엄이라도 얻었으니까. 그러나 김지하는 내 가슴속에서 항상 각혈하면서 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제 자신을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떤 모임에서 김대중 정권이 우리 역사에 매우 유익했다고 평가한 적이 있어요. 정(正) 반(反) 합(合)의 구조에서 우리나라에서 비로소 반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DJ 이전 정권은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성격이 같은 정권이었는데, 완전히 뒤집힌 것 아닙니까? 그 모임에서 제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그전 같으면 비체제라는 얘기도 못했는데 이제는 얘기할 수 있다.’ 내게는 고유한 비겁함과 솔직함이 있습니다. 체제 반체제는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당시 반체제의 행동에 대해 마음속으로는 존경의 염을 보내죠.”

    ―문학 평론이나 신문 문학 기사를 통해 찬사를 듣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 평가를 받을 때도 있을 텐데요.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씨가 ‘별들의 고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쓰고 나서 속이 상해 문단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김현씨는 나하고 친했죠. ‘별들의 고향’이 대중적으로 어필이 되니까 ‘야 너 조금 위험하다’고 해서 ‘나를 평론에서 좀 빼주시오’ 하고 대응했던 것인데, 내 성격이 본래 그래요. 누가 나를 칭찬하는 것도 싫어요. 어떤 면에서 나는 평론가하고 친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평론가들이 대부분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학교수들이에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학문이 아닌데 거꾸로 학교에서 존재하기 위해 문학을 학문화시킨단 말이에요.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문학을 도식화시켜요. 아까 말한 대로 나는 개인주의자여서 초창기에도 그런 게 싫었어요. 문단이 조폭집단이 돼서는 안됩니다. 조폭들이 힘을 갖고 자기 구역을 정해 술집에다가 영업부장을 앉히듯이 문단과 평론가들이 자기 라인을 만들어 상을 주지요.

    소위 문단은 문화 증진에 좋지 않습니다. 자기 파워를 키우기 위한 문단 조직은 작가들한테 결국 치명적인 독이 돼요. 처음에는 우산의 보호 아래 문학적인 평가를 받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작가한테 덫이 된다고요.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작가는 참 고통스러운 직업이다. 문단이 외로움을 달래줄지 모르지만 결국 작품을 잘 쓰게 해주지는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문단이나 사회활동은 작가의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해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작가에게 독이 됩니다.

    내 어머니가 유식한 분은 아닌데 담임 선생님에게 ‘인호는 칭찬하지도 말고 꾸짖지도 말고 내버려두세요’ 하고 말했어요. 물론 칭찬하면 좋죠. 작년인가 어느 신문사에서 내 얘기가 나올 때 나를 내버려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올려줄 필요도 없고 나를 꾸짖을 필요도 없고 다만 필요하다면 내가 한 일에 대해 죽은 다음에 평가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문단정치를 배격해야 하겠지만 수많은 독자를 가진 공인으로서 평론이나 기사에 오르내리는 건 감수해야 할 운명 아닙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아마 그런 걸 눈치 챘는지 별로 안하니까 좋지요 뭐. 나는 그들이 내 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나훈아 인터뷰를 재미있게 봤어요. 기자가 칭찬만 해줄 수 없었던지 창법에 대해 빈정대면서 너무 꺾는 부분을 꼬집으니까 나씨가 ‘외국의 통계에 의하면 최고의 슈퍼스타도 30%의 거부반응이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국내 작가나 해외 작가 중에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든다면.

    “문학청년 때 김유정씨를 참 좋아했어요. 소설의 무대가 농촌이었지만 농촌문학으로 분류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봄 봄’ ‘동백꽃’을 보면 가히 천재적입니다. 표현이 아주 좋습니다. 김유정씨가 폐병으로 죽기 직전에 친구에게 쓴 편지가 있어요.

    ‘내가 날로 몸이 꺼져간다. 구렁이를 몇 마리 사다가 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까 네가 보는 재미난 탐정소설이 있으면 하나 보내다오. 내가 그걸 번역해서 원고료를 받아 닭을 몇 마리 고아 먹고 기운을 차릴 거다.’

    나는 이 편지글을 읽고 문학청년 시절에 펑펑 울었어요. 습작 노트 옆에다 써놓고 다녔습니다. 김유정이라는 사람을 참 좋아했거든요. 감각이 뛰어났어요. 그래서 ‘야 이런 천재가 구렁이도 못 먹어서 폐병으로 죽다니’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어요.

    동시대인으로는 황석영씨를 인정합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두 살쯤 위인데 문단에는 내가 조금 먼저 나왔죠. 이 친구의 문장은 아주 리얼리틱합니다. 나하고는 반대입니다. 나는 약간 도시적이면서 추상성이 강합니다. 황석영씨 문장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하드보일드예요. 다만 이 친구가 필요 이상으로 존경받는 것에 대해서는 좀 그래요. 무슨 얘기냐 하면 작가라는 게 저주받은 존재이거든요. 거지예요. 작가는 지식인도 아니고 그 시대에 저주받은 영혼을 가진 말의 동냥꾼이거든요. 그런 분위기로 계속 글을 썼으면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황석영씨의 문장력 같은 것은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초창기 글, 너무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경도되지 않았을 때의 작품이 좋다는 거죠. ‘삼포 가는 길’ 같은 작품 말입니다. 평론가들이 작가에게 너무 갑갑한 갑옷을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까 말했듯이 작가를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극도의 에고이스트가 되는 게 좋습니다. 황석영씨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외국 작가는 많죠.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좋아하고 제임스 조이스도 즐겨 읽었습니다.”

    1970년대가 최인호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이문열의 시대였다. 70, 80년대의 문단을 굳이 참여와 순수로 가르면 둘 다 순수에 속한다. 그렇지만 참여를 대하는 둘의 태도는 크게 다르다. 이문열씨는 참여 쪽에 대해 가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지만 최인호씨는 ‘나는 김지하에게 미안했다’는 식으로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다른 작가에 대해 묻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문열씨가 최근 신문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사회적 발언을 자제하고 작품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말을 했더군요. 이씨가 갈등구조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과감한 사회적 발언을 자주 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질 것 같아요. 동료작가의 이야기라서 조심스러우면 답변 안해도 됩니다.

    “작가가 사회에 대고 말을 하면 영향력이 커질 수 있습니다. 내 개인 생각이지만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지 문제의 답을 내주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작가들이 문제의 답을 내주려고 할 때 많은 오류를 범하는 걸 봅니다. 작가는 문학적 영향력에 의해 자기의 말이 가장 옳은 정도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작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성철 스님을 좋아하는데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제 네가 생각했을 때도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냐.’

    참으로 어려운 문제죠. 영화 ‘아마데우스’는 음악사에 내려오는 얘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천재였지만 문화권력에서 거리가 멀어 귀족들이 노래해 달라면 노래하고 작곡해 달라면 작곡했습니다. 반면에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문화권력자이자 궁정 악장이며 음악협회장이죠.

    그 영화에 보면 모차르트가 죽은 뒤 몇 년 뒤에 살리에리가 신부에게 자기가 작곡했던 당대 최고의 유행가를 들려주고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으니까 신부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당대에 살리에리 작품은 영향력이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주니까 ‘그건 알겠습니다’고 대답하지요. 모차르트는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작가에게 가장 무서운 건 당대의 칭찬이에요. 나는 이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도 칭찬받고 비난을 받겠지만 그것이 나를 취하게 하거나 물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주의해야 됩니다. 선택하는 것이 모차르트인가 아니면 살리에리인가? 이것은 이문열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부터 글을 써야지’라는 얘기를 작가들이 많이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모든 걸 정리하고 글을 써야지’ 하는데 잘 안됩니다. 글이라는 게 무섭습니다. 권투선수가 은퇴한 지 3년 만에 다시 링에 도전하듯이 할 수가 없습니다.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가는 쓰지 않으면 죽습니다. 쓰지 못하는 작가는 이미 타버린 숯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결심한다고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고독해야 되고 자기 유폐를 해야 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고독과 싸워야 합니다. 나도 ‘상도’가 출산된 뒤 하루에 열 군데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옵니다. 이 모든 것을 커트하는 고통이 보통 아닙니다. 숲을 헤쳐나가는 것 같아요. ‘상도’ 이전에는 인터뷰도 잘 안했습니다.”

    ―‘신동아’ 인터뷰는 커트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상도’를 발간한 뒤 오픈시켜 놓고 보니까 내 자신을 지켜나가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당대의 칭찬과 각광으로부터 초연하고 작가로서 사회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꾸어 말하면 나의 펜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작가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든 걸 정리하고 글 쓰겠다고 결심하기는 쉽지만 잘 안됩니다. 국가대표팀 축구감독 히딩크도 월드컵 출전 당일에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들어놓겠다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쉰다고 해서 쉬는 게 아닙니다. 연필 끝이 날카로워야만 가는 선을 그을 수 있듯이 늘 머릿 속에서 창작의 칼날을 갈아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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