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21세기 코드로 읽는 三國志 인물학

攻·守·速·遲·勇·德·剛·柔

  • 권삼윤 < 문화비평가 > tumida@hanmail.net

    입력2004-11-02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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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지모와 용맹으로 자웅을 겨루는 삼국지는 문학서이자 교양서, 역사서이자 처세학 교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인은 경영의 지침서로 활용한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갖가지 ‘인물론’이 쏟아진다. 이런 시점에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인품과 행적,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은 조건을 곱씹어보는 것은 흥미와 의미를 더할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기독교도였던 그는 종교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아니, 살고 있는 것일까.

    사내들은 흔히 제 가슴에 품은 포부를 펼쳐 보이기 위해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그날을 위해 푸줏간 사나이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었던 그 옛날의 한신(韓信)처럼 험한 꼴을 보면서도 꾹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포부!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청운의 꿈으로, 때로는 엄청난 대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길래 온갖 수모를 견뎌내며 그걸 펼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데에는 15세기 중국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보다 더 효과적인 정보원은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나름의 포부와 능력, 자신감을 갖고 난세와 맞서려 했던 사나이들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관중은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바탕 삼아 거기에다 자신의 가치관을 더하고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드라마틱한 요소까지 곁들인 얘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은 물론 세상을 사는 지혜에도 눈뜨게 만든다. 그래서 한번 책장을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한다. 이 책이 문학서이자 교양서이기도 하지만 역사서로서, 또 처세의 교본으로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가나 경영인은 경영철학의 지침서로도 활용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삼국지 영웅론’ ‘삼국지 인간학’ ‘삼국지 경영학’ 같은 이름을 단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삼국지의 쓰임새는 이처럼 넓고 다양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모든 것을 다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올해에 대통령선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행적과 인품,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들 가운데 승자와 패자를 가른 조건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혀보려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승자의 조건이 바로 천하 제패의 조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정공법은 下策, 꼼수는 上策?


    ‘삼국지연의’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먼저 그들이 살았던 공간과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역적으로는 지금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지린(吉林)성 이북과 윈난(雲南)성 이남, 신장(新疆)성 이서를 제외한 중국 전역이 된다. 시간적으로는 후한 말기에 터진 황건적의 난(184)으로부터 시작, 위(魏)·촉(蜀)·오(吳)가 정립(鼎立)한 이른바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진(晉)을 건국(265)하기까지 약 1세기에 걸친다.

    그렇다면 그 무대가 됐던 중국이란 어떤 곳일까.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지라 중국인 스스로 ‘천하’라고 불렀다. ‘천하’의 주인은 그래서 ‘천자’가 됐다. 야망이 있는 자는 천하를 자신의 손에 움켜쥐려 했다. 천자를 향한 꿈이었다. 천하 제패의 야망이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하라는 말에서 이미 중국 대륙이 갖는 공간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중국을 실제로 여행해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동서와 남북간의 공간이동을 통해 목격하게 되는 자연과 인문환경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장대한 공간에선 상대를 밀어내 굴복시키는 전법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밀어내도 그 끝이 보이지 않거니와, 그렇게 밀고 있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때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복, 야습, 화공, 허위정보 유포 등이 가세하면 상황은 정말 복잡해진다. 전진과 공격이 절대로 능사가 아닌 것이다. 정공법은 오히려 하책(下策)이 되고, 꼼수같이 보이는 후퇴와 도망, 기습이 상책이 될 수 있다.

    모두 13편으로 구성된 병법의 교본 ‘손자(孫子)’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장기전을 피하라(제2 작전편)’ ‘적의 의표를 찌르라(제6 허실편)’ ‘기선을 제압해 국면을 전환하라(제7 군쟁편)’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라(제8 구변편)’ ‘지형에 따라 작전을 구사하라(제10 지형편)’ ‘화공의 효과를 높여라(제12 화공편)’ ‘밀정을 최대한 활용하라(제13 용간편)’ 같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준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싸움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중국인에게 싸움은 싸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심은 물론 천문, 지리에까지 두루 통달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말대로 그들에게 있어 싸움이란 지혜와 용기, 전투력 등 모든 것이 총동원되는 극적 모멘트다.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국은 공간적으로만 스케일이 장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수에서도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만큼 한번 싸웠다 하면 몇십만 대군이 동원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인해전술’을 구사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인적 자원은 차원이 다르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양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질적으로도 그러하다. 출중한 인물, 기상천외한 인재들이 부지기수라 그들만으로도 한 나라를 세울 만큼 엄청난 ‘인재 풀’을 형성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중국에선 예로부터 인재를 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자연발생적으로도 인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재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능한 리더란 바로 그런 인재들을 찾아내 적소에 배치해서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봤다. 유비(劉備)가 삼고(三顧)의 예를 다해 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고, 그랬기 때문에 유비는 유능한 리더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리더만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를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인재라 생각하는 자들이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펼칠 장(場)을 열어줄 리더를 선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원소(袁紹)의 아래에 있다가 그로서는 안되겠다 싶어 구조를 찾아간 순욱(荀彧)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공간적으로 장대하고 다양한 인재들이 풀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선 흑과 백의 이분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국지적 사고 또한 무용지물이다. 다면적 사고, 전방위 사고, 요즘 말로 해서 ‘글로벌 싱킹(global thinking)’이 요구된다. 그들은 인물을 논할 때 ‘그릇(器)’의 크기를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중국이 갖는 지리적 스케일과 다양한 인재를 포용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그들이 ‘능력’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릇’이라 한 것은 승패를 가리는 것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특정 개인의 능력과 운명, 그리고 우연이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하늘이 뜻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하늘의 뜻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란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민심이었으니 승자란 민심을 얻은 자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1841년 ‘영웅과 영웅숭배’를 쓴 영국의 사학자 칼라일이 출중한 능력을 가진 특정 개인을 영웅이라 칭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에 초점을 맞춘 데(‘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해 중국인들은 특정 개인과 함께 그를 둘러싼 집단과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춰 인물을 평가했다. 다시 말해 ‘관계’에 주목했던 것이다.

    무예에 뛰어나고 학문에 식견이 있는 자는 그 분야의 대가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전문가일 뿐이다. 전문가는 전체를 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는 재상은 될 수 있으나 천자의 재목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독불장군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영웅이 경계의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칭송이나 숭배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대신 어질고 덕 있는 인물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그 덕을 이루는 요체가 ‘그릇’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능한 인물로 비치는 사람이 덕 있는 인물로 추앙받았던 데는 이런 정신적 배경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명참모의 필수조건이란 어떤 것일까. 전문적인 식견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겠지만, 스스로를 낮추고 정치적 야망을 죽이는 일도 당연히 포함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 참모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시대에도 종종 이야깃거리가 되는 톱(top)과 브레인(brain) 사이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에서 부서장과 브레인이 술집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며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브레인은 톱에게 일의 맥락(context)을 명료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런 분위기를 잘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브레인은 어떻게든 짧은 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톱에게 전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톱은 꼭 그 브레인이 아니어도 정보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소스가 많으니 걸림돌이 아주 많다.

    요체는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우리 시대의 고민만은 아닌 듯, 이에 대해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세난(說難)’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유세(遊說)의 곤란함은 나의 지식으로써 상대편을 설득시키기가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또 나의 변설로써 상대편에게 나의 의사를 철저히 밝히거나 자기가 말할 바를 종횡무진으로 다 말하기가 어려워서도 아니다. 대체로 설득의 곤란함은 상대편의 심정을 통찰하고 상대편의 심정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맞추어 끼우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게 지나치면, 아니 잘못 이해하면 톱의 비위만 맞춰주는 꼴이 되고 만다. 최고 권력자가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이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사태를 제대로 보고하자니 톱을 불편하게 할 것 같고,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내 자신의 무능이나 잘못을 드러내는 꼴이 되기도 하니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가지는 있다. 하나는 톱이 평소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어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부담감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브레인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각색해 톱의 주파수에 맞도록 하는 일이다. 둘 다 결코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유능한 톱이 되는 것이나 브레인이 된다는 것이 모두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조조에게서 번뜩이는 재기와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진다면 유비에게서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를 편안히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비를 일러 흔히 정과 협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건 물론 장점이다.

    장각이 이끄는 황건의 반란군이 유주(幽州·지금의 허베이성 일대) 근방에 이르렀을 때 유주 자사 유언(劉焉)이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방을 곳곳에 내걸었다. 신장 7척5촌에다 양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이고, 양 팔을 뻗으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예사롭지 않은 체형을 가진 28세의 젊은이 유비도 한 왕실을 부흥하겠다는 일념에 주저없이 모병에 응했다.

    그때 8척 거구에 표범 같은 머리, 번뜩이는 눈,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우레를 닮은 목소리, 거친 말과 같은 힘을 가진 장비를 만나 의기투합,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수염이 2자나 되는데다 얼굴이 붉고 봉황의 눈에, 누에가 누운 듯한 짙은 눈썹을 가진 9척의 건장한 사나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관우였다.

    이들은 그곳에서 가까운 장비의 집 뒤뜰 도원에서 ‘동년 동월 동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에 죽기로 약속’하면서 의형제를 맺었다. 키가 제일 작은 유비가 맏형이 됐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어질고 슬기로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인데, 유비에게서는 그때에도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형제의 뜻을 굳이 따진다면 ‘의미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중국사회에선 아주 흔한 관습이었다. 유비의 조직은 이러한 의협적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어 법치에 기반을 둔 조조의 조직과는 성격이 판이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비(非)체제 성격이 강한 의협 쪽을 선호했다. 기계적인 제도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덕으로 사회가 운영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지금의 중국 무협영화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덕이란 계산을 초월하는 가치이자 세계다. 계산의 세계에서 1+1은 2가 되지만 덕의 세계에선 10도 되고 100도 될 수 있다. 유비의 덕은 그가 개울에서 노인을 두 번이나 업어 건네준 일화로도 확인된다. 노인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억지였다. 하지만 유비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를 업고 싫은 내색 한번 비치지 않고 두 번이나 개울을 건넜다. 그렇다고 그에게 뭐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일로 유비는 ‘쪼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는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다. 손자가 병법에서 으뜸으로 쳤던 것이 바로 덕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덕이라면 용(用)은 사람에게 뭔가를 따지게 하는 것이기에 손자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서 얻을 것은 있지만 빼앗길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를 멀리 하겠는가. 덕이란 이런 것이다. 나무가 크면 큰 그늘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서 쉴 수 있다. 그릇이 크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사람은 덕이 있는 자에게 모여든다. 맹자 또한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의 부림을 받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의 부림을 받는다. 천하에 도가 없으면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부림을 당하고,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부림을 받는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이다. 하늘을 따르는 자가 살아남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유비는 사마휘에게서 공명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형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깊은 융중(隆中)의 산속에 위치한 공명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는 성의를 보였다. 처음 두 번은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허탕을 쳤고, 세번째는 낮잠을 자고 있는 공명을 깨우지 못해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관우와 장비가 “그까짓 촌놈한테 형님이 뭐하러 몸소 가보려고 하시오. 아무나 하나 보내서 불러오면 그만일 걸” 하고 만류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고 끝까지 성의를 다했다.

    유비의 이런 행동은 두 번을 협박하고도 응하지 않자 마지막엔 “거절하면 목에 포승줄을 묶어서라도 데려오라”고 사자에게 엄명을 내려 기어이 사마의를 자기 앞으로 끌어낸 조조의 경우와 너무 달라 흥미를 자아낸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공명을 마주한 유비는 그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내 비록 이름이 없고 덕은 박(薄)하나 원컨대 선생은 비천하다 버리지 마시고 산에서 나오시어 도와주십시오. 비(備)가 삼가 가르침을 받자오리라.”

    공명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양(亮)이 오랫동안 전야에 묻혀 지내 세사에 게으른 터라 존명을 받잡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유비가 아니었다.

    “선생이 나오시지 않으면 저 어린 백성들을 어찌하라 하십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누가 그 청을 뿌리치겠는가. 유비에겐 그런 대의명분 이 있었다.

    삼고초려가 주위 사람들에겐 부질없는 짓거리로 비쳤을지 몰라도 유비는 이를 통해 그토록 갈망하던 천하의 재사 제갈량을 자기 곁으로 끌어들이는 쾌거를 이뤘다. 공명은 이른바 ‘천하 삼분지계’를 헌책하여 그 은혜에 보답했다.

    “동탁의 난 이래 천하에 군웅이 할거하고 있으나 최강자는 단연 조조입니다. 그는 원소보다 열등한 군사력을 갖고도 교묘한 계책으로 원소를 패퇴시켰고, 지금은 천자를 등에 업고 100만 대군을 호령하니 이겨내기란 극히 어렵습니다. 강남의 손권은 장강(長江)을 방패로 삼아 안전한데다 백성들이 그를 따르니 이 나라와는 원조할지언정 다퉈서는 안됩니다.”

    “이 땅 형주는 북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고, 남으로는 바다이며, 동으로는 오와 접하고, 서로는 파촉(巴蜀)과 통하는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그런데 유표는 패기가 부족해 이를 능히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늘이 당신께 주신 절호의 선물인 셈입니다. 형주를 차지하고 기름진 들이 1000리나 펼쳐진 이웃 익주를 점령하십시오. 그리하면 틀림없이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그 자리에서 공명을 군사(軍師)로 삼고는 스승의 예를 다했다. 그의 진언에 따라 형주를 손에 넣으니 천하의 조조마저 “교룡(蛟龍)이 이제 물을 만났구나” 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는가. 형주의 장악은 단지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한다는 의미 이상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바라고 바라던 바를 유비는 공명을 얻음으로써 이뤘다.

    이들이 만들어낸 절묘한 콤비 플레이를 흔히 ‘어수지교(魚水之交)’란 말로 표현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이를 두고 “고기와 물이 삼고 끝에 만났으니 바람과 구름이 사해에 인다”고 읊었다. 기존의 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사람들 역시 이익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난세에, 유비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과 협과 성으로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깨뜨려지지 않는 단단한 인간관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유비의 장기인 트러스트는 두 개의 기둥으로 떠받쳐졌다. 하나는 멤버들간의 강한 결속력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알아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하는 자발성이었다. 시스템 위주로 가동된 조조의 조직에서 기대할 수 없는 트러스트 덕분에 유비는 난세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난세를 경영하는 수완까지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변변치 못한 그였지만 이런 가공할 만한 자산을 가졌기에 끝내 한 마리 교룡이 될 수 있었다.

    손권은 조조와 유비에 비해 인상이 강하지 못하다. 스스로 피땀 흘려 기틀을 다진 창업자가 아니라 아버지 손견, 형 손책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출발했기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그는 3분된 천하의 한 축을 움켜쥐고도 천하를 얻으려는 의욕을 한 번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손권을 일러 ‘삼국지 인물기행’을 쓴 일본의 중국문학자 모리야 히로시는 ‘수성(守成)에 능한 조연 배우’라고 혹평했다.

    그는 변화하는 정세에 따라 어떤 때는 촉과 손을 잡고, 어떤 때는 위와 동맹을 맺는 등 정세에 대응하는 유연성을 보인 것 같으나 본질에서는 수동적이었다. 그가 집착했던 것은 유비가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는 형주의 귀속 정도였다. 손권보다 15세 위였던 손책도 일찍이 그의 이러한 성향을 꿰뚫어보고는 아무래도 그의 장점을 살려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던지 죽기 전에 손권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만약 강동의 백성을 몰고 조조와 원소가 다투는 틈을 타 천하를 노리고 싸우는 일이라면 너는 나보다 못하다. 그러나 어진 사람을 불러들이고 능력 있는 이를 뽑아 그들과 함께 강동을 지키는 일이라면 너는 나보다 나으리라.”

    손권은 형의 유지를 따랐다. 모험을 피하고 인재를 끌어들여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부하를 믿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는 그의 인물평은 그래서 나왔다. 그가 인재들을 가까이한 것은 형의 유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에 비해 인구가 적고 벽지라는 강동의 열악한 조건이 한몫 거들었다. 인재를 널리 구하는 일에서 그만큼 불리했기에 소중히 다룰 수밖에 없었다. 손권은 토착 호족들과도 어울려 그들의 지원을 받아내는 등 인화에선 누구 못지않은 강점을 보였다. 그 성공비결에 대해 그는 이런 말을 자주 들려줬다.

    “상대의 장점을 높이 사주고, 대신 단점은 곧 잊어버린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라 누구나 단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만 부각시키면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반대로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주위에서 분위기를 띄워주면 놀라운 성과를 발휘한다. 손권은 인사관리의 달인답게 그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지극히 열세인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혼비백산케 했고, 형주 공방전에선 천하의 명장 관우를 쓰러뜨렸다.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던 여몽을 발탁, 중책을 맡기면서 공부할 것을 권면해 ‘괄목상대’의 고사를 탄생시키는 인재로 키워냈던 것을 보면 사람을 다루는 면에서 손권은 조조를 분명히 앞섰다. 하지만 그의 강점은 행정분야에 국한됐다. 전쟁이나 정치에선 그렇지 못했다.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오직 행정가로 일관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주유 노숙 여몽 육손 제갈근 등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수와 참모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이 큰 힘이 돼주었다. 그러나 손권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다. 죽마고우 손책을 도와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손권의 든든한 지지에 힘입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오의 총사령관 주유는 형주를 손에 넣으려다 번번이 공명에게 저지당하자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미 주유를 내셨다면, 왜 또 제갈량을 내셨나이까?” 하고 애달프게 외치며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주유의 사후 전군지휘관이 된 노숙은 형주를 유비에게 내주면서 그와 동맹관계를 수립해 조조를 견제할 것을 진언하는 등 오의 외교방침을 바꾸는 데 진력했다. 유비가 형주를 기반으로 해서 익주를 손에 넣으며 세력을 급격히 키워나가자 두려움을 느낀 손권이 유비를 칠 계획을 세웠지만, 노숙은 끝까지 촉과의 동맹을 권해 두 나라 사이에선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4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노숙의 뒤를 이어 군권을 맡은 여몽은 노숙과는 달리 촉과의 동맹보다는 형주를 되찾는 일에 골몰했다. 그 결과 형주를 손에 넣고 형주 책임자 관우마저 잡아들이는 등 손권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 또한 46세로 죽었다.

    그나마 장수한 것은 육손이었지만 그는 말년에 후계자 문제에 말려든 죄로 손권에게 질책받고는 이듬해 63세로 세상을 떴다. 인재들이 이렇게 차례로 떠나가면서 손권의 시대도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됐다.

    변방에서 몸을 일으켜 마침내 천하를 삼분한 조조·유비·손권은 걸출한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조조의 경우 통찰력과 결단력, 적극적인 인재 활용, 엄격한 신상필벌, 유비의 경우에는 의협에 바탕을 둔 굳건한 인간관계, 손권의 경우에는 뛰어난 인사관리와 진언 경청이 승인(勝因)이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그런 몇 가지 요인만으로 그들이 승자가 됐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듯하다. 한때는 장점이었던 것이 조건이 바뀌면 단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맞물려 때로는 플러스 방향으로, 때로는 마이너스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학생의 성적이나 태도를 평가하거나 회사나 기관에서 직원의 인사고과를 평정할 때에도 여러가지 평가항목을 마련해 각 항목마다 주어진 기준에 따라 점수를 부여한다. 하물며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 어찌 몇 가지 항목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들에 대해서도 인사고과 평정방식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각자의 장점과 단점은 물론 성향까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챙기다가 이런 성적표가 이미 작성돼 있음을 발견했다. 일본의 월간지 ‘역사가도(歷史街道)’ 1993년 7월호는 일본의 삼국지 전문가 세 사람(중국문학자 모리야 히로시, 작가 후지모토 기이치, 사학자 가노 나오사다)에게 설문지를 돌려 그 결과를 채점표로 만들었다.

    평가항목은 결단력, 통솔력, 실행력 등 20가지로 각 5점 만점이었는데, 채점결과 조조가 88.1점으로 최고점을 기록했다. 다음이 83.6점의 손권, 유비는 79.7로 꼴찌였다(표 참조). 조조가 최고의 성적을 거둔 것은 위나라가 강국이니 이해할 수 있다지만, 손권이 유비를 앞선 것은 좀 의외다. 하지만 채점표를 들여다보니 그럴 법도 하다. 손권은 각 항목에서 대체로 고른 점수를 얻은 데 비해 유비는 기복이 심했다. 카리스마, 정의감, 운에서는 최고점을 얻은 반면 재력, 구상력(構想力), 후계자 육성, 교양에선 최저점을 받았다. 손권은 인재활용에서만 최고점을 받았으나 어느 항목에서도 3.3점 아래는 없다. 조조도 포용력에서는 3.0의 낮은 점수를 받았다.

    조조는 예상대로 결단력, 실행력, 구상력, 재력, 권모술수, 교양 등 무려 6개 항목에서 최고점을 기록했다. 그가 최고점을 얻은 항목은 개인적 재능이나 특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 그가 인망이나 포용력, 민정수완 등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점을 받은 것을 보면 인간관계나 사회관계, 즉 공공적 분야에선 취약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비의 경우 최하점을 얻은 구상력, 재력, 교양은 어떻게 보면 약점이라 하기 어렵다. 변변한 기반 없이 교룡이라 불렸으니 오히려 치하할 일일 수도 있다. 그는 부하들에게 자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도가(道家)적 태도를 견지했기에 그 스스로 무언가를 꾸미고 짜낼 까닭이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구상력에서 최하점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점을 받아야 마땅하다. 구상력이라는 게 모두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또 그 지향하는 바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비전 같은 것이라면 말이다.

    조조·유비·손권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는 이 시점에서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당신이 참모의 자질을 갖고 있다면 이 세 인물 가운데 누구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고 싶은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들에 대한 독자의 평가가 될 것이다.

    제2라운드가 끝나가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킨 것은 다름 아닌 관우의 죽음 때문이다. 오의 여몽이 꾀를 내어 총사령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고는 그 자리에 육손을 앉혔다. 관우는 육손이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의 공격에 대비하던 군사들을 조조 쪽으로 돌렸다. 여몽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형주로 공격해 들어갔다. 앞에서는 조조군이, 뒤에서는 여몽의 오군이 밀려들자 충의와 용맹으로 똘똘 뭉친 관우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마지막은 정말 관우답지 못했다.

    그게 219년의 일인데, 그 이듬해에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것 같던 조조마저 장자 비(丕)에게 양위하고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로 치면 살 만큼 산 나이였다. 조비는 즉위하자마자 헌제가 양위하는 형식을 빌려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한 왕조는 명실공히 사라졌다. 이 엄청난 일을 조조는 끝내 이루지 못했는데, 젊은 조비는 서슴없이 해냈다. 그의 이러한 과단성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것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미숙함의 발로일 수도 있다.

    왕위를 찬탈당한 헌제는 이듬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귀의 객이 됐다. 그 소식을 접한 유비는 헌제에 대한 상례(喪禮)를 다한 다음, 위(220∼265)의 조비에게 질세라 스스로 황제가 되어 한실(漢室)의 적통자임을 대외에 과시하니, 그것이 이른바 촉한(221∼263)이다.

    관우를 잃은 터라 유비는 즉위식이 끝나자 곧 복수전에 돌입했다. 조운(趙雲) 등이 “경계할 자는 손권이 아니라 새로 떠오르는 조비”라며 극구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일이 꼬이려고 해서인지 출병준비를 서두르던 장비가 부하의 손에 암살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의형제 관우에 이어 장비까지 잃게 되자 유비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그래서 복수심이 더 강렬해졌는지 그는 계획대로 동정(東征)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패였다.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는데, 결국 그것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의 심신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63세였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삼국지’는 이렇게 전한다.

    “승상의 재주는 조비의 열 배나 되니 반드시 한실을 부흥시켜 천하 대업을 이룰 것이라 믿소. 다만 근심되는 것은 내 아들 선(禪)이 변변치 못함이오. 아무쪼록 태자를 보좌하되, 그 보람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대가 제위에 올라 대업을 성취하기 바라오.”

    이에 공명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신을 믿음이 이와 같으시니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새 황제 폐하께 충의와 정절을 다 바치겠습니다.”

    유비는 다시 태자 선에게 유언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그를 아비처럼 따라야 하느니라.”

    굳이 유비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실패의 원인은 나 자신이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걸 깨닫지 못해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비가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 것이다.

    조조, 유비와 20년 이상 나이차가 나는 젊은 손권이 오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유비의 죽음으로 삼국지 제2라운드 게임은 끝났다. 조비와 유선을 새 선수로 맞아들인 가운데 제3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엔트리 상에는 주전선수가 조비와 유선, 손권이라고 돼 있었지만, 실제로 경기에 임할 선수는 위의 사마의, 촉의 제갈량, 오의 손권이었다. 이것만 봐도 제3라운드 경기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찬탈의 오명이 늘 따라다녔던 조비. 그는 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여러가지 궁리를 다했지만, 재위 7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위의 영광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조예, 조방, 조모, 조황 등이 제위에 올랐으나 너무 어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실권은 승상인 사마의,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등에게 맡겨놓다시피 했다.

    조조가 사마의를 발탁했으나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사마의 또한 그것을 내색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사마’라는 성은 고대 중국의 군정(軍政)을 다스리던 관명. 이를 보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군사(軍師)를 배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라면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마의는 조조와 닮은 점이 많다. 조조가 그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도 현실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 기질, 그 못지않게 사마의도 두둑한 배짱을 가졌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흑심을 가까이 있는 누군가가, 그것도 자기 못지않은 능력과 배짱을 가진 자가 지켜보고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니 조조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일 그가 세운 나라가 사마 집안에 의해 무너져 조조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을 보면 그의 선견지명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불운을 슬퍼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촉의 사정도 위에 비해 그리 나을 게 없었다. 유선이 제위에 올랐다고는 하나 유약하기 이를 데 없어 공명이 국정을 도맡아 꾸려가야 할 처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명은 유비와의 약속이 없었다 해도 유선을 제치고 국정을 농단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일에 몸소 수범을 보였고 청렴했으며, 무엇보다도 부지런했다.

    공명의 목표가 한실의 부흥이었으니 위와의 대결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 사마의와의 싸움은 필연적이었다. 공명은 북방 공략을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렸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었고 익주는 피폐해 있습니다.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궁궐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실한 장수들은 궁궐 밖에서 자신의 몸을 잊고 있습니다. 선제의 각별한 은총을 추모하고, 폐하께 그 보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여 한실을 부흥시킬 공적을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신은 큰 은혜를 받은 감격을 이기지 못해 금일 먼길을 떠나고자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떠난 227년의 제1차 북벌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고사만 만들어내고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듬해 겨울, 제2차 북벌도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위의 사마의가 수성전으로 나와 승기(勝氣)를 뺏을 기회를 도무지 주지 않는데다 군량만 축내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마의는 군사집안 출신답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는 손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다시 2년간의 준비 끝에 234년, 공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방으로 향했다.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는 이번에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속이 탄 공명은 족두리와 치마저고리를 함에 넣고는 이런 글과 함께 사마의에게 보냈다. 그의 성질을 건드려 싸움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중달(仲達·사마의의 자), 그대가 기왕 대장이 되어 중원의 군마를 통솔하였음에 날램을 잡아 자웅을 결할 생각은 아니하고 토굴만 굳게 지키고 도전(刀箭·칼과 화살)을 피하니, 아녀자와 무엇이 다르다 하리. 이제 사람을 시켜 족두리와 치마저고리를 보내니, 싸우지 아니 하려면 두 번 절하고 받을 것이며, 혹시나 아직도 남자의 흉금으로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거늘 일찍이 회답하여 날을 정하고 싸움을 결단하라.”

    사마의는 서찰을 읽고도 태연했다. 오히려 사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 승상의 침식과 일의 번한함은 어떠한가?”

    “승상께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주무시며, 대소사 어느 하나 눈 아니 거치심이 없사옵고, 드시는 것은 하루에 불과 몇 승(升)이오이다.”

    이를 듣고 난 사마의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장수들에게 “공명이 그렇게 식소사번(食少事煩)하니 어찌 오래갈까”라고 하고는, 사자에게는 이렇게 일렀다.

    “돌아가거든 승상 팔자가 기구하다고 여쭈어라.”

    오장원(五丈原)의 진지로 돌아온 사자는 공명에게 사실대로 복명했다. 이에 공명은 무릎을 치며 “그가 참으로 나를 깊이 알았구나!” 하고 탄복했다.

    사마의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명은 오장원에서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던 것이다. 공명은 출사표에서도 밝혔던 대로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이나 구차히 보전하려고 제후에게 알려 영달을 구하지도 않는’ 성품 때문에 유비가 떠난 뒤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그의 인품을 빛나게 하지만, 촉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대소사를 공명이 관여해야 한다면 우선 그의 건강을 심히 해쳐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누가 대신 그의 자리를 메울 것인가. 설령 그런 결정적인 위기가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일이 몰리면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하던 일을 손에서 놓게 된다. 인화도 생산성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촉이 바로 이런 꼴이었다.

    유선이 일을 적절히 배분해 공명에게는 쉴 여유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면 유비가 꿈꿨던 한실 중흥은 이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선은 그런 재목이 못 됐다. 유선이 그러하다면 공명 스스로라도 그렇게 끌고 갔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설혹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해도 2인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처신한다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기에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 상대가 유비였다면 주파수가 맞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나, 유선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라 천하의 공명도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 게 아닌가싶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부하의 잘못에 대해서도 대신 벌을 받고, 최고의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가진 것은 고작 밭 몇 마지기라며 청렴을 떨었으니 사람들이 일을 찾아 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잘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가야 하고, 그걸 갖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것인데, 승상 스스로 그것을 막는 꼴이 되었으니 누가 은공을 기대하고 공을 세우려 들겠는가.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처신하는 사이에선 트러스트보다 강한 힘이 없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면, 또 그럴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면 공정한 신상필벌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공명이 유비·관우·장비가 떠나고 자신만 홀로 남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때의 공명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불안감은 북벌을 서두르는 그의 행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유비 또한 그렇게 가지 않았던가.

    유선은 공명이 전사한 뒤로도 29년이나 더 제위에 머물렀다. 유비가 촉을 세운 지 42년째 되던 263년, 사마소가 이끄는 위군이 쳐들어와 붙잡힌 몸이 되면서 촉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환관과 무능한 신하들 사이에서 놀아나다 그런 꼴을 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를 쓰러뜨리고 진(晉)을 건국했다. 진은 그로부터 15년 후인 280년, 육손이 죽은 뒤 실수를 거듭하면서 근근히 꾸려가고 있던 오마저 괴멸시키고 말았다. 삼국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중국 대륙엔 새로운 통일왕조 진이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진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기틀을 구축한 사마의는 과연 조조·유비·손권에 앞서는 인물이었을까. 그는 조조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이니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나 세 사람보다 더 출중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의 승인은 오히려 그가 상대했던 조비·유선 등 2세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싸움이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기에.

    영웅은 1대로 끝난다. 선대가 구축한 재산과 권위 등 외형적인 것들은 상속될지 모르지만,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노하우는 DNA 위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어서 절대로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세상의 법칙인데, 2세들은 종종 그 사실을 몰라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조식·유선이 그러했고,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손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자기가 피땀 흘려 체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자기것이 되지 않는다. 그걸 무시하고 일을 저지른다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삼국시대는 참으로 험난한 세월이었다. 그것도 막을 내렸으니 이제 제3라운드의 성적을 정리해보자. 역전의 용사들이 사라진 뒤라 경기장은 스산했다. 오직 공명의 출사표만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을 뿐이다.

    이 글의 주제는 천하제패의 조건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인심과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 제 때를 맞추어 결행하는 결단력, 인재를 끌어들이고 그들이 제 몫을 다 하도록 만드는 인화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신중해야 할 때와 과감해야 할 때를 가릴 줄 아는 능력과,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 같은 것 말이다. 왜냐하면 말년의 공명에서 보듯이 원리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때에 맞춰 변화를 부릴 줄 모른다면 뜻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 가운데 하나가 ‘시(時)’ 아니던가. 이때의 시는 고정된 어떤 ‘시점(time)’이라기보다는 변화하는 시간에 ‘적절한(timely)’이란 뜻에 가깝다. 그만큼 그들은 동적(dynamic)인 사고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강조할 것은 절대 소탐대실(小貪大失)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웅이 1대로 끝나듯 아무리 강성한 대제국이라도 천년 만년 지속되지는 않는다. 지속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영속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게 자칫 세상을 살아가고픈 의욕을 꺾어놓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한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보여준 생각의 크기와 행동의 고매함이, 그 인간은 물론 그가 이룩한 조직이나 국가에게 무궁한 생명력을 부여해주고 있기에 그러하다. 천하제패의 조건은 그런 것이 아닐까.

    춘추전국시대를 빛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맹자(孟子)는 역사를 일러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반복’이라 정의했고, 나관중 또한 “여럿으로 쪼개진 것은 언젠가 하나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것은 언젠가 다시 여럿으로 쪼개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라는 멋진 말로 ‘삼국지연의’를 시작했다.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는 맹자의 말처럼 진시황에 의해 수습되어 진(秦)이라는 사상 초유의 통일 제국이 탄생했다. 진은 단명했으나 곧 한(漢)이라는 거대 제국에 의해 400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던 것이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광대한 중국 천하를 놓고 군웅들이 다시 한번 쟁탈전을 벌이는 분열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삼국지는 이때부터 약 1세기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삼국시대는 그러므로 분열의 시대였다. 사회를 움직이는 어떤 고정된 잣대나 가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선 난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높은 학식이나 지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깨나 쓸 수가 있었지만, 기존의 가치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난세에선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는 야망의 시대였다. 기존의 틀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야심가들이 너도나도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힘 겨루기에 달려들었다. 심판도, 룰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 하찮은 필부도 운만 좋으면 왕후장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야망의 시대, 자유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고, 인재 또한 둑이 터진 듯 한꺼번에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다양한 인물의 면면을 보라.

    삼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조조(曹操)와 유비, 손권(孫權)을 비롯하여, 청류와 탁류가 싸우는 통에 어부지리로 얻은 권력을 오로지하다 그만 폭군의 대명사가 돼버린 동탁(董卓), 뛰어난 무예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결국 주군 동탁까지 죽여버린 여포(呂布), 연환계(連環計)로 동탁과 여포를 동시에 괴멸시킨 후한의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그때 미끼가 되기로 자청한 미인 초선(貂蟬), 반(反)동탁군의 대장으로 한때 북방을 주름잡았던 원소, 원소와 자웅을 겨루고자 한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袁術), 유비와 동문수학하고 북방에서 원소와 패권을 다투다 쓰러진 공손찬(孔孫璨), 형주 자사로 한때 유비를 도와준 유표(劉表), 명의 화타(華陀) 등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조조 아래에는 그를 삼국의 제일인자로 만드는 데 최대의 공로자였던 책사 순욱, 순욱의 생질로서 사려 깊은 일처리와 판단력으로 조조를 도왔던 순유(荀攸), 조조의 심복으로 ‘난폭자’란 별명까지 얻은 애꾸눈 하후돈(夏侯惇), 조조의 자랑스런 선봉장 하후연(夏侯淵), 교묘한 처세술로 군사의 자리까지 오른 정욱(程昱), 조조를 원소와 비교, 모든 면에서 조조가 뛰어나다고 한데다 손책의 죽음을 예언한 곽가(郭嘉), ‘난세의 철새’ 가후(賈珝), 적벽전투에서 패한 조조를 호위해 허도로 철수한, 투구솜씨가 뛰어난 허저(許楮), “사사로운 일로 국사를 망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조조를 끝까지 지켰던 무장 서황(徐晃), 여러 차례 주군을 바꿨으나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하는 위엄으로 오를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료(張遼), 군사보다는 학문을 좋아해 다른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던 이전(李典), 공손찬 정벌과 관도대전에서 밟히면서도 끝내 용맹함을 잃지 않아 조조가 “나의 한신”이라며 자랑했던 장합, 조비의 등극에 앞장섰던 화흠(華歆), 후한의 헌제를 장안에서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하다 위로 가서 태위의 지위까지 오른 종요(種繇), 조조로부터 “2000석의 장수가 모두 가규와 같다면 걱정할 게 없다”고 칭송받은 가규(賈逵), 용감하게 싸웠으나 사로잡힌 몸이 되는 통에 오에 항복, 끝내 그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해 저세상으로 떠나야 했던 무장 우금(于禁), 관도전투에서 발석거로 대항해 승리를 이끄는 데 큰 힘을 보탠 모신 유엽(劉曄), 조조가 동탁 토벌을 위해 의용군을 모집할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등 매사에 솔선한 악진(樂進), 괴력 무쌍의 호걸로 조조를 지키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전위(典韋), 조조의 뒤를 이어 위왕이 된 조비(曹丕), 문재(文才)가 뛰어난 조조의 차남 조식(曹植), 촉의 승상 제갈량을 쓰러뜨리고 위가 삼국 최고의 강국임을 증명한 사마의 등이 있었다.

    유비 아래에는 유비와 도원의 결의를 맺고 유비를 위해 신명을 다 바친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유비가 삼고의 예를 다해 군사로 맞아들였던 재사 제갈량(諸葛亮), 냉정함과 침착함으로 무장의 귀감이 됐던 조운(趙雲), 풍모가 좋지 않아 인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애석하게 요절한 방통(龐統), 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젊은이 못지않은 기개를 보여줬던 무장 황충(黃忠), 조조도 두려워한 무법자이자 떠돌이 맹장이었던 마초(馬超), ‘읍참마속’의 희생자 마속(馬謖), 무예는 출중했으나 배반을 밥먹듯 하여 공명을 괴롭혔던 맹달(孟達), 활과 마술에 능통했으나 선비로 남길 원했던 미축, 유비를 제갈량에게 소개하여 유비의 아래에 있다 조조가 모친을 인질로 가두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수하가 됐던 재사 서서(徐庶),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위탁하고 있을 때 “나는 세상의 움직임을 알 수 없지만 형주에는 시국 정세를 읽을 줄 아는 공명과 방통이 있다”면서 유비가 그토록 찾고자 한 재사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일등공신 사마휘(司馬徽), 유약함의 상징처럼 돼버린 비의 아들 유선(劉禪), 유선의 군사였던 강유(姜維) 등이 있었다.

    또 오나라에는 건국의 아버지 손견(孫堅), 그의 후계자 손책, 적벽대전의 최고 영웅 주유(周瑜), 오의 외교 대가 노숙(魯肅), 손견이 낙양의 우물 밑바닥에서 주운 인감이 전국옥새라고 감정한 정보(程普),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진언해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황개(黃蓋), 고사성어 ‘괄목상대’의 주인공 여몽(呂蒙), 공명의 형이자 손권의 책사로서 늘 화합을 강조했던 제갈근(諸葛瑾), 의젓함과 냉정함으로 손씨 집안을 도운 육손(陸遜), 손권이 “조조에게 장료가 있다면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며 치켜세웠던 감녕(甘寧), 손책이 죽자 비통에 빠진 손권에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격려하는 등 그의 참모 노릇을 톡톡히 해낸 장소(張昭), 적에게 포위된 손책을 구하기 위해 육탄으로 맞서 그를 구해낸 무장 주태(周泰), 주군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적군을 격퇴했던 능통(凌統) 등이 있었으니, 여기에 원소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책사 전풍(田豊), 관도싸움에서 지구전으로 나갈 것을 원소에게 진언한 모신 저수(沮授), 기인 예형과 공자의 후손으로 재기를 자랑했으나 끝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비운의 공융(孔融) 등을 보태고, 다시 그 사이사이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까지 합친다면 인명 백과사전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다.

    삼국시대는 황건적의 난에서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 조조·유비·손권에 의한 천하 삼분시대,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이 힘을 겨뤘던 2세 시대 등 크게 3개의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를 각각 제1, 제2, 제3라운드라 명명하고, 각 라운드별로 승자와 패자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호족과 환관들의 전횡, 또 그들끼리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했던 후한 말,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노한 민심은 끝내 민란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자는 태평도의 수령 장각(張角). 머리에 누런 띠를 둘렀다 하여 흔히 ‘황건적’이라 부르는 반란의 주모자 장각은 “갑자년(184)에 한 왕조를 뒤엎고 천하를 평정하면 대길하다”는 말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천하의 행방이 민심에 달려 있음을 그 또한 이렇게 확인시켜줬다. 선거라는 민주적 제도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무엇이 정치의 요체인지는 그 당시의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나름대로 훌륭하게 작동시켰던 것이다.

    황건적은 전국 8개 주에서 동시 다발로 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흑산적과 태평도의 한 갈래인 오두미도도 이에 합세했다. 바야흐로 난세의 회오리가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은 권력투쟁을 일시 중단하고 토벌군을 조직해 봉기 현장으로 내려보냈으나 그들을 당해내지 못해 관군들은 여기저기서 밀리고 있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조조였다. 황건적이 몰고 온 난세는 30세의 젊은 조조를 난세의 리더로 떠오르게 했다. 당시 24세였던 유비는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후일 강동의 실력자가 되는 손견 역시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조조만이 그런 영광의 대열에 선착한 것이다. 유비가 정치무대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였다.

    조조의 등장으로 사태는 반전됐다. 반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얼마 안가 주모자 장각마저 병사했다. 그 잔당들이 각지에 흩어져 저항을 계속했지만, 한시름 덜은 조정은 또 다시 권력투쟁의 흙탕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영제(靈帝)의 죽음이었다. 영제의 황후 하태후가 낳은 소제(少帝)가 제위에 오르자 실권을 장악한 태후의 오빠 대장군 하진(何進)이 원소 등과 힘을 합쳐 환관들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태후가 이에 제동을 걸었고, 그 바람에 하진만 모살됐다.

    이를 목격한 원소는 궁에 들어가 환관 2000여 명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하진의 부름을 받고 낙양(洛陽)으로 들어온 동탁은 소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패잔병들을 거두어 권력을 장악했다. 동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소제를 폐위하고 소제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 진류왕을 헌제(獻帝)로 옹립하면서 상국(相國·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황건적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운 조조와 환관들을 쓸어버린 원소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동탁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조조와 원소는 각자 자기네 본거지로 돌아가 전국의 군웅들과 함께 동탁 토벌군을 결성했다. 이른바 ‘반동탁연합군’은 그렇게 해서 권력의 한 축을 이뤘다. 그 즈음 천하는 동탁군과 반동탁군으로 이분됐다.

    연합군의 근거지가 낙양과 가까워 위협을 느낀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으로 천도하는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군웅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시작돼 연합군은 분열되고 만다. 덕분에 천하를 오로지하게 된 동탁은 궁 안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했고, 성 밖에 왕궁 못지않게 으리으리한 전각을 지은 후 거기에다 30년을 먹고도 남을 양식과 재물을 비축하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그래서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곁에는 마술과 궁술에 뛰어난데다, 명마 ‘적토마’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여포가 버티고 있어 누구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천하를 쥔 동탁의 강함은 어떻게든 그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무리들을 키워내고 있었으니 실은 약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 일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사도(司徒) 왕윤이 가무에 뛰어난 미인 초선을 미끼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기 시작하자 여포가 양아버지 동탁을 주살하고 만 것이다. 동탁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여포의 세상이 된 것도 아니었다. 동탁의 잔당인 이각, 장사 등이 여포를 죽이려 달려들자 그는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왕윤은 처형됐다.

    동탁의 죽음과 여포의 줄행랑은 뜻밖에도 조조에게 행운을 안겨줬다. 그런 혼란기에 장안을 탈출, 낙양으로 돌아가던 헌제를 조조가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모심으로써 대의명분도 얻고 그를 통해 세력도 규합하는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조가 이렇게 권력의 축을 향해 다가서고 있을 때 유비는 변변한 근거지 하나 마련하지 못해 힘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몸을 의탁하는 서글픈 나그네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조조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원소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원소는 조조를 자신의 상대라고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이같은 오판은 그후 관도(官渡)싸움에서 대패하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했다. 병력의 수나 군량 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던 원소군이 조조군에게 패한 것은 원소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라 원소는 그 때문에 화병이 나서 2년 뒤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조조·유비·손권, 1라운드 A학점


    관도싸움 초기 원소군의 진영에 머물고 있던 유비는 의형제 관우가 원소의 양팔 격인 장수 안량(顔良)과 문추(文雛)의 목을 베는 일이 일어나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면목이 없어 형주(荊州)를 찾았다. 당시 형주 자사(刺史·지방장관)는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에 선 유표(劉表)였다. 그는 부임 당시 무법천지였던 형주를,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 괴량·괴월 형제와 채모 등을 초빙해 자문을 구해 평정한 데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정도의 실력까지 갖춘 명실공히 강남의 실력자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유비에게 변방인 신야(新野)를 맡겼다. 거기서 유비는 한동안 생사를 모른 채 떨어져 있던 관우와 장비 형제를 다시 만났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등 형주 시절을 참으로 귀중한 시간으로 활용했다. 그의 취약점은 책사(策士)가 없다는 것. 그래서 수경선생으로 불리는 사마휘로부터 형주에 공명과 방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삼고의 예를 갖춰가며 공명을 자기 곁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당시 유비가 이런 재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형주 땅을 찾았기에 행운을 얻었다고 보면 하늘이 그를 어여삐 보았음에 틀림없는 듯하다.

    한편 손권은 건업(建業·지금의 난징)에 도읍을 정하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작업에 들어갔고, 조조 또한 천하 14개 주를 합병하면서 220년 드디어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질세라 유비 역시 유표가 죽은 후 형주를 손에 넣은 데 이어 한중까지 평정하고는 한중왕이 됐고, 다시 익주(益州)마저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촉한을 세우고 왕이 됐다. 그 이듬해인 222년에는 손권마저 오왕이라 칭했다. 황하 유역의 위(魏), 강동의 오(吳), 사천의 촉(蜀)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삼국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진행된 제1라운드의 성적만 본다면 조조·유비·손권은 A학점을, 동탁·여포·원소·유표는 F학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A학점을 받은 세 선수만이 제2라운드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탁·여포·원소·유표는 왜 F학점을 받았을까. 이름하여 이들 ‘패자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젊어서부터 배포도 크고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도 있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는 동탁은 하진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도 적은 군사를 대군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를 부릴 줄 알았고, 낙양에 들어와서는 소제를 보호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장수 여포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단기간에 승승장구했다.

    사람의 능력 또는 그릇의 크고 작음은 그 지위가 높고 귀해질 때 가장 잘 드러나는지, 그는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제까지 쌓아올린 것들을 와르르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큰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곧바로 이를 사물화했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행동했다. 미인계에도 쉽게 걸려들 만큼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도 드러냈다. 그런 그에게 온전한 참모 또한 있을 리 없었으니 제동장치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독재와 사치, 향락의 길로 마구 치달았다. 전투력이랄 것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왕윤의 연환계에 걸려들어 여포가 풀어놓은 자객에게 비명횡사, 독재자의 말로를 몸소 보여줬을 뿐이다. 그는 삼국지 제일의 악역으로 평가받는다.

    출중한 무술로 산천초목까지 떨게 했던 여포. 용맹성이란 점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지만 그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판단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동탁과는 배짱이 맞아 그의 양아들이 됐고 지근 거리에서 그를 지키는 경호실장 노릇을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의(義)로써 형제를 맺은 유비·관우·장비와는 달리 그 이해구조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런 문제가 터졌을 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머리도 없었기에 한번 불이 붙으면 그것으로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동탁과 여포 사이에 초선이라는 미인이 끼어들자 두 사람은 자석의 마이너스극이 마이너스극을 만난 것처럼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인간관계가 무엇에 바탕을 둬야 하는지, 인간이 왜 사리분별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반면교사 노릇만큼은 톡톡히 해냈다.

    여포는 독재자 동탁을 주살했다는 이유로 한때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탁의 잔당에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의탁할 곳을 찾아 헤매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 시절 유비 또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고 심지어는 빈말일지라도 “나 대신 이 땅을 다스려 달라”는 부탁까지 들었다.

    그러나 여포는 달랐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의리 없는 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설령 그를 받아들인 이도 그의 오만불손함을 보다못해 곧 쫓아버리고 말았다. 여포는 원소에 이어 장량, 장막, 유비 등을 찾아 전전하다 결국 조조에게 잡혀 목을 베이며 배반과 오만, 그리고 비굴함으로 얼룩진 삶을 마감했다. 이런 여포의 삶을 보면 출중한 무술과 용맹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배우고 익히려는 것일까. 여포는 그것을 우리에게 되묻는다.

    원소는 후한시대 최고의 관직이었던 3공 자리를 무려 네 차례나 연임한 집안의 출신이라 신분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조금도 남부러울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진의 수하가 되어 하진이 환관들에게 주살될 때 궁중으로 들어가 환관 2000명을 순식간에 살육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만큼 과단성이 있었고, 보스기질에다 정치적 감각까지 겸비해 반동탁군의 선봉장을 맡기도 했다. 연합군은 비록 공중분해되고 말았지만, 기주(冀州)를 본거지로 한 황하 북방 전역을 차지하는 등 실리도 챙길 줄 아는 실력가였다. 북방의 공손찬까지 쓰러뜨리자 그에게 맞설 자는 조조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조와의 대결은 필연의 수순이었다.

    200년 2월, 드디어 원소군은 관도에서 조조군과 맞붙었다. 원소는 이곳에서 실책을 거듭해 패배를 자초함으로써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패배한 데에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명문가 출신이었고 머리도 괜찮은 편이었다. 태평성대라면 이러한 조건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겠지만, 그가 살아간 시대는 난세였기에 오히려 그런 조건이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자만심은 버려야 했는데, 그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변혁의 기운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났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중심에선 변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명문가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성향이라 고정관념에 빠져 있게 마련이다. 삼국시대에 큰 족적을 남긴 조조 유비 손견 동탁 여포 공명 사마의 등은 하나같이 변방 출신으로 이렇다할 배경이 없었다. 대신 야망만큼은 컸다. 거칠었기에 웬만한 세파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난세에선 야성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원씨 집안에는 인물도 많았다. 이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은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겠지만, 이런 집안일수록 서로 잘나서 내부갈등을 빚기 십상이다. 원소에게도 원술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어 늘 속을 끓여야 했다. 원소는 측실 출신이나 원술은 정실 소생이라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원소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옛날에 잘 나가던 시절만 생각했다. 이는 참모들의 진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일을 처결해간 그의 행태로 증명된다.

    게다가 그는 젊은 시절에 보여준 과단성은 어디다 내버렸는지 우유부단하기까지 해서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기가 일쑤였다. 그의 정치적인 입지는 물론 생명에도 치명타를 입힌 두 가지의 큰 실책도 여기서 배태됐다.

    동탁이 죽은 후 헌제가 낙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참모들은 원소에게 조조에 앞서 헌제를 모셔야 된다고 진언했으나,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조에게 기회를 내주고 말았다. 그때 원소 수하에 있었던 순욱은 “그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며 조조의 진영으로 들어가 장자방 노릇을 했으니 원소의 손실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조조가 날개를 달았다면 원소는 덩굴째 굴러온 호박을 차버린 꼴이었다.

    두번째 실책은 천하의 향배를 가르는 관도싸움을 전후해 일어났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재기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조조군이 유비군을 정벌하고 있을 때 책사 전풍(田豊)은 조조군을 배후에서 칠 것을 진언했으나, 원소는 자식이 병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관도의 싸움은 그때 패한 유비가 원소의 진영을 찾아온 까닭에 시작됐으니 결과적으로 전쟁을 부른 셈이 됐던 것이다.

    사실 원소군은 병력과 물자 면에서 5대 1 이상의 절대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잘만했으면 조조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용장 안량과 문추가 조조군에 있던 관우의 손에 목이 달아나면서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기 전까지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원소군의 뚝 떨어진 사기였다. 그때 참모 저수가 이렇게 진언했다.

    “아군의 병력은 적군보다 월등히 우세하지만 용맹성에서는 뒤지고 있습니다. 적군은 군량이 모자라 물량작전에는 우리를 따르지 못합니다. 때문에 적군은 단기결전에 유리하지만 우리에겐 지구전이 유리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느긋이 버티면서 적을 소모시키는 작전을 펴야 합니다.”

    하지만 원소는 그의 조언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였다.

    이에 반해 조조는 “반드시 전황이 호전되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참모 순욱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결정적인 시기에 모신(謀臣)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모신을 곁에 뒀단 말인가. 모신 범증(范增)의 진언에 귀를 닫아버린 항우(項羽)가 홍문(鴻門)의 전투에서 유방에게 패해 손아귀에 다 들어온 천하를 내주고 말았던 것과 같은 실책을 원소 또한 되풀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 자신만만한 게 탈이었다. 자만은 자칫 주위의 반발을 사고, 또 자신을 좁은 세계 속에 가두고 만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자신만이 옳다며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하다 번번히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결국 제1라운드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원소는 관도에서의 패배로 화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반격 한번 못해보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 아들들 역시 변변치 못해 조조군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제1라운드에서 탈락한 또 한 사람의 패자는 유표다. 형주 자사로 부임한 초기에는 의욕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유비에게도 너그럽게 대해주는 등 인심을 얻고 내실도 기했으나, 주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옛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몰락을 재촉한 빌미는 원소의 경우처럼 관도싸움이 제공했다.

    관도싸움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표는 원소로부터 구원요청을 받고 그러마고 승낙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조조를 편든 것도 아니었다. 엉거주춤한 태도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가신 한신과 유선 등이 보다못해 “두 걸물이 기를 쓰고 싸우고 있는 이 틈을 이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승리할 공산이 큰 쪽에 힘을 실어주어 장래를 보장받자”고 졸랐지만,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정세를 살핀답시고 한승을 조조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한승도 믿지 못해 그를 죽이려 들었다.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도 우유부단한 태도로 내부갈등만 증폭시켰다. 그 결과 비록 그 자신이 조조에게 모욕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가 죽은 지 8일 뒤에 들이닥친 조조군에게 아들 유종(劉琮)이 목숨을 잃고 땅까지 내줬으니 이 모두가 그의 실책의 소산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참모의 활용과 타이밍을 잃지 않는 결단력이 리더의 필수요건임을 깨닫게 하는 반면교사다.

    조조·유비·손권은 제1라운드에서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하여 마침내 독자적 왕국을 세웠으니 A학점을 받을 만하다. 제2라운드는 이들 세 선수가 주역이 되어 펼치게 됐다. 2라운드에서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긴 했으나 1라운드의 적벽대전이나 관도싸움 같은, 생사를 가를 정도의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참모와 장수 몇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제2라운드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몸 만들기에 진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많은 조연들이 등장해 주전 선수들을 도왔다. 중국이란 무대가 늘 그래왔듯이 ‘삼국지 게임’ 역시 몇몇 스타플레이어에 의존하기보다는 팀 플레이를 선호한다. ‘팀장’격인 조조·유비·손권 세 사람은 팀 플레이에서도 자기들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었다. 조조가 신상필벌이란 제도적 잣대로 임했다면, 유비는 일찍이 도원의 결의를 한 사람답게 정(情)과 협(俠)과 성(誠)을 바탕으로 넓은 도량을 과시했으며, 손권은 부하들을 믿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유비와 손권은 사람들 사이의 ‘트러스트(trust)’를 지렛대로 삼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나, 조조와의 사이에서는 그런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너무나 대조적인 방법으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조조나 유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제 각각이다.

    조조에 대해 좋게 평하는 사람은 그의 과감한 인재등용, 엄격한 신상필벌, 현실중시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인재를 거두어 쓰되 모두 제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정보다는 능력을 먼저 헤아렸고, 쓸 때에는 지난 허물을 상관하지 않았다”고 조조를 평했다.

    그가 인재를 끌어모으는 데 열심이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의 보스기질이다. 보스가 되기 위해서는 권력과 경제력을 갖춰야 하는데, 조조는 그 둘을 다 구비했을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때를 놓치지 않는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결단력까지 갖춰 부하들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야망이 컸던 만큼 수하에 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런 기질은 경우에 따라 참모나 장수들의 진언을 무시하게 만들어 마이너스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무서울 정도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으로 팀을 이끌어 나갔다.

    둘째 이유는 그가 문제 해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전문가의 의견을 구해야 했다. 셋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전국 각지로부터 많은 인재들을 등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각 지방으로 자연스레 확대시킬 수 있다는 철저한 계산이었다. 여기에 당근과 채찍이라는 신상필벌의 방책까지 구사했으니 그는 조직운영의 달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조가 기인 예형과 만난 자리에서 수하 문무백관들의 사람됨을 자랑스레 소개한 바 있는데, 그걸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욱·순유·곽가·정욱 등의 모사는 기지가 심원하여 소하·진평(陳平)을 능가하며, 장료·허저·이전·악진은 용력을 당할 자가 없어 옛날 잠평(광무제를 도운 장수), 마무(광무제를 도운 장수)도 그들에 미치지 못하며, 만총(滿寵)은 종사에 뛰어나고, 우금(于禁)·서황은 선봉장이며, 게다가 하후돈은 천하 기재이니 모두가 출중하도다.”

    또한 조조는 문(文)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병서는 물론 역사서, 유학서, 문학서 등에 걸쳐 폭넓은 독서를 했으며, 시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이는 그가 호학(好學)의 군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기여한 바 컸다.

    이렇게 장점이 많은 조조이지만 그를 나쁘게 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를 ‘난세의 간웅’이라 부르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든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중시했던 지(智)도 따지고 보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도 이런 생각이었던지 조조를 비판적 시각에서 묘사한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조조가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점을 일깨우는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날 군대를 이끌고 작전을 벌이던 중 군량이 바닥나는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되면 작전이고 뭐고 다 소용없게 된다. 조조는 담당 장교를 불러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그에게서 “되를 작게 하면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다”는 대답을 끌어내고는 곧바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미봉책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 곧 탄로가 났다. 병사들의 입에서 “대장님이 우리를 속여 밥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면서 분위기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조는 담당 장교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는 “병사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면 네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단숨에 목을 벤 후 잘린 목을 병사들에게 들어보였다. “이 놈은 작은 되를 써서 군량을 훔친 죄로 이렇게 처벌하였다”면서. 병사들이 조조의 엄정한 기강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분노는 진정됐다.

    대군을 이끄는 수령으로서 ‘큰 것을 구하기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할 수밖에 없다’며 조조의 행동을 두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냐고 되묻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오히려 그는 너무 안이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현실중시, 능력 제일주의라는 것도 어쩌면 이런 자기중심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극진히 보필했던 순욱이나 순유와 같은 명참모를 서운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조조에겐 사람을 믿지 못하는 구석도 있었다. 고향에서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여백사의 여덟 식구를 몰살시킨 일은 그런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탁이 실권을 잡자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조조는 고향에서 가까운 여백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됐다. 그때 여백사가 조조를 위한답시고 “조정에서 자네를 잡으려고 이곳에까지 방을 돌렸는데 자네가 어떻게 이렇듯 무사히 왔는가” 하고 저간의 사정을 들려준 다음 마침 집에 술이 떨어져 이웃마을로 술을 사러 나갔다. 그 사이에 조조는 혹시 여백사가 밀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달아났다.

    순욱은 후한 말에 조정에 들어갔다가 동탁이 실권을 잡은 뒤 낙향했다. 그러다 원소의 진영에서 상객 일을 보았으나 그의 그릇이 작다는 것을 알고는 제 발로 조조의 진영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포부를 펼치게 해줄 주군을 찾아다닌 특이한 인물이었다. 조조는 순욱을 보는 순간 “나의 장자방이 되리라” 하며 그를 융숭하게 대했다. 이에 흡족한 순욱은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조조에게 헌제를 맞아들이라고 진언했고,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둔전(屯田)을 설치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내놓는 등 조조의 지혜를 빛냈다.

    그는 원소가 싸움을 걸어왔을 때 자신의 군세가 원소군에 미치지 못한다며 한숨짓는 조조를 향해 이렇게 기운을 북돋아줬을 만큼 충직한 모신이었다.

    “예전부터 승부는 총사령관의 기량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능력있는 장군은 약소한 세력도 강대하게 만들 수 있으며, 그러한 기량이 없으면 강대하던 힘도 쇠퇴하고 맙니다. 이는 유방과 항우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공(公)과 천하를 겨룰 자는 원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원소는 어떠합니까? 외양은 의젓하게 차리고 있지만, 속마음은 시기심으로 뭉쳐 있으며, 일을 맡기면서도 부하를 의심하는 인물입니다. 그 점에서 공은 매사에 구애받지 않고 탁 트여서 사리에 맞게 처결하십니다. 이것은 도량이 크다는 증거입니다.”

    관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는 여러 차례 조조를 안심시키는 계책을 내놓아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는 또 생질인 순유와 후일 북방 책략에 큰 공을 세우는 곽가를 모신으로 추천하는 등 조조를 보필하는 데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순욱은 조조의 말마따나 그의 장자방 노릇을 톡톡히 수행한 셈이었다.

    ‘장자방(張子房)’이란 유방(劉邦)을 도와 한 제국을 일으킨 일등공신 장량(張良·‘자방’은 그의 자)을 일컫는 것이나, 중국인들은 이상적인 책사나 참모를 흔히 이렇게 부른다. 참모의 역할은 정세를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정략과 방책을 강구하여 보스에게 진언하는 것인데, 장량은 그 일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자신이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장량의 역할도 지적했는데, ‘사기(史記)’ 고조 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막사에서 계책을 짜내 1000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에서는 내가 자방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서는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며, 또 100만 대군을 통솔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걸출한 인재로서 그들을 임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반면 항우는 단지 범증 한 사람만을 썼으나 그마저 끝까지 믿지 못했으니 이것이 항우가 내게 잡힌 까닭이다.”

    순욱은 장자방답게 조조가 패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조 또한 그에 대해 나름대로 보답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끝은 좋지 않았다. 조조가 더 이상 순욱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조조가 그에게서 더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도 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힘을 합쳐 이루고자 한 것을 모두 이뤘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둔 인생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서로 달랐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조조는 스스로 천자가 되려 했는데 반해 순욱은 한 왕조의 부흥을 꿈꿨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다면 달리 길이 없다. 누군가 한 사람은 배에서 내려야 한다. 순욱은 그 일로 가슴앓이를 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순욱의 죽음은 천재를 주군으로 섬긴 수재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조조에게도 득될 것이 없었다. 그나마 그를 돕고 때로는 과속을 못하게 브레이크 노릇을 해내던 순욱이 사라졌으니 조조는 긴장이 풀어지고 활력도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조조에게 드리운 것은 희망의 무지개가 아니라 검은 구름떼 같은 모순덩어리였다. 목적과 수단의 괴리, 정치와 군사의 모순, 멀어져 가는 민심, 이 기회에 아부하여 일신의 영달이나 노리려는 아첨배들…. 이런 것들로 하여 조조는 서서히 비극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순욱은 정치노선으로 조조와 갈등을 겪지 않았다 해도 그의 쓰임이 다하면 언젠가는 조조의 곁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장량 역시 그랬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어보았던 장량은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자 스스로를 낮추고 자리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유방이 권하는 고관 자리를 사양하고 변방의 한직을 택해 주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그후 한신 등 역전의 공신들이 차례로 숙청됐지만 그는 천수를 누렸다. 그는 손자가 말했던 대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택해 지선(至善)의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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