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상스적 전인(全人)의 표상 알베르티. 법학·철학은 물론 미술· 건축·음악·어문학 등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양각의 눈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고, 한편으론 이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만능인이자 교양인.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2년 전 아주 어렵게 ‘법과 예술’이라는 교양강좌를 열었으나, 고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작 법대 교양과목에서는 제외된 일이 있었다. 법대교수가 예술에 대해 쓴 글이 연구업적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이 글도 당연히 연구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곧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법을 비롯한 우리의 학문과 예술은 대부분 서양의 토막지식을 기술적으로 모방하거나 암기한 것에 불과하다. 연구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베끼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암기하게 한다. 이를 통해 지난 30여 년 군사독재 치하에서 급격한 서양화를 이루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비판과 창조이며, 이는 오직 교양과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보기를 우리는 르네상스에서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인·만능인·보편인의 표상인 알베르티는 대학에서 7년간 법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이로써 그는 법을 비롯한 도덕철학 등 여러 학문 분야뿐 아니라 회화·조각·건축·음악·시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역사상 거의 최초이자 최고의 업적을 남겨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다.
알베르티는 다양성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했다. 이 두 가지 안목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고 또한 이를 뛰어넘기 위해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나갔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인(全人)이며 르네상스인, 겹눈의 인간이다. 또한 교양인, 지성인의 전형이다.
평생의 모토 “다음은 무엇?”
알베르티는 평생 하나의 모토로 살았다. QUVID TUM, ‘다음은 무엇?’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 무엇이든 완성하지 않은 미완의 상태, 영속적인 계기(繼起)와 지속의 반복을 통해 불변부동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을 뜻한다. 그가 쓰고 그리며 만들고 설계한 것들이 모두 그렇다. 시작도 끝도 없는 편린, 해결도 결론도 대단원도 없는 끝없는 모색의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고 상대주의나 자의성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편을 향한 끝없는 몸짓이라 봐야 할 것이다. 개별의 미완성·유동성·다양성은 전체의 통일·조화·균형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예술·학문·기술 등에 두루 통했다는 것은 그런 모토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어떤 구분도, 경계도 무의미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하나’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흔히 르네상스를 개인주의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자화상이나 자서전을 든다. 알베르티는 역사상 최초로 자화상을 조각하고, 자서전을 썼다. 그러나 3인칭으로 서술된 자서전은 끝까지 익명으로 유포되었다. 사실 그는 무수히 다른 이름으로 글을 썼고, 심지어 무명으로 쓰기도 했다. 자기 작품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내버려두었고, 완성품이니 결정판이니 하는 것들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우리는 강렬한 자기주장과 더불어 지독한 자기은폐를 본다. 자만과 자폐의 공존이다.
그는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다. 게다가 그 가면은 언제나 변한다. 카멜레온처럼. 그는 변화 무쌍, 변환 자재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나름의 시야와 논리가 있으며 문제를 짚고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그래서 그를 전능의 천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천재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고정된 위치나 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증거한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이란 보통 중세적 신이 아닌 근대적 인간의 가치를 주장한 것이라고 하는데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 말의 기원인 인문학이란 문법·수사·역사·시·도덕이라는 한정된 연구영역을 뜻하나, 이를 곧 휴머니즘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기술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적어도 알베르티를 통해 휴머니즘을 정의한다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고정된 동일 불변의 내용을 갖는 사상 형태가 아니라, 때와 곳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면서도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고와 태도다. 즉 다양성 사이의 끝없는 대화이자, 그러한 대화를 통해 보편성을 추구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 특히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식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적 전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알베르티는 1404년생이니 거의 600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귀족의 자제여서 어려서부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인문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고, 17세가 된 1421년부터는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공부했다. 28세 때인 1432년부터 1464년, 즉 60세가 될 때까지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472년 68세로 죽었다.
그의 저술은 벌써 500년 이전의 것이므로 당연히 연대가 불확실한데, 이는 그 자신이 언제 출판할 지에 관심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중요한 저작 중 ‘가족론’은 1433~1434년, ‘회화론’은 라틴어본이 1435년, ‘문법론’은 1438~1441년, ‘조각론’은 1464년 이후, ‘건축론’은 1452년 교황이 보았다고 하나 출간은 사후인 1485년에 이루어졌다. 그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1998년에 나온 ‘회화론’뿐이다. 약 563년 만에 번역된 셈이다. ‘회화론’의 우리말 역자는 이 책을 ‘르네상스 최초’의, ‘서양미술사 최고의 회화론’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최초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나 서양미술사 최고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여하튼 그의 책들은 대부분 각 분야에서 처음으로 쓰여졌고, 그뒤 수많은 유서가 나왔다.
‘회화론’에 대해서는 역자의 해설이 있고, ‘건축론’에 대해서도 건축서에 약간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그밖의 책들에 대해서는 소개된 바가 없고, 특히 그의 책 전모를 다룬 글은 아직 우리나라에 없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의 ‘문법론’과 ‘가족론’이다. 후자에 나타나는 가족에 대한 강한 관심과 옹호가 그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 그를 다른 휴머니스트와 구별하게 한다.
종래 이러한 가족주의적 경향은 알베르티를 보수적 인물로 보게 하는 요인으로 생각돼 무시되었으나, 대가족에서 핵가족제로 변모하는 가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찰이기도 하다. 이 점은 가족주의에 대한 치열한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뿌리 깊게 유지되고 있는 우리 사회를 관찰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그런 평가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알베르티의 모든 책을 15세기 르네상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읽는다. 전인으로서 알베르티의 다양한 관심은 하나의 사회를 다각도로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그것은 특히 가족과 도시라는 이데올로기로 장식된 사회의 모습이다.
가족과 도시는 우리 사회에서도 중요한 이데올로기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 도시와 달리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국가다. 그러나 가족 이데올로기는 르네상스는 물론 그 어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두 이데올로기는 흔히 빈부갈등과 체제변화를 호도하는 것으로 장식된다.
알베르티의 여러 책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준다. 알베르티는 그 이데올로기에 단순히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예견했다. 즉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안목으로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하면서 넘어선 것이다.
알베르티는 평생 교회인으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추기경 비서를 시작으로 1432년부터 32년간 교황의 서기로 일했다. 그를 교회인이라 부를 수는 있으되 종교인이라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신앙심보다는 그의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이나 문장력을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 알베르티가 교회에서 일했다 해도 당시 어떤 휴머니스트보다 교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저서 ‘사교’에서 성직자의 부패, 무지몽매, 동족을 등용하는 위선과 야심, 허식과 부정거래를 비판하고 ‘가족론’에서는 성직자의 죄상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유일한 종교적 작품인 ‘성 포티투스전’에서 그는 금욕과 세속혐오의 생활을 그만두고 시민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라며 극도로 아름다운 악마를 등장시킨다. 중세적인 현실혐오는 철저히 거부되고 수도사적인 미덕이나 금욕은 기만으로 비판되어 배제된다.
알베르티가 교회에 근무한 것은 생계를 위해서였다. 다른 길이라면 마키아벨리처럼 관리가 되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를 혐오했다. 당시 그 두 가지는 휴머니스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길이다.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법학과 문장력을 필요로 한 교회는 휴머니스트들이 충분한 시간여유를 가지고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알베르티는 정치를 혐오했다. 그러나 당대의 휴머니스트들은 대부분 정치에 투신했고, 나름의 정치적 휴머니즘을 주장했다. 즉 공화정 로마와 그 자유의 유일하고 영예로운 후예인 피렌체가 시민들의 법적 평등을 전제로,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의 지배를 수호하기 위해 폭군과 싸운다는 신화였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따라서 그것은 허위였다. 하지만 그러한 ‘신화’는 당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의식이 되었다. 즉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로 뿌리내린 것이다. 그것은 뒤에 마키아벨리에 의해 폭로된다.
15세기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는 다른 도시처럼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화국을 위한 문화였으나, 차차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된다. 11~13세기까지 유지된 귀족 중심의 단체사회가 14세기에 와서 붕괴되고 대가족제가 핵가족으로 이행하면서, 소수의 유력한 문벌에 의한 과두체제가 형성돼 전제(專制)로 나아갔다.
1427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1%에 불과한 약 100가구의 시민이 도시 부의 6분의 1을 점유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도시라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사회적 불평등을 호도하는 지배의 도구로 등장한다. 예컨대 도시를 수호하는 성인에 대한 숭배나 도시찬미가 그것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법을 찬양했다. 그리고 그러한 숭배와 찬미를 위해 수많은 예술품과 저술이 만들어졌다.
르네상스 문화의 기초가 상업에 의한 부의 증대였으므로 그 사회는 당연히 배금주의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메디치가는 사치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가문이 위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에서 손을 떼게 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다져 나갔다.
휴머니스트가 ‘인류를 위하여’ ‘인간을 위하여’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 자신들이 속한 상층시민 계급의 이익만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그 상층이란 당시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 소수였다. 물론 그들에게 인구의 90%를 넘는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사상이든 정책이든 간에 하층민의 잠재적인 욕구를 고려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책은 격리를 수반하는 자선이 거의 전부였다.
알베르티도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비켜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휴머니스트들과는 구별함이 옳다. 알베르티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공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 공공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정치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인 미덕을 발휘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졌다.
알베르티는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데올로기로 타락한 권력적 휴머니즘의 위기를 예리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관리·성직자·철학자·상인 등 모든 종류의 권력과 부를 가진 인간의 타락을 규탄하고, 전제정치에서 휴머니즘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흔히 르네상스를 문예부흥이라 하면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부흥시켰다고들 한다. 그래서 고전과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문학적 태도가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고전고대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알베르티는 라틴어가 아닌 속어의 중요성을 말하고 최초의 이탈리아어 문법서를 저술한다. 또한 그리스 로마를 비롯한 전대의 역사를 그 시대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시대에 맞게 해석하는 역사주의의 편에 선다.
알베르티는 인간의 이성과 유약한 인간이 완성되는 장으로서의 현실 속 시민생활의 활동과 책임에 관심을 가졌을 뿐 고대나 외국의 문물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는 실용적인 것이다. 따라서 도덕생활의 원리인 법과 사회생활의 수단인 경제를 중시하고 육체와 그 쾌락을 긍정한다.
알베르티는 이성과 미덕을 중시한다. 교육된 이성은 편견의 해독제이며, 미덕은 인간성에 이르는 길이다. 미덕은 명예와 명성을 낳는다. 명예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희생정신과 아량, 평등에 의한 공적 책임의 활동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개인적인 권력추구는 철저히 부정된다. 이는 중세적 귀족이나 기사의 명예와는 달리, 시민적·공화정적 공생의 집합체에서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적 무위(無爲)사상은 철저히 배제된다. 알베르티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무위는 죄악이자 불명예로서 개인을 타락시키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무위에 대항해 알베르티는 근면을 주장한다. 근면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회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미덕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여가로서의 무위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근면의 최고인 학문 연구와 예술 창조는 여가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티가 여러 미덕 중 특히 강조하는 것은 현명함이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함께하며, 세계와 그 힘을 파악하고, 유용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공사(公私) 모두에서 활동적이고 건설적인 경험을 말한다. 이밖에도 알베르티는 정직·선량·정의·의지·충성·공정·중용·경건·자애 등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러한 미덕은 운명에 저항하는 이성의 수족이다. 르네상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알베르티는 인간이 내면의 자연인 이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지력과 체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알베르티의 생각에는 공사의 구분이나 도덕과 사회의 구별이 없다. 개인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가족이나 도시에도 도움이 되며, 거꾸로 가족이나 도시도 개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이성적 존재로서 이성을 통해 내면의 자연적 능력을 개발·실현해 사회에 공헌하고 스스로 행복해지며 타인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고립돼 추상적 연구에 몰두하는 자는 반역자로 저주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과 예술은 알베르티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알베르티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회인으로서 당시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토아 철학에 젖기도 했다. 즉 감정을 억제하고 건강과 명예에 무관심하며 운명이나 죽음에 달관한 태도다. 이는 알베르티만의 이중성이 아니라 르네상스 당시 대다수 인간들이 가진 자세였다.
이러한 이중성을 정신의 분열이나 시류에 따른 변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알베르티에게 그러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필연적인 것이며, 또 그런 모순을 가졌기에 오히려 시대를 투시하고 미래로 연결되는 건설적 사상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그밖에는 없다)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산 네 귀족 여인의 이야기다.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요체를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은 대담한 영혼과 냉철하고 합리적 정신”이라 하고 그것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르네상스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부분적이어서 르네상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르네상스의 여인들’은 TV 드라마 ‘여인천하’를 방불케 하는, 정쟁 속에서 살아가는 여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어서 어떻게 그 속에서 그런 르네상스 정신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르네상스를 남성 천재들과 여걸의 시대로 특징 지우는 태도는 부르크하르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르네상스가 개인주의시대였음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재능이 개화되어 높은 지위에 올랐음을, 그런 여걸과 시인, 고급창부들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상 ‘개인주의자’였던 것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저급 여성인 창부들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집안의 보호를 받은 고급 여성이었다.
나나미는 고급창부는 물론 시인들도 소개하지 않고 있으나, 그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당시 여성 인구 전체를 놓고 보면 열 손가락에도 꼽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비참한 처지에 놓인 다른 대부분의 여성의 처우 개선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여걸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예술을 후원한 것은 그들이 귀족의 딸로 태어나 귀족과 결혼했기 때문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즉 그들이 휴머니즘 교양을 쌓아 남성 엘리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경쟁할 만한 재기발랄함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나 나마미가 보여주는 화려한 여걸의 르네상스는 최근 연구에 의해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다. 즉 공공 차원에서 여성이 배제되거나 가정에서도 권리가 박탈되었음은 물론 남편에게 종속된 처지라는 게 그 실체임이 증명되고 있다. 당시는 철저한 가부장사회로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남성의 지배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휴머니스트들은 연애를 지극히 도덕적인 차원에서 논하며 여성에 대해서는 극단적 혐오와 함께 가족의 명예를 위해 철저히 감시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남성의 간통과 달리 여성의 간통은 엄격히 처벌되었으나, 피렌체는 ‘창녀의 도시’라 일컬어질 정도로 창녀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도 방직이나 세탁 등 상당수 여성이 직장을 갖고 있었다. 화장을 비롯한 사치는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가족의 명예를 위한다는 이유로 널리 행해졌다.
1433년 피렌체 법은 여성을 ‘도시에 아이가 가득 차도록 해야 하는’ 아이주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당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계의 계승을 위해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다. 그 다음 역할이 자녀를 다른 훌륭한 가문의 자녀와 결혼시켜 화려한 인척관계를 형성해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경제적인 것으로서,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었다. 지참금 문제는 특히 딸을 많이 둔 부모에게는 고통이어서 지참금 보험이 생길 정도였다.
르네상스 결혼의 특징은 남녀의 나이 차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여성은 대부분 15~18세에 그 배가 넘는 나이의 남성과 결혼했다. 따라서 과부가 될 가능성이 높아 피렌체의 경우 50세 여성의 25%, 60대 여성의 절반이 과부였다. 과부가 젊고 아이가 없으면 재혼하기도 했으나 아이가 있으면 재혼은 불가능했다. 당시 귀족 가정에는 하녀가 있었다. 그 중 상당수는 노예였는데 노예무역은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그 대부분은 매매되거나 상속되고 심지어 성적 노리개로 학대받았다.
11~13세기 귀족들은 그야말로 대토지를 기반으로 대가족을 형성했으나, 그후 도시의 반호족정책에 의해 분해돼 1427년 과세대장에 의하면 피렌체의 세대별 평균 가족수는 3.8명으로 격감했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본래 이름이 없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명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핵가족화는 추상적인 연대로서의 새로운 가족이념을 발생시켰다.
이는 가족을 넘어 친구나 이웃에 대한 새로운 이념까지 낳았다. 그래서 알베르티는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는 그를, 그는 또 다른 사람을, 그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 그렇듯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전체적인 우정과 협조로 통합되는 요인이자 수단이다”라고 하며 이용과 착취를 위해 다가오는 거짓 친구가 아닌 참된 친구를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고한다.
이렇듯 새로운 가족은 지배집단의 경우 결혼 등을 매개로 ‘피렌체라는 도시의 모두가 친척이 되게’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지배집단은 하층민을 감시하는 장로정치체제와 함께 한편으로는 그들을 지원하는 패트런체제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메디치가처럼 정치·경제를 독점하는 지배집단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옹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알베르티의 주장이었다.
알베르티가 주장하는 가족의 핵심은 혈연이나 감정이 아닌 우애다. 그는 공동체(가족이든 도시이든 국가이든)의 구성원은 자연이라는 최상의 법에 따라 통합되어 불화가 없도록, 성실·형평·사랑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메디치가의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알베르티가 말하는 가족은 계급의 이해관계나 전통적 습속에 복종하는 가족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회화나 건축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 즉 자연이 준 미덕과 합리적 규칙을 근거로 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가족 개념의 기초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는 자연에 따르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는 다산(多産)이 장려되고 자녀들에게 애정을 갖는 어머니가 칭송을 받은 한편, 중세 이래의 자녀 유기의 관습 또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알베르티는 양자도 친자와 똑같이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기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고아원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은 시민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5~7세부터 17세까지 공립초등학교에서 읽고 쓰기, 상업에 필요한 산수를 배웠으나 알베르티가 상인들의 무식을 개탄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충분한 교육이 행해지지는 못했다. 남자 아동의 경우 상류계층인 30% 정도가 학교를 다녔으나, 여성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우리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사립 기숙학교는 상류계층 자녀를 상대로 휴머니즘의 전인교육을 목표로 삼았으나,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순종하는 인간을 육성한다는 것이었고, 유아기의 가정교육이 빚은 비남성화를 교정해 재남성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대학에서의 인문학도 상류계층 자녀를 위한 것임은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대학은 메디치가에 의해 관리되어 권력조작의 중요한 도구 노릇을 했다.
하층민의 자녀들은 교육에서 제외되었다. 교육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생활에서 제외됐다. 하층민은 무지몽매하므로 언제나 감시해야 한다고 알베르티는 ‘가족론’에서 주장한다. 그 점에서 알베르티는 당시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계급주의자, 엘리트주의자다. 아니, 휴머니즘 자체야말로 귀족들이 즐기는 일종의 지적 운동으로 대중의 생활과는 철저히 무관한 몇몇 엘리트들의 고급 놀이였다.
1434년 알베르티는 교황을 따라 페렌체에 왔다가 당시의 회화 작품을 보고 ‘회화론’을 쓴다. 그 책 제1권에서 그는 원근법을 말하는데 이는 그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라 이미 많은 화가들에 의해 사용된 것을 이론적으로 밝힌 것이다.
제2권에서는, 회화는 우정이 그렇듯 “부재한 사람을 등장시킬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을 살아있듯이 만드는 신과 같은 힘을 갖는다”고 하면서 그 구성요소를 윤곽선, 구성 및 빛의 수용으로 설명한다. 윤곽선은 면밀하게 윤곽을 묘사해 대상을 확정하는 것이고, 구성은 전체의 이야기에 회화의 각 부분을 관련시키는 것이며, 빛의 수용은 색채와 색조를 윤곽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제3권에서는 예술가의 교육과 성격을 논한다. 자연은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야 하며, 자연 및 인간의 윤곽과 움직임은 자연으로부터 학습되어야 하고, 회화의 주제와 구성은 문화적·사회적 기초를 가지며, 교양을 쌓은 선량한 성격의 완전한 인간만이 가치로운 회화를 만들 수 있고, 화가는 이익이 아니라 명예를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 및 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설명이다. 화면 설정과 색조 선택에서의 다양성은 각기 다른 성질간의 비교·대조를 통해 미를 배가시킨다고 주장한다. 다양성의 추구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비롯한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전통적 가치관으로는 공존을 인정할 수 없는 다양한 특질이 한 인물이 가진 여러 성향으로 표현되고 묘사된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인물들 또한 공통의 인간성을 갖고 있다는 확실성으로 인해 서로 만나게 된다.
부르크하르트 이래 르네상스는 개인의 발견, 개인주의의 시대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법이 그 권리를 보증하는 평등한 시민들이 봉건적 유제를 불식한 도시에서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한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도리어 가족이 시민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의 기지로써 중시되었음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흔히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초상화를 든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군주나 그 아내의 초상화는 방문자에게 집안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회화·가구·조각·장식 등과 더불어 거실이나 침실에 걸렸다. 또한 화려하게 그려진 딸의 옆얼굴은 결혼할 때 에 집안의 명예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화가나 조각가에 의한 자화상의 탄생이다. 그 최초의 작품이 알베르티가 만든 조각 초상이고 그후 많은 자화상이 제작되었다. 또한 전기와 함께 자서전이 많이 쓰여졌다. 알베르티도 자서전을 썼다. 그러나 그 자서전을 개인주의의 소산으로 보기는 어렵다.
알베르티의 ‘건축론’은 건물 비율의 정확성, 건물과 인체의 유비(類比)를 강조한 로마의 유기적 조화의 건축이론으로부터 출발해 필요성·편리성·쾌락성이라는 세 가지 요구를 강조한다. 여기서 수사학의 방식으로 건축의 장식을 구분하는, 원칙을 자유롭게 뛰어넘는 사고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수학적 비율을 중시해 다양성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베르티의 회화 작품이 현존하지 않는 것과 달리 건축 작품은 많진 않으나 현존하는데 당연히 그의 이론과 일치한다.
‘가족론’이든 ‘회화론’이든 ‘건축론’이든 그의 생각은 자연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끝난다. 회화나 건축이라는 인공물도 자연의 미를 인공으로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에 포함된다. 그에게 세계는 전체로서도 부분으로서도 유기적인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조직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빌라다. 우리는 빌라라는 말을 좀 비싼 집 정도로 사용하나, 본래는 별장을 뜻한다. 별장을 갖는 취향은 르네상스에서 비롯된다. 휴머니즘은 예술의 신이 사는 곳으로 정원의 이미지를 부활시켰고, 그것이 자연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빌라로 나타났다. 따라서 빌라는 부자의 은거처가 아니라 자유의 집을 뜻했다.
알베르티가 빌라를 시민의 의무인 근면을 북돋우기 위한 휴식처로 찬양하면서 자급경제의 터전으로 강조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오늘의 별장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또한 빌라 주변의 자연도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베르티는 스스로 그런 빌라를 설계하고 건축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문헌의 발굴에 치중하여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중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시대 풍조에 저항해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속어의 유용성을 최초로 주장하고 속어를 옹호한 이가 바로 알베르티다. 로마시대에도 라틴어는 일부에서만 사용했고, 일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속어가 사용되었으므로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에서도 이탈리아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아가 알베르티는 예술·과학·문학에 적합한 언어로서 구어·속어를 문어로 바꿔 갈고 닦으며 체계화하는 것이야말로 휴머니스트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알베르티는 속어의 문법과 통사법의 순화 및 규칙화의 가능성을 그가 사상 최초로 쓴 이탈리아어 문법책 ‘문법론’에서 증명하고 있다. ‘가족론’은 도덕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속어 저작이고, ‘회화론’도 속어로 썼다.
알베르티는 언어란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굴레라고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휴머니스트들은 정신과 언어의 불가분성, 회화와 웅변의 중요성을 강조해 그야말로 언어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대화체로 쓰여진 책은 물론 어디서나 예술·문학·가족·정치·상업을 열심히 토론하는 시민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대화의 원리란 다양한 모든 견해는 서로 보완되어 진리를 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가 아닌 대화, 지성이 아닌 직감, 반박이나 설득이 아닌 포용과 변화로 나아가는 대화술을 강조했다. 이처럼 열린 대화에서 개인의 견해는 인간이 갖는 다양성의 하나로서, 인간 본성의 통일성과 보편성이 여러 조건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견해도 보편일 수 없으며, 다양성에 의한 대화적 운동만이 보편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알베르티는 자신이 쓴 대화체 책에서 그런 대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최종적인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끝없이 대화한다. 그 대화는 끝까지 평행선을 가는 것처럼 보이나 자연스럽게 하나의 점으로 모아진다. 그 대화는 진리를 향한 여행이며 일체의 권위주의가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언제나 우호적으로 유쾌하게 행해진다. 알베르티의 문체는 지극히 간명하고 실용적이다.
알베르티는 가족과 도시(국가)의 올바른 일치를 꿈꾸었다. 그리고 자연과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인공의 미를 통해 인류를 구출하고자 했다.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념을 예술적 장식과 수사적 언어에 실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우리 모두 알베르티처럼 만능인이고 보편인이다. 그것은 누구와도 다르지만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말라. 유일한 아이덴티티는 없다. 우리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끝없이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우리도 언제나 묻는다. ‘다음은 무엇?’이라고.
알베르티 평생의 모토인 ‘다음은 무엇?’은 비관주의를 거부하는 낙관주의다. 의지의 힘으로 인격이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간 변화에 대한 낙관주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아니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끝없는 회의에 젖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만능인 알베르티도 그랬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예술작품을 만들 듯 인간도 결국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것도 허구가 아닌가? 우리가 인간주의니 인문주의니 하고 번역하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란 사실 수사의 대가였고, 그 예술가들은 장식의 프로였다. 모두 꾸밈의 천재였다. 그 모든 것은 허구의 장난, 인공의 조작이었다. 그것은 비판과 창조, 다양성과 보편성의 변증법에 의해 운동한다.
르네상스는 근대적 사고가 규정한 ‘확고하게 자리잡고 변화 없는 기계적 인간’이 아닌, 언제든 지금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본성이나 자연에 맞추어 행동하고 행복을 추구하나, 자아의 경계는 애매하고 불확실하여 그 경계를 넘어 끝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보편성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베르티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