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모의 관계는 정말 그처럼 대단한 것인가. 이 제도의 근간은 기독교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기독교의 세례식에는 아이 곁에 부모와 나란히 대부모란 존재가 등장했다. 남자아이에게는 대부, 여자아이에게는 대모가 세례식에 참여한다. 본래 대부모는 대자 또는 대녀의 영적 보호와 신앙 강화에 책임이 있다. 대자와 대녀는 대부모를 믿고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이로써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부모자식 관계가 성립한다.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대부모 제도를 중시한다. 가톨릭이 국교로 기능을 하는 여러 나라, 특히 남유럽과 남아메리카 각국에서는 이 제도의 기능이 뚜렷하다.
‘대부모’ 제도는 ‘의사가족’ 관계
대부모 제도는 역사를 통해 변화를 거듭했다. 사람들은 이 제도를 통해 사회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대부모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제도야말로 신자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미신적 수단이라고 공격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 사회는 나날이 세속화됐고, 대부모 제도 역시 관습의 일부가 됐다.지난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농촌 사회에서는 ‘의사가족’ 관계가 일상생활의 중심축이었다. 유럽의 ‘의사가족공동체’는 대부모 제도를 비롯해 친족 및 의형제 관계가 하나로 결합한 것이다. 그 명칭은 지역마다 다양했다. 대표적인 것이 ‘오스탈(Ostal)’ 또는 ‘카사(Casa)’였다. 현대 프랑스 역사가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는 15~18세기 프랑스 남부의 몽타유 마을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명성을 얻었다. 그에 따르면 몽타유 마을에도 ‘도무스(domus)’라 불리는 의사가족공동체가 존재했다.
그 활동은 다방면에 걸쳤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빈곤 문제의 공동 해결을 비롯해 고아의 양육, 청소년의 직업훈련, 마을에서 발생한 분쟁의 처리 및 집단적인 복수까지 그 공동체의 기능에 포함됐다. 의사가족공동체가 살인과 집단 폭행 등의 ‘집단 복수’까지 일삼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지방마다 차이는 있었으나 유럽 각지에 의사가족공동체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모와 대자녀 집안을 친족집단으로 인식해, 내부의 결혼관계를 기피하는 현상도 보였다. 심지어 세례를 주관한 담당 사제의 집안과도 결혼을 금했다.
근대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의사가족공동체의 위상에 변화가 나타났다. 국가권력이 확대일로에 있었고, 그에 따라 사적 영역의 축소가 불가피했다. 대부모 제도는 약화됐다.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속도를 내자, 가족은 직계가족 위주의 단출한 조직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판국이라 친부모도 아닌 대부모의 역할은 더욱 축소됐다. 큰 틀에서 보면 ‘대부모 제도는 서양 중세의 유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란 복잡 미묘한 것이다. 일정한 방향을 따라 직선적으로 발전해가는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 19세기까지도 가톨릭국가 스페인의 식민지, 곧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모 제도가 외려 강화됐다. 대자녀의 일생에 분기점이 되는 중요 행사마다 대부모가 반드시 입회했다. 그들은 대자녀의 양육 또는 교육에도 관여했다. 대자녀는 대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하며, 그들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종교심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간주되는 유럽의 사정도 현미경을 들이대면 달리 보인다. 가령 1845년경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대부모를 통해 의사친족관계를 형성했다. 아마 유럽 각국의 사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벨름 마을의 빈농들
독일 역사가 위르겐 슐룸봄은 독일 북부의 농촌마을 벨름을 연구해 주목을 받았다. 그 백미(白眉)는 17~19세기 그곳의 소작농민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각도로 밝힌 점이다. 당시에는 한 뼘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 곧 빈농(貧農)이 주민의 대다수였다. 농촌의 양극화는 18세기 이후 심화됐다.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한 결과였다.당초 유럽의 지주들은 빈농이 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막았다. 극빈층의 증가는 사회 혼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 사회에는 가난해서 비혼(非婚)으로 남은 독신자가 많았다. 그 비율이 총 가구 수의 10%를 넘은 곳도 있었다. ‘짚신도 짝이 있다.’ 이런 속담이 널리 퍼진 한국 사회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17세기 후반 유럽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빈농층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지주의 이익에 기여한다.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은 국가의 세수입 증가에도 기여한다.’ 이처럼 새로운 주장이 이목을 끌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및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노동력의 수요가 커졌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화되자 빈농층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유럽의 지배층은 소작제도의 정착을 서둘렀다. 독일의 벨름 마을에서도 4년제 소작계약서가 유행했다. 지주는 자신의 거주 구역에 1~3채의 오두막을 지어놓고 근면한 소작농을 유치했다. 많은 소작농민이 지주가 제공하는 오두막에 살며 정해진 소작료를 해마다 꼬박꼬박 냈다. 겨울철이면 그들은 지주에게서 땔감을 사기도 했다. 또 그들은 지주의 요구대로 농사일을 거들었다. 지주는 소작인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소작농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판단하면 지주는 언제든지 즉각 계약 해지를 선언했다. 이 경우 소작농은 살고 있던 집을 당장에 떠나야 했다. 소작농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부초 같은 소작 인생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을까. 필자는 슐룸봄의 연구 결과를 들여다보았다. 역사의 진실은 후자에 가까웠다. 18세기 벨름 마을에서는 소작농민의 30%가량이 4년마다 농지를 찾아 다른 마을로 떠났다. 대략 14년마다 마을의 소작농민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19세기가 되면 소작 관계가 조금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벨름의 소작농민이 완전히 바뀌는 데 2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업 사회는 정착 사회다.’ 지금도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소작농민층은 끊임없이 부유(浮游)했다.
필자가 조선시대 경상도 단성현의 호적을 연구한 결과 그곳의 극빈층은 30년을 주기로 마을을 떠났다. 가난한 소작농민의 신세는 ‘부초(浮草)’와 같았다. 지금도 가난한 소시민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소작농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8세기 후반, 벨름의 실정을 좀 더 깊이 파헤쳐보자. 소작농민의 과반수는 소작농민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흙수저’, 가난의 대물림이었다. 또, 소유한 농토의 규모가 자급자족에 미치지 못한 소농민의 자녀들이 소작농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작농민의 20%는 소농의 자녀로서 상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대농(지주)의 자녀라 해도 상속자 1인을 제외하면 모두 소작농민이 되고 말았다. 벨름의 대농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 자녀가 소작농민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했다.
출신이 무엇이든, 일단 소작농민으로 지위가 떨어진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상승 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번 소작농은 영원한 소작농이었다. 가난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17세기 이후 이 마을의 소작농민 가운데서는 자력으로 소농이나 대농의 지위를 얻은 이도 없었다. 소농 중에서도 대농으로 성장한 집안이 없었다. 독일 북부 농촌 사회에서는 기껏해야 현상 유지요, 그도 아니면 사회적 하강 운동만 무한 반복되는 구조였다.
한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
부의 정체 현상이 17~19세기 독일 북부에 국한될 리가 없다. 유럽 각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여기저기서 반복됐음은 당연하다. 상업적 농업이 성행한 지역이라 해서 사정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벨름 마을이야말로 이미 17세기부터 아마포를 비롯한 환금 작물 재배에 힘을 쏟은 곳이었다.한국사 교과서에서는 17세기 이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해 농민들의 신분 상승이 활발했다고 서술돼 있다. 부지런하면 가난한 농부도 부자가 되고, 양반도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에는 이러한 서술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주 가문을 상속한 벨름의 젊은이들은 소작농으로 전락이 예정돼 있는 자신의 형제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했을까. 18세기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대농의 자녀들은 대개 이웃 마을로 이주했다. 가문의 상속자는 단 한 사람, 대개는 막내아들이었다. 부모의 재산을 그가 송두리째 상속하는 것. 이것이 벨름의 풍습이었다. 불공평한 상속제도로 인해 동기 간 사회적 지위는 하늘과 땅처럼 멀어졌다.
지주의 아들딸들, 곧 대농의 형제자매 간에 긴장이 조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지주들은 하나의 전략을 마련했다. 가난해진 형제자매의 아들딸 즉, 조카들의 대부가 됨으로써 동기간에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아직도 친척이다!’ 이런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사정이 또 바뀌었다. 농지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져 소작농민이 되기도 쉽지 않았다. 외부에서 농지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벨름 대농가는 전략을 수정했다. 그들 자녀의 절반가량이 나이가 들어도 본가 오두막에 눌러앉았다. 그들은 본가의 소작농이 됐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 혈연은 가장 믿음직한 구명대였다.
비슷한 생존 전략이 명청시대 중국과 조선왕조 사회에서도 목격된다. 인구 증가로 농토가 부족해지자 부계혈연집단이 대대로 한 마을에 눌러살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부유한 지주로서, 가난한 친척들에게 농토를 나눠주며 경작을 맡겼다. 가난한 사람들은 친척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다. 이것이 이른바 동족마을의 낯익은 풍경이었다.
지주 대부모를 선택하는 이유
19세기 벨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소작농민은 더욱 큰 위기를 맞았다. 그들에게는 넓은 농지를 소유한 친척이 없었다.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단은 없어 보였다.가난한 소작농민에게도 가족은 삶의 토대였다. 슐룸봄의 책에도 기술돼 있듯, 형제자매가 한 사람의 지주에 기대어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소작농민들은 합리적인 지주를 만나면 우선 자신의 형제자매를 불러들였다.
때로 대부모 제도를 매개로 한 ‘의사가족’이 생존의 버팀목이었다. 유럽의 속설에 따르면, 소작농민들은 자녀의 세례식 때 자신의 주인인 지주를 대부모로 모셨다. 지주 부부 또는 지주의 미혼 자녀가 어린아이의 대부모로 선택됐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소작농민의 자녀들도 장차 대를 이어 그 지주의 보호 아래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 그랬을까. 슐룸봄의 책을 읽어보면, 사회 현실은 속설과 거리가 있었다. 18~19세기 벨름의 소작농민 자녀의 20%는 지주 또는 지주 자녀의 대자녀가 됐다. 그 나머지 자녀들은 이웃에 사는 다른 지주 부부를 대부모로 정했다.
소작농민들은 대부모 제도를 이용해, 인근의 여러 지주와 사회적으로 결합했다. 이것은 수직적 그물망이었다. 평생 남의 소작인으로 살아야만 했기에, 소작농민은 다수의 지주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유리했다. 한동안 마을을 떠나지 않고 다소나마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려는 수단이었다. 대부모 제도는 소작농민의 입장에서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지주와 소작농민들이 갓난아이의 세례식을 계기로 체결한 대부모 관계는 문화적 상징이기도 했다. 그것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 정서적 유대감을 부여했다. 혹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지주가 사회적 약자인 소작농민의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실제로 벨름에서는 고아가 된 소작농민의 자녀를 지주가 데려다 기르기도 했다.
대부모 제도는 소작농민의 삶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슐룸봄은 거기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고 못 박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소작농민은 20년 이내에 마을을 떠나게 될 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관계는 한계가 있었다.
소작농민이 농토를 구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누구였을까. 소작농의 형제자매를 비롯한 가족이었다. 대다수 농민에게 시련을 안겨준 19세기에 벨름의 소작농민들에게 구세주는 곧 형제자매요, 시부모 또는 처부모였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대부모라는 존재가 소작농민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